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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 왜 짧은가 - 세네카의 행복론, 인생의 의미를 찾는 오래된 질문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루키우스 아니이우스 세네카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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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은 우리로 하여금 사람을 그리워하게 만들고, 교제는 우리 자신을 그리워 하게 만드네` 책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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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글맨
크리스토퍼 이셔우드 지음, 조동섭 옮김 / 그책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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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가 터질것 같을때 나는 소설을 읽는다. 요즘은 그냥 심심해서 읽을 겨를이 없으므로 소설을 접할 시간은 거의 없었는데 전공서적을 읽으며 스트레스로 가슴이 답답할때, 믿어지지 않겠지만 소설을 보는 것이다. 문자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문자로 푸는 격이다. 그러나 어찌 우리가 외형의 같음만 말하겠는가, 의미가 다름을.

 미국 소설은 읽을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건조하다. 마치 건조한 사람이 자기 나름대로는 감성적인 사람이 되어 보려고 애쓰지만 그 본성을 숨길 수 없는 것처럼 미국 사람이 쓰는 소설은 재미는 있고, 메시지는 묵직해도 어쨌든 건조하다. 이건 소설뿐만이 아니라 철학 역시도 마찬가지다. 영미철학은 마치 과학 같다. 과학의 문제를 풀어가듯이 철학적인 주제를 하나하나 풀어가는 것이 영미철학이다. 아마도 그쪽 사람들의 스타일이리라.

 이 소설, 동성애자에 관한 소설이다. 나는 아직도 동성애자라는 사람들을 솔직히 이해하지 못한다. 이해가 다 뭔가, 아마도 내 눈앞에 동성애자가 있다면 동물원의 동물을 구경하듯이 호기심어린 눈으로 관찰할 것 같다. 이성은 그러지 말자고, 그냥 우리의 유전자 하나가 삐걱거려서 장애인이 있듯이 그들 역시도 유전자 하나가 삐걱거려서 이성애를 하지 못하고 동성애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현실적으로는 그러하지 못한다. 나와는 다르다는 것, 성격이 다른 것은 당연하지만 몸이 다른 것은 내게는 당연하지 못하다. 이것도 편견이라면 편견이겠지만, 이것도 교육의 힘이라면 힘이겠지만, 이것도 그 거창한 도덕이라면 도덕이겠지만 어쨌든 내게는 낯설다.

 그러나 어쨌든, 전 세계에는 이미 동성애자들이 많이 있고 우리나라에도 커밍아웃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고 있고, 그들이 내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점에서 내가 그들을 비난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것쯤은 나도 안다. 그냥 나와는 다른 것이다. 그 다른, 두 남자가 함께 살다가 한 남자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다. 소설은 이미 한 남자가 세상을 떠난 그 날부터 시작한다. 아침에 일어나니 그 남자, 짐이 없다는 것, 좁은 집에서 어깨를 부딪히며 요리를 해 먹고,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 티브이를  보고, 한 침대에 누워 잠을 자던 그가 없다는 것 때문에 또 다른 한 남자, 조지는 쓸쓸하다. 조지는 짐이 없는 집에서 아침을 먹고 학교에 가서 강의를 하고 동료 교수와 점심을 먹고, 학생들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짐을 좋아했던 한 여자를 찾아가 술을 마시고, 그리고 그도 죽어간다. 이 풍경은 이성애로 뭉쳐진 부부가 사는 풍경과 전혀 다르지 않다. 그들이 갔던 식당, 그들이 갔던 술집, 그들이 갔던 시골, 함께 쇼핑카트를 밀고 다녔던 쇼핑센터, 한 남자가 좋아했지만 다른 남자는 좋아하지 않았던 식료품들, 조지는 짐의 교통사고 소식을 듣고 짐이 없는 세상을 살면서 그의 흔적을 느끼고 그를 그리워한다. 그리고 아마도 새로운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한다. 그러나 새로운 사람은 만나지겠지만 그는 짐은 아니다. 그는 짐이 다른 다른 사람일 것이다. 

