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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가져갔을까?
김고운 지음, 기정현 그림 / 키즈엠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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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엽고 착한 두더지 두찌의 이야기 누가 가져갔을까

 

 

두더지를 처음 본 것은 몇 해 전 시골 과수원에서였다. 잘 다듬어진 과수원에 이리저리 길게 땅을 파헤친 흔적을 보았다. 파헤친 길은 과수원의 노란 민들레를 뒤집고 보랏빛 별꽃을 잘라 놓았고 냉이꽃도 사정없이 파헤쳐 놓았다. 두더지가 한 일이었다. 땅속의 벌레를 쫓아 역시 땅속을 온 힘을 다해서 달린 두더지는 과연 그 벌레를 잡았을까 못 잡았을까.

 

우리 집 고양이 나비는 자주 그 두더지를 잡아 온다. 나비는 코를 땅속에 박고 두 발로 재빨리 땅을 파서 입이 뾰족한 두더지를 잡아서는 주인인 나에게 선물로 바친다. 나는 절대로 두더지 선물을 받고 싶지 않지만 우리 나비의 선물을 거절할 방법이 없다.

 

달달토끼로 이미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은 작가 김고운이 쓰고 기정현이 그린 그림책 누가 가져갔을까는 바로 그 두더지 이야기다. 아이들이 1년 뒤에 열어보기로 하고 묻어둔 딱지와 빈 병과 막대 사탕과 사진 등등을 발견한 두찌는 그 귀한 보물을 가져와 땅속 두더지 장터에 내다 판다. 물건을 팔고 받은 지렁이가 가장 많은 고슴도치가 그달의 판매왕이 되는데 아이들의 물건을 모두 판 두찌는 과연 판매왕이 될 수 있을까 없을까.

커다란 병을 매달고 끙차 끙차 땅속을 달린 두찌는 과연 어떻게 될까요?

 

귀여운 두찌의 모습에 웃음이 한번 터졌고, 두찌네 가게 간판인 두찌네 다 있어에서 또 웃음이 터졌고, 또 다시 보물을 찾으러 룰루랄라 떠나는 두찌의 모습에서 자꾸만 웃음이 터졌다.

 

귀엽고 우스운 두찌, 마음이 착한 두찌, 그래서 읽는 사람까지 행복하고 즐거워지는 두찌 이야기 누가 가져갔을까가 인기가 아주 많아서 판매왕 두찌처럼 인기왕 동화책이 되었으면 좋겠다.

"자, 이제 가장 소중한 물건을 여기에 넣고 땅에 묻는거야.
우리 딱 1년 뒤에 열어 보자!"
"좋아!"

두찌는 고민에 빠졌어요.

"내가 가져온 건 아이들의 소중한 물건들이야.
다시 되돌려 줘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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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망대 혹은 세상의 끝
심강우 지음 / 문이당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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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가들이란 어쩌다 한 번씩 잊을만하면 나타나는 그런 기질을 가진 사람인지, 아니면 소설이란 장르가 그렇게 틀어박혀야만 쓰여지는 글인지 내 주변의 소설가들은 전부 그렇다. 그래서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말은 소설가들에게 적당한 말이다. 그들은 자기들만의 은신처에 깊이 틀어박혀 글을 쓰다가 가끔씩 외부에 얼굴을 내민다. 그렇게 오랜만에 얼굴을 내민 소설가 심강우에게서 이 책을 받았고, 가방을 뒤적여 볼펜을 꺼내주고 사인을 해 달래서야 간신히 사인을 받았다. 그 또한 소설가들이란 그렇거니 이해한다. 사실 이 책을 사봐야 하는데 그냥 받자니 손이 오그라들었고, 세상의 작가들에게 그냥 받는 책은 늘 빚지는 기분이기도 하다. 그래서 서평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는데 한편으로는 글이 시원찮으면 어떻게 서평을 쓸까 고민이 되기도 했는데 그것은 완전한 기우였다. 글을 읽으면서 행복했던 것은 아, 이 소설가, 글 참 잘 쓰는구나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전망대 혹은 세상의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전망대도 세상의 끝인데 혹은 세상의 끝은 또 어떤 풍경일까, 제목을 보면서 그 생각을 했다. ‘전망대 혹은 세상의 끝에는 죽음과 사랑이 있다. 이 소설의 전체를 관통하는 어두운 죽음의 현장과 거기에 내밀하게 스며있는 사랑은 죽음이 아주 비참하고 어둡지만은 않은, 사람 사는 방식 중의 하나임을 일깨워준다. 이 소설집에 실려 있는 10편의 단편 각각은 모두 전망대 혹은 세상의 끝이라는 제목을 붙여도 조금도 어색하지 않게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고, 사랑이 마치 죽음을 무화시키듯 죽음의 곁을 함께 달려가고 있었다.

