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요나스 요나손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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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웃기다. 

제목은 그냥 던져 본 말이다. (본래 이 글의 제목은 이 책이 웃기다고? 삶이 우스워? 였다)

하지만 이 책이 주는 웃음은 '폭소'라기보다 '쓴웃음'에 가까운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100년을 살고도 끝나지 않은 삶에 대한 연민이 아니다. 그 모든 순간에 담겨있었을 몸부림에서 느껴지는 충실한 삶에 대한 갈망이 어쩐지 서글프게 느껴진 탓이다. 

 이 이야기를 한 줄로 줄이면 이렇게 되지 않을까?


"이렇게 된 거 어쩔 수 없지, 가볼까?" 


요나스 요나손이라는 작가에 대해서 아는 것은 거의 없다. 이 작품이 데뷔작이라는 것은 분명 놀라운 것이지만 단지 웃음을 주려고 썼을 것 같지가 않다. 웃음은 덤, 100세 노인의 삶이 주는 교훈이 본 아닐까.

그래서 이 감상에서는 그 교훈이 뭔지 아주 잠깐 생각해보려고 한다. 

깊이 말고 얕게, 길게 말고 짧게.


 이야기는 100세를 맞은 칼손 알란이라는 노인이 창문을 넘어 도망치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러고 나서는 마치 타임머신으로 오가는 것처럼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노인의 100년 인생을 중계한다. 이 노인의 삶은 그야말로 파란만장해서 세계 역사의 곳곳에 발자취와 인연을 남긴 화려한 경력을 갖고 있다. 미국의 대통령들과 절친이었다거나 핵폭탄의 개발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거나 하는 것도 그 경력 가운데 일부다. 한 번은 히말라야를 걸어서 넘기도 했다. 분명 보통 노인은 아닌 게 분명하다. 


 이 노인은 100년을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살았던 걸까?

100세나 되어서 창문 밖으로 도망쳐야 할 만큼 간절히 하고 싶었던 것은 뭘까?

이 우스운 이야기는 이런 흔한 주제들을 떠올리게 한다. 

 100년을 사는 동안 친하게 지냈던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죽어버렸다. 무엇인가 간절히 하고 싶다거나 이루고 싶다는 것도 없다. 


바라는 것은 오직 하나, 죽을 때까지 살아가는 것이다. 


살아가는 것?

죽지 않는 한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니던가?

아니다. 

노인에게는 죽지 않은 것과 살아가는 것은 엄연히 달라 보인다. 


일체의 자유를 빼앗긴 상태로 계획된 시간에 정해진 일과를 반복하는 것은 노인의 '삶'과는 거리가 너무나 먼 것이었다. 당연히 창문이라도 넘어서 도망쳐야 할 수밖에 없었던 거다. 


 100년이 넘는 노인의 삶을 따라가면서 이상하게 느낀 것이 몇 가지 있다.

첫 번째는,

"노인에게는 '반드시' 해야만 하는 것이 없다."는 거다.

노인은 꿈을 꾸지 않는다. 무엇이 되고 싶다거나, 무엇이 되고 싶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도 100년 동안이나 '목표' 없이 살아간다. 이런 삶은 보통의 '이상적인 삶'과는 거리가 너무나 먼 삶이다. 

 보통은 목표를 정하고 그것을 이루는 것, 즉 성취가 삶의 목표일 때 비로소 그 삶이 가치를 갖는다고 생각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 노인은 그런 것이 없다. 거의 즉흥적으로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뿐이다. 치명적인 실수에 대한 후회나 반성도 없다. 사람 하나를 차와 함께 날려버렸을 때조차 "뭐, 어쩔 수 없지." 식으로 생각해버리고 만다. 


 안달복달하지 않는 이런 성품이 장수의 비결일 수도 있겠다. 그래도 이런 삶을 따라 하는 사람이 많아지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두 번째는,

"노인이 결코 서두르지 않는다."는 거다.

어떤 상황에서도 노인은 당황하지 않는다. 당황하지 않았기에 서두르지 않는 것인지, 서두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기에 당황하지 않는 것인지는 분명치 않지만 목숨이 오가는 상황에서도 어디까지나 침착하게 때를 기다리며, 기회가 왔을 때 확실하게 붙잡는다. 이러한 '통찰'이라고 할 만한 뛰어난 감각은 언제부턴가 노인의 삶에 저절로 들어와 있는 것처럼 보인다. 

