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망대 혹은 세상의 끝
심강우 지음 / 문이당 / 2018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소설가들이란 어쩌다 한 번씩 잊을만하면 나타나는 그런 기질을 가진 사람인지, 아니면 소설이란 장르가 그렇게 틀어박혀야만 쓰여지는 글인지 내 주변의 소설가들은 전부 그렇다. 그래서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말은 소설가들에게 적당한 말이다. 그들은 자기들만의 은신처에 깊이 틀어박혀 글을 쓰다가 가끔씩 외부에 얼굴을 내민다. 그렇게 오랜만에 얼굴을 내민 소설가 심강우에게서 이 책을 받았고, 가방을 뒤적여 볼펜을 꺼내주고 사인을 해 달래서야 간신히 사인을 받았다. 그 또한 소설가들이란 그렇거니 이해한다. 사실 이 책을 사봐야 하는데 그냥 받자니 손이 오그라들었고, 세상의 작가들에게 그냥 받는 책은 늘 빚지는 기분이기도 하다. 그래서 서평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는데 한편으로는 글이 시원찮으면 어떻게 서평을 쓸까 고민이 되기도 했는데 그것은 완전한 기우였다. 글을 읽으면서 행복했던 것은 아, 이 소설가, 글 참 잘 쓰는구나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전망대 혹은 세상의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전망대도 세상의 끝인데 혹은 세상의 끝은 또 어떤 풍경일까, 제목을 보면서 그 생각을 했다. ‘전망대 혹은 세상의 끝에는 죽음과 사랑이 있다. 이 소설의 전체를 관통하는 어두운 죽음의 현장과 거기에 내밀하게 스며있는 사랑은 죽음이 아주 비참하고 어둡지만은 않은, 사람 사는 방식 중의 하나임을 일깨워준다. 이 소설집에 실려 있는 10편의 단편 각각은 모두 전망대 혹은 세상의 끝이라는 제목을 붙여도 조금도 어색하지 않게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고, 사랑이 마치 죽음을 무화시키듯 죽음의 곁을 함께 달려가고 있었다.

 

첫 번째 소설인 화우和雨는 우선 문장이 어찌나 섬세하고 가슴을 흔들어 놓던지 문체의 매력에 빠져 들었다. 문체의 매력이라면 이 화우和雨보다 우선 제일 앞에 있는 작가의 말에서 두드러졌다. 책을 받고 그 자리에서 이 작가의 말을 읽으면서 나는 설렜다. 책을 받고 설레기는 참 오랜만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소설집을 낸다라는 말로 시작하는 작가의 말은 간결했지만 절실했다. 그 간결하고 절실한 문장은 작가의 말을 써 본 사람은 안다. 가슴 속에 수 천 수 만의 언어가 둥둥 떠다녀도 작가의 말에 쓸 수 있는 몇 문장의 언어가 떠오르지 않아 오래 뒤척이다 보면 드디어 너무나 절실해진 나머지 너무나 간결한 문장만 남게 되는 것이다. 그런 설렘은 화우和雨를 읽으면서 깊어졌다. 어쩌면 문장이 이리도 섬세하고 결이 고운지 도대체 이 작가의 어디에서 이런 섬세하고 결 고운 언어가 나오는지 잠시 앉아 소설가를 떠올려 볼 정도였다. 기생 화우의 이야기를 쓴 이 단편에도 죽음과 사랑이 섬세한 문체로 전체를 끌고 가고 있었다.

 

이어지는 전망대 혹은 세상의 끝역시 인간의 사랑과 죽음이 이야기를 끌고 가고 있었는데 나는 그의 문장에 홀렸다. 미사여구가 없는 간결하고 단단한 문장들에 홀려 전망대로 따라 올라가는 동안 펼쳐지는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나의 상상력을 확장했다. 화우和雨에 나오던 살아 있으니 우리가 만나는 것 아니냐라는 말은 죽음 이후에나 해당되는 말일까. 전체적으로는 죽었으니 우리가 만났음을 아는 것 아니냐라는 말을 생각하게 했다.

 

왜 작가는 그렇게 집요하게 죽음과 사랑에 매달렸을까. 언젠가 언뜻 아주 짧게나마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던 것도 같은데 작가에게 죽음은 어떤 화두일까, 소설을 읽는 내내 그 생각을 했다. 그러면서도 역시 집요하게 끌고 가던 사랑은 또 작가에게 무엇일까, 어떤 작품에도 놓치지 않고 있었던 것은 형태는 다르지만 우리가 무릇 사랑이라고 일컫는 것들이었다. 그깟 사랑, 요즘 시대에 사랑이란 개도 안 물어갈 벌레 같은 것이 되어 여기저기 기어 다니는데 작가가 말하는 사랑은 개가 물어가서는 안될 고귀한 것으로 드러나 있다. 인간에 대한 연민, 남녀 간의 사랑, 모르는 타인에 대한 배려, 은혜 갚음, 약자에 대한 안쓰러움 들이 사랑의 형태로 얼굴을 내민다. 그리고 그 모든 사랑에는 죽음이 있다.

