꾿빠이, 이상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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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와 가짜의 경계는 무엇이고, 어디까지가 진짜이고 어디까지가 가짜인지 소설을 읽는 내내 헷갈렸다. 전설로만 전해 내려오던 이상의 데드마스크가 실제로 존재하기나 한 것인지, 시 제16호 실화는 존재한다고 봐야 할지, 존재하지 않는다고 봐야할지 난감했다. 소설이라는 허구의 상황을 설정해놓고 모든 것이 허구라고 볼라치면 자료가 너무나 치밀했고, 믿으려니 현재 존재하지 않는 오감도 시 제16호 실화를 믿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어쩌면 오감도 제16호는 발표되지 않았을뿐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하게 되었다. 작가가 독자들의 아우성에 밀려 발표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써놓았을 가능성은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는 이 제16호를 찾으러 길을 떠나야 하는가.

 

현대는 원본과 복사본의 구분이 모호한 시대이다. 수많은 원본이 복사본의 형태로 떠돌아 다니고 있으며 그 복사본은 진짜라고 하기에도, 가짜라고 하기에도 애매하다. 앤디 워홀의 마릴린 먼로 그림은 수많은 마릴린 먼로를 내놓고 있지만 원본이 무엇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수많은 원본이 수많은 복사본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원본이 애매하므로 원본이 가지고 있는 아우라도 애매할 수밖에 없으므로 벤야민은 일찍이 그 아우라는 원본이 가지는 것이 아니라 복사본이 가질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원본이 애매한 아홉 개의 마릴린 먼로가 제각각의 아우라를 가지듯이 지금까지 우리가 원본에만 있다고 생각해 왔던 작품 고유의 가치는 복사본에도 충분히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꾿빠이, 이상을 읽는 내내 나는 이 원본과 복사본의 문제로 허둥댔다. 데드마스크는 실제로 존재하는가, 가짜 데드마스크를 진짜로 오인하는 순간 그 가짜에는 아우라가 존재했다. 수염의 흔적이 완연한 데드마스크가 진짜라고 오인한 것은 오감도 시 제10호 나비에 나오는 수염에죽어가는나비라는 구절을 떠올리는 순간이다. 또한 1931년 조선미술전람회 입선작인 이상의 <자상>이라는 작품이 겁에 질린듯하고 어떻게 보면 거의 뭉개진듯한 표정의 안면상인데 그 그림과 데드마스크가 오버랩되는 순간이다.

 

진실은 데드마스크도 전설로 전해내려오는 이야기를 소설화했을 뿐이고, 시 제16호 실화는 소설가의 머리 속에서 존재하는 가짜이다. 그러므로 완벽하게 소설이다. 그러나 작가 김연수의 이상에 대한 고증이 치밀하고 연구가 세밀하여 고작 이상전집 하나 정도만 갖고 있는 얼치기 문학도인 나로서는 혼란에 빠질만도 했다. 한참 전에 보르헤스의 전집을 읽고 혼란에 빠졌던 정도의 혼란이었다. 보르헤스는 가짜와 진짜가 오리무중의 세계이지만 보르헤스가 제시한 자료 자체가 가짜이므로 그것 역시도 완벽한 소설이다. 그러나 소설을 읽는 내내 우리는 진짜와 가짜의 미로를 헤맨다. 진짜와 가짜를 구분할 수 있는 눈이 없으니 소설을 읽는 상황 자체가 미로였던 경험이 김연수의 소설에서 재현되었다.

우리의 삶도 그러하지 않을까. 우리의 삶 무엇이 진짜이고 무엇이 가짜라고 단정지을 수 있는가. 지금 글을 쓰는 내가 진짜인지, 꿈 속을 헤매는 내가 진짜인지 가끔 헷갈릴 때가 있다.

