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편 竹篇 (양장) 황금알 시인선 125
서정춘 지음 / 황금알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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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부터, 멀다

칸칸마다 밤이 깊은

푸른 기차를 타고

대꽃이 피는 마을까지

백 년이 걸린다

<竹篇·1 -여행>전문

 

장사익이 부르는 이 노래가 서정춘의 시인줄은 이제야 알았다. 가난과 독학의 세월을 살아오면서 시를 접하고는 시가 그렇게 좋은 것인 줄 상상도 하지 못했다. 시를 읽으면 현실의 고통이 말끔히 사라졌다라고 말했던 가난과 고통의 시인, 그러나 시에는 가난과 고통이 보이지 않는다. 독학으로 공부한 시에 대한 결벽증으로 쓴 시를 버리고 또 버렸던 시인, 그래서 남겨진 35편의 시가 시집 竹篇에 실렸다. 한 시집에 실린 시편이 적지만 시의 숫자만 적은 것이 아니라 시도 간결하다. 언어를 버리고 또 버리면서 남은 것들이리라.

 

시는 한자로 로 쓰여지는데 이 말을 풀어보면 말씀의 사원쯤 되겠다. 말씀을 만든 사원, 말씀으로 득도하고픈 기원이 담겨 있다. 말씀으로 만든 사원은 시인 서정춘에게 딱 어울리는 말이다. 그의 시는 한 편 한 편이 사원을 짓듯 경건하고 단순하고 치밀하다. 쌓아올린 돌의 어느 하나라도 빼내면 허물어져 버릴 듯이 언어들은 보드라운 직조물처럼 촘촘히 짜여 있다. 그래서 나는 이 시집에서 간결한 언어, 더 줄일 것이 없는 언어의 경지를 보았다. 그래서일까, 시인은 시집의 첫머리 시인의 말에서 아 나의 농사는 참혹하구나// !/ 이라고 탄식한다. 평생의 농사 치고는 너무나 참혹한, 그래서 아름다운 시들이다.

 

자네가 너무 많은 시간을 여의고 나서 그때 온전한 허심으로 가득 차 있더라도 지나간 시간 위로 비가 오고 눈이 오고 바람이 세차게 몰아쳐서 눈을 뜰 수가 없고 온 몸을 안으로 안으로 웅크리며 신음과 고통만을 삭이고 있는 그동안이 자네가 비로소 돌이 되고 있음이네

 

자네가 돌이 되고 돌 속으로 스며서 벙어리가 된 시간을 한 뭉치 녹여 본다면 자네 마음 속 고요 한 뭉치는 동굴 속의 까마득한 금이 되어 시간의 누런 여물을 되씹고 있음이네

<돌의 시간>전문

 

 

돌 속으로 스미고 벙어리가 된 다음에야 찾아오는 고요의 한 뭉치는 되씹고 되씹었던 한 생의 끝에 비로소 얻어진 안식이 아니었을까, 시를 통해서 현실의 고통을 잊으려 했던 시인이 온 몸을 통해 체득한 시간의 경지였을 것이다. 조동화는 시론에서 가령 화폭에다 산 하나를 담는다 할 때/ 그 뉘도 모든 것을 다 옮길 순 없다/ 이것은 턱없이 작고 저는 너무 크므로라고 말하듯이 시에다 우주의 모든 것을 담을 수는 없다. 그래서 서정춘은 고요한 뭉치를 집어 들고 시에다 조용히 내려 놓는 것이다. 우주의 기껏 하나인 고요’, 그러나 우주의 전부인 고요를 전 생애를 걸었던 시에 내려 놓고 평생의 농사가 참혹하였다고 우는 것이다.

 

시는 무엇일까? 시는 무엇이라고 딱 잘라서 규정할 수 없는 애매모호한 것이다. 정작 쓰자고 하면 손아귀에서 잘도 빠져 나가는 언어를 데려와 놓으면 언어는 기껏 세상에서 가장 한심한 말 한 마디만 던져 두고 다시 도망간다. 그러나 언어는 자기 스스로 말함이며, 스스로 나타냄이다. ‘이제는 기쁜 일로 천년을 살더라도/ 금이나 은같이는 빛나지 말자에서처럼 언어는 시인의 삶에서 스스로 말하고 스스로 나타나진다. 하이데거는 詩語를 일상어와 엄격히 구분하고 있다. 잡담, 한담 수준인 일상어는 산문에 어울리는 말이지만 시어는 이 잡담과 한담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예술이 탄생한다. 엘리트 예술주의를 지향했던 하이데거는 언어가 말한다는 이 한마디로 시어를 규정한다. 시인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가 하는 말, 서정춘은 평생을 이 언어가 하는 말에 귀 기울이며 그 소리를 한 자 한 자 기록해 나갔던 것이다. ‘돌 속에/ 내 마음 놓아 버렸으니라고 말하며. 돌 속에 마음을 놓아 버리고 얻어 들었던 귀한 말씀, 언어가 말하는 시, 그래서 간결하고 한없이 단순한 말들이 이 시집에서 문자로 보여지고 나는 그 귀한 말씀을 듣는다.

 

빗소리 얻으러 귀동냥 가고 있다/ 귓속으로 귓속으로/ 귀동냥 가고 있다시인을 보는 것보다 듣는 것이 더 익숙하다. 청각적 신호보다 시각적 신호에 더 익숙하고 친숙한 나는 비는 먼저 보는 것이었고, 그 다음이 듣는 것이었다. ‘비 보러 간다라고 말했지 비 들으러 간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가끔 지붕을 두드리는 비소리를 듣고 싶었을때가 있었지만 비는 듣기 이전에 먼저 보는 것이었다. 그러나 참혹한 세월을 살아온 시인에게 비는 들으러 가는 것이었고, 그것도 그냥 듣는 것이 아니라 귀동냥 가는 것이었다. ‘동냥이라는 그 말의 아픔, 그 말의 슬픈 삶의 비의를 모두 짐작이나 할 수 있겠는가. 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을 겪었던 세대들의 집단 무의식 속에는 이 동냥이라는 말에 대한 트라우마가 강하게 새겨져 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시인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빗소리 듣는 것도 귀동냥이라고 표현한다. 빗소리마저 온전히 내 것이 아닌 것이다. 그렇다고 시인이 그 기억의 역사를 치유되지 못한 트라우마로 간직하는 것은 아니다. ‘물사발의 균열이 모질게도 아름답다라고 노래하듯이 그는 트라우마, 곧 균열 자체를 아름답게 본다. 사람은 누구나 트라우마를 가지게 마련이다.

 

내 오십 사발의 물사발에

날이 갈수록 균열이 심하다

 

쩍쩍 줄금이 난 데를 불안한 듯

가느다란 실핏줄이 종횡무진 짜고 있다

 

아직 물 한 방울 새지 않는다

물사발의 균열이 모질게도 아름답다

-<균열> 전문

 

생은 살아갈수록 균열이 나게 마련이고, 그 균열은 실핏줄처럼 종횡무진 흩어져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시인에게는 그 균열이 아름답다. 아름답지 않고는 어찌할 도리가 없다. 생은 그러한 것이다. 아름답지 않고 어쩔 도리가 없는 그 생이 시의 몸으로 오롯이 드러나 있다. 그래서 생은 더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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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D 2017-07-06 16: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버리고 또 버렸으되 남은 시어가 가득한 시집, 읽어보고 싶어졌어요. 좋은 리뷰 잘 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