 '바쁘다'거나, '서두르라'거나, '빨리'라는 말을 달고 사는 우리 보통 사람들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노인은 느긋한 삶을 산다. 처음부터 자신이 100년이나 살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임에도 인도네시아의 해변에서 10년 넘는 시간 동안 파라솔에 누워 술만 마시고 있을 정도로 느긋하다. 

 노인에게는 이 시간이 '아깝다'는 개념 자체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시간을 몰아세운다고 빨리 흘러가거나 위협한다고 늦게 가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노인의 태도가 인간의 삶을 더 풍요롭게 해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인의 삶을 대하는 태도는 기이하다는 말 외에는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독특하다. 


세 번째는,

"노인이 사랑에 빠지는 여자가 없다."는 거다.

이 말은 사실 이야기의 말미에 가면 다르게 적어야 하는 말일 거다. 그러나 노인의 100년 삶에 격정적인 '사랑'이 없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감정, 사랑이라는 달콤한 고통이 없었다는 것 또한 장수의 비결이었을까?

 노인에게도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은 있었다. 결코 노인이 우정이나 사랑을 거부하거나 없는 것으로 치부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그래서 '사랑'이 결핍되어 있다는 것이 더 기묘하게 느껴진다. 

 "왜 노인은 사랑에 빠지지 않았을까?"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이 수수께끼는 풀리지 않는다. 아마도 앞으로도 풀리지 않을 거다.

아무렴 어떤가.


네 번째는,

"모든 것이 적도에서의 나비의 날갯짓이 만든 태평양의 태풍 같은 나비효과로 연결되어 있다."는 거다.


 '어떤 삶은 다른 삶보다 더 가치가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다."고 말할 수도 있을 거다. 

대통령과 일반인이 같다고 생각하지 않을 테니 말이다. 그러나 이 노인에게는 그 대통령이나 일반인이나 동등한 존재로 인식된다. 더 존중할 필요도 없고, 더 업신여길 필요도 없이 그냥 다를 것 없는 거다. 노인은 세계를 다니며 사소하지만 커다란 '가능성'들을 심어 놓는다. 예광탄 하나가 블라디보스토크를 불바다로 만든다거나, 한 번의 거짓말이 어린 김정일에게 치명적인 불신을 심어 놓는다거나 하는 것이 그런 가능성들이다. 

 모두가 이 노인처럼 100세 넘게 사는 것은 아니다. 이 노인처럼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 가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런 삶이라고 해도 가치가 덜 하다거나 덜 중요하다는 것은 아니다. 노인은 의도적으로든 우연히든 실수로든 많은 사람을 '날려'버린다. 이렇게 날아가버린 사람들의 삶 역시 본인에게는 유일한 것이었을 거다. 하지만 돌아보면 이렇게 날아간 사람들 대부분은 자신의 삶이 다른 사람의 삶보다 '더 가치 있다'고 믿고 있는 사람들인 경우가 많은 것처럼 보였다. 함부로 하는 사람, 무례한 사람, 잔인한 사람들이 주로 날아갔으니 말이다. 

 노인의 한 마디가 핵폭탄을 낳았다는 설정은 사소한 존재의 무신경한 행동이 어떤 결과를 낳을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이른바 적도에서의 나비의 날갯짓이 태평양의 섬에서는 태풍이 되는 것 같은 나비효과다. 


 노인의 삶은 온갖 파란을 거쳐 안정에 닿는다. 그러나 살아 있는 동안에 노인은 계속해서 살기 위해 몇 번이고 창문을 넘을 것이다. 노인의 삶은 얼핏 목적이 없어 보이지만 다른 모든 것을 뛰어넘는 한 가지 의지는 엿보인다. 

"스스로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

노인은 누구에게 의지하지도, 간섭받을 생각도 없다. 그저 자신의 삶을 충실하게 살아가고자 할 뿐이다. 

그런 노인을 막는 존재들을 노인은 시원하게 날려버린다.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내 삶이다. 방해하지 마라."


 노인과 일당의 이야기는 황당한데다 웃기다. 거기에다가 그럴듯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어딘가 따뜻한 게 느껴지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노인은 누구든 날려버릴 수 있지만 아무나 날려버리거나 함부로 죽여버리지는 않는다.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과 갈등을 누그러뜨리는 능력 또한 갖고 있는 거다. 


 노인처럼 세계를 둘러보지 않아도 괜찮다. 

유명인들과의 친분이 없어도 좋다. 

그러나 나 역시 살아있는 동안 내 삶을 충실히 살아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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