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요나스 요나손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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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웃기다. 

제목은 그냥 던져 본 말이다. (본래 이 글의 제목은 이 책이 웃기다고? 삶이 우스워? 였다)

하지만 이 책이 주는 웃음은 '폭소'라기보다 '쓴웃음'에 가까운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100년을 살고도 끝나지 않은 삶에 대한 연민이 아니다. 그 모든 순간에 담겨있었을 몸부림에서 느껴지는 충실한 삶에 대한 갈망이 어쩐지 서글프게 느껴진 탓이다. 

 이 이야기를 한 줄로 줄이면 이렇게 되지 않을까?


"이렇게 된 거 어쩔 수 없지, 가볼까?" 


요나스 요나손이라는 작가에 대해서 아는 것은 거의 없다. 이 작품이 데뷔작이라는 것은 분명 놀라운 것이지만 단지 웃음을 주려고 썼을 것 같지가 않다. 웃음은 덤, 100세 노인의 삶이 주는 교훈이 본 아닐까.

그래서 이 감상에서는 그 교훈이 뭔지 아주 잠깐 생각해보려고 한다. 

깊이 말고 얕게, 길게 말고 짧게.


 이야기는 100세를 맞은 칼손 알란이라는 노인이 창문을 넘어 도망치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러고 나서는 마치 타임머신으로 오가는 것처럼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노인의 100년 인생을 중계한다. 이 노인의 삶은 그야말로 파란만장해서 세계 역사의 곳곳에 발자취와 인연을 남긴 화려한 경력을 갖고 있다. 미국의 대통령들과 절친이었다거나 핵폭탄의 개발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거나 하는 것도 그 경력 가운데 일부다. 한 번은 히말라야를 걸어서 넘기도 했다. 분명 보통 노인은 아닌 게 분명하다. 


 이 노인은 100년을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살았던 걸까?

100세나 되어서 창문 밖으로 도망쳐야 할 만큼 간절히 하고 싶었던 것은 뭘까?

이 우스운 이야기는 이런 흔한 주제들을 떠올리게 한다. 

 100년을 사는 동안 친하게 지냈던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죽어버렸다. 무엇인가 간절히 하고 싶다거나 이루고 싶다는 것도 없다. 


바라는 것은 오직 하나, 죽을 때까지 살아가는 것이다. 


살아가는 것?

죽지 않는 한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니던가?

아니다. 

노인에게는 죽지 않은 것과 살아가는 것은 엄연히 달라 보인다. 


일체의 자유를 빼앗긴 상태로 계획된 시간에 정해진 일과를 반복하는 것은 노인의 '삶'과는 거리가 너무나 먼 것이었다. 당연히 창문이라도 넘어서 도망쳐야 할 수밖에 없었던 거다. 


 100년이 넘는 노인의 삶을 따라가면서 이상하게 느낀 것이 몇 가지 있다.

첫 번째는,

"노인에게는 '반드시' 해야만 하는 것이 없다."는 거다.

노인은 꿈을 꾸지 않는다. 무엇이 되고 싶다거나, 무엇이 되고 싶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도 100년 동안이나 '목표' 없이 살아간다. 이런 삶은 보통의 '이상적인 삶'과는 거리가 너무나 먼 삶이다. 

 보통은 목표를 정하고 그것을 이루는 것, 즉 성취가 삶의 목표일 때 비로소 그 삶이 가치를 갖는다고 생각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 노인은 그런 것이 없다. 거의 즉흥적으로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뿐이다. 치명적인 실수에 대한 후회나 반성도 없다. 사람 하나를 차와 함께 날려버렸을 때조차 "뭐, 어쩔 수 없지." 식으로 생각해버리고 만다. 


 안달복달하지 않는 이런 성품이 장수의 비결일 수도 있겠다. 그래도 이런 삶을 따라 하는 사람이 많아지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두 번째는,

"노인이 결코 서두르지 않는다."는 거다.

어떤 상황에서도 노인은 당황하지 않는다. 당황하지 않았기에 서두르지 않는 것인지, 서두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기에 당황하지 않는 것인지는 분명치 않지만 목숨이 오가는 상황에서도 어디까지나 침착하게 때를 기다리며, 기회가 왔을 때 확실하게 붙잡는다. 이러한 '통찰'이라고 할 만한 뛰어난 감각은 언제부턴가 노인의 삶에 저절로 들어와 있는 것처럼 보인다. 

 '바쁘다'거나, '서두르라'거나, '빨리'라는 말을 달고 사는 우리 보통 사람들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노인은 느긋한 삶을 산다. 처음부터 자신이 100년이나 살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임에도 인도네시아의 해변에서 10년 넘는 시간 동안 파라솔에 누워 술만 마시고 있을 정도로 느긋하다. 

 노인에게는 이 시간이 '아깝다'는 개념 자체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시간을 몰아세운다고 빨리 흘러가거나 위협한다고 늦게 가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노인의 태도가 인간의 삶을 더 풍요롭게 해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인의 삶을 대하는 태도는 기이하다는 말 외에는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독특하다. 


세 번째는,

"노인이 사랑에 빠지는 여자가 없다."는 거다.

이 말은 사실 이야기의 말미에 가면 다르게 적어야 하는 말일 거다. 그러나 노인의 100년 삶에 격정적인 '사랑'이 없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감정, 사랑이라는 달콤한 고통이 없었다는 것 또한 장수의 비결이었을까?

 노인에게도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은 있었다. 결코 노인이 우정이나 사랑을 거부하거나 없는 것으로 치부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그래서 '사랑'이 결핍되어 있다는 것이 더 기묘하게 느껴진다. 

 "왜 노인은 사랑에 빠지지 않았을까?"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이 수수께끼는 풀리지 않는다. 아마도 앞으로도 풀리지 않을 거다.

아무렴 어떤가.


네 번째는,

"모든 것이 적도에서의 나비의 날갯짓이 만든 태평양의 태풍 같은 나비효과로 연결되어 있다."는 거다.


 '어떤 삶은 다른 삶보다 더 가치가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다."고 말할 수도 있을 거다. 

