굶주림은 사람을 비참하게 만든다. 허기와 함께 다가오는 비참함은 삶에서 최소한도로 지켜야 할 자존감을 여지없이 무너뜨려 버린다. 허기를 느껴 본 자, 단 한번이라도 먹이를 찾아 헤매본 자들을 알 것이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처음 도시로 나왔을 때를 떠올렸다. 누구 한 사람 등 기댈 곳 없는 도시의 구석에서 혼자 일어나 밥을 먹고 일을 하고 다시 그 혼자의 공간으로 돌아가는 일은 늘 외로웠다. 먹는 일은 힘겨웠으며, 때로는 허기가 질 때도 있었다. 대문앞을 나서면 누구나 아는 사람이 사는 동네에서 살았던 나는 문을 열어도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견디기가 힘들었던 것 같다. 철저한 타인이 되는 도시, 그 한 시절을 생각하며 함순의 <굶주림>을 읽는 시간은 더디게 흘러갔다.

 먹는 일과 삶의 자존감을 지키는 일은 관련이 깊다. <굶주림>에 나오는 '나'는 굷기를 먹는 일보다 더 자주 하면서도 마지막 지켜야 할 삶의 자존감 때문에 힘겨워한다. 대팻밥을 씹거나, 정육점에서 얻어온 뼈다귀를 먹으며 구역질을 하면서도 '나'는 돈이 생기면 남을 주는 일에 인색하지 않다. 그 행위는 자선의 행위가 아니라 자신의 자존심, 결코 먹이의 포획감이 되지 않으려 하는 처절한 싸움이다.

 초를 사러 갔다가 가게 노파가 잘못 거슬러 준 돈을 빵집 노파에게 주어 버리는 행위도 도둑질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양심에 대한 행위이기보다는 그러한 현실에 놓인 자신을 견뎌내기 위해서로 보인다. 며칠을 굶어 사물이 흐리게 보이면서도 그 돈으로 빵을 사먹지 않고 궁색해 보이는 노파에게 주어 버리는 행위, 굶주림으로 몸의 감각을 잃어 가면서도 어쩌다 돈이 생겼을 때 주위의 비참한 사람이 돈을 구걸하면 주어 버리는 행위는 우리를 이해 불가능하게 한다. 허위로도 보이는 이러한 삶을 사는 '나'는 먹는 일보다 사람답게 사는 일을 우위에 놓으면서 점점 더 비참해진다. 간혹 얻어 걸리는 원고료로 삶을 지탱하기에는 도시에서의 삶이 너무 벅차다. 결국 도시의 생활, 먹이를 구해야 하는 일을 견디지 못하고 '나'는 보조선원이 되기 위해 배에 오른다.

 함순의 자전적 소설이라고 말해지는 이 소설은 우리의 근대 문학, 40년대까지 우리의 문학 작품에서 곧잘 읽어내어지던 삶의 비참함과 자존감 사이의 갈등을 보여 준다.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 라는 물음을 필연적으로 던질 수밖에 없는 이 소설을 통해 나는 나의 삶, 우리의 삶을 세밀히 읽어 내었다. 위선과 허위의 탈을 쓰고 살지만 그 속에 감추어진 인간의 가장 본질적인 삶을 모습을 가감없이 그려낸 이 소설로 함순은 세계적인 문학가의 대열에 올랐다. 

 함순이 왜 노년에 잘못된 판단으로 나치에 협력하게 되었는지는 그 스스로에게 물어 볼 수밖에 없는 일이지만 외부와의 소식을 끊고 소설쓰기에만 몰두한 한 소설가의 현실판단능력은 형편없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사회상을 읽어내는데는 실패한 함순이지만 개인의 삶, 인간의 내면을 통찰하는데는 뛰어난 안목을 보여준 대가의 시선이 소설 곳곳에 녹아 있어 오랫동안 여운이 남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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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반이 남자고 반이 여자인 엄연한 현실앞에서도 여자인 우리는 가끔씩 여자이기 때문에 전전긍긍하는 경우가 있다. 나는 고등학교 진학할때부터 내가 여자라는 것, 그래서 필연적으로 남자에게 권리를 양보해야 한다고 강요받았다. 그것을 받아 들이지 못해 부모님과 오랜 기간동안 대치(?)했지만 결국 내가 져야 했고, 그 기억은 내 삶에서 아직도 아물지 않은 상처가 되어 있다. 