 

첫 번째 소설인 화우和雨는 우선 문장이 어찌나 섬세하고 가슴을 흔들어 놓던지 문체의 매력에 빠져 들었다. 문체의 매력이라면 이 화우和雨보다 우선 제일 앞에 있는 작가의 말에서 두드러졌다. 책을 받고 그 자리에서 이 작가의 말을 읽으면서 나는 설렜다. 책을 받고 설레기는 참 오랜만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소설집을 낸다라는 말로 시작하는 작가의 말은 간결했지만 절실했다. 그 간결하고 절실한 문장은 작가의 말을 써 본 사람은 안다. 가슴 속에 수 천 수 만의 언어가 둥둥 떠다녀도 작가의 말에 쓸 수 있는 몇 문장의 언어가 떠오르지 않아 오래 뒤척이다 보면 드디어 너무나 절실해진 나머지 너무나 간결한 문장만 남게 되는 것이다. 그런 설렘은 화우和雨를 읽으면서 깊어졌다. 어쩌면 문장이 이리도 섬세하고 결이 고운지 도대체 이 작가의 어디에서 이런 섬세하고 결 고운 언어가 나오는지 잠시 앉아 소설가를 떠올려 볼 정도였다. 기생 화우의 이야기를 쓴 이 단편에도 죽음과 사랑이 섬세한 문체로 전체를 끌고 가고 있었다.

 

이어지는 전망대 혹은 세상의 끝역시 인간의 사랑과 죽음이 이야기를 끌고 가고 있었는데 나는 그의 문장에 홀렸다. 미사여구가 없는 간결하고 단단한 문장들에 홀려 전망대로 따라 올라가는 동안 펼쳐지는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나의 상상력을 확장했다. 화우和雨에 나오던 살아 있으니 우리가 만나는 것 아니냐라는 말은 죽음 이후에나 해당되는 말일까. 전체적으로는 죽었으니 우리가 만났음을 아는 것 아니냐라는 말을 생각하게 했다.

 

왜 작가는 그렇게 집요하게 죽음과 사랑에 매달렸을까. 언젠가 언뜻 아주 짧게나마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던 것도 같은데 작가에게 죽음은 어떤 화두일까, 소설을 읽는 내내 그 생각을 했다. 그러면서도 역시 집요하게 끌고 가던 사랑은 또 작가에게 무엇일까, 어떤 작품에도 놓치지 않고 있었던 것은 형태는 다르지만 우리가 무릇 사랑이라고 일컫는 것들이었다. 그깟 사랑, 요즘 시대에 사랑이란 개도 안 물어갈 벌레 같은 것이 되어 여기저기 기어 다니는데 작가가 말하는 사랑은 개가 물어가서는 안될 고귀한 것으로 드러나 있다. 인간에 대한 연민, 남녀 간의 사랑, 모르는 타인에 대한 배려, 은혜 갚음, 약자에 대한 안쓰러움 들이 사랑의 형태로 얼굴을 내민다. 그리고 그 모든 사랑에는 죽음이 있다.

 

내가 특별히 흥미롭게 봤던 것은 화우和雨전망대 혹은 세상의 끝이다. 화우和雨는 그 섬세하고 결 고운 문체에 마음이 닿았고, 전망대 혹은 세상의 끝은 언어학에서 말하는 기표와 기의의 관계가 문장 사이에서 물결처럼 출렁거렸다. 물이 고층 빌딩의 전망대까지 올라오는 동안 기표와 기의의 출렁거림도 함께 올라왔다. 사랑이라는 기표는 냉정했지만 기의는 자의적이었고 배척과 소외의 이면에는 구조주의적 언어학에 대한 기대가 살아 있었을까. “배척되거나 소외되는 데에도 어떤 공식이 있을 거라는, 그러니까 배척과 소외의 다양한 동인이 범주화가 가능할 거라는구조주의 언어학에 대한 기대는 아마도 전망대 앞에서 여지없이 깨어졌을 것이다. 개별적인 것들의 범주화, 규명하고 또 규명하라. 그런 다음 규정해도 늦지 않다라는 신념조차도 물이 올라오면서 죽음이 수없이 널부러진 전망대 앞에서는 옳지 않다. “눕거나 기댄 모습 그대로 정물이 되어가는 사람들, 서로를 구성하기보다 스스로의 것을 스스로에게만 설정하기로 결심한 사람들이 사실은 언어학을 넘어선 사람들의 모습이다. 그리하여 작가는 기표에게 작별을 고한다. “안녕히, 나의 기표들이라고.