대통령과 일반인이 같다고 생각하지 않을 테니 말이다. 그러나 이 노인에게는 그 대통령이나 일반인이나 동등한 존재로 인식된다. 더 존중할 필요도 없고, 더 업신여길 필요도 없이 그냥 다를 것 없는 거다. 노인은 세계를 다니며 사소하지만 커다란 '가능성'들을 심어 놓는다. 예광탄 하나가 블라디보스토크를 불바다로 만든다거나, 한 번의 거짓말이 어린 김정일에게 치명적인 불신을 심어 놓는다거나 하는 것이 그런 가능성들이다. 

 모두가 이 노인처럼 100세 넘게 사는 것은 아니다. 이 노인처럼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 가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런 삶이라고 해도 가치가 덜 하다거나 덜 중요하다는 것은 아니다. 노인은 의도적으로든 우연히든 실수로든 많은 사람을 '날려'버린다. 이렇게 날아가버린 사람들의 삶 역시 본인에게는 유일한 것이었을 거다. 하지만 돌아보면 이렇게 날아간 사람들 대부분은 자신의 삶이 다른 사람의 삶보다 '더 가치 있다'고 믿고 있는 사람들인 경우가 많은 것처럼 보였다. 함부로 하는 사람, 무례한 사람, 잔인한 사람들이 주로 날아갔으니 말이다. 

 노인의 한 마디가 핵폭탄을 낳았다는 설정은 사소한 존재의 무신경한 행동이 어떤 결과를 낳을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이른바 적도에서의 나비의 날갯짓이 태평양의 섬에서는 태풍이 되는 것 같은 나비효과다. 


 노인의 삶은 온갖 파란을 거쳐 안정에 닿는다. 그러나 살아 있는 동안에 노인은 계속해서 살기 위해 몇 번이고 창문을 넘을 것이다. 노인의 삶은 얼핏 목적이 없어 보이지만 다른 모든 것을 뛰어넘는 한 가지 의지는 엿보인다. 

"스스로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

노인은 누구에게 의지하지도, 간섭받을 생각도 없다. 그저 자신의 삶을 충실하게 살아가고자 할 뿐이다. 

그런 노인을 막는 존재들을 노인은 시원하게 날려버린다.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내 삶이다. 방해하지 마라."


 노인과 일당의 이야기는 황당한데다 웃기다. 거기에다가 그럴듯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어딘가 따뜻한 게 느껴지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노인은 누구든 날려버릴 수 있지만 아무나 날려버리거나 함부로 죽여버리지는 않는다.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과 갈등을 누그러뜨리는 능력 또한 갖고 있는 거다. 


 노인처럼 세계를 둘러보지 않아도 괜찮다. 

유명인들과의 친분이 없어도 좋다. 

그러나 나 역시 살아있는 동안 내 삶을 충실히 살아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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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우스트 열린책들 세계문학 73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김인순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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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페이지,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의 이야기가 끝나는 쪽수다.

473페이지, 파우스트의 이야기가 끝나는 쪽수다. 


 파우스트를 읽고 싶지만 정말 읽히지 않는다는 고민을 종종 접한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그 고민을 '이해한다'고 말하기 어렵다.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을 읽는데 8시간쯤 걸렸다면 <파우스트>는 오히려 그보다 적게 걸렸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에는 이미 파우스트를 2~3번 읽었던 경험이 크게 작용했다. 그러나 그런 점을 감안해도 파우스트를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처럼 재밌게 읽지 말라는 법은 없다. 메피스토펠레스가 부리는 익살과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신화 속 인물들의 모습, 마녀들의 축제와 파우스트의 고뇌는 한 편의 드라마처럼 흘러간다 

 파우스트와 같은 작품을 읽는데 어려움을 느끼는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희곡이라는 장르가 잘 맞지 않는다고 말하기도 한다. 인물들의 말투가 낯설다고도 한다. 장면의 설명이나 배경이 이해하기 어렵다고도 한다. 

  

 이 이야기는 지금으로부터 200년도 더 전에 쓰인 것이다. 게다가 배경이 외국이다. 그런 점을 생각하면 어색하거나 낯선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사실은 처음 파우스트를 읽었을 때의 기억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을 정도로 읽는데 고생했었다. 단테의 <신곡>처럼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기분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 가지 알고 싶은 것이 있었기에 끝까지 읽었었다.


 "왜 파우스트 박사는 구원받는가?"

처음의 궁금증은 '이론적'으로는 풀렸다. 그러나 아직도 감정적으로는 완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이전에 읽었을 때는 버럭 화가 나는 걸 느꼈을 정도다. 가련한 메피스토펠레스라며 사탄을 동정했을 정도다. 


 파우스트를 읽으려고 하는 사람은 왜 이 이야기가 시작되는지만 알고 들어가도 조금 마음이 편해질지 모르겠다. 이 이야기의 시작은 하느님과 메피스토펠레스의 '내기'다. 마치 성경 속에서 '욥'을 사탄의 손에 내어주었던 것처럼 여기서 하느님은 파우스트를 메피스토펠레스에게 내어주며 시험해보라고 부추긴다. 

 이 시험을 통과하면 파우스트는 구원받을 것이고, 통과하지 못하면 지옥으로 떨어질 거다. 

물론 이 내기에 파우스트 박사의 의지는 전혀 개입하지 않는다. '그들'의 마음대로 내기를 정하고 시험당하는 것뿐이다. 그러면서 하느님은 의미심장한 한 마디 말을 던진다.

18쪽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기 마련이니라.


 이 문장을 납득할 수 있게 되면 <파우스트>를 읽기는 대단히 수월해지는 것처럼 느껴진다. 받아들이든 거부하든 그것은 읽는 이의 마음이다. 그러나 '인간의 노력'과 '방황'이 파우스트 속 내용의 전부라는 것은 기억해두는 게 좋겠다. 파우스트가 어떤 노력을 했고, 방황 속에서 무엇을 깨달아가는지 그것이 이 책 <파우스트>를 통해 괴테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안타까운 것은 인간이 노력하는 한 방황할 뿐 아니라 거듭 시험에 들게 된다는 것이다. 

누군가를 탓하거나, 자신을 탓하거나 인간은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갈등하며 괴로워한다. 누구에게나 그런 경험이 있을 것이다.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모습과 현실 속의 자신 사이의 부정할 수 없는 '차이'의 실감 말이다.


