굶주림은 사람을 비참하게 만든다. 허기와 함께 다가오는 비참함은 삶에서 최소한도로 지켜야 할 자존감을 여지없이 무너뜨려 버린다. 허기를 느껴 본 자, 단 한번이라도 먹이를 찾아 헤매본 자들을 알 것이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처음 도시로 나왔을 때를 떠올렸다. 누구 한 사람 등 기댈 곳 없는 도시의 구석에서 혼자 일어나 밥을 먹고 일을 하고 다시 그 혼자의 공간으로 돌아가는 일은 늘 외로웠다. 먹는 일은 힘겨웠으며, 때로는 허기가 질 때도 있었다. 대문앞을 나서면 누구나 아는 사람이 사는 동네에서 살았던 나는 문을 열어도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견디기가 힘들었던 것 같다. 철저한 타인이 되는 도시, 그 한 시절을 생각하며 함순의 <굶주림>을 읽는 시간은 더디게 흘러갔다.

 먹는 일과 삶의 자존감을 지키는 일은 관련이 깊다. <굶주림>에 나오는 '나'는 굷기를 먹는 일보다 더 자주 하면서도 마지막 지켜야 할 삶의 자존감 때문에 힘겨워한다. 대팻밥을 씹거나, 정육점에서 얻어온 뼈다귀를 먹으며 구역질을 하면서도 '나'는 돈이 생기면 남을 주는 일에 인색하지 않다. 그 행위는 자선의 행위가 아니라 자신의 자존심, 결코 먹이의 포획감이 되지 않으려 하는 처절한 싸움이다.

 초를 사러 갔다가 가게 노파가 잘못 거슬러 준 돈을 빵집 노파에게 주어 버리는 행위도 도둑질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양심에 대한 행위이기보다는 그러한 현실에 놓인 자신을 견뎌내기 위해서로 보인다. 며칠을 굶어 사물이 흐리게 보이면서도 그 돈으로 빵을 사먹지 않고 궁색해 보이는 노파에게 주어 버리는 행위, 굶주림으로 몸의 감각을 잃어 가면서도 어쩌다 돈이 생겼을 때 주위의 비참한 사람이 돈을 구걸하면 주어 버리는 행위는 우리를 이해 불가능하게 한다. 허위로도 보이는 이러한 삶을 사는 '나'는 먹는 일보다 사람답게 사는 일을 우위에 놓으면서 점점 더 비참해진다. 간혹 얻어 걸리는 원고료로 삶을 지탱하기에는 도시에서의 삶이 너무 벅차다. 결국 도시의 생활, 먹이를 구해야 하는 일을 견디지 못하고 '나'는 보조선원이 되기 위해 배에 오른다.

 함순의 자전적 소설이라고 말해지는 이 소설은 우리의 근대 문학, 40년대까지 우리의 문학 작품에서 곧잘 읽어내어지던 삶의 비참함과 자존감 사이의 갈등을 보여 준다.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 라는 물음을 필연적으로 던질 수밖에 없는 이 소설을 통해 나는 나의 삶, 우리의 삶을 세밀히 읽어 내었다. 위선과 허위의 탈을 쓰고 살지만 그 속에 감추어진 인간의 가장 본질적인 삶을 모습을 가감없이 그려낸 이 소설로 함순은 세계적인 문학가의 대열에 올랐다. 

 함순이 왜 노년에 잘못된 판단으로 나치에 협력하게 되었는지는 그 스스로에게 물어 볼 수밖에 없는 일이지만 외부와의 소식을 끊고 소설쓰기에만 몰두한 한 소설가의 현실판단능력은 형편없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사회상을 읽어내는데는 실패한 함순이지만 개인의 삶, 인간의 내면을 통찰하는데는 뛰어난 안목을 보여준 대가의 시선이 소설 곳곳에 녹아 있어 오랫동안 여운이 남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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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반이 남자고 반이 여자인 엄연한 현실앞에서도 여자인 우리는 가끔씩 여자이기 때문에 전전긍긍하는 경우가 있다. 나는 고등학교 진학할때부터 내가 여자라는 것, 그래서 필연적으로 남자에게 권리를 양보해야 한다고 강요받았다. 그것을 받아 들이지 못해 부모님과 오랜 기간동안 대치(?)했지만 결국 내가 져야 했고, 그 기억은 내 삶에서 아직도 아물지 않은 상처가 되어 있다. 