 이웃의 여자는 조지와 짐을 향해 특별한 비난을 퍼붓지는 않았고, 자신도 교양인이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 마치 특별한 사람을 보는듯하지도 않았고, 적어도 겉으로는 이해하는 척했다. 아니 실제로 이해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신의 집에는 초대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짐이 사라지고 나자 여자는 조지를 초대한다. 조지와 짐은 둘이 있을때는 이상한 부류였지만 이제는 조지 혼자이므로 이상하지 않다. 그저 평범한 이웃의 남자에 불과하다.

 짐이 떠난 후 하룻동안의 일을 그린 이 소설은 아직은 우리에게 낯선 동성애자의 속마음을 그대로 그려내 보여준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느낀 것은 그들도 우리들 이성애자들처럼 사랑의 감정이 같다는 것이다. 허긴, 다를게 무어가 있겠는가. 사랑은 만국공통어이므로, 다만 표현 방식만 다를뿐이겠지. 그러나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내가 끊임없이 반복했던 그 '같다'는 느낌은 나를 촌스럽게 만들었다.당연히 같아야 하는걸 같구나 느끼는 것은 촌스럽다.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받아 들이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다. 

 재미? 뭐 그저 그렇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마음을 엿보고 싶다면 읽어도 무방하리라. 나와 다른 것에 대한 호기심이 있다면, 이해까지는 아니어도 좋다. 이미 우리는 새로운 것을 이해하기에는 나이가 들었다. 그냥 지금껏 살아오던 방식으로 쭉 살면 그만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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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레이]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 아웃케이스 없음
데이비드 핀처 감독, 브래드 피트 외 출연 / 워너브라더스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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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되돌리고 싶은 적이 있었는가. 이별했던 사람과 다시 만나 사랑을 나누고,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나 우리의 곁으로 돌아오고, 꼭 하고 싶었으나 이런저런 사정으로 하지 못했던 일들을 하기 위해 한번쯤 시간이 거꾸로 흘러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는가. 불가능한 일을 열망하는 것은 모든 인간의 보편적 정서다. 욕망은 불가능한 것에 더 강렬하게 타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찌기 헤라클리이토스가 설파했듯이 흐르는 강울에는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 이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진리이고, 또 사실 우리네 인생은 그렇게 속절없이 흘러간다.

 우리 인간을 만든 창조주도 한번쯤은 그 인간을 대상으로 살짝 장난을 치고 싶을 때가 있을 것이다. 창조주의 치기 어린 장난이 아니라면 불가능한 일, 시간을 거꾸로 돌리는 일이 벤자민 버튼이라는 한 사내에게 일어난다. 전쟁에 나갔다가 전사한 아들의 죽음 앞에서 그 아들이 살아 돌아오기를 갈망하는 한 시계공이 만든 거꾸로 가는 시계처럼, 벤자민에게 시간은 거꾸로 흘러간다. 80대의 노인에서 삶을 시작하는 벤자민은 태어날때 이미 양로원의 노인들과 같은 행색을 하고 있었다. 벗겨진 머리에 주름진 피부, 희귀병을 안고 태어난 벤자민은 아버지에게서 버려져 양로원에서 일을 돌보는 한 흑인 여자에 의해 길러진다. 벤자민이 괴물처럼 생긴것을 보고도 운명이 있다는 것을 믿는 여자는 기꺼이 벤자민을 돌보기 시작한다. 어느날 휠체어에서 일어나고, 어느날 목발에 의지해 걷기 시작하고, 어느날 누구의 도움도 없이 걷기 시작하는 벤자민은 시간이 흘러 갈수록 점점 젊어진다. 아직 머리가 벗겨진 노인일때 예인선을 운행하는 선장을 따라가서 첫 경험을 하고, 처음으로 술을 마시며 강을 따라 떠돌면서 벤자민의 머리카락은 나기 시작하고 주름도 적어진다. 

