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성의 부름.화이트 팽 펭귄클래식 137
잭 런던 지음, 오숙은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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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평화 
자유는 예속 
무지는 힘
<1984년> 청목 출판사 1994년 초판

요즘 미국에서 새롭게 주목받고 있는 조지 오웰의 <1984년>.

위에 적은 세 줄의 문장은 <1984년>의 주인공 윈스턴 스미드가 속한 오세아니아의 슬로건입니다.

시대는 다르지만 조지 오웰의 디스토피아적 예언이 여전히 유효하기에, 지금도 그 의미와 가치를 잃지 않고 있죠.


 <야성의 부름>, <화이트 팽> 감상을 적으면서 조지 오웰을 언급한 이유는 <1984년> 속 슬로건과 이 두 작품의 메시지에 닮은 부분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야생'.

야성, 때로는 야만이라고 부르는 자연 상태에서는 모든 순간, 모든 것이 전쟁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겁니다. 적어도 현대인이 생각하는 '평화'는 찾을 수 없죠. 하지만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평화에는 많은 제약과 조건이 따릅니다. '자유'를 내주고 얻은 평화인 셈이죠. 

 그렇다고 '자유롭지 못하다'고만 볼 수도 없는 건 우리에게는 '구속을 선택할 자유'도 있기 때문입니다. 


<1984년>은 많은 판본으로 출간되었는데 굳이 청목 출판사의 '예속'을 골라 적은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굴종이나 구속으로 번역한 경우도 있는데 틀리지는 않지만 예속이라고 적었을 때의 느낌은 어느 정도는 자발적이고, 때로는 적극적이며, 순응하고 있는 듯하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그렇게 느끼지는 않을 겁니다. 적어도, 저에게는 그렇다는 이야기니까요.


 예속된 상태가 지속되기 위해서는, 그것도 평화롭게 계속되기 위해서는 너무 많은 '앎'은 방해가 될 수 있습니다. 

'무지'.

여기서 무지라고 하는 건 '아무것도 모른다'는 의미라기보다, '불필요한 것은 알려고 하지 않는다'는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1984년> 속 슬로건을 정리해볼까요.

 생존에 필요한 것만을 알고, 
생존과 안전을 위해 예속되는 것을 선택함으로써 얼마간의 자유 대신 안락함을 구하고, 
상시적인 전쟁 상태에서 벗어나 일상의 평화를 누린다. 

  제게는 많은 사람들, 많은 책에서 가르치고 있는 것과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세상은 타협하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어쩔 수 없기 때문이며, 다들 그렇게 한다고 말하죠.


잭 런던의 두 작품, <야성의 부름>, <화이트 팽>은 그런 자유와 예속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적어도 제게는요.


 <야성의 부름>, <화이트 팽>은 비슷하지만 완전히 반대되는 이야기입니다. 

<야성의 부름>은 따뜻하고 풍요로운 환경에서 나고 자란 한 마리의 개가 납치되어 팔려가면서 시작됩니다. 야성이나 야생의 투쟁과는 거리가 멀었던 '벅(개의 이름)'은 익숙하지 않은 세계와 맞닥드리면서 충격과 공포를 느낍니다. 하지만 변화된 환경에 적응하면서 잃어버린 야성을 되찾게 되고, 마침내는 아주 오래전, 개가 인간에게 길들여지기 전의 자유를 찾게 됩니다.

<화이트 팽>은 야생에서 태어난 늑대의 이야기입니다. 어릴 때부터 자연의 경이로움과 생존 경쟁의 혹독함을 몸에 익힌 '화이트 팽(늑대의 이름)'이지만, 인간과 맞닥드리면서 야성보다는 종속을 선택하죠. 선택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건 생존의 문제였습니다. 살아남기 위해 인간의 곁에 머물기를 선택한 거였던 겁니다. 하지만 이 선택이 화이트 팽을 괴롭히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이 주는 '사랑' 안에서, 유희처럼 야성을 즐기며 삶을 즐기죠. 


 벅과 화이트 팽, 어느 쪽의 선택이 더 옳다거나 낫다고 말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서로에게 선택의 이유가 있고, 그 선택에 따르는 책임도 감당하고 있으며, 그들이 선택한 삶을 괴로움으로 여기지 않으니까요. 둘 모두 옳은 선택을 했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겁니다.


 <야성의 부름>, <화이트 팽>은 야성을 이야기하지만 단순하지는 않습니다. 벅과 화이트 팽은 문명과 자연을 상징하는 것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을 대하는 '인간의 모습'은 몹시 폭력적이고, 가학적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사랑으로 이들을 대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죠. 

 잭 런던은 문명을 비판한 작가로도 잘 알려져 있는데, 인간이 자연을 정복의 대상이나, 단순히 이용하고 개발하는 사물로 대하는 모습을 비판한 것이 아닐까 합니다.