여자로 산다는 것은 어렵다. 남자들은 미처 예측하지 못하는 어이없는 일들에 여자들은 노출되어 있고, 그 부당함을 이야기해보았자 대부분의 남자들은 이해하지도, 받아 들이려고 하지도 않는다. 목소리가 높아지면 으례히, 많이 배운 여자들은 드세다고 핀잔받는다. 남자들이라면 당연히 누릴 권리들을 여자들은 투쟁을 통해 얻어내어야 할 경우가 많은 것이다. 

내 부모님 세대가 아닌 내 세대에서도 나는 충분히 차별받으며 자랐다고 생각한다. 먹고 입는 사소한 문제에서는 차별을 못 느꼇지만 내 인생을 결정지을 중대한 문제 앞에서는 어김없이 여자라는 것 때문에 위축되기를 강요받았고, 그때마다 나는 분노했지만 내게 돌아오는 것은 말을 딱 부러지게 잘 하는, 그래서 벅차고 드센 여자라는 평판이었다. 그런 과정을 겪으며 자란 여자가 얼마나 사회에서 자신의 꿈을 이루어 갈 수 있다고 믿는가. 

 물론 그렇지 않은 여자들도 많은 것이다. 나는 단지 우리 세대의 대부분의 여자들의 삶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내 시골 중학교 동기 중에서 정상적으로 대학을 간 여자 친구는 단 한명이었지만 남자들은 수를 헤아리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그 남자들보다 훨씬 우수한 여자들은 모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취직해서 어렵게 공부를 하거나, 아니면 아예 포기하고 집안의 또다른 남자 형제의 뒷바라지를 해야 했던 것이다. 

<공자의 이름으로 죽은 여인들>을 읽어 보면 그래도 우리의 삶은 목숨을 담보로 한 삶은 아니었다는 것에서 안도감을 느끼게 한다. 가문을 위해 목숨을 버려야 했던 여인들, 더 나아가 순장의 운명을 받아 들여야 했던 여인들 앞에서 나의 한탄은 어린아이의 투정에 지나지 않는다. 제목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명청시대 중국의 여인들은 예의 관습에 얽매여 목숨을 버려야 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고 한다. 그것도 남편이나 약혼자가 죽었을때 자신의 절개를 보여 주고 가문의 영광을 위해 공개적인 목 매달기, 즉 탑대의식을 통해 자살을 했다. 구름처럼 모인 관중들은 여인의 탑대의식을 구경하면서 여인의 절개를 칭찬하고 가문의 영광을 부러워했다니 여인의 목숨을 통해 가문의 영광을 얻으려 한 그 가문이 오히려 초라하고 비참해 보인다. 