 벤자민에게는 아이이자 노인이었을 적부터 친하게 지내온 한 꼬마 여자친구가 있었다. 이 여자친구가 늙어서 죽음을 기다리며 벤자민이 쓴 노트를 딸이 읽어주는 것을 통해 과거를 회상하는 영화는, 그러므로 이 노인과 딸의 대화를 통해 이어진다. 액자소설 같은 형식을 빌어 회상으로 이어지는데 회상은 하이데거의 표현을 빌자면 동트는 새벽에 찾아오는 존재에 대한 추억이다. 노인은 벤자민이라는 한 존재에 대한 추억을 통해 자신들의 아름다웠던 사랑 이야기, 시간을 거꾸로 사는 한 남자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 놓는다. 한평생 벤자민을 사랑했던 노인과 벤자민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은 어머니의 입을 통해 그 노트를 쓴 벤자민이라는 남자가 자신의 아버지였음을 알게 되고, 그 벤자민이 아주 훤칠한 청년기였을 때 단 한번 본적이 있음을 회고한다.

 

점점 젊어지면서 키도 자라고, 주연을 맡은 브레드 피트의 본 얼굴이 드러나는 청장년기를 정점으로 이 영화는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한다. 자신이 점점 젊어지는 대신에 자신의 딸은 점점 자랄 것이라는 사실에 절망한 벤자민은 딸에게 그 모습을 보여 주기 싫어 방랑의 길에 오른다. 벤자민이 떠난 후 여자는 재혼을 하고, 세월이 흘러 재혼한 남자도 죽은 어느 날, 벤자민은 아이의 모습으로 자신이 자란 양로원으로 돌아온다. 거기에서 벤자민은 10대의 모습이 되고, 어린애의 모습이 되었다가 결국은 갓난 아이의 상태로 여자의 품에서 숨을 거둔다.

 

자신의 딸에게는 늙어가는 아버지가 필요한 것이지 데리고 놀아줘야 하는 어린 아이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는 벤자민의 말은 늙어감을 한탄하는 우리에게 많은 울림을 남긴다. 자연스럽다는 것, 자연의 순리대로 살아간다는 것이 이처럼 다행스럽고 편안한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나만의 시간이 거꾸로 흘러 내가 내 아이보다 더 어린 아이가 된다는 사실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그러므로 영화는 정상적으로 흘러가는 우리 삶에 안도하게 하면서도 벤자민의 삶에 안타까움을 가지게 할 수밖에 없다.

 

죽지 못하는 인간의 삶을 다룬 소설을 본 적이 있다. 어떤 이유로 죽지 않는 축복을 받게 된 사람은 주변의 사람들이 하나 둘 죽어가고 새로운 사람이 태어나는 몇 백년 동안 죽지 않았다. 상처를 입어도 자연회복이 되었고, 이빨이 빠지면 새로 올라오기를 반복하면서 이 남자의 가장 간절한 소원은 죽은 것이 되어 버렸다. 삶은 견딜 수 있는 것만을 견딘다. 우리 삶이 고통으로 점철되어 있는 것이라 하더라도 죽음이 앞에 있기 때문에 그 고통의 극한 순간에는 죽음에 자신을 맡겨 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에도 죽을 수 없다는 것, 어떠한 고통이 자신을 짓눌러도 그 고통을 오직 견디는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인간을 무력감에 빠지게 한다.

 

이처럼 다른 사람이 사는 것처럼 살지 못한다는 것은 비극적이다. 한번쯤 시간이 거꾸로 흘러 갔으면 하고 바란적은 많다. 그러나 몸에 치명적인 병이 찾아오지 않는다면 그런 불행은 아무에게나 오는 것이 아니다. 공부를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그 아이가 또 아이를 낳을 때쯤 우리는 이제 이 세계로부터 서서히 물러날 준비를 해야 한다. 이 세계에서 내가 차지하고 있는 공간, 내 거처를 누군가에게 물려 주어야 하는 것이다. 나는 그것이 기왕이면 잘 늙어 잘 죽는 순간이었으면 한다. 벤자민처럼 갓난 아기가 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처럼 얼굴에 주름이 가득하고 모습 그 자체가 추해 보일 때 죽음이 찾아 왔으면 좋겠다. 왜냐하면 그것이 너와 나, 우리 모두가 살아가고 죽는 방식이므로.