 <야성의 부름>에서 벅이 안락한 세계에서 야성으로 옮겨갈 때 세례라도 되는 것처럼 매를 맞는 장면이 나옵니다. 벅의 말을 빌리자면 '몽둥이와 이빨의 법칙'인데, 야성의 세계에서는 인간의 몽둥이와 상대의 이빨을 조심해야 한다는 단순하지만 생존과 직결되는 중요한 교훈이죠. 여기서 몽둥이와 이빨이 동일하게 다뤄졌다는 건, 인간의 야만성을 이야기하고 있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화이트 팽>에서 잭 런던은 인간에 대해 이렇게 서술합니다.

황야가 하는 이 가운데 무엇보다 잔인하고 끔찍한 것은 인간을 짓밟고 깔아뭉개 굴복시키는 것이다. 인간, 인간이야말로 가장 부산스러운 생명이었고, 모든 움직임은 결국에는 움직임을 멈추어야 한다는 금언에 항상 반항하는 생명이었다.
<화이트 팽> 中

인간은 자연의 법칙에 순응하기보다는 자연을 정복하는 걸 선택했습니다. 이런 생각은 특히 서양에서 두드러지는데, 그 결과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그대로 드러나 있습니다. 너무 많은 개발과 파괴는 인간이 감당하지 못하는 재앙을 예고한다는 전조가 곳곳에서 보이는 지금의 모습으로요. 지금의 태도를 바꾸기보다 더 발전시켜 극복하겠다는 게 지금의 방향처럼 보입니다. 인간은 늘 그래 왔기에, 앞으로도 잘할 수 있을 거라며.


 그 결과는 아직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아직은요.


잭 런던은 야성의 생존을 최우선 문제로 다루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사랑의 문제'에 마음을 쏟습니다. 

함께 사냥했던 날들, 함께 쓰러뜨렸던 사냥감, 함께 견뎠던 굶주림의 기억은 잊혔다. 그런 것들은 과거의 일이었다. 당면한 문제는 사랑이었다. 사랑은 언제나 먹이를 구하는 것보다 가혹하고 잔인하다.
<화이트 팽> 中

이 장면은 함께 무리를 지어 사냥을 하던 동료 늑대와 암컷을 사이에 두고 싸움이 일어나는 부분을 그린 겁니다. 먹이를 구하는 문제보다 사랑을 얻는 것,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피를 이어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거죠. 낭만적이라고 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인간의 사랑조차 이와 다르지 않다고 말하기 어려운 순간이 많습니다. 맹목적인 사랑, 오직 사랑, 생존을 위한 사랑.


야생에는 하나의 법칙만이 존재합니다. 바로 '생존의 법칙'이죠. 사랑조차 생존을 위한 거라고 적은 건 그런 의미입니다.

이 분류법에서 법칙이 생겨났다. 생명이 노리는 것은 고기이다. 생명 그 자체도 고기이다. 생명은 생명을 먹고 산다. 세상에는 먹는 것들과 먹히는 것들이 있다. 먹느냐 먹히느냐, 이것이 생존의 법칙이었다. 그는 이 법칙을 명확히 공식화하진 않았다. 심지어 그 법칙을 생각하지도 않았다. 아무 생각도 없이 그저 법칙대로 살아갈 뿐이었다.
<화이트 팽> 中

'먹느냐 먹히느냐', '죽느냐 사느냐', '올라가느냐 내려가느냐'. 

생존의 법칙은 이분법입니다. 

인간이 하는 것처럼 명확한 공식으로 만들지는 않지만 분명 그런 모습으로 존재합니다. 이분법적 사고는 단순해서 저급하다고 생각하지만 인간 세상의 많은 부분 역시 이분법적으로 분류됩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너는 누구 편이야?"

이 물음에는 내 편이 아니면, '적'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이분법적이죠. 지극히. 


 <화이트 팽>은 인간을 사랑해서 그들의 곁에 머무는 늑대 이야기지만, 화이트 팽이 느끼는 사랑은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사랑과 다릅니다.


신을 가지는 것에는 봉사가 따른다. 화이트 팽에게 그것은 의무와 두려움의 봉사였지, 사랑의 봉사는 아니었다. 사랑이 어떤 것인지 그는 알지 못했다. 그는 사랑을 경험해 본 적이 없었다.
<화이트 팽> 中

화이트 팽은 사랑을 '의무와 두려움의 봉사'라고 말합니다. 두려움은 몽둥이에 대한 두려움, 처벌, 버림받음, 죽음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경험하지 못한 것은 알기 어렵습니다. 인간은 '학습'을 통해 간접적으로 배우기도 하지만 동물은 그러한 과정을 경험하기 어려우니까요. 화이트 팽이 만약 진정한 사랑을 경험한다면, 조금은 달라질 텐데 말이죠.