아마도 김연수는 그것을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당신에게 무엇이 진짜이고 무엇이 가짜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오늘도 무엇이 진짜인지 무엇이 가짜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살아간다. 그것을 생각하는 내가 진짜인지 가짜인지도 가끔은 헷갈리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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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산 국경 문예중앙시선 24
우대식 지음 / 문예중앙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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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시인은 좌파이고 혁명가인가? 그들이 무슨 뻔질난 열정이 있어 혁명가이기야 할까만 적어도 그들은 늘 혁명을 꿈꾼다. 그래서 이 시인도 이렇게 노래한다. '몽유의 회벽을 개어 바른 건물 앞에서 나는 헤매리라'. 그러므로 시인들은 모두 몽유병자인지도 모른다. 서정시로 가득찬 이 시집에서도 혁명의 냄새는 어김없이 배어 나온다. '혁명이란 독백이지/ 예세닌은 이런 겨울밤/ 담배를 물고 보드카를 홀짝이며/ 또 다른 혁명에 대한 명상에 빠졌을 것이다 -(예세닌을 생각하는 밤에서)'라고 노래한다. 돌아갈 곳이 없는 '이념의 떠돌이'인 자신을 돌아보며 예세닌을 그리워 하는 밤, 시인은 혁명의 몽유를 하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우대식은 서정시인이다. 그를 일컬어 혁명가라는 말은 당치도 않고 좌파라는 말은 더 온당치 않다. <설산국경>에 넘쳐나는 서정시들은 자본 앞에서 고개를 수그리고 기어다니던 우리들을 부끄럽게 한다. 그러나 그를 서정시인으로만 자리매김하는 것도 온당치가 않다. 그는 허무주의자이기도 하다. 허긴 시인들은 모두 허무주의자이기도 하므로 그의 시에서 흘러나오는 허무가 새삼스럽지는 않다. '바람이여/ 다시는 나를 이곳으로 인도하지 마라/ 허무의 모가지, 모가지/ 고향을 떠난 염치없는 이리들이 들판을/ 배회한다-(바람의 사원에서) 그러나 시인의 허무는 그 근원을 허무에 두지 않는다. 그는 버림 받는 자, 외로운 자, 세상의 슬픈 자들을 바라보며 허무를 키워 나간다. '나는 바람의 후레자식......살아 있다 살아 있다/ 이를 내 유서라 하자-(유서에서)'


세상의 모든 시인들은 외롭고 쓸쓸하고 슬프도록 태어났다. 나도 자주 외롭고 쓸쓸하고 슬프다. 그러므로 시인들의 근원적인 외로움과 쓸쓸함과 슬픔을 그 근원까지 모두 이해한다. 시인들은 너무 일찍 세상을 알아버린 자이고, 너무 일찍 하늘의 비의를 알아버린 자들이다. '나는 크게 결심하였다/ 나는 간다/ 내가 도달한 곳이 본래(本來)이다......아버지도 어머니도 실은 팽팽한 활시위에 놓인/ 내 굴욕의 촉이었음을 고백한다......한 인간의 굴욕이 음각된 것을-(이력에서)'이라고 시인은 자신의 태어남이 '굴욕이 음각'된 것이었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원죄처럼 시인은 굴욕의 태어남에 대해서 말한다. 그러므로 그 굴욕의 태어남은 너무도 당연히 외롭고 쓸쓸하고 슬픈 생으로 이어질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늘 '대지 깊은 곳으로 혈육을 찾아가는 그의 여행은/아주 오래도록 지속될 것이며/ 한 순간에 끝날 일이다-(바람이 보내는 경배)'라고 말한다. 굴욕의 태어남은 늘 대지 깊은 곳을 향해 있었으니 그 생이 어찌 명랑하고 또 명랑하리오.


그러한 생이, 누구나 그러하듯이, 행복하기만 한 것은 아닐 것이다. 세상에는 행복이란 말이 넘쳐나고 누구나 행복하기를 꿈꾸지만 정작 행복을 찾은 사람은 많지 않다. 행복은 순간순간 바람처럼 머물지만 고통은 긴 장마처럼 우리 삶을 잠식한다. 그래서일까, 지상의 글들과 말들에는 '행복'이라는 단어가 넘쳐난다. 그래서일까, 역설적으로 그 행복은 이 지상 어디에도 머물지 않는다. '아이들은 점점 똑똑해지고/ 점점 슬퍼진다......일곱시만 넘으면 대문이 잠기고/ 할머니가 보는 연속극 보며/ 함께 울고 웃는/ 긴 밤의 유폐-(유폐)' 아이들은 부모를 잃고 할머니의 집에서 유폐되었지만 어른인 우리들은 어디에 유폐되었을까. 오히려 할머니의 집에 유폐당한 아이들이 부러울 정도로 어른들의 유폐는 그 자리가 없다. 유폐당하지 않고 사는 어른들은 정작 지상과 하늘 모두에 유폐당한 것을 모른다. 희미하게 유폐의 흔적을 찾아가는 시인들은 그래서 비극적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귀가 웃는다......귀가 서럽다......향기를 듣는다......시인들이 모자를 좋아하는 것도 알 법하다/ 혼자 웃고 싶다는 뜻일 테지-(귀와 모자에서)'에서처럼 시인의 귀는 웃기도 하고 서럽기도 하고 향기를 듣기도 한다. 그러면서 때로는 모자로 얼굴을 가리고 혼자서 깔깔깔 웃고 싶기도 할 것이다.