 

이런저런 매체에서 이 영화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들었는데 우연히 비디오방 앞을 지나다가 광고판을 보고 망설임 없이 빌렸다. 액션이나 쇼킹한 것을 보고 싶다면 보지 않는 것이 좋지만, 삶이 버겁고 한번쯤 도망치고 싶은 기분이 들 때 이 영화를 보면 많은 위로가 된다. 거기에다 영화 <가을의 전설>에서 매혹되었던 배우 브레드 피트의 조각같은 얼굴을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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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워진 사람 창비시선 285
이진명 지음 / 창비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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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에 흔하고 흔한 것이 시이다. 어디 시 뿐인가. 얼마나 많은 문자들이 책의 형태를 빌어 서점에 나와 있는지 , 우리 집에만 해도 이미 수천권의 책이 방 하나를 점령하고 있다. 저 책들을 모두 문자로 풀어 본다면, 저 많은 책들 속에 묻힌 글 하나하나를 풀어 세상에 내어 놓는다면 아마 세상은 문자의 포화상태에 멀미를 느낄 것이다. 그런 멀미 때문에 이제 시는 귀하지 않다. 그러나 시가 귀한 대접을 못받는다고 해서 안타까워 할 필요는 없다. 시가 대접받던 시대가 갔다는 것은 인간이 평등해지고 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시를 읽는 일은 얼마간의 훈련과 숙련의 시간을 필요로 한다. 그 숙련의 시간을 가질 수  없는 사람들에게 시는 낯선 언어일뿐이다. 그들과의 거리를 어떻게 좁힐 것인가. 인간이 진정으로 평등해지고자 한다면 인간들끼리 주고받는 언어에 담이 없어야 한다. 내가 하는 말을 네가 알아듣고, 네가 하는 말을 내가 알아 들어야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시는 그렇지 않다. 

 이진명의 시는 시 같지 않은 시다. 시 냄새가 별로 나지 않는다. 아침에 밥을 먹다가 밥 먹는 일을 시로 쓰고, 꽃을 사다가 꽃 사는 일을 시로 쓴다. 그가 쓰는 언어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일상범부들이 쓰는 언어가 시로 변해 있기 때문이다. 부처님과 농담을 하고 독자들과 농담을 주고 받는다. 그 속에 치밀한 계산이 깔려 있다고 생각하든 말든 그것은 독자의 맘이다. 욕을 하고 싶을 때는 욕을 하고, 순한 여자가 되고 싶을때는 순한 여자가 되고, 널부러진 아줌마가 되고 싶으면 또 그렇게 한다. 그녀의 시에서 무엇보다 좋은 것은 이렇게 시에서 힘을 빼고 있는 것이다. 힘이 빠진 시, 그래서 그녀의 시는 가볍다.

