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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에서 다산까지
김형효 지음 / 청계(휴먼필드) / 2000년 3월
평점 :
품절
김형효의 글을 읽는 것은 대단히 흥미롭다. 철학을 공부하면서 이런저런 난해한 책들에 어느정도 단련이 되었지만 그래도 문장 연결이 안되는 책들이 어디 한두권이던가. 특히 번역서를 읽을때면 한글 문장을 읽으면서 그 난해함에 혀를 내둘렀던 일이 한두번이 아니다.
그러나 김형효는 그런 난해한 문법을 쓰지 않는다. 철학의 풀어쓰기라고나 할까. 그의 박학다식함이야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것을 굳이 강조하지 않아도 이미 철학에 관심이 있는 이들은 알것이다. 그러나 그 박학다식함이 좋은 책을 만들어 주는 것은 아니다. 요는 철학의 풀어쓰기가 이루어져야 하고 문장의 힘이 받쳐 주어야 좋은 책이 된다.
제목에서 암시하는 것처럼 이 책은 한국철학자들 다섯명의 사상을 정리한 글이다. 원효, 지눌, 퇴계, 율곡, 다산. 각자의 호불호가 다르니 딱히 어떤 글이 좋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나는 지눌과 율곡 쪽으로 좋았고 특히 지눌의 글을 읽으면서는 지눌을 더 공부하고 싶다는 열망을 불태우기도 했다. '성성적적', 깨어 있으되 요란스럽지 않고 고요하되 혼미하지 않는다는 불교의 오랜 법어들이 선승 지눌의 글을 통해 나오면 가슴에 화인처럼 박힌다. 이런 말들이야 흔하다. 남명이 자신을 드러내되 드러내지 않으며 살아야 한다고 말한것도 같은 맥락이다.
한국 사상의 비교철학적 해석이라는 설명처럼 이 책은 각 사상가들의 사상을 서로 비교하고 있고, 때로는 서양 철학자들의 사상과도 비교한다. 몇년동안 서양철학을 공부해 오다가 한국철학책을 읽으니 머리 속에는 여전히 서양철학의 이론들이 맴돌고, 한국사상에 내가 서양사상을 접목시키는 재미도 누릴 수 있다. 김형효도 칸트를 전공한 서양철학자이지만 이제는 어느 한분야에 그를 얽매여 놓기에는 폭이 너무 넒다. 학위를 받기 위한 전공이 세월을 넘어 그 전공까지 넘을 수 있으니 김형효의 학문의 깊이가 새삼스레 위대해 보이는 책이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김형효의 독특한 해석에 때로 의문이 생겨 주변 사람들에게 자문을 구하기도 하고, 난상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 해석이 맞고 틀리고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관심을 가지는 것은 김형효만의 독자적인 해석법이다. 플라톤의 이데아와 퇴계의 리의 연관성을 가지고 토론하던 일이 기억에 남는다. 고정불변이라고 흔히 알고 있는 이데아와 변하는 리가 분명히 닮은 꼴이 있음을 확인하고 플라톤의 이데아를 다시 공부하면서 이데아 역시 불변이 아님을 확인한 것은 큰 수확이었다. 플라톤은 후기에 가서 고정불변이라고 주장했던 이데아를 퇴계의 리처럼 스스로 활동해서 현상으로 드러남을 말했는데 그런 의미에서 플라톤과 퇴계는 거의 같은 사상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눌은 가장 관심이 가는 부분이었는데 그것은 내가 하이데거에 끌리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역시 끌리는 것은 하나라는 것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는데, 우연스러웠던 일은 지눌을 읽고 돌아서서 경북 청도의 적천사라는 절에 갔었는데 거기서 지눌의 흔적을 발견한 일이다. 지눌이 심었다는 은행 나무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는 작은 절인데 그 절의 고요함이 지눌의 선풍에서 유래한 것 같아서 좋았다.
무려 600페이지가 넘는 책인데 단 한장도 허투루 넘길수 없는 책이다. 순서는 원효, 지눌, 퇴계, 율곡, 다산 이런식으로 시대순으로 되어 있지만 읽는 것까지 순서대로 읽을 필요는 없다. 나는 공부 때문에 퇴계를 먼저 읽었고 그 다음엔 율곡, 지눌, 원효를 읽다가 미처 덜 읽고 다산을 읽었다. 내 관심가는대로 아무렇게나 읽어도 별 무리가 없다. 이 한권의 책을 읽고 나면 한국사상에 대해서 폼을 잡아가며 아는척해도 좋다.
그리고 이 책을 읽으면서 개탄스러웠던 것은 근대 이후 우리에게는 여기 책에 나오는 사상가들만한 사상가가 배출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항간에서는 다석이나 함석헌등을 거론하기도 하지만 다산 이전의 사상가들에 비하면 허술하기 짝이 없다. 흔히 동양 철학은 정밀하지 못하다고 하지만 그 맥락을 짚어가다 보면 그 말은 오독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별로 부담스럽지 않은 책이지만 간혹 용어의 개념에서 혼란을 느낄수도 있다. 그럴때는 컴퓨터에서 개념을 찾아가며 읽으면 된다. 마치 직접 저자를 마주하고 강의를 듣듯이 쉽게 술술 풀어가는 것이 이 책의 매력이라면 매력이겠다. 한국철학의 기초부터 섭렵하고 싶다면 한국사상연구소에서 출간한 '자료와 해설 한국의 철학사상'을 먼저 읽고 이 책을 읽어도 좋다. 거기에는 한국의 철학사상사가 방대한 인용문과 함께 제시되어 있어 많은 도움이 된다. 그러나 그냥 지적 욕심으로 읽는 것이라면 그냥 이 책만 읽어도 충분하다.
해체 사상가이기도 한 김형효의 글들은 어려운 철학서이면서도 묘한 매력을 뿜어낸다. 사상의 체득과 문장의 힘이 어우러진 탓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