'충신은 두 군주를 섬기지 않고 열녀는 재가를 하지 않는다'라는 가르침은 역사적으로 중국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쳐 지금까지 여인의 재가를 고운 눈으로 바라보지 않게 한다. 통치자들의 통치도구로써 쓰여졌던 이 말이 얼마나 여성을 억압하고 세뇌시켰는지 그 가치를 생각해 보면 차마 말을 잃게 한다. 거기에다 여아의 살해 현상으로 여자가 부족한 중국에서는 과부를 팔아 재산을 챙기려는 시댁 식구들의 파렴치한 행위와, 자결을 통해 여인의 절개를 보여 주고 가문의 영광을 드높이기를 바라는 친정 식구들의 이해 관계가 맞아 떨어져 여인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거기에다 직접적으로 여인을 규제하는 각종 법규들, 가령 '여성은 결혼, 토지, 재산 등에 관한 문제로 다른 사람을 고발하기 위해 법정에 서는 것을 금지한다.'는 조항은 여인의 생존권 자체를 박탈하는 것이었다. 부당한 일을 당하더라도 고소 고발을 할 수 없고, 그렇다고 지역 사회로부터 배려를 받을 수도 없었던 여인들이 택할 수 있는 것은 가문의 영광이 아니더라도 자살밖에 없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이것은 중국의 과거 이야기이지만 돌이켜 보면 우리 사회에서도 멀지 않은 과거의 일들이다. 여성의 권리를 누리기 위해 법률 개정을 하나 하는데도 전국의 유림이 벌떼처럼 일어나는 것이 우리나라의 현실이다. 많은 법률이 여성들도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누리도록 개정되고 있지만 아직도 곳곳에는 틈이 많다. 거기에다 홀아비에게는 동정의 눈길을 보내면서 과부에게는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우리 사회의 정서도 여성을 위협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현풍에 가면 현풍곽씨 12정려각이 있는데 여기에 모셔진 열녀, 효자들은 모두 15분이다. 그 열다섯의 사람들 중에서 6명이 열녀이다. 여자를 팔아 가문의 영광을 샀다고 나는 감히 말하고 싶다. 그 정려각 앞에서 어느 한 해 자랑스럽게 가문을 자랑하던 집안의 어른을 보면서 내가 느꼈던 거슨 차라리 슬픔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여성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도덕적, 법적, 종교적 , 문화적 요인들이 우리 사회에서는 많이 사라졌다 하더라도 우리 스스로가 여성들을 남성들과 동등한 자리에 놓고 있는지 이 책을 읽으면서 반문하고 싶다. 그리고 우리 사회 곳곳에 있는 열녀각이 한 여인을 어떤 아픈 삶으로 몰아 넣고 결국은 죽음으로 몰아 갔는지 한번쯤 생각해 볼 일이라고 생각한다. 막연히 생각만 하던 것들을 구체적인 수치를 제공하면서 치밀하게 분석해 간 이 책을 보면서 이 책을 쓴 중국의 한 학자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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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레이]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 아웃케이스 없음
데이비드 핀처 감독, 브래드 피트 외 출연 / 워너브라더스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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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되돌리고 싶은 적이 있었는가. 이별했던 사람과 다시 만나 사랑을 나누고,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나 우리의 곁으로 돌아오고, 꼭 하고 싶었으나 이런저런 사정으로 하지 못했던 일들을 하기 위해 한번쯤 시간이 거꾸로 흘러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는가. 불가능한 일을 열망하는 것은 모든 인간의 보편적 정서다. 욕망은 불가능한 것에 더 강렬하게 타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찌기 헤라클리이토스가 설파했듯이 흐르는 강울에는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 이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진리이고, 또 사실 우리네 인생은 그렇게 속절없이 흘러간다.

 우리 인간을 만든 창조주도 한번쯤은 그 인간을 대상으로 살짝 장난을 치고 싶을 때가 있을 것이다. 창조주의 치기 어린 장난이 아니라면 불가능한 일, 시간을 거꾸로 돌리는 일이 벤자민 버튼이라는 한 사내에게 일어난다. 전쟁에 나갔다가 전사한 아들의 죽음 앞에서 그 아들이 살아 돌아오기를 갈망하는 한 시계공이 만든 거꾸로 가는 시계처럼, 벤자민에게 시간은 거꾸로 흘러간다. 80대의 노인에서 삶을 시작하는 벤자민은 태어날때 이미 양로원의 노인들과 같은 행색을 하고 있었다. 벗겨진 머리에 주름진 피부, 희귀병을 안고 태어난 벤자민은 아버지에게서 버려져 양로원에서 일을 돌보는 한 흑인 여자에 의해 길러진다. 벤자민이 괴물처럼 생긴것을 보고도 운명이 있다는 것을 믿는 여자는 기꺼이 벤자민을 돌보기 시작한다. 어느날 휠체어에서 일어나고, 어느날 목발에 의지해 걷기 시작하고, 어느날 누구의 도움도 없이 걷기 시작하는 벤자민은 시간이 흘러 갈수록 점점 젊어진다. 아직 머리가 벗겨진 노인일때 예인선을 운행하는 선장을 따라가서 첫 경험을 하고, 처음으로 술을 마시며 강을 따라 떠돌면서 벤자민의 머리카락은 나기 시작하고 주름도 적어진다. 