 

내가 특별히 흥미롭게 봤던 것은 화우和雨전망대 혹은 세상의 끝이다. 화우和雨는 그 섬세하고 결 고운 문체에 마음이 닿았고, 전망대 혹은 세상의 끝은 언어학에서 말하는 기표와 기의의 관계가 문장 사이에서 물결처럼 출렁거렸다. 물이 고층 빌딩의 전망대까지 올라오는 동안 기표와 기의의 출렁거림도 함께 올라왔다. 사랑이라는 기표는 냉정했지만 기의는 자의적이었고 배척과 소외의 이면에는 구조주의적 언어학에 대한 기대가 살아 있었을까. “배척되거나 소외되는 데에도 어떤 공식이 있을 거라는, 그러니까 배척과 소외의 다양한 동인이 범주화가 가능할 거라는구조주의 언어학에 대한 기대는 아마도 전망대 앞에서 여지없이 깨어졌을 것이다. 개별적인 것들의 범주화, 규명하고 또 규명하라. 그런 다음 규정해도 늦지 않다라는 신념조차도 물이 올라오면서 죽음이 수없이 널부러진 전망대 앞에서는 옳지 않다. “눕거나 기댄 모습 그대로 정물이 되어가는 사람들, 서로를 구성하기보다 스스로의 것을 스스로에게만 설정하기로 결심한 사람들이 사실은 언어학을 넘어선 사람들의 모습이다. 그리하여 작가는 기표에게 작별을 고한다. “안녕히, 나의 기표들이라고.

 

오랜만에 좋은 소설을 읽었다. 더 좋았던 것은 화우和雨에서 내 창작의 영감이 번뜩였다는 것이다. 예술작품을 대하면서 창작의 영감이 번뜩거리는 작품을 만나면 행복해진다. 고갈되고 시들어가는 영혼에 새로운 번뜩거림이 스며들기 때문이다. 작가의 말처럼 이 소설이 저잣거리로 많이 팔려가는 장작이 되기를.

 

     엇이 아직 그대를 불안하게 하는가?

      그대는 모든 동물들과 함께 죽을 것을.

     그 다음에는 아무것도 오지 않는 것을.

                                    -베르톨트 브레히트 <유혹받지 말라>중에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거짓말이다
김탁환 지음 / 북스피어 / 2016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세월호가 인양되었을때 나는 이 세상이 거짓으로 점철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잠깐 의심했었다. 마침 전 대통령이 탄핵을 당했고, 그 탄핵의 뿌리가 세월호에 있다고 믿었는데 마침 3년동안 맹골수도의 깊은 바닷속에 가라앉아 있던 세월호가 거짓말처럼 떠올랐다. 네가 가라앉으면 내가 떠오르겠다는 신의 약속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런 의심도 했었다. 그 세월호는 음악으로, 그림으로, 시로 재생되었고 김탁환에 의해서 소설로도 재생되었다. 김탁환에게 세월호의 무엇이 거짓말이었을까.

소설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허위의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다. 물론 소설은 소설로만 읽을 일이라고 해도 무방하지만 또 소설은 소설로만 읽을 수 없는 경우도 가끔은 있다. 그래서 이 소설은 거짓을 파헤치기 위한 지난한 작업의 결과물이 아닐까 생각해 보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세월호에 매달렸고, 나는 멀리서 텔레비젼이나 신문이나 떠도는 말들을 통해 세월호를 풍문으로만 들었다. 처음 들어보는 팽목항이 자주 뉴스에 나왔고, 어디선가 들어본적도 있었던 맹골수도가 자주 오르내렸으며 그 바다가 그리도 거칠어서 세월호 같은 배 하나쯤을 삼키는 것은 일도 아니라는 것은 예전에 이미 들어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예전의 일이었다. 과학기술이 극도로 발전한 지금, 세월호 같은 배가 아무리 맹골수도의 물길이 사납다 한들 그곳을 무사히 지나가지 못하고 물길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특별히 풍문으로 떠도는 음모론을 믿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냥 배 하나가 맹골수도를 무사히 지나가지 못했고, 많은 사람들이 배와 함께 운명을 달리했고, 하필이면 어린 애들이 그 희생자라는 팩트에서 내 생각은 머물렀다.