 

오랜만에 좋은 소설을 읽었다. 더 좋았던 것은 화우和雨에서 내 창작의 영감이 번뜩였다는 것이다. 예술작품을 대하면서 창작의 영감이 번뜩거리는 작품을 만나면 행복해진다. 고갈되고 시들어가는 영혼에 새로운 번뜩거림이 스며들기 때문이다. 작가의 말처럼 이 소설이 저잣거리로 많이 팔려가는 장작이 되기를.

 

     엇이 아직 그대를 불안하게 하는가?

      그대는 모든 동물들과 함께 죽을 것을.

     그 다음에는 아무것도 오지 않는 것을.

                                    -베르톨트 브레히트 <유혹받지 말라>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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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기억의 예술관 - 도시의 풍경에 스며든 10가지 기념조형물
백종옥 지음 / 반비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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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깊은 반성이란 어떠해야 할까. 흔히들 진심이 담긴 사과를 하지 않는다고 분노하는 사람들이 있다. 진심이 담긴 사과는 깊은 반성이 바탕이 되어야 하는데 역사에서의 깊은 반성이란 어떠해야 할까. 바르샤바 게토추모비에서 무릎을 꿇었던 빌리브란트의 행동은 가장 많은 유대인이 희생된 폴란드인들로 하여금 치유의 마음을 가지게 해주었다. 그뿐만 아니라 과거 나치의 죄악을 속죄하기 위해서 독일에서는 총리의 사과도 있었지만 사회 여기저기에 디테일한 반성과 재발방지를 위한 장치들을 해놓고 있다.

잘못된 역사를 잊지 않기 위해서 베를린 시 전체에 기념조형물들을 설치하여 추모하고 반성하는 이 조형물들에는 독일인의 깊은 반성이 담겨 있다. 물론 여전히 나치즘 부활을 꿈꾸는 독일 우익들이 있지만 이들이 사회적인 지지를 받지는 못한다. 아베의 수출 규제에 연이은 한국의 화이트리스트 제외를 지켜보면서 일본은 과거를 인정하지도 않고, 그러다보니 반성할 줄도 사과할 줄도 모르는 뻔뻔한 국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논리에 맞지 않는 주장을 하면서 경제 전쟁을 시작한 일본을 보면서 일본이 전쟁을 할 수 있는 국가였으면 전쟁도 불사할 나라라는 생각까지도 들었다. 그동안 우리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감정이 희석되어 있었고, 일본의 유화정책에 너무 쉽게 동화된 건 아닌가 하는 반성이 생긴다.

물론 과거를 빌미로 현재가 정지되어 있어서는 안 된다. 역사는 진보한다고 믿는 나로서는 과거를 바탕으로 현재가 구성되고 미래가 예측되어야 한다고 본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인정할 줄 모르고 반성하지 않는 일본을 우리는 너무 쉽게 용서하고 받아들인 것이 아니었는가 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백종옥이 쓴 『베를린, 기억의 예술관』을 읽으면서 나는 베를린 전체가 역사를 잊지 않기 위해 서 기념조형물들을 설치한 독일인들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나 잘못된 과거는 잊고 싶어 하고 묻어버리고 싶어 하지만 역사적으로 유래가 없었던 유대인학살에 대한 책임을 지고 과거를 통해 미래를 보고 싶어 하는 독일인들의 힘은 어디에서 나올까.