 명절이 되어도 엄마에게서는 전화 한통도 오지 않는다. 그래서 그녀는 쓴다. '명절인데 엄마는 전화도 못하나/거긴 전화도 없나'라고. 그러다가 애꿎은 보름달을 원망한다. '유선이든 무선이든 전화 하나 성사 못 시키는/느려터진 보름달/ 둥글너부데데한 지지리 바보/ 얼굴 피부 하나만 허여멀건 발질해가지고/ 니 굴러가는 데 알기나 할까'라고. 그러다가 그 원망은 다시 엄마에게로 이어지고 괜히 할머니까지 원망스럽다. '엄마는 그깟 전화 한번을 어떤 세월에 쓰려고 아끼나/ 할머니도 마찬가지/ 죽어 새 눈 떴는데/ 아직도 눈 어두워 숫자 버튼 하나 제대로 못누르나'. 그러다가 그 원망은 자신에게로 돌아온다. '전화기 돌릴 손모가지가 없어/ 전화 못하긴 나도 마찬가지'.(보름달) 이쯤이면 독자들은 이미 눈치챈다. 이 시인은 명절이 되자 이미 돌아가신 어머니가 그립구나 라고. 그 그리운 마음을 이런 식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꽃을 사는 마음도 마찬가지다. 절간을 한바퀴 돌아나오다 꽃 파는 아줌마를 만난다. 운동도 싫고 산도 싫어 올라가던 길을 내려 오면서 별안간 그 꽃을 사고 싶어진 시인은 중얼거린다. '별안간 꽃이 사고 싶다/ 꽃을 안 사면 무엇을 산단 말인가'라고. 그리고 자기자신에게 주기 위해서 하얀 소국을 사면서 다시 중얼거린다. '이즈음의 자기 자신이나 좀 위로코 싶었겠지'라고. 마치 타인을 빈정거리듯이 자신을 빈정거리다가 갑자기 그 꽃은 절에 사들고 가라고 파는 꽃이 아니가 하는데 생각이 미친다. 그래서 그녀는 절에 갈때는 사가지 않고 내려 올때 산 자신을 변명하기 시작한다. 

 부처님 앞엔 얼씬도 안하고 내려와서

맘 같지도 않은 맘에게 안기려고 꽃을 다 산다고라

웃을 일, 하긴 부처님은 항상 빙그레 웃고 계시더라

부처님, 다 보이시죠, 꽃 사는 이 미물의 속

그렇지만 다른 것도 아니고 꽃이잖아요

부처님도 예뻐서 늘 무릎 앞에 놓고 계시는 그 꽃이요

헤헤, 오늘은 나한테 그 꽃을 내주었다 생각하세요

맘이 맘이 아닌 중생을 한번 쓰다듬어주었다 생각하세요

부처님, 나 주신 꽃 들고 내려갑니다

                        <젠장, 이런 식으로 꽃을 사다니>의 일부

 그리고는 그런 자신이 또 못마땅해 한마디 더 보탠다. '젠장, 이런 식으로 꽃을 사다니, 덜 떨어진 꼭지여/ 비리구나 측은쿠나 비리구나 멀구나'라고

 세상 일이라고 해서 시인의 시야에서 멀어진 것은 아니다. 아침 신문에서 노부부의 불행한 죽음을 보고 외면하지 못한다. '아침신문이 턱하니 식탁에 뱉어버리고 싶은/지독한 죽음의 참상을 차렸다/나는 꼼짝없이 앉아 꾸역꾸역 그걸 씹어야 했다'<눈물 머금은 신이 우리를 바라보신다>

 나는 이 시같지 않은 시에 매료되어서 시집 한권을 모처럼 꼼꼼하게 읽었다. 이 시집이라고 한권 전체가 모두 살아 펄떡이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도무지 시어로는 쓰이지 않을것 같은 말들로 만들어낸 시들은 눈부시다. 모름지기 시란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법칙을 이 시인은 유쾌하게 깨어 버린다. 온갖 제도와 관습이 횡행하는 시대에 시까지 그 관습에 얽매여야 한다는 것은 얼마나 억울한가. 시인은 모름지기 자유로워야 하고 그가 쓰는 언어도 자유로워야 한다. 그리고 시인은 세상을 가르치는 자도, 통제하는 자도 아니다. 시인은 그저 존재의 본질을 드러내고 그 본질을 인간의 언어로 바꾸어 주는 주술사에 다름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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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자들
W. G. 제발트 지음, 이재영 옮김 / 창비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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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문학은 내 독서 경험으로는 정밀하게 얽혀 있다는 느낌이 든다. 독일문학 전공자가 아니어서 단적으로 말하기는 그렇지만 여태껏 읽은 책들에서 감지되는 느낌이다. 그에 비해 프랑스 문학은 자유롭게 풀어 헤쳐진 느낌이고 러시아 문학은 인간의 심연까지 파고드는 집요한 느낌이 있다.  