여자로 산다는 것은 어렵다. 남자들은 미처 예측하지 못하는 어이없는 일들에 여자들은 노출되어 있고, 그 부당함을 이야기해보았자 대부분의 남자들은 이해하지도, 받아 들이려고 하지도 않는다. 목소리가 높아지면 으례히, 많이 배운 여자들은 드세다고 핀잔받는다. 남자들이라면 당연히 누릴 권리들을 여자들은 투쟁을 통해 얻어내어야 할 경우가 많은 것이다. 

내 부모님 세대가 아닌 내 세대에서도 나는 충분히 차별받으며 자랐다고 생각한다. 먹고 입는 사소한 문제에서는 차별을 못 느꼇지만 내 인생을 결정지을 중대한 문제 앞에서는 어김없이 여자라는 것 때문에 위축되기를 강요받았고, 그때마다 나는 분노했지만 내게 돌아오는 것은 말을 딱 부러지게 잘 하는, 그래서 벅차고 드센 여자라는 평판이었다. 그런 과정을 겪으며 자란 여자가 얼마나 사회에서 자신의 꿈을 이루어 갈 수 있다고 믿는가. 

 물론 그렇지 않은 여자들도 많은 것이다. 나는 단지 우리 세대의 대부분의 여자들의 삶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내 시골 중학교 동기 중에서 정상적으로 대학을 간 여자 친구는 단 한명이었지만 남자들은 수를 헤아리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그 남자들보다 훨씬 우수한 여자들은 모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취직해서 어렵게 공부를 하거나, 아니면 아예 포기하고 집안의 또다른 남자 형제의 뒷바라지를 해야 했던 것이다. 

<공자의 이름으로 죽은 여인들>을 읽어 보면 그래도 우리의 삶은 목숨을 담보로 한 삶은 아니었다는 것에서 안도감을 느끼게 한다. 가문을 위해 목숨을 버려야 했던 여인들, 더 나아가 순장의 운명을 받아 들여야 했던 여인들 앞에서 나의 한탄은 어린아이의 투정에 지나지 않는다. 제목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명청시대 중국의 여인들은 예의 관습에 얽매여 목숨을 버려야 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고 한다. 그것도 남편이나 약혼자가 죽었을때 자신의 절개를 보여 주고 가문의 영광을 위해 공개적인 목 매달기, 즉 탑대의식을 통해 자살을 했다. 구름처럼 모인 관중들은 여인의 탑대의식을 구경하면서 여인의 절개를 칭찬하고 가문의 영광을 부러워했다니 여인의 목숨을 통해 가문의 영광을 얻으려 한 그 가문이 오히려 초라하고 비참해 보인다. 

'충신은 두 군주를 섬기지 않고 열녀는 재가를 하지 않는다'라는 가르침은 역사적으로 중국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쳐 지금까지 여인의 재가를 고운 눈으로 바라보지 않게 한다. 통치자들의 통치도구로써 쓰여졌던 이 말이 얼마나 여성을 억압하고 세뇌시켰는지 그 가치를 생각해 보면 차마 말을 잃게 한다. 거기에다 여아의 살해 현상으로 여자가 부족한 중국에서는 과부를 팔아 재산을 챙기려는 시댁 식구들의 파렴치한 행위와, 자결을 통해 여인의 절개를 보여 주고 가문의 영광을 드높이기를 바라는 친정 식구들의 이해 관계가 맞아 떨어져 여인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거기에다 직접적으로 여인을 규제하는 각종 법규들, 가령 '여성은 결혼, 토지, 재산 등에 관한 문제로 다른 사람을 고발하기 위해 법정에 서는 것을 금지한다.'는 조항은 여인의 생존권 자체를 박탈하는 것이었다. 부당한 일을 당하더라도 고소 고발을 할 수 없고, 그렇다고 지역 사회로부터 배려를 받을 수도 없었던 여인들이 택할 수 있는 것은 가문의 영광이 아니더라도 자살밖에 없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이것은 중국의 과거 이야기이지만 돌이켜 보면 우리 사회에서도 멀지 않은 과거의 일들이다. 여성의 권리를 누리기 위해 법률 개정을 하나 하는데도 전국의 유림이 벌떼처럼 일어나는 것이 우리나라의 현실이다. 많은 법률이 여성들도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누리도록 개정되고 있지만 아직도 곳곳에는 틈이 많다. 거기에다 홀아비에게는 동정의 눈길을 보내면서 과부에게는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우리 사회의 정서도 여성을 위협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현풍에 가면 현풍곽씨 12정려각이 있는데 여기에 모셔진 열녀, 효자들은 모두 15분이다. 그 열다섯의 사람들 중에서 6명이 열녀이다. 여자를 팔아 가문의 영광을 샀다고 나는 감히 말하고 싶다. 그 정려각 앞에서 어느 한 해 자랑스럽게 가문을 자랑하던 집안의 어른을 보면서 내가 느꼈던 거슨 차라리 슬픔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여성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도덕적, 법적, 종교적 , 문화적 요인들이 우리 사회에서는 많이 사라졌다 하더라도 우리 스스로가 여성들을 남성들과 동등한 자리에 놓고 있는지 이 책을 읽으면서 반문하고 싶다. 그리고 우리 사회 곳곳에 있는 열녀각이 한 여인을 어떤 아픈 삶으로 몰아 넣고 결국은 죽음으로 몰아 갔는지 한번쯤 생각해 볼 일이라고 생각한다. 막연히 생각만 하던 것들을 구체적인 수치를 제공하면서 치밀하게 분석해 간 이 책을 보면서 이 책을 쓴 중국의 한 학자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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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다보면 이런저런 일들로 주변 사람들로부터 서운 일을 많이 당한다. 그것이 배신이라고까지 생각되는 일이었다면 우리는 그것을 온전히 삼키기가 어렵다. 그러나 사람살이라는 것이 내가 남을 배신하기도 하고, 남이 나를 배신하기도 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아 버리면 더 이상 타인의 배신 따위는 마음에 담아 두지 않게도 된다. 그러나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타인으로 인해 상처를 받으며 산다. 설령 그것이 인간이 살아가는 방식이라는 것을 안다고 하더라도. 