  파우스트 박사는 뛰어난 학자다. '초인'이라 불릴 정도로 지혜로운 동시에 학문에서 마법까지 다방면에 걸쳐 능력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그는 한탄한다. 자신은 너무 늙었으며, 여전히 이상은 멀리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결국 파우스트는 자신을 유혹하는 줄 알면서도 메피스토펠레스와 계약한다. 더 나은 자신을 위해 영혼을 버릴 각오를 다진 것이다. 

 이 계약을 끝내는 주문은 이렇다. 

<순간이여 멈추어라, 정말 아름답구나!>

이 말을 하는 순간 계약은 끝나고, 파우스트는 메피스토펠레스의 것이 되는 것이다.


 메피스토펠레스는 파우스트에게 인간의 사랑에서부터 발푸르기스의 밤이라는 환락, 신화 속 미녀 헬레네와의 시간과 왕과 같은 삶까지를 경험하게 한다. 그리고 그 시간 동안 파우스트에게 그야말로 종처럼 봉사한다. 자신이 가진 보물과 능력을 몽땅 뽑아내어 파우스트의 요구를 들어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경험하고 또 손에 넣고도 파우스트는 여전히 공허함에 시달린다. 그러던 어느 날 근심이 찾아와 파우스트의 눈을 멀게 한다. 그러나 파우스트는 눈이 멀면서 오히려 빛을 발견하게 되고 넓은 궁성에서 좁은 곳으로 거처를 옮긴 후 메피스토펠레스에게 최후의 역사를 지시한다. 그 역사란 수백만 명을 위한 토지를 일구어 내는 것이다. 

 파우스트가 '지혜가 내리는 최후의 결론'이라고 명명한 이 마지막 역사는 마치 인간의 삶을 빗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453~454쪽

날마다 자유와 삶을 쟁취하려고 노력하는 자만이 

그것을 느릴 자격이 있네.

어린아이, 젊은이, 늙은이 할 것 없이 이곳에서 위험에 둘러싸여 

알찬 삶을 보내리라.

나는 사람들이 그리 모여 사는 것을 보며,

자유로운 땅에서 자유로운 사람들과 더불어 지내고 싶네.

그러면 순간을 향해 말할 수 있으리라.

<순간아 멈추어라, 정말 아름답구나!>

이 지상에서 보낸 내 삶의 흔적이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걸세


솔직히 <파우스트>에 대해서 나부터도 이해하고 있는 것은 거의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단지 몇 번인가 파우스트를 읽고 인간의 노력과 방황, 삶의 목적과 구원의 근거를 발견하고자 하는 시도를 해봤을 뿐이다. 뒤편에 해석이 적혀 있지만 고집스럽게 읽지 않기로 결심한 터라 앞으로도 읽을 생각은 거의 없다.


 파우스트의 마지막 말, "이 지상에서 보낸 내 삶의 흔적이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걸세"라는 말은 지극히 인간적인 소망처럼 보인다. 잊히지 않는 것, 사라지지 않는 것. 사람들이 위험 속에서, 그러나 자유로움 속에서 살아가는 것을 보는 것. 얼마나 인간적인가.

  

 모든 것을 잃고 그동안의 노력에 어떤 보상도 받지 못하고 이를 가는 메피스토펠레스의 모습 역시 인간적이기는 마찬가지다. 어쩌면 악마, 사탄이라 불리는 메피스토펠레스야말로 인간을 가장 잘 아는 가장 인간적인 존재인지도 모른다. 파우스트 역시 메피스토펠레스와 거의 다르지 않게 행동했다. 때로는 더 지나치기도 했다. 그러나 그 목적에 있어서 둘은 너무나 달랐다. 하나는 다른 영혼의 타락을 위해 봉사했지만 다른 하나는 더 나은 어떤 것을 꿈꾸고 갈구했다는 거다. 


 이렇게 감상을 적어보니 아직도 누군가에게 파우스트라는 작품을 설명하기에는 너무 멀고도 부족하다고 느껴진다. 다만 나 스스로 믿고 느끼는 바가 있었다.

 파우스트 박사만큼은 아니지만 나 역시 더 나아지기를, 궁극적인 가치 혹은 목적을 발견하기를 꿈꾸며 나름의 노력을 기울여 왔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그 노력이 좌절될 때마다 실망하기도 하고 슬퍼하기도 했으며, 메피스토펠레스와 같은 악마가 나타나 영혼을 두고 계약을 하자고 한다면 나 역시 그 계약을 받아들이겠다고도 생각했었다. 지금도 그런 생각은 변함이 없다. 


'더 나아진다'는 말은 무척 모호한 말이다. 그러나 저마다 다른 그 나아짐이 간절해지는 순간은 누구에게나 찾아든다. 파우스트를 읽으며 화가 났던 것은 파우스트 박사의 도덕적인 타락에도 불구하고 완벽하게 구원에 이른다는 결말 때문이었다. 그런 것은 있어서는 안 되는 비극처럼 보였다. 메피스토펠레스를 동정하고 파우스트 박사를 질투할 수밖에 없는 그런 결말이었던 거다. 

  

 이번에도 완전히 그런 마음이 사라지지는 않았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러나 지난번처럼 화가 나지는 않았다. 때로 인간은 이기적이 된다. '완성'은 희생 없이는 얻을 수 없는 교환의 결과물인 것 같다. 파우스트 박사가 걸었던 자신의 영혼과 자신이 타락시켜 죽음에 이르게 한 여자와 아이의 영혼, 그 모든 것이 필요한 것이었다는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은 선택을 하고 싶지는 않다. 일단 시대가 다르고 생각이 다르다. 


 나였다면 어땠을까?

이 생각이 그치지 않았다. 

무책임한 파우스트,

이기적인 파우스트,

음란한 파우스트,

욕심쟁이 파우스트, 

잔인한 파우스트, 

쉽게 화내는 파우스트,

다른 사람을 탓하는 파우스트.

파우스트의 결점은 너무나도 많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메피스토펠레스가 부추긴 결과인 것처럼 된다.

결말은 해피엔딩이다. 

