베를린, 기억의 예술관 - 도시의 풍경에 스며든 10가지 기념조형물
백종옥 지음 / 반비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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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깊은 반성이란 어떠해야 할까. 흔히들 진심이 담긴 사과를 하지 않는다고 분노하는 사람들이 있다. 진심이 담긴 사과는 깊은 반성이 바탕이 되어야 하는데 역사에서의 깊은 반성이란 어떠해야 할까. 바르샤바 게토추모비에서 무릎을 꿇었던 빌리브란트의 행동은 가장 많은 유대인이 희생된 폴란드인들로 하여금 치유의 마음을 가지게 해주었다. 그뿐만 아니라 과거 나치의 죄악을 속죄하기 위해서 독일에서는 총리의 사과도 있었지만 사회 여기저기에 디테일한 반성과 재발방지를 위한 장치들을 해놓고 있다.

잘못된 역사를 잊지 않기 위해서 베를린 시 전체에 기념조형물들을 설치하여 추모하고 반성하는 이 조형물들에는 독일인의 깊은 반성이 담겨 있다. 물론 여전히 나치즘 부활을 꿈꾸는 독일 우익들이 있지만 이들이 사회적인 지지를 받지는 못한다. 아베의 수출 규제에 연이은 한국의 화이트리스트 제외를 지켜보면서 일본은 과거를 인정하지도 않고, 그러다보니 반성할 줄도 사과할 줄도 모르는 뻔뻔한 국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논리에 맞지 않는 주장을 하면서 경제 전쟁을 시작한 일본을 보면서 일본이 전쟁을 할 수 있는 국가였으면 전쟁도 불사할 나라라는 생각까지도 들었다. 그동안 우리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감정이 희석되어 있었고, 일본의 유화정책에 너무 쉽게 동화된 건 아닌가 하는 반성이 생긴다.

물론 과거를 빌미로 현재가 정지되어 있어서는 안 된다. 역사는 진보한다고 믿는 나로서는 과거를 바탕으로 현재가 구성되고 미래가 예측되어야 한다고 본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인정할 줄 모르고 반성하지 않는 일본을 우리는 너무 쉽게 용서하고 받아들인 것이 아니었는가 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백종옥이 쓴 『베를린, 기억의 예술관』을 읽으면서 나는 베를린 전체가 역사를 잊지 않기 위해 서 기념조형물들을 설치한 독일인들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나 잘못된 과거는 잊고 싶어 하고 묻어버리고 싶어 하지만 역사적으로 유래가 없었던 유대인학살에 대한 책임을 지고 과거를 통해 미래를 보고 싶어 하는 독일인들의 힘은 어디에서 나올까.

‘도시의 풍경에 스며든 10가지 기념조형물’이란 부제가 붙어 있는 이 책의 제1장이 전쟁과 폭정의 희생자들을 위한 중앙 추모소인 노이에바헤이다. 유명한 케테 콜비츠의 「죽은 아들을 안은 어머니」조각상이 설치되어서 전쟁과 희생자들에 대한 추모와 숙고를 할 수 있는 묵상의 공간이다.
2장은 마르크스, 프로이트, 브레히트, 하이네, 고리키 등의 유대인 작가들과 학자들, 그리고 나치를 비판한 비유대인의 책까지 약 2만권이 불태워진 베벨 광장에 설치된 미하 울만의 「도서관」이다. 분서의 현장 지하에 설치된 텅 빈 도서관인 이 조형물은 역시 독일인들이 과거를 잊지 않기 위해 설치했는데 그 기하학적인 공허가 주는 충격이 크다 밤이면 텅 빈 지하도서관에서 불빛이 새어나오는데 분서의 날 타올랐던 불빛을 연상케 한다.

제3장은 2711개의 추모비들과 홀로코스트와 관련된 자료가 전시된 지하 정보관으로 구성된 「학살된 유럽 유대인을 위한 추모비」이다. 유대인의 묘지를 형상화한 이 추모비는 베를린 유대인박물관과 함께 매년 50만명 이상이 다녀간다고 한다.                           