 이 소설 <열정>은 묘한 느낌을 주는 소설이다. 자신의 분신처럼 생각하는 친구가 자신의 아내와 간음을 하고, 급기야 자신을 죽이기까지 하려고 했다고 생각하는 장군은 자신을 떠나버린 친구를 평생 기다린다. 자신의 아내였던 크리스티나는 친구가 떠나버리자 장군의 옆 성에서 7년을 혼자서 보내다가 결국은 병으로 죽는다. 사냥터에서 친구가 자신을 죽이고자 했던 날, 느낌으로 친구의 열정을 감지한 장군은 사냥터에서 돌아와 곧바로 친구의 집으로 간다. 그러나 이미 친구는 열대 지방으로 떠나 버린 후, 거기서 우연히 크리스티나를 만난 장군은 한순간에 그 모든 사실을 알아 버린다. 친구가 자신의 아내와 사랑을 했고, 그래서 사냥터에서 자신을 죽이려다 말았다는 것을. 

 이후 장군은 성의 문을 닫아 건다. 이후 성에는 단 한번도 파티가 열리지 않았고, 어떤 손님이 와도 장군은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 그러면서 친구는 평생동안 그 친구만 기다린다. 진실을 알기 위해서, 정말 친구가 자신을 죽이고 싶어 했는지, 정말 자신의 아내와 친구가 사랑했었는지. 그 모든 것들은 장군은 친구로부터 직접 듣기를 원한다. 젊은이였던 장군은 어느덧 백발의 노인이 되고, 이제 죽음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감지한다. 

 드디어 장군의 성으로 친구가 찾아 오겠다고 기별이 온 날, 장군은 친구가 떠나 버린 그날 그대로 간직해 두었던 성에서 친구가 떠난 이후 처음으로 손님맞이 준비를 한다. 모든 것은, 식탁의 음식까지 친구가 떠난 마지막 날 그대로이다. 둘은 그날과 똑같은 음식을 먹고 그날과 똑같이 꾸며진 거실의 난로 앞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독백처럼 이어지는 장군의 말, 정말 친구는 자신을 죽이고자 했는지, 아내와 친구는 정말 사랑을 했었는지, 그래서 한때 자신은 증오와 배신감, 복수의 열정으로 시간을 보내었는데 이제는 모두 그럴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친구에게 담담히 밝힌다. 그것들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것을, 설령 그것이 진실이라 하더라도 이제는 자신에게 아무것도 아니었음을 독백처럼 말하는 곁에서 친구는 침묵한다. 장군의 이야기가 끝나자 친구는 끝까지 침묵하면서 성을 떠난다. 