이야기의 끄트머리에 동물처럼 학대당하고, 가혹한 대우만을 받았던 한 범죄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범죄자는 야성의 잔혹함을 이겨내고 살아남기 위해 누구보다 비열하고 잔혹해졌던 화이트 팽의 모습과 겹쳐집니다. 굳이 늑대 이야기에 인간 범죄자의 성장 배경을 넣은 건 인간 역시 짐승처럼 대우하면 짐승보다 나아질 수 없다는 단순한 교훈을 주기 위해서였을 겁니다. 너무 단순하고 명확해서 식상하게까지 느껴지지만 우리가 인간을 얼마나 인간답게 대하고 있는지 생각하게 합니다. 


 카리스마, 체벌, 처벌, 제재, 불이익. 

부정적인 기재를 통해 인간을 조종하고 지배하는 일은 지금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사고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는 존재임을 알지만 신뢰하기보다는 복종시키는 게 쉽다고 생각하죠. 마치 자연이 생각할 수 없는 존재이기에 정복하는 것이고, 동물이 학습할 수 없기에 각인시키려고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야성의 부름>, <화이트 팽>은 그런 인간의 모습을 돌아보게 합니다. 오래전에 쓴 작품이지만 이질감 없이 편안하게 읽혀서 깜짝 놀라게 될 거예요. 


 오래전 <견신>이라는 만화에서 개들의 신은 인간을 멸망시키기 전에 전령을 보내 인간을 관찰하게 합니다.

그때 내린 명령이 "인간을 보라"였습니다. 

 문학은 인간을 들여다보게 합니다. 복잡해서 알 수 없었던 모습도 쪼개고 나누어 보여줍니다. 그 모습들이 하나로 합쳐지는 과정이 책을 읽고 생각하는 과정이 아닐까 합니다. 


 야생의 이야기로 시작해서 마지막에는 책 읽기를 권하는 걸로 끝나버렸군요.

시작하며 <1984년>의 세 슬로건을 이야기했습니다. 


전쟁은 평화, 자유는 예속, 무지는 힘.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이 슬로건, 우리 삶에는 어떤 모습으로 녹아들어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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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애덤 스미스 씨, 저녁은 누가 차려줬어요? - 유쾌한 페미니스트의 경제학 뒤집어 보기
카트리네 마르살 지음, 김희정 옮김 / 부키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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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경제학의 아버지,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에서 언급했다는 말이죠. 

애덤 스미스는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말로 '시장'의 작용을 설명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애덤 스미스의 경제학에는 보이지 않는 손이 하나 더 있습니다.

바로, 애덤 스미스의 식탁에 매끼 식사를 차려 올리는 '어머니의 손' 말입니다.


 20년쯤 전 일로 기억합니다. 

당시 한 여성이 이혼을 하면서 재산 분할에 대한 권리를 청구했는데, 재판에서 '가사노동'의 가치를 고려한 위자료도 함께 청구했던 거죠. 그런데 그 액수가 어마어마했습니다. 재산을 분할할게 아니라 전부 줘야 할 정도였죠. 재판 결과가 어땠는지는 기억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때의 경험은 '가사노동'이 결코 공짜가 아니라는 걸 깨닫게 했죠.


 언제부터였는지 알지 못하지만 사회를 지배하는, 주도하는 개념을 차지하고 있는 경제학만을 보고 배워왔습니다. 경제는 활성화시켜야 하고, 경쟁은 자유로워야 하며, 그를 위해 끊임없이 능력을 계발해야 하고, 뒤처지면 도태된다는 위기의식과 함께 말이죠. 

 이유는 분명하지 않지만 한국 사회는 여성의 사회 참여를 부정적으로 생각한다고 여겨왔습니다. 가부장적인 인식도 있었고, 여성이 사회생활을 하는데 불편함이 너무 많아 보였으니까요. 같은 교육을 받고, 오히려 더 나은 성적을 내도 직장에서는 더 낮은 급여를 받고, 승진의 기회도 적다는 이야기도 그런 생각을 부추겼습니다.


 솔직히 그런 인식과 차별의 문제들, 불평등과 부당한 대우들을 단순히 우리 사회의 문제라고 생각해왔습니다. 그래서 선진국들은 역시 다르다며, 당당한 커리어 우먼들을 내세운 외국 사회를 마냥 아름답다고 믿었죠.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차별들과 불평등하고 부당한 대우는 단지 우리 사회의 문제가 아니라 여성이 있는 모든 곳에서 일어나는 문제였습니다. 


 <잠깐, 애덤 스미스 씨 저녁은 누가 차려줬어요?>는 이런 문제들을 페미니즘 경제학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경제학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여성 문제에 관심을 둔 적이 없어 선후 관계를 잘 몰라도 이해할 수 있는 주제를 통해서 말이죠.  

