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워진 사람 창비시선 285
이진명 지음 / 창비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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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에 흔하고 흔한 것이 시이다. 어디 시 뿐인가. 얼마나 많은 문자들이 책의 형태를 빌어 서점에 나와 있는지 , 우리 집에만 해도 이미 수천권의 책이 방 하나를 점령하고 있다. 저 책들을 모두 문자로 풀어 본다면, 저 많은 책들 속에 묻힌 글 하나하나를 풀어 세상에 내어 놓는다면 아마 세상은 문자의 포화상태에 멀미를 느낄 것이다. 그런 멀미 때문에 이제 시는 귀하지 않다. 그러나 시가 귀한 대접을 못받는다고 해서 안타까워 할 필요는 없다. 시가 대접받던 시대가 갔다는 것은 인간이 평등해지고 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시를 읽는 일은 얼마간의 훈련과 숙련의 시간을 필요로 한다. 그 숙련의 시간을 가질 수  없는 사람들에게 시는 낯선 언어일뿐이다. 그들과의 거리를 어떻게 좁힐 것인가. 인간이 진정으로 평등해지고자 한다면 인간들끼리 주고받는 언어에 담이 없어야 한다. 내가 하는 말을 네가 알아듣고, 네가 하는 말을 내가 알아 들어야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시는 그렇지 않다. 

 이진명의 시는 시 같지 않은 시다. 시 냄새가 별로 나지 않는다. 아침에 밥을 먹다가 밥 먹는 일을 시로 쓰고, 꽃을 사다가 꽃 사는 일을 시로 쓴다. 그가 쓰는 언어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일상범부들이 쓰는 언어가 시로 변해 있기 때문이다. 부처님과 농담을 하고 독자들과 농담을 주고 받는다. 그 속에 치밀한 계산이 깔려 있다고 생각하든 말든 그것은 독자의 맘이다. 욕을 하고 싶을 때는 욕을 하고, 순한 여자가 되고 싶을때는 순한 여자가 되고, 널부러진 아줌마가 되고 싶으면 또 그렇게 한다. 그녀의 시에서 무엇보다 좋은 것은 이렇게 시에서 힘을 빼고 있는 것이다. 힘이 빠진 시, 그래서 그녀의 시는 가볍다.

 명절이 되어도 엄마에게서는 전화 한통도 오지 않는다. 그래서 그녀는 쓴다. '명절인데 엄마는 전화도 못하나/거긴 전화도 없나'라고. 그러다가 애꿎은 보름달을 원망한다. '유선이든 무선이든 전화 하나 성사 못 시키는/느려터진 보름달/ 둥글너부데데한 지지리 바보/ 얼굴 피부 하나만 허여멀건 발질해가지고/ 니 굴러가는 데 알기나 할까'라고. 그러다가 그 원망은 다시 엄마에게로 이어지고 괜히 할머니까지 원망스럽다. '엄마는 그깟 전화 한번을 어떤 세월에 쓰려고 아끼나/ 할머니도 마찬가지/ 죽어 새 눈 떴는데/ 아직도 눈 어두워 숫자 버튼 하나 제대로 못누르나'. 그러다가 그 원망은 자신에게로 돌아온다. '전화기 돌릴 손모가지가 없어/ 전화 못하긴 나도 마찬가지'.(보름달) 이쯤이면 독자들은 이미 눈치챈다. 이 시인은 명절이 되자 이미 돌아가신 어머니가 그립구나 라고. 그 그리운 마음을 이런 식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꽃을 사는 마음도 마찬가지다. 절간을 한바퀴 돌아나오다 꽃 파는 아줌마를 만난다. 운동도 싫고 산도 싫어 올라가던 길을 내려 오면서 별안간 그 꽃을 사고 싶어진 시인은 중얼거린다. '별안간 꽃이 사고 싶다/ 꽃을 안 사면 무엇을 산단 말인가'라고. 그리고 자기자신에게 주기 위해서 하얀 소국을 사면서 다시 중얼거린다. '이즈음의 자기 자신이나 좀 위로코 싶었겠지'라고. 마치 타인을 빈정거리듯이 자신을 빈정거리다가 갑자기 그 꽃은 절에 사들고 가라고 파는 꽃이 아니가 하는데 생각이 미친다. 그래서 그녀는 절에 갈때는 사가지 않고 내려 올때 산 자신을 변명하기 시작한다. 

 부처님 앞엔 얼씬도 안하고 내려와서

맘 같지도 않은 맘에게 안기려고 꽃을 다 산다고라

웃을 일, 하긴 부처님은 항상 빙그레 웃고 계시더라

부처님, 다 보이시죠, 꽃 사는 이 미물의 속

그렇지만 다른 것도 아니고 꽃이잖아요

부처님도 예뻐서 늘 무릎 앞에 놓고 계시는 그 꽃이요

헤헤, 오늘은 나한테 그 꽃을 내주었다 생각하세요

맘이 맘이 아닌 중생을 한번 쓰다듬어주었다 생각하세요

부처님, 나 주신 꽃 들고 내려갑니다

                        <젠장, 이런 식으로 꽃을 사다니>의 일부

 그리고는 그런 자신이 또 못마땅해 한마디 더 보탠다. '젠장, 이런 식으로 꽃을 사다니, 덜 떨어진 꼭지여/ 비리구나 측은쿠나 비리구나 멀구나'라고

 세상 일이라고 해서 시인의 시야에서 멀어진 것은 아니다. 아침 신문에서 노부부의 불행한 죽음을 보고 외면하지 못한다. '아침신문이 턱하니 식탁에 뱉어버리고 싶은/지독한 죽음의 참상을 차렸다/나는 꼼짝없이 앉아 꾸역꾸역 그걸 씹어야 했다'<눈물 머금은 신이 우리를 바라보신다>

 나는 이 시같지 않은 시에 매료되어서 시집 한권을 모처럼 꼼꼼하게 읽었다. 이 시집이라고 한권 전체가 모두 살아 펄떡이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도무지 시어로는 쓰이지 않을것 같은 말들로 만들어낸 시들은 눈부시다. 모름지기 시란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법칙을 이 시인은 유쾌하게 깨어 버린다. 온갖 제도와 관습이 횡행하는 시대에 시까지 그 관습에 얽매여야 한다는 것은 얼마나 억울한가. 시인은 모름지기 자유로워야 하고 그가 쓰는 언어도 자유로워야 한다. 그리고 시인은 세상을 가르치는 자도, 통제하는 자도 아니다. 시인은 그저 존재의 본질을 드러내고 그 본질을 인간의 언어로 바꾸어 주는 주술사에 다름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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