파우스트도, 그로 인해 죄에 빠진 여자도 모두 구원받는다. 그러나, 정말 최선이었을까.


보지 못하고 지나친 것이 많을 것이고,

이해하지 못하고 넘어간 것이 적지 않을 것이란 것은 당연하다.

수십 년, 수백 년을 연구한 학자들도 모든 비밀을 풀지는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혹 파우스트를 읽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저 한 편의 막장 드라마를 보는 것처럼 생각하고 읽어도 좋겠다.

실제로 이야기는 막장 요소가 다분하니 말이다.

모든 용어나 배경을 이해하려고 생각하고 읽는다면, 이 생에 이 작품을 다 읽기는 글렀다고 보는 게 좋을 것 같다.

 모든 시대에는 그 시대의 요구가 있는 법이다.

과거는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둘 필요도 있는 법이다.

일단은 보이는 것만을 보는 것으로 만족해도 좋지 않을까. 더 멀리 보는 것은 그다음이다.


 말하는 것을 잊었지만, <파우스트> 속 '호문쿨루스'는 너무 욕심을 부리다 자신이 들어있는 플라스크가 깨지는 바람에 사라지고 만다. 지나친 욕심은 경계되어야 한다. 그것은 과거에도 지금에도 변하지 않는 진리다. 

그러나,

어디까지가 적당한 욕심이고,

어디부터가 지나친 욕심인지 가릴 수 있는 지혜를 가진 사람은 그리 많지 않으므로,

실수해도 어쩔 수 없겠다.


잊지 말자.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는 법이라고 한다. 

지금의 방황이 잘못된 것은 아니라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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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라디오 2015-12-30 12: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파우스트> 너무 읽어보고 싶네요. 내년에 꼭 읽어보겠습니다. 좋은 리뷰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칼의 노래
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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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책을 읽게 되는 이유 가운데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눈에 보여서'라고 적으면 웃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건 사실이다. 

 어떤 책이 어느 순간, 

집의 책장에서든, 서점에서든, 도서관에서든, 인터넷에서든, 어디서든,

눈에 띄었을 때 "이거 한 번 읽어볼까?"하는 생각이 떠오르면 보통은 읽을 수밖에 없게 되기 때문이다. 

 <칼의 노래>를 다시 읽게 된 계기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원래는 이 책을 누군가에게 줄 생각으로 책장에서 꺼냈던 거였다. 

그랬던 것이 눈에 들어왔으니 오랜만에 한 번 더 읽어볼까? 가 되어서 결국 읽어버리고 말았던 거다.

 뭐, 그런 경험들 한두 번씩은 하지 않았을까?


10년도 전에 <칼의 노래>를 처음 읽었었다. 그때의 기억은 희미하지만 '좋았다'는 여운만은 분명히 남아있었다. 아쉽게도 어떻게 좋았었는지 기억나지를 않는다. 결국 두 번째 읽은 기분과 비교하는 것이 어려워지고 말았다.


<칼의 노래>는 임진왜란부터 정유재란까지 이순신 장군이 백의종군을 끝내고 노량해전에서 목숨을 잃을 때까지의 이야기를 역사를 뼈대로 해서 새롭게 해석해 적어낸 소설이다. 

 

 '안타깝다'라고 적는 것이 올바른 표현인지 분명하지는 않지만, 안타깝게도 이 소설은 성웅 이순신 장군의 이야기가 아니다. 백성과 나라를 생각하며 애태우는 것이 사실이고, 목숨을 바쳐서라도 지켜내고자 하는 의지 역시 진짜지만 그것보다 더 두드러지는 것이 이순신이라는 한 인간의 '자아'이기 때문이다. 


 바람이 부는 바다의 파도가 칼날처럼 일어나는 것, 

마음의 칼이 우는 것처럼 느끼는 것, 

스스로를 적의 적이라거나 타자의 존재를 통해서만 자신을 증명하고 인식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들은 몹시 철학적이다. 

 무인이라고 하기보다 철학자라고 하는 것이 더 올바른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될 만큼 작가 김훈이 그려낸 이순신은 사유하기를 그치지 않는다.


 목숨이 오가는 전장, 나라의 흥망성쇠가 자신의 손에 달려있을지 모른다는 막중한 책임감과 무능력할 뿐 아니라 변덕스럽고, 성마른 왕에 대한 냉엄한 평가. 

 명나라에 대한 사대주의뿐 아니라 당쟁으로만 치닫는 정치에의 환멸. 

 서로의 이익을 좇아 거리낌 없이 타협하는 인간군상에 대한 분노 역시 내면 깊은 곳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관찰과 생각의 끝에는 자신이라는 '존재의 규정'이 있다. 

간신이 있기에 충신이 있고, 난세가 있기에 영웅이 태어나며, 죽음이 있기에 삶을 갈구하는 것 혹은 살아남았기에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이순신의 생각하게 만드는 외부 요인들이다. 


아, 여기까지 30분간 적은 내용은 혼잣말이라고 생각하고 넘어가 줬으면 좋겠다.

이 아래에서부터가 감상인 걸로. 


 이 소설의 제목이 <칼의 노래>인 이유는 뭘까? 

단순히 생각해보면 이야기 속에서 칼이 노래를 부르기 때문일 거다. 그렇다면 그 노래는 어떤 노래일까?

이순신 장군의 성품이나 인격을 통해 생각해보면 이 노래가 흥에 겨운 것, 당시에도 있었을 유행가 같은 것은 아닐 것이다. 


 먼저 이 '칼'은 어떤 칼을 말하는 걸까?

몇 가지로 생각해볼 수 있다.

하나는 말 그대로 '칼刀'이다. 

이야기 속에는 이순신 장군을 포함해 여러 사람의 칼에 새겨진 검명이 등장한다. 

예를 들어 이순신 장군의 검명은 이렇다.


"한 번 휘둘러 쓸어버리니,

피가 강산을 물들이도다."


이순신이 추구하는 '칼'은 전쟁을 끝내는 종결의 칼이다. 

또한 자신의 죽음의 자리와 순간을 찾아가는 여정이기도 하다. 