<설산 국경>에는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다. 시인의, 이웃의, 혁명의, 허무의 이야기들이 문자가 되어 펄럭인다. 그 펄럭임을 태풍전야의 바람처럼 읽는다. 고요하되 고요하지 않은 술렁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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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편 竹篇 (양장) 황금알 시인선 125
서정춘 지음 / 황금알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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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부터, 멀다

칸칸마다 밤이 깊은

푸른 기차를 타고

대꽃이 피는 마을까지

백 년이 걸린다

<竹篇·1 -여행>전문

 

장사익이 부르는 이 노래가 서정춘의 시인줄은 이제야 알았다. 가난과 독학의 세월을 살아오면서 시를 접하고는 시가 그렇게 좋은 것인 줄 상상도 하지 못했다. 시를 읽으면 현실의 고통이 말끔히 사라졌다라고 말했던 가난과 고통의 시인, 그러나 시에는 가난과 고통이 보이지 않는다. 독학으로 공부한 시에 대한 결벽증으로 쓴 시를 버리고 또 버렸던 시인, 그래서 남겨진 35편의 시가 시집 竹篇에 실렸다. 한 시집에 실린 시편이 적지만 시의 숫자만 적은 것이 아니라 시도 간결하다. 언어를 버리고 또 버리면서 남은 것들이리라.

 

시는 한자로 로 쓰여지는데 이 말을 풀어보면 말씀의 사원쯤 되겠다. 말씀을 만든 사원, 말씀으로 득도하고픈 기원이 담겨 있다. 말씀으로 만든 사원은 시인 서정춘에게 딱 어울리는 말이다. 그의 시는 한 편 한 편이 사원을 짓듯 경건하고 단순하고 치밀하다. 쌓아올린 돌의 어느 하나라도 빼내면 허물어져 버릴 듯이 언어들은 보드라운 직조물처럼 촘촘히 짜여 있다. 그래서 나는 이 시집에서 간결한 언어, 더 줄일 것이 없는 언어의 경지를 보았다. 그래서일까, 시인은 시집의 첫머리 시인의 말에서 아 나의 농사는 참혹하구나// !/ 이라고 탄식한다. 평생의 농사 치고는 너무나 참혹한, 그래서 아름다운 시들이다.

 

자네가 너무 많은 시간을 여의고 나서 그때 온전한 허심으로 가득 차 있더라도 지나간 시간 위로 비가 오고 눈이 오고 바람이 세차게 몰아쳐서 눈을 뜰 수가 없고 온 몸을 안으로 안으로 웅크리며 신음과 고통만을 삭이고 있는 그동안이 자네가 비로소 돌이 되고 있음이네

 

자네가 돌이 되고 돌 속으로 스며서 벙어리가 된 시간을 한 뭉치 녹여 본다면 자네 마음 속 고요 한 뭉치는 동굴 속의 까마득한 금이 되어 시간의 누런 여물을 되씹고 있음이네

<돌의 시간>전문

 

 

돌 속으로 스미고 벙어리가 된 다음에야 찾아오는 고요의 한 뭉치는 되씹고 되씹었던 한 생의 끝에 비로소 얻어진 안식이 아니었을까, 시를 통해서 현실의 고통을 잊으려 했던 시인이 온 몸을 통해 체득한 시간의 경지였을 것이다. 조동화는 시론에서 가령 화폭에다 산 하나를 담는다 할 때/ 그 뉘도 모든 것을 다 옮길 순 없다/ 이것은 턱없이 작고 저는 너무 크므로라고 말하듯이 시에다 우주의 모든 것을 담을 수는 없다. 그래서 서정춘은 고요한 뭉치를 집어 들고 시에다 조용히 내려 놓는 것이다. 우주의 기껏 하나인 고요’, 그러나 우주의 전부인 고요를 전 생애를 걸었던 시에 내려 놓고 평생의 농사가 참혹하였다고 우는 것이다.

 