 이 '주제'는 앞에서 이야기한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 애덤 스미스의 식탁에 식사를 차려 올리는 '어머니의 손'을 말한 겁니다.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 어느 집에서나 '여성', 엄마, 할머니, 아내, 심지어는 딸이 집안일을 도맡아 하고 있을 겁니다. 말이 집안일이지, 사실은 이 과정은 대단히 복잡하고, 많은 수고와 시간이 필요한 작업입니다. 요리, 청소에서부터 온갖 잡다한 일까지 더하면 하루가 모자라다고도 하죠. 

 이러한 '보이지 않는 일'을 경제학에서는 '생산활동'이 아니라는 이유로 제외해 왔습니다. 동시에 집안일을 도맡아 하고 있는 여성조차 보이지 않게 만들었습니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여성을 단순히 보이지 않는 존재로 만들었을 뿐 아니라, '가치 없는 존재' 혹은 '무능한 존재'로 치부해버렸다는 데 있습니다. 가정은 물론 사회, 국가의 유지를 위해서는 누군가는 집안일을 해야만 합니다. 아주 먼 옛날에는 사냥과 채집이라는 활동이 주된 경제활동이었기에 여성은 가사와 육아를 담당하는 식의 책임 분담이 자연스러웠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현대 사회는 그때와 전혀 다릅니다.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명백히 다르죠. 하지만 경제학에서는 여전히, 그렇게 믿는 듯 보인다는 겁니다.


 경제학은 여성의 기여와 가치를 배제했을 뿐 아니라 '경제의 원리'라는 것도 왜곡시켜왔습니다. 경제의 시작은 '경쟁'이라는 식으로 말이죠. '무한 경쟁'이라는 말이 귀에 익숙할 겁니다. 경제학은 모든 걸 '이윤 추구'로 수렴시켜버립니다. 경제를 예측하는 사람들, 계획하는 사람들이 만드는 모델은 이상적인 '경제적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데, 이들 경제적 인간은 합리적으로 사고하고, 언제나 최대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며, 사랑이나 인정, 외로움과 같은 건 느끼지 못하는 존재입니다. 


 경제 정책이 현실과 동떨어졌다고 느낀 적이 있으실 겁니다. 아주 당연한 일입니다. 정책을 입안하는 사람들이 생각한 '경제적 인간'과 실제적 인간은 너무 다르니까요. 실제적 인간은 잠을 자야 하고, 외로움과 동정 같은 감정을 지니고 있고, 때로는 합리적이지 않은(사실은 거의 언제나 합리적이지 않은) 선택을 하는 존재입니다. 전혀 다른 존재를 대상으로 같은 정책이 실행되다 보니 이상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는 거죠.


 '경제적 인간' 존재의 비인간성만이 문제 되는 게 아닙니다. 이 존재의 성별은 '당연히 남성'이며, 남성은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며, 객관적이고, 과학적이라는 인식도 함께 있다는 겁니다. 영어에서의 자연(MOTHER NATURE)이라는 표현도, 여성이 상징하는 게 '자연'이라는 인식에서였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자연은 정복되어야 하고, 수동적이며, 무력하고, 의사를 표현하지도 못한다는 부정적인 면에서 말이죠. 


 그는 그가 제거해 버리고자 하는 현실에 반응해 출현한 존재다. 육체, 감정, 의존성, 불안감, 취약성 말이다. 그것은 수천 년간 사회에서 여성들의 자리라고 말해왔던 특징이기도 하다. 경제적 인간은 그런 것들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자신이 그것을 직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거기서 도피하고, 고뇌한다. 그리고 우리는 현기증이 날 정도로 깊은 그의 두려움에 공감한다. 바로 이 때문에 우리가 경제적 인간에게 매혹되는 것이다. 
경제적 이론은 도피처가 되었다.
 <잠깐, 애덤 스미스 씨 저녁은 누가 차려줬어요?> 中

 남성들이 만든 이론에, 남성이 중심이 된 경제학과 남성 위주로 돌아가는 경제 구조. 잘못된 구조가 먼저인지, 잘못된 인식이 먼저인지는 알지 못하지만 이러한 요소들은 잘못이 잘못이 아닌 것처럼, 오히려 정상적인 것처럼 믿게 만들어버렸습니다. 차별이라는 생각을 못하거나, 차별이라고 생각하더라도 지금까지 그래 왔으니 문제없다며 무시하게 만들어버렸다는 겁니다.


  <잠깐, 애덤 스미스 씨 저녁은 누가 차려줬어요?>에서 다루는 문제점들은 처음 제기되는 것이 아닙니다. 지속적으로 제기되어 왔지만 해결되지 않고 미뤄져 온 문제입니다. 

 여성 차별, 여성 혐오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전체의 문제입니다. 