'칼을 찬 장수'로서 승리하고 돌아오겠다고 백성들에게 약속하는 장면에서 이순신 장군이 듣고는 하는 '칼의 노래'가 전쟁을 끝내고 평화를 되찾아 올 방법을 의미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게 된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이순신과 반대로 일본군의 검명은 난폭하고, 폭력적인 것을 '즐기는' 문구로 되어있다. 그들은 죽이고 약탈하는 것이 목적인 존재들이다. 자신을 찾기 위한 것도, 살아남기 위한 것도 그들이 내세우는 명분은 아니다. 맹목적인 충성과 살의가 그들을 지배한다.


둘은 칼날 같은 파도다. 

 바다는 많은 것을 삼킨다. 마치 인명을 도륙하는 칼날처럼 바다에 떨어진 자들의 숨을 끊어놓는다. 뿐만 아니라 이 이야기 속 전쟁의 주된 배경으로써 무수한 전투가 시작되고 끝난다. 

 바람이 잘 때는 칼날 같은 파도도 잠잠해진다. 그러나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어떤 칼보다 날카롭고, 잔혹하게 변하는 것이 바다인 것이다. 

 전쟁이 끝나던 날 그 바다에서 이순신 장군이 숨지는 것도 우연은 아닐 것이다. 

그 바다 위가 아니면, 칼날 같은 파도 위가 아니면 이순신 장군이 죽을 자리는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셋은 잃어버린 마음이다.

 이순신 장군의 셋째 아들 면은 꿈에서 자신의 칼을 찾아달라며 아버지를 찾아온다. 아버지는 잃어버린 것은 되찾을 수 없다고 한다. 

 죽음으로써 마음을 잃어버리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러나 살아있으면서도 그 마음을 잃어버린 자들이 무수했던 시절이었다. 오로지 이순신 장군의 마음에서 울리는 칼의 노래가 간신들, 조정의 대신들, 왕의 마음에서는 울렸을 리가 없다. 그들은 마음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같은 맥락에서 이렇게 생각해볼 수도 있다. 

칼은 잃어버린 강토라고 말이다. 

대신들은 전쟁을 끝내고 백성을 환란과 도탄에서 구하며 나라를 바로 세우는 것보다 자신들의 이익을 더 중요시한다. 그런 그들만으로는 나라를 되찾을 수 있을 리가 없다. 명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 역시 애처로울 지경이다. 그들은 '자기애'에 함몰되어 있었다. 어느 시대에나 간신과 매국노는 있었다. 그들의 마음에는 잘 벼려진 칼이 없었을 것이다. 있다고 해도 자신을 위해 타인을 해치는 이기적인 칼만 품고 있었을 거다.


이번에 읽은 <칼의 노래>는 한 인간의 고독한 투쟁기처럼 읽혔다.

사실 많은 사람이 알고 있을 것이지만 이 소설은 첫 문장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그런 아름다운 첫 문장을 품고 있는 소설이 이렇게 고독하게 읽히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

이 소설의 첫 문장이다.


이순신 장군은 자신을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존재로 인식한다. 

타인이 있기에 자신이 있다고 한다.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며 단지 '적의 적'으로 존재할 뿐이라고 한다. 

이순신 장군이 외로운 까닭은 자신이 누구의 편도 아니기 때문이다. 

왕의 편도 아니고, 대신들의 편도 아니며, 명이나 일본의 편도 아니고, 심지어는 백성의 편도 아닐 수 있다. 

오히려 그들은 자아와 대립하거나 보완하는 위치에서 이순신이라는 존재를 뚜렷이 드러내는 존재가 된다. 


 이순신 장군은 자신의 죽음을 간절히 기다리는 것만 같다. 

자신이 휘두른 칼이 적을 쓸어버리고, 피가 강산을 물들일 때 그 피에 자신의 피까지를 섞고자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의 영웅적인 면모는 400년이 넘는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도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고 있다. 

"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는 유언은 장엄하게까지 느껴진다.

그러나 그런 외부로 드러난 외적인 유지가 아니라 그의 마음이, 의지가 얼마나 많은 마음을 물들였을지는 알 수 없다. 


 <칼의 노래>는 소설이다. 소설 속의 인물의 내면을 너무 깊이 파고들며 시대와 사람들에게 투영하는 건 무리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디에도 갈 곳이 없음을 알고 죽을 자리를 찾아가려고 하는 이순신 장군의 모습은 고향을 잃어버린 피란민들, 나라를 빼앗긴 백성과도 겹쳐진다. 

 전쟁을 승리로 끝내더라도 이순신 장군에게 돌아갈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누구보다 잘 아는 이가 이순신 장군이었다. 전쟁이 두려운 것은 전쟁의 참혹함보다 혼란과 광기 때문이다. 혼란은 너무나 많은 것을 무마시킨다. 광기는 책임조차 물을 수 없게 한다. 잔혹함은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에는 언제나 차고 넘치던 부덕이기에 오히려 무감각할 수 있다.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잃고 살아가고 있다.

그 가운데 가장 안타까운 것은 스스로를, 자신을 잃고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한다.

위안부 문제가 '해결'됐다고 떠드는 소식이 보지 않으려고 해도 눈에 들어오고, 듣지 않으려고 해도 귀에 들린다. 

그들의 마음에는 칼이 없다. 그들의 마음에는 노래하는 칼이 없다. 그들의 마음에는 자기 이외의 사람들을 상처 입히는 칼만이 시퍼런 날을 세우고 있는 것 같다. 

 칼이 없더라도 다른 사람들의 가슴속에서 아프게 울어대는 칼의 노래를 들을 수 있는 열려있는 마음이라도 있었으면 좋았을 것을. 


왜 끊어내야 할 고리는 끊지 못하고, 끊어서는 안 되는 것만을 끊고 찢어대는가.

 벨 수 없는 것을 앞에 두고 마음의 칼이 우우웅하고 우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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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혹미술사 - 섬뜩한 그림으로 엿보는 인간의 야만과 광기
이케가미 히데히로 지음, 송태욱 옮김, 전한호 감수 / 현암사 / 2015년 11월
평점 :
절판



종교가 인간을 신격화시킨다면, 예술은 역사와 현상, 상상까지를 작품화시킨다.