시는 무엇일까? 시는 무엇이라고 딱 잘라서 규정할 수 없는 애매모호한 것이다. 정작 쓰자고 하면 손아귀에서 잘도 빠져 나가는 언어를 데려와 놓으면 언어는 기껏 세상에서 가장 한심한 말 한 마디만 던져 두고 다시 도망간다. 그러나 언어는 자기 스스로 말함이며, 스스로 나타냄이다. ‘이제는 기쁜 일로 천년을 살더라도/ 금이나 은같이는 빛나지 말자에서처럼 언어는 시인의 삶에서 스스로 말하고 스스로 나타나진다. 하이데거는 詩語를 일상어와 엄격히 구분하고 있다. 잡담, 한담 수준인 일상어는 산문에 어울리는 말이지만 시어는 이 잡담과 한담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예술이 탄생한다. 엘리트 예술주의를 지향했던 하이데거는 언어가 말한다는 이 한마디로 시어를 규정한다. 시인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가 하는 말, 서정춘은 평생을 이 언어가 하는 말에 귀 기울이며 그 소리를 한 자 한 자 기록해 나갔던 것이다. ‘돌 속에/ 내 마음 놓아 버렸으니라고 말하며. 돌 속에 마음을 놓아 버리고 얻어 들었던 귀한 말씀, 언어가 말하는 시, 그래서 간결하고 한없이 단순한 말들이 이 시집에서 문자로 보여지고 나는 그 귀한 말씀을 듣는다.

 

빗소리 얻으러 귀동냥 가고 있다/ 귓속으로 귓속으로/ 귀동냥 가고 있다시인을 보는 것보다 듣는 것이 더 익숙하다. 청각적 신호보다 시각적 신호에 더 익숙하고 친숙한 나는 비는 먼저 보는 것이었고, 그 다음이 듣는 것이었다. ‘비 보러 간다라고 말했지 비 들으러 간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가끔 지붕을 두드리는 비소리를 듣고 싶었을때가 있었지만 비는 듣기 이전에 먼저 보는 것이었다. 그러나 참혹한 세월을 살아온 시인에게 비는 들으러 가는 것이었고, 그것도 그냥 듣는 것이 아니라 귀동냥 가는 것이었다. ‘동냥이라는 그 말의 아픔, 그 말의 슬픈 삶의 비의를 모두 짐작이나 할 수 있겠는가. 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을 겪었던 세대들의 집단 무의식 속에는 이 동냥이라는 말에 대한 트라우마가 강하게 새겨져 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시인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빗소리 듣는 것도 귀동냥이라고 표현한다. 빗소리마저 온전히 내 것이 아닌 것이다. 그렇다고 시인이 그 기억의 역사를 치유되지 못한 트라우마로 간직하는 것은 아니다. ‘물사발의 균열이 모질게도 아름답다라고 노래하듯이 그는 트라우마, 곧 균열 자체를 아름답게 본다. 사람은 누구나 트라우마를 가지게 마련이다.

 

내 오십 사발의 물사발에

날이 갈수록 균열이 심하다

 

쩍쩍 줄금이 난 데를 불안한 듯

가느다란 실핏줄이 종횡무진 짜고 있다

 

아직 물 한 방울 새지 않는다

물사발의 균열이 모질게도 아름답다

-<균열> 전문

 

생은 살아갈수록 균열이 나게 마련이고, 그 균열은 실핏줄처럼 종횡무진 흩어져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시인에게는 그 균열이 아름답다. 아름답지 않고는 어찌할 도리가 없다. 생은 그러한 것이다. 아름답지 않고 어쩔 도리가 없는 그 생이 시의 몸으로 오롯이 드러나 있다. 그래서 생은 더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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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D 2017-07-06 16: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버리고 또 버렸으되 남은 시어가 가득한 시집, 읽어보고 싶어졌어요. 좋은 리뷰 잘 읽고 갑니다.
 
삶이라는 직업 문학과지성 시인선 392
박정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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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서도 없이 쓰네, 누군들 이 세계의 음악, 고요한 뒤척임의 순서를 알 수 있으랴' 라고 박정대는 노래하듯이 이 시집 속의 시들은 순서도 없이 중얼거림으로, 때로는 노래하듯이 쓰여 있다. 시집이 배달되어 오고 몇 장을 뒤적이다가 또 한참을 책상 위에 얹혀 있었다. 읽지 않고 책장에 꽂아 놓기에는 아쉽고 뭔가 미진한데, 그렇다고 읽자니 도무지 무슨 말을 하는지 그 맥락이 잡혀 오지 않아서 그냥 쌓아 놓았다. 그러다가 문득, 거짓말처럼 술술 읽혔다. 아마도 내 의식이 박정대라는 시인의 의식에 가닿은 탓이리라.

 

'형식은 내용을 무시하고 내용은 형식에 의해 집결할 것이다'. 그렇다! 형식은 내용을 무시하지만 그 내용은 형식에 의해 모여들 것이다. 그의 시가 그렇다. 주절주절, 어떤 때는 맥락도 없이 글들은 집결해 있지만 그것은 시라는 형식으로 모여 있으므로, 그리하여 그것들은 모두 시다. 이것을 왜 '시'라는 형식으로 읽어야 할까 몇번이나 회의가 들었다. 형식도 없이 맥락도 없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형식은 있었고 내용도 있었다. 나는 단지 그의 노래를 따라가지 못하고 겉돌고 있었던 것이다.