 벤자민에게는 아이이자 노인이었을 적부터 친하게 지내온 한 꼬마 여자친구가 있었다. 이 여자친구가 늙어서 죽음을 기다리며 벤자민이 쓴 노트를 딸이 읽어주는 것을 통해 과거를 회상하는 영화는, 그러므로 이 노인과 딸의 대화를 통해 이어진다. 액자소설 같은 형식을 빌어 회상으로 이어지는데 회상은 하이데거의 표현을 빌자면 동트는 새벽에 찾아오는 존재에 대한 추억이다. 노인은 벤자민이라는 한 존재에 대한 추억을 통해 자신들의 아름다웠던 사랑 이야기, 시간을 거꾸로 사는 한 남자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 놓는다. 한평생 벤자민을 사랑했던 노인과 벤자민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은 어머니의 입을 통해 그 노트를 쓴 벤자민이라는 남자가 자신의 아버지였음을 알게 되고, 그 벤자민이 아주 훤칠한 청년기였을 때 단 한번 본적이 있음을 회고한다.

 

점점 젊어지면서 키도 자라고, 주연을 맡은 브레드 피트의 본 얼굴이 드러나는 청장년기를 정점으로 이 영화는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한다. 자신이 점점 젊어지는 대신에 자신의 딸은 점점 자랄 것이라는 사실에 절망한 벤자민은 딸에게 그 모습을 보여 주기 싫어 방랑의 길에 오른다. 벤자민이 떠난 후 여자는 재혼을 하고, 세월이 흘러 재혼한 남자도 죽은 어느 날, 벤자민은 아이의 모습으로 자신이 자란 양로원으로 돌아온다. 거기에서 벤자민은 10대의 모습이 되고, 어린애의 모습이 되었다가 결국은 갓난 아이의 상태로 여자의 품에서 숨을 거둔다.

 

자신의 딸에게는 늙어가는 아버지가 필요한 것이지 데리고 놀아줘야 하는 어린 아이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는 벤자민의 말은 늙어감을 한탄하는 우리에게 많은 울림을 남긴다. 자연스럽다는 것, 자연의 순리대로 살아간다는 것이 이처럼 다행스럽고 편안한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나만의 시간이 거꾸로 흘러 내가 내 아이보다 더 어린 아이가 된다는 사실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그러므로 영화는 정상적으로 흘러가는 우리 삶에 안도하게 하면서도 벤자민의 삶에 안타까움을 가지게 할 수밖에 없다.

 

죽지 못하는 인간의 삶을 다룬 소설을 본 적이 있다. 어떤 이유로 죽지 않는 축복을 받게 된 사람은 주변의 사람들이 하나 둘 죽어가고 새로운 사람이 태어나는 몇 백년 동안 죽지 않았다. 상처를 입어도 자연회복이 되었고, 이빨이 빠지면 새로 올라오기를 반복하면서 이 남자의 가장 간절한 소원은 죽은 것이 되어 버렸다. 삶은 견딜 수 있는 것만을 견딘다. 우리 삶이 고통으로 점철되어 있는 것이라 하더라도 죽음이 앞에 있기 때문에 그 고통의 극한 순간에는 죽음에 자신을 맡겨 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에도 죽을 수 없다는 것, 어떠한 고통이 자신을 짓눌러도 그 고통을 오직 견디는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인간을 무력감에 빠지게 한다.