‘도시의 풍경에 스며든 10가지 기념조형물’이란 부제가 붙어 있는 이 책의 제1장이 전쟁과 폭정의 희생자들을 위한 중앙 추모소인 노이에바헤이다. 유명한 케테 콜비츠의 「죽은 아들을 안은 어머니」조각상이 설치되어서 전쟁과 희생자들에 대한 추모와 숙고를 할 수 있는 묵상의 공간이다.
2장은 마르크스, 프로이트, 브레히트, 하이네, 고리키 등의 유대인 작가들과 학자들, 그리고 나치를 비판한 비유대인의 책까지 약 2만권이 불태워진 베벨 광장에 설치된 미하 울만의 「도서관」이다. 분서의 현장 지하에 설치된 텅 빈 도서관인 이 조형물은 역시 독일인들이 과거를 잊지 않기 위해 설치했는데 그 기하학적인 공허가 주는 충격이 크다 밤이면 텅 빈 지하도서관에서 불빛이 새어나오는데 분서의 날 타올랐던 불빛을 연상케 한다.

제3장은 2711개의 추모비들과 홀로코스트와 관련된 자료가 전시된 지하 정보관으로 구성된 「학살된 유럽 유대인을 위한 추모비」이다. 유대인의 묘지를 형상화한 이 추모비는 베를린 유대인박물관과 함께 매년 50만명 이상이 다녀간다고 한다.                           

그 외에도 유대인을 아우슈비츠 등 동유럽으로 실어 날랐던 그루네발트역의 17번 선로, 베를린 전역에 있는 희생자들이 살던 집 등에 설치된 길바닥 추모석, 버스정류장인 실슈트라세 정류장의 ‘아이히만의 유대인 담당부서’ 등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기억의 공간들이 설치되어 있다. 독일인들은 그 기억의 공간들을 통해 과거를 잊지 않고 그런 역사가 재발되지 않기를 기대하며, 희생된 유대인들에게 속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인들이 그들이 지배했던 나라들에 어떤 사과를 하고 역사가 재발되지 않기 위해서 조치를 취한 것은 거의 없다. 그들은 과거의 역사를 부정하고 합리화하며 묻으려고 한다. 지금 우리가 분노하는 바탕에는 제대로 사과 받지 못한 역사, 그들이 부정하는 역사에 대한 아픔이 깔려 있다. 개인에 대한 배상은 전후 보상을 받은 한국의 책임이라고 떠넘기거나, 일본 나고야 시장이 아이치트리엔날레에 전시된 평화의 소녀상을 철거 요청하겠다고 한 것은 아직도 그들이 과거의 역사에서 아무런 교훈도 얻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들이 진정으로 반성한다면 평화의 소녀상을 철거 요청할 것이 아니라 그 앞에서 사죄해야 하며, 개인에 대한 배상은 한·일 양국이 협의하여 사죄하고 배상하여야 한다.

지금도 경제적인 문제 때문에 대화를 거절하는 일본에게 계속 대화를 요청해야 하고, 타협을 찾아야 한다는 사람들이 있다. 이것을 개인적인 문제로 본다면 가난한 사람은 부자가 어떤 횡포를 저질러도 돈 때문에 굴욕적인 태도로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우리나라는 이제 가난한 나라가 아니라 세계 10대 경제대국이며, 일본의 경제제재를 우리 힘으로 이겨나갈 수 있으리라 믿는다. 1960년대에 우리나라가 일본에게 전후 보상을 받고 차관을 도입하던 시절과는 다른 시절이다. 물론 대화는 계속되어야 하고, 타협점도 찾아가야 한다, 그러나 그 방식이 굴욕적이어서는 절대 안 된다.

 

『베를린, 기억의 예술관』을 통해 우리는 그동안 얼마나 굴욕적인 역사를 감당해 왔으며, 죄의식이 없는 일본이 얼마나 뻔뻔하고 몰염치한지를 깨닫게 되었다. 여전히 일본의 일부 지식인이나 일부 정치인들은 일본 우익의 행태를 비난하고 있지만 문제는 전후 일본이 단 한 번도 우리에게 공식적인 사과를 한 적이 없다는 것과 역사를 부정한다는 것이다. 적반하장이라는 대통령의 역사인식에 공감하며, 다시는 일본에 지지 않을 것이라는 문재인 대통령의 말을 지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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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미래 - 사슴부족 이누이트들과 함께한 나날들
팔리 모왓 지음, 장석봉 옮김 / 달팽이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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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거는 이미 지나가버린 시간이지만 우리의 기억에 각인되어서 가끔씩 무의식의 세계를 비집고 튀어 나온다. 잊혀진줄 알았던 감정들이 새삼스럽게 들추어지고, 잊혀진 사건들이 어떤 일을 계기로 다시 돌이켜지면 우리는 현재와 과거, 미래가 다른 시간이 아님을 알게 된다. 과거 위에 오늘의 시간이 있고, 이 시간을 바탕으로 미래가 구성된다. 그러므로 과거를 잊어버린다면 미래 또한 기억될 수 없다. 미래는 우리의 멀고 가까운 과거이기 때문이다.