저를 포함해서, '나는 아니다'라고 말하는 이들도 모든 순간에 여성과 남성을 동등하게, 조금의 차별도 없이 대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겁니다. 표현하는 언어가 그렇게 되어있고, 사회 구조가 그러하며, 집안에서도 명백하니까요. 


 얼마 전 정부에서 '가임기 여성 지도'를 만들었다는 사실이 밝혀져 경악하게 한 일이 있었습니다. 더 최근에는 여성들의 사회 진출을 방해, 차단하기 위해서 '불이익'을 줘야 한다는 문건을 작성한 정책 연구원도 있다고 합니다. 나아져야 할 것이, 당연히 그렇게 되어야 할 것조차 나아지게 하기가 이렇게 어려울 수 있는지.


  <잠깐, 애덤 스미스 씨 저녁은 누가 차려줬어요?>은 경제학의 이론과 적용, 사회 현상들을 두루 돌아보며 곳곳에 숨어있는 '차별'을 드러내 보여줍니다.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왔던 것이 사실은 전혀 당연한 것이 아니며, 보이지 않았던 것들, 보지 않으려고 했던 것들이 전혀 가치 없는 게 아니라 가치를 측정할 수 없을 정도라는 사실도 제기합니다. 

 

 학교에서 배우기를 '가정'은 휴식과 재생산의 공간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가정에 돌아와도 휴식할 수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재생산은커녕, 재 소모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이름은 '여성'입니다. 누가, 어떤 권리로 여성을 보이지 않는 존재로 만들 수 있을까요.

어떻게 '의미 없는 일'과 여성을 등식에 넣을 수 있는 걸까요. 


 경제학이 나아가야 하는 방향은 명확합니다. 

지금까지 발견한 문제들 가운데 애써 무시하고 못 본 척 해왔던 여성 문제를 포함시키는 겁니다.

가정에서의 활동(남성이 하든 여성이 하든)도 경제에 포함시키는 겁니다. 왜 집안일을 가사도우미에게 맡겼을 때만 경제활동이 되는지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지금까지 당연하다고 여겨져 왔던 부당하고 불합리한 일들을 바로 잡아야만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식과 함께 구조도 변해야만 합니다.


 어머니가 없이 태어난 사람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여자가 낳은 이는 나를 해칠 수 없다"라며 자만했던 맥베스를 죽인 어머니의 배를 가르고 태어난 자에게도 어머니는 있었습니다. 

 

  <잠깐, 애덤 스미스 씨 저녁은 누가 차려줬어요?> 저자 카트리네 마르살도 이야기하는 바지만 인간은 연약하게 태어납니다. 보호와 양육이 꼭 필요한 존재로 말이죠. 그 기간이 없다면 인간도, 인간의 사회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의 경제학은 그러한 아주 기본적인 사실을 외면해왔습니다. 그렇기에 '틀렸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겁니다.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

작가 치마만다 은고지 아다치에의 말이자, 책 제목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태생을 생각한다면, 삶의 시작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당연히 페미니스트여야 합니다. 아니었다면 되기 위해 애써야만 합니다. 

 우리는 자유롭고, 우리는 평등합니다. 그에 대한 대우 역시 동일해야 합니다. 


 경제는 무한경쟁으로만 돌아가지 않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경쟁으로만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라, 동정과 이타심, 희생정신까지도 지니고 있습니다. 

어쩌면 경제는 경쟁이 아니라, 사랑을 중심으로 돌아가야 하는 건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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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 동안의 고독 - 1982년 노벨문학상 수상작 문학사상 세계문학 6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안정효 옮김, 김욱동 해설 / 문학사상사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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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운 이야기로 시작할 수밖에 없게 됐습니다.
수치스러운 일이나 악행을 저지른 건 아닙니다. 
다만 '읽는 자'가 되어서 여전히 '읽는 데' 의미를 두고 덮고만 책을 한 권 더 늘리고 말았다는 게 부끄럽다는 이야기입니다. 
제임스 조이스 <율리시스>가 그랬고, 모옌 <열세 걸음>도 그랬습니다. 더 열심히 읽고, 깨우쳐 가는 걸 반성으로 삼아야겠습니다. 그런 다짐은 앞으로의 일이기에, 지금부터 적는 건 그저 <백 년 동안의 고독>을 '읽어는 봤다'하는 기록에 불과하다는 걸 알려드리고 싶었습니다. 기록일 뿐이니 너그러운 마음으로 읽어주세요.

 신화, 고대로부터 인간은 초월적인 세계에 대한 도전을 계속해왔습니다. 그런 도전을 괘씸하게 여긴 신이 저주를 내리거나, 파멸시킨 이야기가 세계 곳곳에 남아있죠. 
 한두 가지만 떠올려 보면, 신의 영역에 도달하고자 쌓아나간 바벨탑이 흔적조차 남기지 못하고 사라지고, 이후 언어가 달라져 인간들이 서로 소통하지 못하고 반목하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먼저 떠오릅니다. 
 트로이의 공주 카산드라는 아폴론의 구애를 받아들이는 조건으로 예언 능력을 요구하고는 예언 능력만 받고 구애를 거절해 그 누구도 카산드라의 예언을 믿지 않는 저주를 받게 되죠. 