 우리도 그런 순간이 많지 않았는가. 젊은 날 한때 도저히 용서할 수 없을것 같은 일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아무것도 아니었던 일이 되어 버리는 것을, 그러나 그것은 그 당시에는 우리를 증오와 복수심으로 들끓게 한다. 죽음을 앞두게 되면 그런 것들로 하찮게 여겨지기 시작한다는 장군의 말을 나는 받아 들일수 있을 것 같다. 

이 소설은 결말 부분의 장군의 독백이 돋보이는 부분이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문체는 사소한 일들에 들떴던 일상속의 우리들을 성찰의 시간으로 돌려 놓는다. 장군의 말을 통해 우리는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되고, 타인을 보게 되고, 타인을 재단하려 했던 우리를 다시 돌아보게 만든다.  

소설의 제목이 <열정>이라는 것에 많은 의문을 품었다. 열정이라는 것이 무엇일까. 이 답은 장군의 말 속에 있다. "어느날 우리의 심장, 영혼, 육신으로 뚫고 들어와서 꺼질줄 모르고 영원히 불타 오르는 정열에 우리 삶의 의미가 있다고 자네도 생각하나? 그것을 체험했다면, 우리는 헛산 것이 아니겠지?"  

그렇다. 영원히 불타오르는 정열에 우리의 삶의 의미가 있다고 나도 생각한다. 그 정열로 인해 우리는 삶을 이어가며, 그 정열이 가라앉는 날, 드디어 우리의 삶은 삶보다는 죽음을 향해 가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정열에 헛된 열정을 태우지 말기를. 무엇으로부터 배신당하거나 타인으로부터 받은 상처에 괴로워하는 날, 이 소설을 읽는다면 마음 한 켠 저 멀리서 그 들뜸을 가라앉히는 그 무엇이 찾아 올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는 나날의 삶을 헛사는 것이 아니라고 위안받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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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음속에 무언가를 접어놓아 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그것이 얼마나 자주, 또는 얼마나 뜸하게 불쑥불쑥 나타나 사람을 몽상에 잠기게 하는지를. 그래서 마음속에 접어놓은 것이 많은 사람은 행복하다. 그 접어놓은 것이 사람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혹시 그것이 사랑이 아니라 하더라도 내 마음 속에 접어 둔 사람 하나 있다는 것은 근사한 일이다.

책을 읽고 책장의 가장 아래 칸에 넣어 두었던 책,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의 스밀라는 내 책장의 가장 아래 칸으로 떨려 났음에도 불구하고 자주자주 나를 몽상에 잠기게 만들었다. 이 책을 손이 잘 닿지 않는 책장 맨 아래 칸으로 넣은 이유는 두 번 끄집어 낼 일이 잘 없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서재를 쥐방구리 드나들듯이 드나드는 딸아이의 눈에 띄지 않는다면 아마 오랫동안 먼지를 뒤집어 쓰고 숨을 죽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아이가 읽기에는 어렵고, 추리소설을 두 번이나 꺼내서 읽을 일이야 뭐 있을라구 싶었다. 그렇지만, 물론 책 자체가 다시 나온 것은 아니지만 책의 주인공인 스밀라는 어느 책보다도 자주 내 기억 속으로 드나들었다.

나는 남성적이라는 소리를 자주 들었는데 언제부턴가 그런 소리를 잘 듣지 않게 되었다. 도시에서의 팍팍한 삶을 견디고, 나이가 주는 삶의 중압감을 이겨내기 위해서 가장 먼저 말수가 줄었고, 쓸데없이 나대는 성질도 바뀌었고, 그러다보니 그냥 가만히 앉아 있는 경우가 많아졌다. 남성적이라는 소리가 어느 날부터인가 점잖다는 소리로 바뀌었고, 더 심하게는 조용하다는 소리까지 듣게 되면서 이걸로 내 청춘은 영영 끝인가 했었다. 점잖다는 소리도, 조용하다는 소리도 내가 듣고 싶은 소리는 아니었다. 나는 여전히 주관이 강하고, 에너지가 넘치고 싶었는데 내 몸은 자꾸만 뒤로 숨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태도에 대한 아쉬움 속에서 발견한 스밀라는 여전히 에너지가 넘치고, 때로는 원시적이기까지 한 야생적인 힘이 넘치는 매력적인 아가씨이다. 학교를 몇 번이나 퇴학당하고, 덴마크의 부자 아버지보다는 그린란드의 사냥꾼인 어머니를 더 좋아하는 여자, 이 여자가 세상에서 가장 무서워하는 소리는 ‘갇힌다’는 것이다. 끊임없이 아버지로부터 도망치고, 덴마크의 도시로부터 도망치는 서른이 넘은 여자, 이 여자는 어느 날 친구처럼 지내는 동네 꼬마의 죽음을 목격한다. 3층 건물의 지붕에서 떨어져 죽은 것처럼 보이는 꼬마는 그러나 스밀라의 눈에는 자살로 보이지 않는다. 그린란드에서 자랐으므로 눈과 얼음에 대해서는 동물적인 감각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하는 스밀라의 눈에 보인 지붕위의 눈 자국이 꼬마의 죽음이 자살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했던 것이다.