 

이처럼 다른 사람이 사는 것처럼 살지 못한다는 것은 비극적이다. 한번쯤 시간이 거꾸로 흘러 갔으면 하고 바란적은 많다. 그러나 몸에 치명적인 병이 찾아오지 않는다면 그런 불행은 아무에게나 오는 것이 아니다. 공부를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그 아이가 또 아이를 낳을 때쯤 우리는 이제 이 세계로부터 서서히 물러날 준비를 해야 한다. 이 세계에서 내가 차지하고 있는 공간, 내 거처를 누군가에게 물려 주어야 하는 것이다. 나는 그것이 기왕이면 잘 늙어 잘 죽는 순간이었으면 한다. 벤자민처럼 갓난 아기가 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처럼 얼굴에 주름이 가득하고 모습 그 자체가 추해 보일 때 죽음이 찾아 왔으면 좋겠다. 왜냐하면 그것이 너와 나, 우리 모두가 살아가고 죽는 방식이므로.

 

이런저런 매체에서 이 영화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들었는데 우연히 비디오방 앞을 지나다가 광고판을 보고 망설임 없이 빌렸다. 액션이나 쇼킹한 것을 보고 싶다면 보지 않는 것이 좋지만, 삶이 버겁고 한번쯤 도망치고 싶은 기분이 들 때 이 영화를 보면 많은 위로가 된다. 거기에다 영화 <가을의 전설>에서 매혹되었던 배우 브레드 피트의 조각같은 얼굴을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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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워진 사람 창비시선 285
이진명 지음 / 창비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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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에 흔하고 흔한 것이 시이다. 어디 시 뿐인가. 얼마나 많은 문자들이 책의 형태를 빌어 서점에 나와 있는지 , 우리 집에만 해도 이미 수천권의 책이 방 하나를 점령하고 있다. 저 책들을 모두 문자로 풀어 본다면, 저 많은 책들 속에 묻힌 글 하나하나를 풀어 세상에 내어 놓는다면 아마 세상은 문자의 포화상태에 멀미를 느낄 것이다. 그런 멀미 때문에 이제 시는 귀하지 않다. 그러나 시가 귀한 대접을 못받는다고 해서 안타까워 할 필요는 없다. 시가 대접받던 시대가 갔다는 것은 인간이 평등해지고 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시를 읽는 일은 얼마간의 훈련과 숙련의 시간을 필요로 한다. 그 숙련의 시간을 가질 수  없는 사람들에게 시는 낯선 언어일뿐이다. 그들과의 거리를 어떻게 좁힐 것인가. 인간이 진정으로 평등해지고자 한다면 인간들끼리 주고받는 언어에 담이 없어야 한다. 내가 하는 말을 네가 알아듣고, 네가 하는 말을 내가 알아 들어야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시는 그렇지 않다. 

 이진명의 시는 시 같지 않은 시다. 시 냄새가 별로 나지 않는다. 아침에 밥을 먹다가 밥 먹는 일을 시로 쓰고, 꽃을 사다가 꽃 사는 일을 시로 쓴다. 그가 쓰는 언어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일상범부들이 쓰는 언어가 시로 변해 있기 때문이다. 부처님과 농담을 하고 독자들과 농담을 주고 받는다. 그 속에 치밀한 계산이 깔려 있다고 생각하든 말든 그것은 독자의 맘이다. 욕을 하고 싶을 때는 욕을 하고, 순한 여자가 되고 싶을때는 순한 여자가 되고, 널부러진 아줌마가 되고 싶으면 또 그렇게 한다. 그녀의 시에서 무엇보다 좋은 것은 이렇게 시에서 힘을 빼고 있는 것이다. 힘이 빠진 시, 그래서 그녀의 시는 가볍다.