 이 이야기들은 사람들의 입으로 전해지다가, 누군가에 의해 양피지 등에 기록되어 현재까지 남아 교훈이 되고 있습니다. 많은 기록, 문학이 그렇지만 현재에 의미가 없다면, 아무리 가치가 있다고 해도 오래 전해지고 남겨질 수 없습니다. 그 기록이 오래된 문자로 되어 있다거나 난해하다면 더욱더 간단히 명맥이 끊어져 버리겠죠. 

 옛날이야기를 하고, 그게 전해지느니 끊어지느니 하는 이야기를 보태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백 년 동안의 고독>이 그 옛날이야기들처럼, 오래되었고 난해하지만 그럼에도 앞으로 오랫동안 전해지며 읽힐 거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뭐, 아닐 수도 있지만요.

 <백 년 동안의 고독>은 부엔디아 가문의 6대, 100년 역사를 담고 있습니다. 고향을 떠난 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아와 부인 우르슬라 이구아란이 '마콘도'라는 지역에 정착하며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이 책 표지에는 '마술적 리얼리즘' 소설이라는 문구가 박혀있는데, 리얼리즘은 잘 모르겠지만 '마술적'이라는 데는 확실히 공감합니다. 하늘을 나는 양탄자가 등장하고, 죽었던 자가 살아 돌아오며, 죽은 후에 환영으로 남아 특정한 사람들과 대화하기도 하고, 오이디푸스의 신탁처럼 결코 빗나가지 않을 '돼지꼬리 달린 아이가 태어난다'는 예언이 멜키아데스의 양피지에 적혀 있기도 합니다. 

 부엔디아 가문이 처음부터 위태로웠던 건 아닙니다. 오히려 번영하고 번성하기를 계속하면서 예언을 잊어버리기도 하죠. 하지만 부엔디아 가문에 종종 태어나는 '고독한 존재'들의 기구한 운명은 이야기가 결코 좋게 끝나지는 않을 거라는 예감을 하게 합니다. 

 줄거리를 더 적는 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부엔디아 가문 100년의 이야기이고, 많은 아이들이 태어나고, 죽음을 맞으며, 부엔디아 가문이 일으킨 도시 마콘도는 처음에는 집시가, 다음에는 군인이, 나중에는 미국인들이 찾아옵니다. 이들은 저마다 마콘도와 부엔디아 가문 사람들의 삶에 커다란 영향을 끼칩니다. 발달한 문명과, 전쟁을 몰고 오는 게 그들이었으니까요. 부엔디아 가문은 외부인들과 새로운 문명, 전쟁과 재해에 저마다의 방식으로 저항합니다. 이 저항이 끝나는 날, 부엔디아 가문의 이야기도 끝이 나죠. 
 그런 이야기입니다. 설명이 됐을지 모르지만, 그런 이야기로 기억하고 있어서 더 잘 설명드릴 수가 없군요.

멕시코나 콜롬비아, 남미 지역의 역사에 밝은 분들이라면 <백 년 동안의 고독>을 조금 더 재밌게 읽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권력 다툼과 부정부패, 전쟁과 학살이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데, 분명 모티브가 되는 사건이 있을 테고, 아는 만큼 더 잘 읽힐 테니 말입니다.

 <백 년 동안의 고독> 책 얘기는 여기까지입니다. 지금부터는 잠깐 한탄을 늘어놓아야겠습니다.
지난 설 연휴 때 읽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차례를 지내고, 조카들과 놀고 하느라 거의 읽지 못하고 들고 왔다 갔다만 했죠. 이후로도 거의 매일 가방에 가지고 다니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좀처럼 주욱 읽히지 않더군요. 일주일이 가고, 이주일이 지났습니다. 삼 주째가 되자 책 모서리가 조금씩 해지더군요. 맙소사!
 
문학사상사, <백 년 동안의 고독> 표지에는 이런 문구도 있습니다.
"묘사의 강렬함에서 오는 시적 진실의 획득으로 끝까지 책을 놓을 수 없게 만드는 이 소설에는"
'묘사의 강렬함'에는 얼마간 동의합니다. 하지만 마지막까지 여러 번 책을 놓아버린 저로서는 왜 '책을 놓을 수 없게'된다고 적었는지 의아할 뿐입니다. 