이렇게 시작되는 이 소설은 추리 소설이다. 꼬마의 죽음을 파헤쳐 가는 과정에서 스밀라는 덴마크 빙정석 주식회사가 얽혀 있는 거대한 음모를 찾게 되고, 이론과 실천적인 용기까지 갖춘 스밀라는 그 음모 속으로 직접 몸을 던진다.

우리가 소설을 읽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나 같은 경우에는 일상으로부터의 탈출이 가장 크다. 지루하거나, 내내 보던 책이 너무 딱딱하거나, 뭔가 일상을 바꿔 보고 싶을 때 나는 소설을 본다. 소설에서 무슨 교훈을 찾는다거나 하는 건 내 체질이 아니다. 소설은 그냥 소설다우면 그만이다. 소설답다는 것은 욕구불만을 어느 정도 해소시켜주고, 한나절 정신없이 빠져들 수 있고, 무엇보다 일상을 잊어버릴 만큼 재미있으면 된다. 내가 가장 충족시키지 못하는 욕구불만 중의 하나는 바로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다. 돈과 시간과 자유만 있다면 나는 이 밤에라도 차를 몰고 가거나, 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세계를 돌아다니고 싶다. 구석구석 빼놓지 않고 모조리 돌아다니다가 지치면 집으로 털레털레 돌아오고 싶은 욕구불만, 결코 해결할 수 없는 이 욕구불만을 나는 소설에서 많이 해결한다. 이 소설의 배경이 되는 덴마크와 그린란드는 지도를 보는 것만으로도 황홀했다. 북극해를 끼고 있고 빙산이 있는 그린란드는 소설에 묘사된 것처럼 여자들도 남자들과 같이 사냥꾼이 될 수 있고, 남자들과는 오직 사냥으로만 평가받는다. 덴마크의 부자인 아버지가 반해 버린 위대한 사냥꾼이었던 스밀라의 어머니는 아버지가 살고 싶어하던 도시로 가지 않고 결국 사냥터에서 실종되지만 그것이 그곳에서는 당연한 삶이다. 덴마크령의 그린란드인들은 도시에서는 하층 계급으로 살지만 그린란드에서는 땅의 주인이 된다.

안개가 어는 것은 어떤 풍경일까. 소설을 읽으면서 내가 정말 궁금했던 것은 안개가 얼면 어떤 풍경이 그려질까 하는 것이었다. 안개가 언다는 것,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것은 자세한 문자의 설명으로도 그려지지 않는다. 지도에 묘사된 빙산 공동묘지라는 곳, 빙산들의 묘지라니, 빙산들이 어느정도의 크기로 부서져야 공동묘지에 입성할 자격을 주는지 모르겠지만 빙상 공동묘지라니 생각만 해도 풍경은 또 얼마나 근사한가. 이런 생각들로 사실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스밀라가 따라가는 범죄의 현장보다는 스밀라가 타고가는 배가 지니가는 바다쪽으로 더 마음이 끌렸다. 사진에서 본 빙산과 극 사진들이 머릿속을 바쁘게 돌아다녔지만 결국 내가 상상한 것은 몽상의 작품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소설을 읽고, 이 소설을 자주 생각했고, 여성적이면서도 남성적이고, 도회적이면서도 야생적이고, 다정다감하면서도 인간의 아킬레스를 칼로 자를 줄 아는 스밀라에게 반해 버렸다. 자신을 바꾸려 하지 않고 세상 속으로 스며들거나, 아니면 그 세상을 버리거나, 아니면 자신이 원하는 세상을 찾아가는 스밀라를 통해 가면을 쓰고 사는 내 삶을 보게도 됐다. 그러다 보니 자주 소설이 꽂혀 있는 책장의 맨 아래칸으로 눈이 가게 됐고, 나중에 우리 아이가 눈이 밝아 나이보다 좀 더 빨리 이 소설을 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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