예술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작품'이 되어버리고 나면 마치 하나의 고유명사처럼 자신만의 영역을 갖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불가침의 신성성을 얻어 오래오래 해석되고 재해석되기를 거듭한다. 

'작품'이 된다 함은 신격화의 다른 갈래다. 역사적인, 세계적인 작품이 훼손되거나 파괴되었을 때 사람들이 느끼는 상실감 혹은 박탈감 역시 그런 신격화와 연결된 것 아닐까. 

 

예술과 외설 사이에는 오랜 시간 논쟁이 계속되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냥 예술로 보면 되는 것 아냐?"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술을 무척 잘 알거나 예술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의 이야기일 것 같다. 왜냐하면 '예술'은 단순한 '행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이 되고, '사상'으로 규정되기 때문이다.  

어느 쪽인가 하면 나는 예술을 전혀 모르는 축에 속한다. 예술인지 외설인지 혹은 쓰레기인지 거의 아무 생각도 없었다. 하지만 그런 무지한 나였기에 호기심이 생겼다. 

 "미술사에 그려진 인간의 잔혹함이라니 어떤 것일까?" 

그러나 동시에 이런 생각도 들었다. 

"어떤 잔혹한 미술 작품도 이 세상만큼 잔혹하지는 못할 것이다."하는 생각 말이다. 

 

책은 연대 순이라거나 작가 순으로 작품을 배치하지 않았다.  

'잔혹한 신화의 세계'라는 주제에서 시작해 '인간의 시체, 예술 작품이 되다'로 끝을 맺는다. 

주제가 여럿인 만큼 작품도 여럿이다. 그러나 유독 두드러지는 것은 있었다. 

결국 '잔혹한 미술'의 근원에 있는 것은 인간의 '생로병사'가 아닌 '욕망'인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전쟁보다 참혹한 것이 종교란 사실을 새삼 실감했다. 종교 분쟁으로 일어난 전쟁을 비롯해 종교와 신의 이름으로 자행된 잔혹한 행위를 나열하자면 끝이 없다.  

무엇보다 그 잔혹한 행위는 언제나 '현재 진행형'이다. 

 

책 속에 담긴 작품들은 대부분이 그리스도교와 관련되어 있다.  

'암흑기'라고 하는 중세에도 그림은 쇠퇴하지 않았고,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해와 흑사병의 처참함을 증언했다.  

예술의, 미술의 효용이란 어떤 것일까? 

증언, 기록으로써의 기능 외에 인간을 감화시킬 경고나 교화의 기능도 있는 것일까? 

'잔혹한 미술'작품에는 그런 경계의 의미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정말 효과가 있었을까? 

 

책 속에서 보여주는 지옥은 공포스럽다기보다 우스워 보인다. 물론 이런 생각은 그림에 담긴 진짜 의미를 모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것일 터다. 보통 경고문은 분명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단순한 그림과 함께 적혀 있다. 공포스러워야 할 지옥이 우스워 보이게 된 이유는 지나치게 단순화시킨 동시에 지나치게 많은 의미를 담았기 때문이 아닐까 하고 혼자 웃으며 생각해본다. 

 

사고관의 차이도 작지 않게 작용했을 것이다.  

그림 속의 악마는 역시 무섭다기보다 웃기다. 오히려 인간을 단죄하고, 살해하는 인간이 더 무섭게 느껴진다. 목을 베는 그림이 여럿 나오는데 그 그림들을 볼 때마다 욕지기가 올라오는 것 같은 불쾌감을 느꼈다.  

 

이런 모든 생각이나 느낌도 이 책 속에 담긴 그림들에 대해 최소한으로나마 이해했기 때문에 가질 수 있는 것이었다. 책은 그림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하고 분석해주고 있지는 않지만 최소한의 정황과 의미는 밝히고 있다. 오히려 미술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 호기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는 조금 가벼운 듯한 이런 미술책이 좋을 지도 모르겠다. 물론 주제가 '잔혹'이기에 선택에 앞서 한 번 더 생각해보기를 권하고 싶지만 말이다.

 

미술은 종교보다 역사가 깊은 것 같다. 동시에 미술과 종교는 떼어내기가 쉽지 않은 것처럼도 보인다. 예술이냐 외설이냐의 문제는 이 책 속에 담긴 작품들에도 적용되었을 논쟁일 것이다. 외설이 단순히 야한 것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외설이란 '천박함' 혹은 '불순함'에 더 가까운 의미로 쓰일 것 같기 때문이다.  

잔혹 미술사는 어떤 의미에서는 인간의 일그러진 욕망의 역사처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예술이기에 분명한 메시지를 품고 있는 것도, 사람들에게 영감과 사색의 계기가 되어주는 것 또한 사실이다.  

미술은 결국 인간의 삶과 죽음에 대한 기록이 아닐까. 삶 속의 무수한 순간과 죽음까지의 시간 동안 배우고 느끼고 생각하며 상상한 모든 것을 미술 작품에 담으려고 몸부림치는 예술가들이 보이는 것만 같다.  

 

어떤 그림은 잔혹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끝나지 않으므로 예술이 된다. 


자식을 먹는 시간의 신 크로노스


인간에게 불을 가져다 준 '프로메테우스'


있는 힘껏 목을 베는 '유디트'


죽음에 대한 경계 혹은 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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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마 도노휴 지음, 유소영 옮김 / arte(아르테) / 2015년 12월
평점 :
품절



이 이야기는 2008년 오스트리아에서 있었던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한 소설이다. 아이러니 한 것은 꾸며낸 이야기인 이 소설보다 실제의 사건이 더 참혹하게 느껴질만큼 지독했다는 점이다. 이 사건을 언급하는 것, 떠올리는 것 자체를 불쾌하게 여기는 사람도 있었기에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 가지만 이야기 해두기로 한다. 

 

 실제 사건에서의 범인은 '아버지'였다. 

이 소설 속의 범인이 '낯선 사람'인 것과 비교했을 때 어느 쪽이 더 현실적인가? 

현실은 꾸며낸 이야기보다 '거의 언제나' 더 비극적이며, 비참하다.


 이 이야기는 열아홉 살이던 해에 납치되어 감금된 후, 7년이라는 긴 시간을 갇혀 지내다 아들의 활약으로 탈출한다는 이야기다.