 <백 년 동안의 고독>에서 그나마 느낀 건 한 가지입니다. 
"'고독'이 얼마나 많은 것을 파멸시키는가!"하는 걸 실감했던 겁니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생각하고 싶은 대로 생각하고, 하고자 하는 대로 할 수 있는 상태, 이 상태 역시 '고독'이라고 할 수 있겠더군요.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오래전에는 일본인을 '왜놈'이라 부르기도 했습니다. 속설인지 정설인지 정확히 알지는 못하지만 '왜놈'이 된 이유가 그들이 작고, 왜소해서라고 하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작고 왜소한 이유는 근친상간에 있다는 이야기도요. 
 <백 년 동안의 고독>에서 '돼지꼬리 달린 아이'가 태어나게 되는 이유는 '근친상간'입니다. 
인간을 포함한 거의 모든 동물이 근친상간을 피하는 이유는 열성 인자의 발현 확률이 높아지기 때문이죠. 

근친상간이 부엔디아 가문 멸망에 결정적 기여를 하는 것처럼, 역사 속에서 혹은 사회적으로 근친상간이나 다름없는 일이 벌어졌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마르케스가 포착하고 말하고자 했던 부분이 바로 그런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해보는 거죠.
 이전에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이나, <콜레라 시대의 사랑>을 읽어봤기에, 소재와 묘사가 파격적이다 못해 과격하게 느껴질 정도라고는 생각했지만, <백 년 동안의 고독>은 차원이 다른 '벽'처럼 느껴졌기에 더 당황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한 번 더 읽게 될지 알 수 없지만, 인연이 닿으면 기회가 오겠지요.

 역사는 돌고 돌지만, 동일하게 반복되지는 않습니다. 
어떤 문제, 치명적인 문제가 있고, 그것이 개선되지 않는다면 역사는 반복이 아니라 파멸 혹은 종말을 맞이하게 됩니다. 지금 우리는 아주 중요한 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선택도 앞에 두고 있습니다. 기억합시다. 잊지 맙시다. 함께 할 때 우리는 고독하지도 무력하지도 않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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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똥이 2017-12-08 17: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 정말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내 삶의 의미
로맹 가리 지음, 백선희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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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부터 연거푸 하품을 하는 중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시간이 시간인걸요. 

그럼에도 굳이 졸음을 참아가며 끄적이기 시작한 이유는 밀려가는 감상을 더는 방치할 수 없다는 위기의식 때문입니다. 가뜩이나 기억력도 좋지 않은데, 이러다가 몽땅 잊어버릴 것만 같아서 말이죠.


 피곤해 보일 수 있지만 이런 게 제 나름의 삶을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좋아서 하고 있으므로, 피곤이 고통이나 괴로움, 원망이 되지는 않으니까요.


 벌써 한참 전에 읽은 책이라 거의 다 잊어버렸기에 짧게 적기로 합니다. 


<내 삶의 의미>는 소설은 아닙니다. 에세이라고 하기도 조금 어렵습니다. 오히려 '고백록'이라고 하는 게 어울리겠네요. 고백록이라고 적은 이유는 이 한 권의 책에 실린 인터뷰를 통해 로맹 가리 자신의 삶과 작품을 통해 완성하고자 했던 소망을 담담히 밝히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꿈꾸던 삶과 실제로 '살아진 삶' 모두를 이야기하며,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66년 생을 정리한 거죠.


 로맹 가리는 여러 전설을 남겼는데 그중 가장 많이 회자되는 건 콩쿠르 상을 두 번 수상한 유일한 작가라는 이야기일 겁니다. 본래 콩쿠르 상은 한 작가에게 단 한 번 수상의 기회가 주어지는데, 로맹 가리는 에밀 아자르라는 필명으로도 수상하면서 예외로 남죠. 수상 후보에 올랐다는 말을 들은 로맹 가리가 상을 고사했음에도 선정 위원회에서 수상 거부를 거부하면서 억지로 안긴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로맹 가리는 여러 필명으로 작품을 발표했는데, 에밀 아자르라는 필명이 특히 유명해진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여러 이유로 로맹 가리는 당시 문단에서 냉대를 받았고, 나이가 들면서 '로맹 가리는 이제 끝'이라며 냉소하는 적들도 늘었습니다. 로맹 가리는 이들과 다투는 대신 다른 이름으로 작품을 발표하기로 했고, 로맹 가리를 비판하던 이들은 에밀 아자르를 로맹 가리와는 비교도 안 되는 재능을 가진 신예 작가라고 믿어버립니다. 로맹 가리가 얼마나 웃었을지.

 로맹 가리는 자신을 비웃는 이들을 실컷 비웃습니다. 로맹 가리가 자살 후 남긴 유서를 통해 로맹 가리와 에밀 아자르가 동일인물이라는 걸 알게 된 문단은 얼마나 부끄러웠을까요.


 <내 삶의 의미>는 이러한 로맹 가리의 삶과 크고 작은 소동, 논란과 바람까지, 제목 그대로 로맹 가리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의미를 찾기 위해 기울인 노력이 담겨있습니다.