  날고기를 먹는 사람들이라는 뜻의 에스키모라는 용어는 원래 그 부족에 속한 사람들이 사용하지 않는 이름이다. 이는 인디언들이 붙인 이름으로 원래 에스키모라고 불리는 이들의 고유의 이름은 '이누이트'이다. 이들은 이누이트쿠, 즉 인간의 강이라고 부르는 호수 주변에 사는 사람들이 자기 부족을 가리켜 붙인 이름으로 '인간'이라는 단순한 뜻을 가지고 있다. 이 단순한 이름은 광대한 자연 속의 많은 생물들 가운데 인간으로 불리는 한 종족을 가리킬뿐이다.

  그 이누이트들 가운데 사슴부족으로 불리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이 바로 이 책의 주인공이다. 그들은 사슴고기를 먹고 사슴의 가죽으로 된 옷과 집을 짓고 살며, 오랜 식습관으로 인해 사슴고기를 먹어야만 생존할 수 있도록 진화해왔다. 이 글은 사슴부족 사람들의 생존기, 즉 툰드라의 극한 기후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캐나다 정부는 이누이트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툰드라 남쪽, 그러니까 사슴부족이 사는 북쪽내륙보다 기온이 더 온화하고 살아가기 좋은 남쪽 바닷가에 정착촌을 마련하고 그들의 생활을 지원해왔다. 그러나 사슴고기를 먹으며 살도록 진화되어온 그들에게 이것은 재앙이나 다를바 없었다.

  이미 백인들이 북쪽내륙, 백인들이 들어가 살 수 있는 한계선까지 들어가 사슴을 잡아야만 살 수 있는 사람들에게 총과 밀가루를 주면서 사슴보다는 여우를 잡도록 두어차례 유혹하여 그들의 생존환경을 무너뜨린 적이 있었다. 이누이트들에게 흰여우털을 가져오면 총과 밀가루를 주면서 교역을 하던 백인들은 경제공황이 밀려오면서 흰여우털이 소비되지 않자 교역소를 일방적으로 폐쇄해 버렸다. 영하 50도에서 70도를 넘나드는 겨울, 여우털을 가지고 교역소를 찾아온 이누이트인들은 모두 빈 손으로 되돌아가야 했고, 사슴을 잡아서 겨울을 대비하지 못한 그들은 기아로 많은 사람이 죽어야 했다. 그리고 백인에게서 전해져 온 전염병이 돌아 수천명의 이누이트인들이 죽고 겨우 수백명만이 살아남아 명맥을 잇고 있다.

  백인들은 그들에게 재앙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사슴을 잡기 위한 총과 탄약뿐, 나머지는 그들이 수천년동안 살아온 방식대로 살아가는 것이 그들 부족의 명맥을 이어가는 것이었다.

"텅 빈 공간이라는 사실, 그게 나를 가장 못 견디게 했던 것 같아. 망할 놈의 얼어 죽을 빈 공간, 그게 한도 끝도 없이 이어지면 너는 막판에는 소리를 지르거나 비명을 지르거나 아니면 네 모가지를 분지르고 싶을거야."라는 백인의 말처럼 그들에게는 하얀 툰드라가 재앙이지만 이누이트인들에게는 그 백인들이 재앙이다. 이누이트인들은 자신의 신화속에서 삶을 가꾸어가고, 자신들에게 익숙한 먹거리, 입을거리를 만들며 살아간다. 이누이트인들, 특히 사슴부족이라 불리는 부족이 멸종되어 가면서 그들에게 미래는 잊혀진 미래가 되었다.