외부에서 들어오는 것이라고는 천정의 작은 채광창으로부터의 빛 뿐인 사방 3.3미터 정도의 공간인 '룸'이 주된 배경이다. 그리고 이 이야기의 주연은 7년째 갇혀 지내는 엄마와 룸에서 태어나 다섯 살이 된 아들이다. 

 아, 정정해야겠다.

이 이야기는 '탈출'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탈출'에서 시작되는 이야기인지도 모르겠다. 아들 '잭'이 느끼기에는 '룸'보다 바깥 세상 쪽이 더 위험하고, 힘겨워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는 '룸'이라는 좁은 공간에 갇혀 지낸 두 사람의 이야기일 뿐 아니라 세상이라는 넓으면서도 룸보다 더 좁은 세계에 갇혀 지내는 가련한 사람들의 이야기이기도 할 거라는 것이다.


 어떻게 이야기를 시작하면 좋을 지 얼른 떠오르지 않는다. 왜 떠오르지 않는지는 잠깐 생각해 보고 나니 어느 정도 감이 잡혔다. 

 첫 째, 한 번도 외부와 완전히 차단된 공간에서 오로지 한 사람과의 관계가 전부라고 믿고 살아온 사람을 본 적이 없었기에 주된 화자인 아들 '잭'의 생각이나 행동을 이해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제 막 다섯 번째 생일을 지낸 '잭'은 외부와 완전히 격리된 공간에서도 티브이와 엄마를 통해 글자와 말을 익혔다. 엄마와 자신을 분리해서 생각하지 못하는 분리 불안의 증세를 보이기는 하지만 엄마와 약속된 시간에는 '엄마가 없는 것처럼' 생각할 수 있는 통제력도 갖고 있다. 사실 이 점이 쉽게 납득이 가지 않았다. 분리 불안에 시달리는 어린 아이가 엄마가 지정한 분리 시간 동안에는 자신을 완벽하게 통제한다는 것에서 분리 불안이 아닌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 생각을 계속하게 된 이유는 잭과 엄마가 방에서 나온 이후에 거치는 사회화 과정에서 보이는 잭의 행동이 오히려 방 안에서의 통제 능력을 잃어버린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분리 불안의 또다른 형태였을까 아니면 엄마가 잭의 나중을 생각해 고안해낸 '분리'라는 장치가 효과를 보았던 것일까. 풀 수 있는 방법은 없지만 생각해볼만 하다고 본다. 


 생각할만 하다고 보는 것에도 이유는 있다. 

이 '엄마'의 '룸 탈출 계획'이 하루이틀 만에 세워졌다고 보기에는 너무나 완벽하게 맞아 들어가기 때문이다. 

하나는 잭의 언어 능력이다. 잘은 모르지만 통제된 공간과 환경에서 성장한 여섯 살 짜리 아이가 거의 완벽하게 읽고, 말하며, 좁은 공간에서도 적당한 근력과 순발력을 갖고 있으려면 분명 계획된 교육이 필요할 것 같은 거다. 

둘은 잭의 자기 통제 능력이다. 여섯 살짜리 아이가 자기를 완벽하게 통제하는 것은 언어를 거의 완벽하게 구사하는 것보다 어려우면 어려웠지 쉬울 것 같지 않다. 그러나 이 엄마는 그것을 해냈다. 그런 통제가 가능한 아이로 자신의 아들을 키워낸 것이다. 그 열악한 환경에서!

 이 엄마가 대단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이유인 거다. 


탈출에 성공한 이후 세상의 지나친 관심과 무례하고 무신경한 참견과 이익과 호기심의 해소를 위해 시도되는 모든 활동들은 두 사람을 상처입힌다. 잭이 룸을 그리워 하는 순간은 거의 그런 순간이었다. 잭에게 룸은 위험이자 공포다. 그러나 동시에 엄마와 자신 두 사람만의 아늑하고 안전하며 돌발상황을 염려할 필요가 없는 계획대로 움직이는 '통제 가능한 공간'이기도 하다. 만약 엄마가 원하지 않았다면, 생명에 위협이 될 정도의 상황에 처했음을 자각하게 되는 일이 발생하지 않았다면 '잭'은 탈출을 생각했을까 싶어졌던 이유다. 

 무슨 수를 써서든 기회를 만들어 탈출하고자 하는 엄마와 잭은 이렇게 다르다. 분명 다르다.


 두 사람의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직접 읽어보는 게 가장 좋다. 두 사람을 가뒀던 사람이 어떻게 되는지, 그 사람이 누구였는지, 잭과 엄마는 어떻게 되는지 알고 싶다면 말이다.


 처음으로 돌아가서,

이 이야기는 좁은 방 안에 갇혀 있는 엄마와 아들의 생활기이자 탈출기인 동시에 적응기다. 그런데 내게는 이 이야기가 이렇게도 읽혔다.


"누구나 자기 안에 방 하나쯤 갖고 있는 법이다."

그렇지 않을까?

그 공간에서 모든 것은 나의 의지로 움직이고, 통제가 된다. 무엇도 자신을 부정하지도 거부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동시에 규칙도 존재한다. 무제한의 자유나, 무한한 쾌락 혹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만족시키는 천국 같은 공간은 아니다. 하지만 그 공간의 최대 장점은 '안전하다'는 것이다. 그 안에는 나를 상처주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그 방에서 나가는 것을 선택하는 것 역시 자신이기에 외부의 위력에 의해 타율적으로 통제되지도 않는다. 자율적인 통제, 즉 자아가 그 공간의 지배자가 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봤을 때 두 사람이 방에서 나간 후에 겪는 일들을 개인의 '성장'이라는 측면에서 이렇게 해석할 수 있을 것 같다.

'사회화'에 빗대어서 말이다.


 아이는 태어나 엄마의 품에서 자라다, 가정이라는 최초의 사회를 경험하게 된다. 이후에 친구를 만나고 학교에 가게 되면서 그 사회는 점점 넓어지고 확대되는 것이다. 엄마와의 관계는 '사회'라고 할 수 없는 '동일 시'되는 것이기에 관계가 시작되는 계기나 거리가 다른 관계와는 전혀 다르다. 그러나 엄마와 분리되어 살아가지 못한다면 '나'로 살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가 자라면서 '자아'의 세계에서 벗어나 '관계'로 나아가야 하는 이유와도 같다. 사람은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다. 