 

어느날 문득, 시가 읽혔다. 문장이 다가왔다라고 해야 할 것이다. 나는 박정대의 마음을 알 것 같았고, 그가 왜 이런 말들을 하는지, 왜 이렇게 말을 해야 하는지 그 절절함이 읽혔다. '형식의 불안'은 그도 알고 있었지만 '카치아 게헤이루의 파두를 들으며 형식의 불안에 대해 생각하네, 고통의 파두, 파두를 듣는 고통, 고장난 세계의 허리로부터 오는 요통, 낮과 밤의 뒤바뀜'이라고 노래하듯이 그도 자기 시의 형식의 불안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었던 것이다. 고장난 세계처럼 뒤죽박죽으로 오는 형식, 그러나 그는 그 뒤죽박죽인 형식에 뒤죽박죽인 글들을 담아 놓는다. 그것이 문득, 어느날 갑자기, 아! 이 시들, 참 좋구나!하고 다가왔던 것이다.

 

왜 우리는 고정된 형식과 내용을 가지고만 시라고 말해야 하는가. 왜 시는 함축적이고 간결하며 세련되어야 한다고 말할까. 세련된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의 시는 전혀 함축적이지도, 간결하지도 않지만 세련되어 있다. 아주 노련한 시인의 냄새가 난다. '진부라는 곳'이라는 제목의 시가 참 좋았다. 그러나 옮겨 적을 수가 없다. 컴퓨터의 한글 파일로 작업하다 보면 나오는 오컴 문자라는 것으로 시를 써놓고 마치 주석을 달듯이 우리 말로 설명을 달아 놓았다. 오컴 문자야 나는 해독불가이고 아마 시인 그도 해독 불가일 것이다. 그러나 때로 우리는 해독불가의 문자로 중얼거리고 싶을 때도 있다. 마치 내가 욕하고 싶은 상대가 있으면 자동차 문을 닫고 그 속에서 개새끼 소새끼 하듯이 그도 세상의 문을 잠그고 혼자서 개새끼 소새끼는 하지 않고 '겨울 내내 진부에서 뒹굴었네......먼저 형식의 평화가 오고 그 후에 본질적인 고요가 왔네'라고 오컴 문자로 먼저 중얼거리다가 다시 세상의 너를 향해 한글로 중얼거리는 것이다.

 

형식의 평화라는 것, 오컴 문자로 그림을 그리든말든 마음대로 뒤죽박죽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만 한글을 쓰는 우리는 이해하지 못하는 형식을 만들어 놓고 '먼저 형식의 평화가 오고', 그 형식의 평화를 만들어 놓고 나니 비로소 본질적인 고요를 찾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노래한다. '겨울 내내 진부를 뒹굴었네......나 이제 백야를 꿈꾸네 한 계절을 진부에서 뒹굴었으니 내가 꿈꾸는 백야엔 눈발 같은 사랑이 내리고 사랑 같은 눈발이 내리고 있으리'라고.

 

그는 본질적으로 마오이스트, 공산주의자이다. '마오이스트 거리의 쓸쓸한 선언문'이라는 제목의 시가 아니더라도 시 곳곳에 스며 있는 마오이스트에 대한 쓸쓸한 그리움이 넘쳐 난다. 가장 낮은 몸으로 자유를 찾아 가는 몸, '낙타가 사막의 배라고요, 낙타는 사막의 시예요, 온몸으로 온 발바닥으로 이번 생을 횡단하는 가장 뜨거운 시'가 나에게는 마오이스트로 읽힌다. 마오는 아마도 온 몸으로 사막을 횡단하고 싶어서 혁명을 일으켰을 것이고, '캄캄한 피부 속으로 뜨거운 피가 흘러 아프리카 북부 해안에 노을로 가닿은 이 느낌'으로 살았을 것이다. 그리고 시인도 그렇게 살고 싶었을 것이다. '리 마빈의 아들들 인터내셔널'처럼.

 

'형식의 평화가 오고 그 후에 본질적인 고요'를 찾은 것처럼 이 시집에서는 형식을 찾을 필요도 본질을 찾을 필요도 없다. 그저 시인의 중얼거림을 따라 가면 된다. 그 중얼거림이 벅차면 시집을 덮어 버리면 그만이다. 우리가 한 권의 책을 산다고 죽어라고 모두 읽을 필요는 없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박정대의 중얼거림이 생각나면 다시 펴 보면 될 일, 그렇지 않다면 영원히 잊은들 세상의 고요가 사라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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