그 외에도 유대인을 아우슈비츠 등 동유럽으로 실어 날랐던 그루네발트역의 17번 선로, 베를린 전역에 있는 희생자들이 살던 집 등에 설치된 길바닥 추모석, 버스정류장인 실슈트라세 정류장의 ‘아이히만의 유대인 담당부서’ 등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기억의 공간들이 설치되어 있다. 독일인들은 그 기억의 공간들을 통해 과거를 잊지 않고 그런 역사가 재발되지 않기를 기대하며, 희생된 유대인들에게 속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인들이 그들이 지배했던 나라들에 어떤 사과를 하고 역사가 재발되지 않기 위해서 조치를 취한 것은 거의 없다. 그들은 과거의 역사를 부정하고 합리화하며 묻으려고 한다. 지금 우리가 분노하는 바탕에는 제대로 사과 받지 못한 역사, 그들이 부정하는 역사에 대한 아픔이 깔려 있다. 개인에 대한 배상은 전후 보상을 받은 한국의 책임이라고 떠넘기거나, 일본 나고야 시장이 아이치트리엔날레에 전시된 평화의 소녀상을 철거 요청하겠다고 한 것은 아직도 그들이 과거의 역사에서 아무런 교훈도 얻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들이 진정으로 반성한다면 평화의 소녀상을 철거 요청할 것이 아니라 그 앞에서 사죄해야 하며, 개인에 대한 배상은 한·일 양국이 협의하여 사죄하고 배상하여야 한다.

지금도 경제적인 문제 때문에 대화를 거절하는 일본에게 계속 대화를 요청해야 하고, 타협을 찾아야 한다는 사람들이 있다. 이것을 개인적인 문제로 본다면 가난한 사람은 부자가 어떤 횡포를 저질러도 돈 때문에 굴욕적인 태도로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우리나라는 이제 가난한 나라가 아니라 세계 10대 경제대국이며, 일본의 경제제재를 우리 힘으로 이겨나갈 수 있으리라 믿는다. 1960년대에 우리나라가 일본에게 전후 보상을 받고 차관을 도입하던 시절과는 다른 시절이다. 물론 대화는 계속되어야 하고, 타협점도 찾아가야 한다, 그러나 그 방식이 굴욕적이어서는 절대 안 된다.

 

『베를린, 기억의 예술관』을 통해 우리는 그동안 얼마나 굴욕적인 역사를 감당해 왔으며, 죄의식이 없는 일본이 얼마나 뻔뻔하고 몰염치한지를 깨닫게 되었다. 여전히 일본의 일부 지식인이나 일부 정치인들은 일본 우익의 행태를 비난하고 있지만 문제는 전후 일본이 단 한 번도 우리에게 공식적인 사과를 한 적이 없다는 것과 역사를 부정한다는 것이다. 적반하장이라는 대통령의 역사인식에 공감하며, 다시는 일본에 지지 않을 것이라는 문재인 대통령의 말을 지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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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미래 - 사슴부족 이누이트들과 함께한 나날들
팔리 모왓 지음, 장석봉 옮김 / 달팽이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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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거는 이미 지나가버린 시간이지만 우리의 기억에 각인되어서 가끔씩 무의식의 세계를 비집고 튀어 나온다. 잊혀진줄 알았던 감정들이 새삼스럽게 들추어지고, 잊혀진 사건들이 어떤 일을 계기로 다시 돌이켜지면 우리는 현재와 과거, 미래가 다른 시간이 아님을 알게 된다. 과거 위에 오늘의 시간이 있고, 이 시간을 바탕으로 미래가 구성된다. 그러므로 과거를 잊어버린다면 미래 또한 기억될 수 없다. 미래는 우리의 멀고 가까운 과거이기 때문이다.