 명절이 되어도 엄마에게서는 전화 한통도 오지 않는다. 그래서 그녀는 쓴다. '명절인데 엄마는 전화도 못하나/거긴 전화도 없나'라고. 그러다가 애꿎은 보름달을 원망한다. '유선이든 무선이든 전화 하나 성사 못 시키는/느려터진 보름달/ 둥글너부데데한 지지리 바보/ 얼굴 피부 하나만 허여멀건 발질해가지고/ 니 굴러가는 데 알기나 할까'라고. 그러다가 그 원망은 다시 엄마에게로 이어지고 괜히 할머니까지 원망스럽다. '엄마는 그깟 전화 한번을 어떤 세월에 쓰려고 아끼나/ 할머니도 마찬가지/ 죽어 새 눈 떴는데/ 아직도 눈 어두워 숫자 버튼 하나 제대로 못누르나'. 그러다가 그 원망은 자신에게로 돌아온다. '전화기 돌릴 손모가지가 없어/ 전화 못하긴 나도 마찬가지'.(보름달) 이쯤이면 독자들은 이미 눈치챈다. 이 시인은 명절이 되자 이미 돌아가신 어머니가 그립구나 라고. 그 그리운 마음을 이런 식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꽃을 사는 마음도 마찬가지다. 절간을 한바퀴 돌아나오다 꽃 파는 아줌마를 만난다. 운동도 싫고 산도 싫어 올라가던 길을 내려 오면서 별안간 그 꽃을 사고 싶어진 시인은 중얼거린다. '별안간 꽃이 사고 싶다/ 꽃을 안 사면 무엇을 산단 말인가'라고. 그리고 자기자신에게 주기 위해서 하얀 소국을 사면서 다시 중얼거린다. '이즈음의 자기 자신이나 좀 위로코 싶었겠지'라고. 마치 타인을 빈정거리듯이 자신을 빈정거리다가 갑자기 그 꽃은 절에 사들고 가라고 파는 꽃이 아니가 하는데 생각이 미친다. 그래서 그녀는 절에 갈때는 사가지 않고 내려 올때 산 자신을 변명하기 시작한다. 

 부처님 앞엔 얼씬도 안하고 내려와서

맘 같지도 않은 맘에게 안기려고 꽃을 다 산다고라

웃을 일, 하긴 부처님은 항상 빙그레 웃고 계시더라

부처님, 다 보이시죠, 꽃 사는 이 미물의 속

그렇지만 다른 것도 아니고 꽃이잖아요

부처님도 예뻐서 늘 무릎 앞에 놓고 계시는 그 꽃이요

헤헤, 오늘은 나한테 그 꽃을 내주었다 생각하세요

맘이 맘이 아닌 중생을 한번 쓰다듬어주었다 생각하세요

부처님, 나 주신 꽃 들고 내려갑니다

                        <젠장, 이런 식으로 꽃을 사다니>의 일부

 그리고는 그런 자신이 또 못마땅해 한마디 더 보탠다. '젠장, 이런 식으로 꽃을 사다니, 덜 떨어진 꼭지여/ 비리구나 측은쿠나 비리구나 멀구나'라고

 세상 일이라고 해서 시인의 시야에서 멀어진 것은 아니다. 아침 신문에서 노부부의 불행한 죽음을 보고 외면하지 못한다. '아침신문이 턱하니 식탁에 뱉어버리고 싶은/지독한 죽음의 참상을 차렸다/나는 꼼짝없이 앉아 꾸역꾸역 그걸 씹어야 했다'<눈물 머금은 신이 우리를 바라보신다>

 나는 이 시같지 않은 시에 매료되어서 시집 한권을 모처럼 꼼꼼하게 읽었다. 이 시집이라고 한권 전체가 모두 살아 펄떡이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도무지 시어로는 쓰이지 않을것 같은 말들로 만들어낸 시들은 눈부시다. 모름지기 시란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법칙을 이 시인은 유쾌하게 깨어 버린다. 온갖 제도와 관습이 횡행하는 시대에 시까지 그 관습에 얽매여야 한다는 것은 얼마나 억울한가. 시인은 모름지기 자유로워야 하고 그가 쓰는 언어도 자유로워야 한다. 그리고 시인은 세상을 가르치는 자도, 통제하는 자도 아니다. 시인은 그저 존재의 본질을 드러내고 그 본질을 인간의 언어로 바꾸어 주는 주술사에 다름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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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자들
W. G. 제발트 지음, 이재영 옮김 / 창비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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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문학은 내 독서 경험으로는 정밀하게 얽혀 있다는 느낌이 든다. 독일문학 전공자가 아니어서 단적으로 말하기는 그렇지만 여태껏 읽은 책들에서 감지되는 느낌이다. 그에 비해 프랑스 문학은 자유롭게 풀어 헤쳐진 느낌이고 러시아 문학은 인간의 심연까지 파고드는 집요한 느낌이 있다.  

