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석에 반대한다 이후 오퍼스 7
수잔 손택 지음, 이민아 옮김 / 이후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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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는 일찍이 “사실은 없다, 해석이 있을 뿐이다”라고 말함으로써 예술작품에 대해 날카로운 칼날을 겨누었지만, 이 책의 저자인 수전 손택은 비평가들이 작품에 무차별적으로 가하는 해석을 반대한다. 해석하는 행위는 텍스트를 바꾸고 있는 행위임을 말하면서 손택은 말한다. “해석은 지식인이 예술에 가하는 복수다. 아니, 그 이상이다. 해석은 지식인이 세계에 가하는 복수다. 해석한다는 것은 ‘의미’라는 그림자 세계를 세우기 위해 세계를 무력화시키고 고갈시키는 것이다. 이는 세계를 이 세계로 번역하는 것이다.(‘이 세계’라니! 다른 세계가 있기라도 하다는 말인가?)”

예술가들은 알 것이다. 창작의 고통에 더해 끊임없이 비평가의 입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것을. 책의 독자나 그림을 보는 자나 음악을 듣는 자, 춤을 보는 자는 모두 비평가가 될 수 있다. 관객들은 예술을 보고나서 나름대로 관전평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술가들은 그런 일반 관객들까지 염두에 두고 작품을 쓰지는 않는다. 작품의 해석에 궁극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비평가라는 사람들, 그들의 해석에 따라 작품은 작가의 의도와 상관없이 천국과 지옥을 왕복한다. 손택은 다시 말한다. “해석은 해방 행위이다. 거기서 해석은 수정하고 재평가하는, 죽은 과거를 탈출하는 수단이다. 다른 문화적 맥락에서 보면, 이는 반동적이고 뻔뻔스럽고 비열하고 숨통을 조이는 훼방이다.” 그래서 예술가들은 나름의 방식으로 비평가에게 도전한다. 예술가 스스로가 자신의 텍스트를 해석해 버리거나, 아방가르드적으로 미로를 설치하기도 한다. 아예 해체라는 이름으로 더 이상의 해석을 거부하기도 한다. 그러나 해석을 거부하거나 스스로 해석해 버린다고 해서 비평가의 해석을 피해 갈 수는 없다. 손택의 말처럼 해석은 텍스트에 대해 호전 행위를 보인다. “진짜 예술에는 우리를 안절부절 못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다. 해석자는 예술작품을 그 내용으로 환원시키고, 그 다음에는 그것을 해석함으로써 길들인다.”

그렇다. 비평가는 예술가를 길들인다. 내가 특히 주의 깊게 보았던 부분은 팝아트이다. 마그리트는 파이프 하나를 그려 놓고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제목을 붙여서 작품을 던져 놓았다. 분명히 파이프임에도 불구하고 파이프가 아니라니, 여기에 대해서 비평가들은 나름의 독특한(?) 해석으로 결국은 마그리트가 의도하는 쪽으로 움직였다. 비평가는 예술가를 길들인다고 손택은 말했지만 내가 보기에 현대 예술은 드디어 비평가들을 길들이기 시작했다. 드러나는 그대로가 전부인듯한 작품을 과감하게 던져 놓는다. 마치 비평가들이 어떤 해석을 가하는지 보겠다는 듯이. 예술가들이 작품을 만들어 놓으면 관객들은 그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 해석한다. 그러므로 이해한다는 것 자체가 바로 해석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비평가들은 스스로 직접 예술행위를 하지 않으면서 텍스트를 바꾼다. 작품은 해석을 통해 전혀 다른 작품으로 탄생하는 것이다.

“해석은 지식인이 예술에 가하는 복수다”라는 글로 유명해진 이 책은 소설가이면서 비평가인 손택의 대표작이다. 그렇다면 스스로 비평가인 손택이 왜 이렇게 해석에 부정적인가. 손택은 단지 옳지 못한 해석에 반대하는 것이다. 문자로 쓰여지지는 않았지만 창작의 고통을 모르고 비평의 칼날을 쉽게 들이대는 비평가들에 대한 문제 제기다. 예술가들보다 훨씬 현란한 언어를 구사하는 비평가들은 창작의 본질은 도외시한채 자신들의 언어로 예술작품을 재단하는 오만한 행위에 대해 반성을 하지 않음에 대한 경고인 셈이다. 바꾸어 말하면 해석은 작품을 다른 것으로 바꾸어 놓고 싶은 비평가들의 희망 사항이라고 신랄하게 비꼰다. 
   

그렇다면 예술작품의 자리를 빼앗는 것이 아니라 예술에 이바지할 비평이란 어떤 것일까? 이에 대해 손택은 예술의 형식에 더 주의를 기울일 것을 당부한다. 내용만으로 작품을 평가하는 태도는 편협한 태도이며 최상의 비평이란 내용에 관한 언급 안에 형식에 대한 언급을 녹여낸 비평이라고 말한다. 비평가의 임무는 실체를 보는 것이며, 예술작품이 어떻게 예술작품이 됐는지, 더 나아가 예술 작품은 예술 작품일 뿐이라는 사실을 보여 주는데 있다는 것이다.

손택은 예술작품은 근원적으로 그 내용이라는 것에 반대한다. 내용과 스타일은 함께 존중받아야 하며, 어떤 경우에는 오히려 스타일이 내용을 압도하는 경우가 많다. 오래 전에 데리다는 작품은 어떤 액자에 끼워져 있느냐에 따라 작품의 가치가 달라진다고 말한 바 있다. 아무리 좋은 작품이라도 포장이 그럴듯하지 않으면 그 내용이 돋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부르디외를 포함한 후기 구조주의자들은 ‘구조가 실재를 압도한다’는 것을 주장한다. 가령, 상품의 질이 아무리 좋더라도 그럴듯한 브랜드를 달지 못한 상품은 시장에서 높은 상품 가치를 인정받기 어렵다. 현대 사회는 상품의 질이 다소 떨어지더라도 브랜드 가치로서 상품의 가치를 말한다. 예술작품 역시 마찬가지라고 손택은 주장한다. 예술작품이 근원적으로 내용에 있다는 것은 고대 사람들의 이데아적인 발상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함을 말하는 것이다. 모든 표현은 스타일을 통해 구현된다는 손택의 주장에 전적으로는 아니더라도 많은 부분 우리는 공감할 수밖에 없다.

이 책은 문학작품과 연극, 영화, 사회학에 대한 다양한 비평작품이 포함되어 있다. 내가 관심있게 보았던 것은 레비-스트로스의 「슬픈 열대」에 대한 비평이다. 「슬픈 열대」를 읽으면서 내가 가졌던 의문들이 일단은 해소되는 것 같았고, 거기에다 나만의 독특한 사유를 더할 수 있었다. 예술의 전 분야로 확대해 가는 손택의 비평은 보수적인 비평가들의 범위를 넘어선다. 그것은 되돌아서서 끊임없이 해석을 염두에 둘 수 밖에 없는 창작행위를 할 때 염두에 두어야 할 중요한 내용들이 되어 주었다. 거기에다 비평에 뜻을 두고 있는 내가 지양해야 할 것들을 미리 깨우칠 수 있어 더 좋은 책이 되었던 것 같다. 창작은 어렵지만 해석은 쉬웠던 그간의 내 행위에 대한 반성을 덧붙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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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이 2009-02-05 0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선 마이리뷰 당선을 축하드립니다. 손택여사 주변을 맴돌고는 있지만 늘 마지막 장을 덮기가 어려웠습니다. <사진에 관하여>를 읽고 있는데 님의 리뷰를 읽고 또 용기를 내 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