  날고기를 먹는 사람들이라는 뜻의 에스키모라는 용어는 원래 그 부족에 속한 사람들이 사용하지 않는 이름이다. 이는 인디언들이 붙인 이름으로 원래 에스키모라고 불리는 이들의 고유의 이름은 '이누이트'이다. 이들은 이누이트쿠, 즉 인간의 강이라고 부르는 호수 주변에 사는 사람들이 자기 부족을 가리켜 붙인 이름으로 '인간'이라는 단순한 뜻을 가지고 있다. 이 단순한 이름은 광대한 자연 속의 많은 생물들 가운데 인간으로 불리는 한 종족을 가리킬뿐이다.

  그 이누이트들 가운데 사슴부족으로 불리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이 바로 이 책의 주인공이다. 그들은 사슴고기를 먹고 사슴의 가죽으로 된 옷과 집을 짓고 살며, 오랜 식습관으로 인해 사슴고기를 먹어야만 생존할 수 있도록 진화해왔다. 이 글은 사슴부족 사람들의 생존기, 즉 툰드라의 극한 기후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캐나다 정부는 이누이트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툰드라 남쪽, 그러니까 사슴부족이 사는 북쪽내륙보다 기온이 더 온화하고 살아가기 좋은 남쪽 바닷가에 정착촌을 마련하고 그들의 생활을 지원해왔다. 그러나 사슴고기를 먹으며 살도록 진화되어온 그들에게 이것은 재앙이나 다를바 없었다.

  이미 백인들이 북쪽내륙, 백인들이 들어가 살 수 있는 한계선까지 들어가 사슴을 잡아야만 살 수 있는 사람들에게 총과 밀가루를 주면서 사슴보다는 여우를 잡도록 두어차례 유혹하여 그들의 생존환경을 무너뜨린 적이 있었다. 이누이트들에게 흰여우털을 가져오면 총과 밀가루를 주면서 교역을 하던 백인들은 경제공황이 밀려오면서 흰여우털이 소비되지 않자 교역소를 일방적으로 폐쇄해 버렸다. 영하 50도에서 70도를 넘나드는 겨울, 여우털을 가지고 교역소를 찾아온 이누이트인들은 모두 빈 손으로 되돌아가야 했고, 사슴을 잡아서 겨울을 대비하지 못한 그들은 기아로 많은 사람이 죽어야 했다. 그리고 백인에게서 전해져 온 전염병이 돌아 수천명의 이누이트인들이 죽고 겨우 수백명만이 살아남아 명맥을 잇고 있다.

  백인들은 그들에게 재앙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사슴을 잡기 위한 총과 탄약뿐, 나머지는 그들이 수천년동안 살아온 방식대로 살아가는 것이 그들 부족의 명맥을 이어가는 것이었다.

"텅 빈 공간이라는 사실, 그게 나를 가장 못 견디게 했던 것 같아. 망할 놈의 얼어 죽을 빈 공간, 그게 한도 끝도 없이 이어지면 너는 막판에는 소리를 지르거나 비명을 지르거나 아니면 네 모가지를 분지르고 싶을거야."라는 백인의 말처럼 그들에게는 하얀 툰드라가 재앙이지만 이누이트인들에게는 그 백인들이 재앙이다. 이누이트인들은 자신의 신화속에서 삶을 가꾸어가고, 자신들에게 익숙한 먹거리, 입을거리를 만들며 살아간다. 이누이트인들, 특히 사슴부족이라 불리는 부족이 멸종되어 가면서 그들에게 미래는 잊혀진 미래가 되었다.

  태초에 여신이 개를 낳았고, 그때 개들은 인간의 말을 했기 때문에 개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인간과 함께 살았다는 그들의 신화는 인간 또한 그 툰드라의 생명 중 하나에 불과함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툰트라의 법칙에 따라 살고자 했으나, 개화되었다는 백인들이 그들의 삶을 망쳐버렸다. 캐나다 정부는 그들의 멸종을 막기 위해 캠프를 설치하고 의식주를 제공하고 있으나 그들에게 미래는 그리 밝아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끊임없이 그들 조상이 살아왔던 툰드라로 돌아가고 싶어하고, 사냥을 하며 살았던 조상들의 습성처럼 날이 풀리면 사냥을 하고 싶어한다. 그리고 기아가 찾아오면 나이 많은 순서대로 캠프를 나가 사슴가죽옷을 벗어버리고 조용히 죽음을 맞으며 종족을 이어가기를 원한다.

