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자들
W. G. 제발트 지음, 이재영 옮김 / 창비 / 2008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독일 문학은 내 독서 경험으로는 정밀하게 얽혀 있다는 느낌이 든다. 독일문학 전공자가 아니어서 단적으로 말하기는 그렇지만 여태껏 읽은 책들에서 감지되는 느낌이다. 그에 비해 프랑스 문학은 자유롭게 풀어 헤쳐진 느낌이고 러시아 문학은 인간의 심연까지 파고드는 집요한 느낌이 있다.  

이 책 '이민자들'역시 정밀하다. 그러나 그 정밀하다는 것은 구조상으로 그렇다는 것이지 내용까지 기하학적인 정밀성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인간의 심리를 드러내는 정밀성이 두드러진다고나 할까. 저자 제발트의 글은 처음이다. 그렇지만 나는 제목에 끌렸고, 어쩌면 뜻밖의 수확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읽었는데 역시 기대만큼 뜻밖의 수확이다. 

이 책에는 네명의 이민자들의 삶이 그려져 있다. 이민자들은 떠도는 자들을 연상시키는데 어떤 목적의 이민이었던간에 이민이란 개인과 그 가족에게 깊은 흔적을 남긴다. 자신의 거처가 좋다면 굳이 다른 나라에 이민을 갈 일이 무엇이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여기 나오는 네명의 사람들은 떠돌이이며 국외자이고 이방인들이다. 유대인인 세사람이 이민자가 되어야 하는 사정이야 굳이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한 사람의 이민자인 막스 페르버는 도시화가 되어가는 곳에서 고향을 떠올리는 또 다른 이민자이다.  

그러고 보니 현대인들 가운데 이민자가 아닌 사람은 소수에 불과할 것 같다. 나도 어떤 의미에서는 이민자이며 그러므로 끊임없이 고향의 마을을 그리워하고 돌아갈 날을 기다리고 있다. 도시에서 산 시간이 고향에서 산 시간과 거의 일치하는데도 나는 아직 이방인처럼 이 도시에 머무르고 있다. 그러나 나는 언제든 내가 원하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의미에서 갇힌 이민자는 아니다. 그냥 이런저런 이유에서 아직 도시를 떠나지 못하고 있을 뿐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이민자의 신세를 면할 수있다.  

그러나 여기 나오는 사람들은 귀향이 불가능하다. 귀향한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귀향한 사람의 이야기도 나오는데 그들은 떠돌이의 삶보다 죽음을 선택했던 것이다. 이민자들의 삶이라니 한때 우리나라에서 유행했던 디아스포라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하겠지만 이 책은 그보다는 더 깊이가 있다. 인간 내면의 심리를 고찰하는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는 작가는 이 글들이 사실임을 증명하기 위해 많은 사진도 첨부해 놓았다. 작가는 직접 여기에 나오는 사람들을 만나 보았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을 증명하는 일은 어렵다. 사진 역시 그럴듯해 보이지만 사실 확인은 되지 않았다고 한다.  

이 책을 읽으면 우리는 인간에 대한 연민과 애정을 다시 느끼게 된다. 그 연민과 애정은 나에게로 향할 수도 있고 타인에게로 향할 수도 있다. 어떤 것이든 좋다. 우리의 마음에서 연민과 애정을 불러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은 우리의 살아 있음을 확인하는 일이며, 우리의 인간됨을 확인하는 과정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우리 인간의 역사, 나라가 다르고 각각의 역사는 다르지만 그것이 하나로 수렴됨을 느낀다. 인간의 삶이 너나없이 특별히 다르지 않다면 그 인간이 만들어 가는 역사도 크게 다르지 않다. 단지 거주하는 공간과 살았던 시간이 다를뿐이다. 

불에 태워진듯한 표지의 디자인은 이 책의 성격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불태워 버리고 싶었던 흔적들이 없었던가. 그러나 미처 모두 불태우지 못하고 다시 불길에서 흔적을 건져내는 일들은 없었던가. 이 책은 그 흔적들을 기록한 책이다.불태워 버리고 싶지만 결코 태울 수 없는 삶의 흔적들, 우리가 지은 죄악들, 우리가 가진 연민들, 고통들이 불길에서 그대로 건져 올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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