왜? 

 혼자서는 사람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은 그 사람을 인정해주고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을 필요로 한다. 동시에 다른 사람과 구분되는 것을 자기 안에서 발견할 수 있어야만 한다. 한 마디로 함께 하면서 구분될 수 있어야만 비로소 하나의 '존재'로서의 가치를 얻는다는 것이다. 


 이야기 속에서 엄마가 갑자기 사라지고 난 후 사람들의 반응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었다. 

하나는 '죽었다'였다. 당연히 그럴 수 있다. 갑자기 사라졌을 뿐 아니라 몇 년이 지나도록 어떤 형태의 흔적도 발견되지 않는다면 '죽은 것'이나 다름 없다고 여길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살아있다'였다. 마지막까지 살아 있다고 믿은 것은 엄마였다. 아빠는 딸이 죽었을 것이라 생각했으며, 이후 엄마와 이혼을 하고 고향으로 돌아간다. 딸이 돌아온 후에도 서먹한 관계에 머물뿐 아니라 손자와도 어우러지지 못한다. 딸과 아빠의 관계는 어떻게 보면 이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사건에서의 관계를 상징하는 것처럼도 보인다. 본래의 범인이 아빠였기에 둘은 화해하지 못하고 다시 멀어진 것 아닐까.


 묘한 말이 괜스레 길어져버렸지만 이 책을 읽으며 아들 잭에게 거의 공감하지 못한 것을 생각하면 이 책에서 느껴지는 묘한 공감대는 정말 기묘한 것이다. 이 기묘함의 원인이 앞에서 이야기한 '누구나 갖고 있을 수 있는 자기 안의 방'에 대한 생각이란 걸 안다.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었던 범인과 의외로 번화한 곳에서 벌어진 끔찍한 사건이라는 의외성은 오히려 아무렇지 않게 느껴졌다. 


 이런 이야기에서 '악의 평범성'을 이야기 하고 싶지는 않다. 악도 선도 실제로 평범하기 때문이다. 동시에 특별하기도 하고 말이다.

엄마와 잭이 탈출한 이후에 세상은 아들에게 여러가지 칭호를 가져다 붙인다. 용감한 아이라거나 아름다운 천사 같은 말들 말이다. 그러나 잭은 자신의 마음을 '무섭-용감'이라는 식으로 단일한 것이 아닌 모호한 것으로 표현한다. 나는 잭의 표현이 오히려 진실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용감하기만 한 사람이 어디있겠는가? 무섭기도 하지만 용기를 내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 정확하지 않은가 말이다. 천사같다는 칭호에 잭은 자신은 천사가 아니라고 한다. 날개가 없기 때문에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생각하지 않는 것, 그렇다고 여기지 않는 모습까지도 타인이 말하는 대로 받아들이는 경향을 갖고 있다. 이것은 굳이 정정하거나 거부할 필요가 없어서 이기도 하지만 자신을 바로 알지 못한다고 여기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고작 다섯 살인 잭은 자신이 어떤 상태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자신이 무섭-용감 상태이며 천사같은 존재가 아니라는 것까지도 알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순수함이라는 말로 얼버무릴 수 있는 특징은 아니다. '솔직함'이지만 그것이 '정말 그렇게 여기기 때문'이 아닌 '그렇지 않다는 것은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게 재밌다는 이야기다. 


 물론, 이런 이야기는 나만 재밌을 수도 있다. 솔직함이면 솔직함이지, 정말 그렇게 여기기 때문이건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았기 때문이건 하는 것이 중요하냐고 할 수도 있다는 거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인간은 학습된대로만 행동하는가? 가치있다고 배운 것을 정말 가치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는가? 다른 사람에게 물어볼 것도 세상의 누군가가 어떻게 하는지 지켜볼 것도 없이 스스로에게 물어보면 그 답이 나올 것이다. 

 나의 대답은,

"인간은 학습된 대로만 행동하는 것은 아니며 동시에 가치있다고 배웠다고 해서 그 가치에 공감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내가 그렇기 때문이다. 학습된 것보다 하고 싶은대로 행동하려고 하고, 가치있다고 가르쳐주는 것에 가치를 부여하기보다 스스로 가치있다고 믿는 것을 찾으려고 한다. 고생스럽지만 그렇게 하는 거다. 잭에게는 사실 반드시 탈출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엄마가 간절히 탈출을 바라고 원했다. 그래서 마치 소원을 이루어주는 지니처럼 죽은 척하고 밖으로 나가 엄마를 구한 것이다. 잭은 어린 나이에 이미 가치의 충돌을 경험한 셈이다. 자신을 위한 가치와 자신이 이루어주고 싶은 가치 사이를 저울질 한 후에 움직였기 때문이다. 다섯 살 생일 전까지 엄마는 그 공간이 마치 '완벽한 것'처럼 가르쳤던 것 같다. 티브이를 통해 보는 '모든 것'이 '가짜'라고 가르친 것에서 그렇게 볼 수 있는 단서가 생긴다. 물론 그것은 자기 방어적인 '생존 방식'이었을 수도 있다. 언제까지 갇혀 지낼지 모르는 상태에서 아이에게 경험해보지 못한 현실을 가르치려고 해도 잘 되었을 것 같지 않다.


 이렇게 이야기를 자꾸 적어봤자, 횡설수설만 늘어날 것 같으니 적당히 마무리 하기로 한다. 


 느닷 없이 결론을 내리자면 이렇다.

"결국 자기의 삶은 자신의 삶이어야 한다."는 거다. 


 누구나 자기 안에 자기만의 완벽하고 또 안전한 방 하나쯤을 가질 수는 있다. 그러나 그 방 안에 다른 사람을 가둬서는 안 된다. 물론 자기 자신을 가둬서도 안 되고 말이다. 

 인간은 자유로운 동안 인간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스스로 자유를 포기하는 것도, 다른 사람의 자유를 박탈하는 것도 서로의 행복을 망칠 뿐, 누구도 행복하게 만들지 못한다는 것이다. 


 뭐,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드는 그런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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