  그들은 백인들에게 묻는다. "왜 당신들은 우리의 도움이 필요해 왔다가, 우리가 당신들의 도움이 가장 절실히 필요할 때에 갑자기 사라져버리는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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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자 룩셈부르크 평전
막스 갈로 지음, 임헌 옮김 / 푸른숲 / 200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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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있었노라. 나는 있노라. 나는 있으리라."

 

2017년에 로자 룩셈부르크를 읽는 기분은 특별했다. 무혈봉기가 광화문에서 일어나 전국을 들불처럼 휩쓸었고, 정권이 무너졌고, 새로운 정권이 들어섰으며, 그 새로운 정권은 날마다 언론을 향해 미소를 보내고 있다. 고요한 것은 고요가 아니었고, 인내는 인내가 아니었다. 어떤 권력도 자유와 평등을 날려 버리지는 못했던 것이다. 자유와 평등은 존중되어야 할 가치일뿐 억압하거나 탄압한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로자는 나는 있으리라고 했지만 마르크시즘이 그러하듯이 지나간 사상가이며 정치가이다. 혁명을 주창하고 혁명의 대오에 몸을 던진 여자이지만 지금 시대에는 그러한 혁명의 시대가 아니다. 보았듯이 광화문에는 노래와 춤이 넘쳤고, 밤이면 촛불이 타올랐다. 혁명은 다른 이름으로 호명되길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미 사라진 구시대의 혁명가인 로자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것은 그녀의 자유와 평등, 인간애를 향한 열정일 것이다. 지금 이 시대에 다시 로자를 읽는 것은 우리 가슴속의 열정을 끌어내고 싶어서였는지도 모른다. 마르크시즘은 죽었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여전히 문화와 예술에서 종횡무진 누비고 있다. 그리고 광화문에서 촛불로 타올랐다. 마르크시즘을 인간이 살기 좋은 사회에 대한 혁명을 꿈꾸지 않는다. 불공정하고 자유롭지 못하며 불평등한 사회의 혁명을 꿈꾸며, 그것은 어느 시대에나 잠재되어 있는 꽃씨와도 같다. 로자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죽었으나 살기 좋은 세상을 원하는 사람들의 가슴 속에 꽃씨처럼 자라고 있다고 믿는다.

 

이론으로는 탁월했으나 전술과 현실정치에서는 무능했던 로자는 결국 반대파들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로자는 어쩌면 정치인보다는 사상가로서 더 어울렸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로자는 혁명을 원했고, 정치와 사회가 바뀌기를 원했지만 전술과 현실정치에서 전략가들에게 밀렸다. 로자는 어쩌면 꿈을 꾸었는지도 모르겠다.

 