  태초에 여신이 개를 낳았고, 그때 개들은 인간의 말을 했기 때문에 개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인간과 함께 살았다는 그들의 신화는 인간 또한 그 툰드라의 생명 중 하나에 불과함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툰트라의 법칙에 따라 살고자 했으나, 개화되었다는 백인들이 그들의 삶을 망쳐버렸다. 캐나다 정부는 그들의 멸종을 막기 위해 캠프를 설치하고 의식주를 제공하고 있으나 그들에게 미래는 그리 밝아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끊임없이 그들 조상이 살아왔던 툰드라로 돌아가고 싶어하고, 사냥을 하며 살았던 조상들의 습성처럼 날이 풀리면 사냥을 하고 싶어한다. 그리고 기아가 찾아오면 나이 많은 순서대로 캠프를 나가 사슴가죽옷을 벗어버리고 조용히 죽음을 맞으며 종족을 이어가기를 원한다.

  그들은 백인들에게 묻는다. "왜 당신들은 우리의 도움이 필요해 왔다가, 우리가 당신들의 도움이 가장 절실히 필요할 때에 갑자기 사라져버리는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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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리나 미메시스 그래픽노블
바스티앙 비베스 지음, 임순정 옮김 / 미메시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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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갈수록 험난하고 가난하여 이 길이 가야 할 길인가를 스스로에게 자주 묻는다. 그러나 그 물음은 헛되다. 나는 이 길이 가야 할 길인지 아닌지를 물을 겨를도 없이 가고 있으며 가야 할 것임을 알고 있다. 그러나 또 묻고 물으며 천천히 발을 내디딘다.

무용한 것들의 대표적인 예가 예술임은 말할 나위가 없다. 실용과 무용을 따지자면 예술은 무용의 대열에 서겠지만 그러나 사랑하지 않을 도리 또한 없다. 그리하여 예술은 생존한다.

폴리나는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가 늘 의문을 가지는 현대 예술에 대한 물음이다. 현대 예술이라 일컬어지는 예술은 여전히 예술로서 유효한가. 물론이다. 그것이 예술이라는 이름을 얻고 있는 한 현대예술이든 고전예술이든 예술로서는 유효하다. 다만 형식이 다를뿐이다.

폴리나는 클래식 댄서이다. 끊임없이 질문은 던지는 보진스키 교수는 다른 댄서들과 불화를 일으키지만 폴리나는 묘한 매력을 느낀다. 댄서 개인의 생각은 없이 가르치는 교수의 생각에 따라 생각없이 따라하기를 강요하는 다른 교수들에 비해 보진스키는 자신이 구현한 실질적인 가치가 무엇인지에 대해 묻는다. 끊임없이 완벽을 추구하기 때문에 예술가의 퍼포먼스는 항상 불만스러울 수밖에 없고, 생을 마감하는 순간에야 실질적인 가치가 무엇인지를 깨달을 수 있다는 보진스키의 말은 예술의 과정에서 겪는 불만과 절망을 위무해 주지만 도달해야 할 길 또한 멀고 험난함을 알려 준다. 춤보다는 춤의 실질적인 가치, 즉 철학을 요구하는 보진스키는 당연히 댄서들에게 인기가 없다. 폴리나 역시 보진스키를 떠나 독일로 가서 현대예술가들과 합류한다.

그러나 연극과 춤의 조합으로 성공을 거둔 폴리나는 늘 마음 한 켠에 보진스키를 생각한다. 즉 자신의 춤의 밑바닥에 보진스키가 존재했다는 말이다. 보진스키가 가르쳤던 춤의 기본 위에 자신의 성공이 있음을 폴리나는 인정하는 것이다. 탄탄한 기본기를 쌓은 후에야 모든 퍼포먼스가 가능함은 어떤 분야에도 마찬가지이겠지만 특히 예술은 특별하다. 얕은 바탕은 퍼포먼스의 격을 여과없이 드러내는 만큼 오랫동안의 탄탄한 기본기 수련이 후에 날개를 달아줄 바탕이 되는 것이다.

현대예술은 결국 예술의 기본이 튼튼해야 성공할 수 있음을 말한다. 자칫 현대예술은 개인기나 테크닉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고, 그 테크닉은 잠깐의 눈속임에는 유효하나 오래가지는 못한다. 질낮은 개인기나 테크닉의 성공에 환호하는 젊은 예술가들에게 예술의 본래성으로 돌아가기를 권하는 이 짧은 만화는 내가 가고 있는 예술의 길을 잠깐 멈추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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