이 책 '이민자들'역시 정밀하다. 그러나 그 정밀하다는 것은 구조상으로 그렇다는 것이지 내용까지 기하학적인 정밀성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인간의 심리를 드러내는 정밀성이 두드러진다고나 할까. 저자 제발트의 글은 처음이다. 그렇지만 나는 제목에 끌렸고, 어쩌면 뜻밖의 수확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읽었는데 역시 기대만큼 뜻밖의 수확이다. 

이 책에는 네명의 이민자들의 삶이 그려져 있다. 이민자들은 떠도는 자들을 연상시키는데 어떤 목적의 이민이었던간에 이민이란 개인과 그 가족에게 깊은 흔적을 남긴다. 자신의 거처가 좋다면 굳이 다른 나라에 이민을 갈 일이 무엇이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여기 나오는 네명의 사람들은 떠돌이이며 국외자이고 이방인들이다. 유대인인 세사람이 이민자가 되어야 하는 사정이야 굳이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한 사람의 이민자인 막스 페르버는 도시화가 되어가는 곳에서 고향을 떠올리는 또 다른 이민자이다.  

그러고 보니 현대인들 가운데 이민자가 아닌 사람은 소수에 불과할 것 같다. 나도 어떤 의미에서는 이민자이며 그러므로 끊임없이 고향의 마을을 그리워하고 돌아갈 날을 기다리고 있다. 도시에서 산 시간이 고향에서 산 시간과 거의 일치하는데도 나는 아직 이방인처럼 이 도시에 머무르고 있다. 그러나 나는 언제든 내가 원하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의미에서 갇힌 이민자는 아니다. 그냥 이런저런 이유에서 아직 도시를 떠나지 못하고 있을 뿐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이민자의 신세를 면할 수있다.  

그러나 여기 나오는 사람들은 귀향이 불가능하다. 귀향한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귀향한 사람의 이야기도 나오는데 그들은 떠돌이의 삶보다 죽음을 선택했던 것이다. 이민자들의 삶이라니 한때 우리나라에서 유행했던 디아스포라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하겠지만 이 책은 그보다는 더 깊이가 있다. 인간 내면의 심리를 고찰하는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는 작가는 이 글들이 사실임을 증명하기 위해 많은 사진도 첨부해 놓았다. 작가는 직접 여기에 나오는 사람들을 만나 보았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을 증명하는 일은 어렵다. 사진 역시 그럴듯해 보이지만 사실 확인은 되지 않았다고 한다.  

이 책을 읽으면 우리는 인간에 대한 연민과 애정을 다시 느끼게 된다. 그 연민과 애정은 나에게로 향할 수도 있고 타인에게로 향할 수도 있다. 어떤 것이든 좋다. 우리의 마음에서 연민과 애정을 불러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은 우리의 살아 있음을 확인하는 일이며, 우리의 인간됨을 확인하는 과정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우리 인간의 역사, 나라가 다르고 각각의 역사는 다르지만 그것이 하나로 수렴됨을 느낀다. 인간의 삶이 너나없이 특별히 다르지 않다면 그 인간이 만들어 가는 역사도 크게 다르지 않다. 단지 거주하는 공간과 살았던 시간이 다를뿐이다. 

불에 태워진듯한 표지의 디자인은 이 책의 성격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불태워 버리고 싶었던 흔적들이 없었던가. 그러나 미처 모두 불태우지 못하고 다시 불길에서 흔적을 건져내는 일들은 없었던가. 이 책은 그 흔적들을 기록한 책이다.불태워 버리고 싶지만 결코 태울 수 없는 삶의 흔적들, 우리가 지은 죄악들, 우리가 가진 연민들, 고통들이 불길에서 그대로 건져 올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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