 

그러나 김탁환은 나처럼 순진무구하게 뉴스를 모두 믿은 것은 아니었나 보다. 소설을 다 읽고 난 지금 나는 왜 저자가 이 소설을 써야만 했는지 알것도 같다. 세월호가 맹골수도의 허리를 지나가지 못하고 침몰된 그 사실에서 출발한 이 소설은 그 이후 인간의 허위의식이 얼마나 큰 참사를 만들어내었는지를 잠수사를 통해 보여준다. 민간인 잠수사와 해경, 해군 등 비민간인 잠수사들간의 관계, 여기서 민간인이라는 것은 해경, 해군 등의 관의 밥을 먹는 사람과 절대 동급은 될 수 없다. 우리 삶도 그러하듯이 민간인들은 언제나 관의 통제하에 그들의 관리를 받지만 관의 의식은 알지 못한다. 민간인들은 자기들이 살아가는 방식대로 그들도 살아갈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은 그 평등의식이야말로 순진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생명을 걸고 시신을 모셔오던 민간인 잠수사의 사고사 때문에 한 민간인 잠수사가 기소를 당하고 재판을 받고, 무죄 선고를 받지만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통해 저자는 우리 사회의 구역질 나는 허위와 마주한다. 세월호는 바로 이 허위의식의 폭발과도 같은 것이었다. 총체적으로 발현된 허위의식이 세월호와 마주한 순간 우리나라는 극복할 수 없는 무력감에 빠진다. 아이들을 눈 앞에 두고도 구조하지 못했던 사실, 민간인 잠수사만이 아이들의 시신을 모셔올 수 있었던 사실, 극한의 작업환경에서 노출된 직업병인 잠수병을 제대로 치료해 주지 못하는 국가안에 살고 있다는 사실, 오해하고 기만하는 여론, 이런 것들 속에서 잠수사들은 병에 걸리고 아이들은 죽었고, 유가족은 상처받았던 것이다.

 

그래서 '거짓말이다'. '그'들이 하는 모든 것이 거짓말인 것이다. 우리는 그들, 곧 국가를 믿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그들을 위해 희생한 민간인은 버려지는 것이다. 아니 그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아이들을 위한 일, 그 고귀한 일들은 무시당하고 조롱받는 것이다. 우리는 그런 세상을 살고 있다고 소설은 이야기를 통해 말한다. 그리고 나도 그런 세상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파타고니아 특급 열차
루이스 세풀베다 지음, 정창 옮김 / 열린책들 / 2003년 8월
평점 :
품절


여행을 떠난다면 지금 살고 있는 세상과는 다른 곳, 희한하고 자유롭고 거침이 없는 곳으로 가고 싶다. 어떤 황당한 일을 해도 그러려니 하는 곳으로.

그러나 나이가 들고 보니 여행도 때가 있고, 이제는 떠난다는 것이 부담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십 대 때처럼 들뜨지도 않게 되고, 그때처럼 떠나고 싶어 몸살이 나지도 않는다. 그래서 갈까 말까 망설이는 때가 더 많다. 이 얼마나 황망스러운 일인가. 나는 내가 죽을 때까지 떠나고 싶어서 몸살을 앓을 줄 알았지 떠나는 일을 망설이게 될 줄은 몰랐다. 그러나 지금도 여행을 떠나는 일을 거절하지는 않는다. 갈 기회가 있으면 무조건 가고 본다. 예전과 달라진 점이라면 사진도 별로 찍지 않고 그냥 조용히 다녀온다는 것이다. 여행지에서 누군가 전화를 걸어오면 통화료를 아끼기 위해 전화를 받지 않는 정도이다. 내가 전화를 받지 않는다면, 전화를 걸었는데 자꾸 끊어진다면 여행 중일 뿐이다.

 

잠시 후, 음식이 테이블에 놓여졌는데, 음식이라고 나온 게 구운 양고기 다리가 반쪽이나 되었다. 그는 어이가 없어 가벼운 음식을 시키지 않았느냐고 따졌지만 외려 천연덕스러운 답변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그건 그래도 가장 비쩍 마른 놈입니다. 이 섬 전체를 뒤져 보십시오. 장담컨대 그것보다 작은 놈은 구경하지 못할 것입니다.

얼마나 기이한 사람들인가. 그렇지만 그것은 파타고니아의 관문인 칠로에 섬의 사소한 에피소드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곳으로 여행을 떠날 날도 있을 것이다. 더 늙기 전에. 나는 나이 오십이라는 것이 나를 이렇게 변화시킬 줄은 미처 몰랐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