이 책 '이민자들'역시 정밀하다. 그러나 그 정밀하다는 것은 구조상으로 그렇다는 것이지 내용까지 기하학적인 정밀성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인간의 심리를 드러내는 정밀성이 두드러진다고나 할까. 저자 제발트의 글은 처음이다. 그렇지만 나는 제목에 끌렸고, 어쩌면 뜻밖의 수확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읽었는데 역시 기대만큼 뜻밖의 수확이다. 

이 책에는 네명의 이민자들의 삶이 그려져 있다. 이민자들은 떠도는 자들을 연상시키는데 어떤 목적의 이민이었던간에 이민이란 개인과 그 가족에게 깊은 흔적을 남긴다. 자신의 거처가 좋다면 굳이 다른 나라에 이민을 갈 일이 무엇이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여기 나오는 네명의 사람들은 떠돌이이며 국외자이고 이방인들이다. 유대인인 세사람이 이민자가 되어야 하는 사정이야 굳이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한 사람의 이민자인 막스 페르버는 도시화가 되어가는 곳에서 고향을 떠올리는 또 다른 이민자이다.  

그러고 보니 현대인들 가운데 이민자가 아닌 사람은 소수에 불과할 것 같다. 나도 어떤 의미에서는 이민자이며 그러므로 끊임없이 고향의 마을을 그리워하고 돌아갈 날을 기다리고 있다. 도시에서 산 시간이 고향에서 산 시간과 거의 일치하는데도 나는 아직 이방인처럼 이 도시에 머무르고 있다. 그러나 나는 언제든 내가 원하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의미에서 갇힌 이민자는 아니다. 그냥 이런저런 이유에서 아직 도시를 떠나지 못하고 있을 뿐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이민자의 신세를 면할 수있다.  

그러나 여기 나오는 사람들은 귀향이 불가능하다. 귀향한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귀향한 사람의 이야기도 나오는데 그들은 떠돌이의 삶보다 죽음을 선택했던 것이다. 이민자들의 삶이라니 한때 우리나라에서 유행했던 디아스포라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하겠지만 이 책은 그보다는 더 깊이가 있다. 인간 내면의 심리를 고찰하는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는 작가는 이 글들이 사실임을 증명하기 위해 많은 사진도 첨부해 놓았다. 작가는 직접 여기에 나오는 사람들을 만나 보았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을 증명하는 일은 어렵다. 사진 역시 그럴듯해 보이지만 사실 확인은 되지 않았다고 한다.  

이 책을 읽으면 우리는 인간에 대한 연민과 애정을 다시 느끼게 된다. 그 연민과 애정은 나에게로 향할 수도 있고 타인에게로 향할 수도 있다. 어떤 것이든 좋다. 우리의 마음에서 연민과 애정을 불러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은 우리의 살아 있음을 확인하는 일이며, 우리의 인간됨을 확인하는 과정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우리 인간의 역사, 나라가 다르고 각각의 역사는 다르지만 그것이 하나로 수렴됨을 느낀다. 인간의 삶이 너나없이 특별히 다르지 않다면 그 인간이 만들어 가는 역사도 크게 다르지 않다. 단지 거주하는 공간과 살았던 시간이 다를뿐이다. 

불에 태워진듯한 표지의 디자인은 이 책의 성격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불태워 버리고 싶었던 흔적들이 없었던가. 그러나 미처 모두 불태우지 못하고 다시 불길에서 흔적을 건져내는 일들은 없었던가. 이 책은 그 흔적들을 기록한 책이다.불태워 버리고 싶지만 결코 태울 수 없는 삶의 흔적들, 우리가 지은 죄악들, 우리가 가진 연민들, 고통들이 불길에서 그대로 건져 올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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