지금 이 시대에 다시 로자를 읽는 이유는 무력하게 가라앉아 있는 삶의 열정을 되살리고 싶어서이다. 혁명의 낯선 대열에 몸을 던지는 시대는 지났다. 그러나 부조리한 세상을 바꾸고 싶어하는 로자의 열정은 시대를 지나도 여전히 유효하다. 열정이 세상을 바꿀 수 있고 영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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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와 역사의 몽타주,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 리라이팅 클래식 12
권용선 지음 / 그린비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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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의 거대한 상점 아케이드에 문화와 정치, 역사를 넣어두고 분석하는 벤야민의 시선은 현대의 우리가 간과하고 있거나 애써 모른척 했던 자본시대의 어두운 자화상을 날 것 그대로 보여 준다. 유대인인 벤야민은 '부정의 방식으로밖에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없는 사람(19p)'임으로 인해 어쩌면 사회를 부정의 방식으로 보여 주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부정에는 긍정이 깊이 도사리고 있으니 유태인인 자신을 부정하면서 만들어낸 긍정일 것이다. 위대한 학식을 가졌지만 학자는 아니었고, 신학에 매력을 느꼈지만 신학자는 아니었으며, 천부적인 문장 실력을 지녔지만 작가는 아니었고, 프루스트를 최초로 번역했지만 번역가는 아니었으며 시인도, 철학자도 아니었고, 그는 모든 것이 아니었기에 그 모든 것이기도 했다. 그렇게밖에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수 없는 벤야민은 그 특유의 아포리즘 글쓰기를 만들어낸다. 그 모든 것이 아니었으나 그 모든 것이었고, 그 모든 것이었으나 그 모든 것이 아니었던 위대한 사람, 그래서 벤야민은 우리 시대의 산책자인지도 모른다.


그는 그 모든 것이었으되 그 모든 것이 아니었으므로 정착하지 못하고 유목자의 삶을 살았으나 떠돌아다니는 유목민이 아니라 앉아 있는 유목민이었다. 그리고 그는 아케이드에 유목민의 밥상을 차린다. 벤야민은 서로의 연결고리가 없는 에세이적 글쓰기를 지향하는데 그에게  알레고리는 '세계를 표현하고 드러내는 방식, 그리고 그것을 독해하는 방식(96p)' 이며, '다르게 말하기'의 방식이다. '알레고리는 하나의 의미로 결박되기를 거부하며 다양한 의미를 향해 끊임없이 미끄러져 나가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어떤 의미를 형성하며 진정으로 대상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암호'라는 점에서 상징과 다르지는 않지만 '유일한 의미로 고정된 것을 목표로 하는 표현의 기술'인 상징과 알레고리는 질적으로 다르다. 자신을 부정함으로써 존재를 증명할 수밖에 없는 태생적 유목민인 벤야민은 고정된 것을 지향하는 상징보다는 끊임없이 의미가 미끄러지는 알레고리적 글쓰기를 지향할 수밖에 없다. 보들레르의 영향을 받은 벤야민은 풀어야할 삶의 수수께끼로 놓여 있는 알레고리적 사유를 통해 상징의 권위에 균열을 내면서 진보적 경향을 드러내는 고도의 정치적 기술이기도 하다.


벤야민은 아케이드를 통해 자본의 정수를 보여 주고자 한다. 마침 탄생한 아케이드적 건축을 통해 알레고리적 사유를 한다. '건축가 각각의 재로를 서로 연결하고 위치 지음으로써 새로운 효과를 기대했듯이, 역사가(혹은 철학자)는 자신의 사유를 드러내는 하나의 방식으로 원래의 자리에서 떼어 낸 문장들을 모자이크이 파편처럼 새롭게 재배치하고 인용하는 문학적 몽타주를 통해 강력한 현실성을 불러 일으키고자'했던 것이다. 현대예술에서 파편적으로 등장하는 소재들이 서로 분리되지 않고 서로 연결되면서 기존의 질서를 파괴하고 새로운 아우라를 만들어 내는 방식, 이것이 바로 벤야민이 추구하는 글쓰기의 방식이다.

물론 그 사유는 문학적 글쓰기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노동, 자본, 미디어, 복제기술, 역사 등으로 폭넓게 펼쳐지는 사유는 고정된 것에 머물러 있던 우리의 뇌에 전복적 사로를 불러 일으킨다. 예술과 노동, 자본, 미디어, 복제기술, 역사등은 서로에게 낯설지만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하나로 연결되면서 또 흩어진다. 벤야민은 기본적으로 중앙을 지향하지 않으므로 연결은 언제나 무너져야 하며, 무너짐은 또 연결되어야 한다.


아케이드, 온갖 물건이 진열되고 기후로부터 소외된 현대적인 시장, 그 아케이드에서 우리는 과연 무엇을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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