 <내 삶의 의미>를 읽기 전까지 로맹 가리는 외교관과 전설적인 작가라는 지위에 올라 화려한 삶을 보냈을 유명인이라는 이미지가 강했습니다. 영화감독으로서 영화를 찍기도 하고, 유명 배우와 결혼도 한 그런 행복한 인물이라고 생각했던 거죠. 단순히 적자면 '부러움의 대상'이었습니다. 물론, 그게 전부는 아닐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로맹 가리의 삶은 충분히 동경할만하다고 생각했었죠.


 하지만, 그렇지도 않았습니다. 예상은 했습니다. 어느 정도는요. 왜냐하면 로맹 가리의 작품을 읽다 보면 마냥 행복하고, 만족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으니까요. 

 오히려 외롭고, 쓸쓸하며, 늘 방황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강했습니다. <이 경계를 지나면 당신의 승차권은 유효하지 않다>와 에밀 아자르의 이름으로 발표한 <자기 앞의 생>에 이르면 그 느낌은 절정에 이릅니다. 오래지 않아 스스로 목숨을 끊는 걸 선택한 게 납득이 갈 정도로, 로맹 가리는 고통스러워하고 있었습니다.


 <내 삶의 의미>를 통해 새롭게 알게 된 것 가운데 하나는 로맹 가리가 오랜 시간 동안 군인으로 지내며 전투기를 몰았다는 겁니다. 전장에도 여러 차례 투입됐고, 죽을 고비도 여러 번 넘긴 베테랑 조종사였던 거죠. 가장 이해할 수 없는 건 비행 중 사고로 코를 다치는 바람에 코로 숨을 쉬지 못하게 된 상황에서도 꿋꿋이 비행을 포기하지 않았던 점이었습니다. 

 위태로운 몸 상태로, 위험하기 짝이 없는 비행을 계속한 이유는 무엇이었을지.

극한의 상황에서 느끼는 생의 실감, 그런 것이었을까요.


 또 한 가지 알게 된 의외의 사실은, 로맹 가리가 어머니에게 상당한 애착을 품고 평생을 보냈다는 점이었습니다. 로맹 가리에게 온갖 기대를 품었던 어머니, 죽음의 순간에도 아들을 부르지 않고 자신이 소망하는 모습이 되기를 바라며 홀로 죽어간 어머니, 로맹 가리의 어머니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어머니의 굳건한 바람이 오히려 로맹 가리의 외로움에 외로움을 보태는 요인이 된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설령 꿈을 이루지 못한대도, 어머니와 시간을 보내며, 막연하게 마음으로, 머리로만 인지하고 있는 사랑과 애정을 확인하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이야기입니다.


 짧게 적어보겠다고 하고 또 이렇게 늘어지고 있으니 하나만 더 적고 이야기를 마치기로 합니다.


 로맹 가리는 자신의 삶을 두고 '살아졌다'라고 말합니다. 로맹 가리의 고백을 들어보죠.


이 대담 초반부에서 나는 우리가 삶을 살아가기보다는 삶에 의해 살아지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내 삶에 의해 살아졌다는 느낌이 듭니다. 내가 삶을 선택했다기보다는 삶의 대상이 되었다는 느낌입니다. 분명 우리는 삶에 조종당합니다.
<내 삶의 의미> 중


'삶에 조종당'한다는 말, '삶에 의해 살아졌다'는 말, '삶의 대상이 되었다'는 말. 

이 말들에는 자기 삶을 주도하는 적극성도 확신도 없습니다. 자포자기처럼 들리기도 하죠. 하지만 로맹 가리는 마지막까지 스스로 삶을 살아내기 위해 애썼다고 믿습니다. 이런 고백도 하고 있으니까요.


나는 삶의 철학으로 '짝' 외에 다른 개인적 가치들은 알지 못합니다. 이 점에서만큼은 내 삶은 실패였다는 걸 인정합니다. 그러나 한 인간이 자기 삶을 망쳤다고 해서 그것이 곧 그가 추구하고자 했던 가치를 저버렸다는 얘기는 결코 아니지요.
<내 삶의 의미> 중

로맹 가리에게는 '삶'보다 더 중요한 게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삶 자체보다 '추구하는 가치'를 지키는 게 더 우선이었다는 거죠. 늦은, 유예된, 미뤄진, 그러나 결국 결행된 로맹 가리의 자살은 그가 추구하는 가치와 삶이 충돌한 결과였는지도 모릅니다. 더 가치 있는 것을 추구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그런 일 말입니다.


 삶을 관통하여 추구할 가치를 생각하기는커녕 당장 내일의 일조차 생각하지 못하고 급하고도 바쁘게 흘려보낼 때가 적지 않습니다. 그런 제게 로맹 가리의 삶은 상당히 멀고도 희미하기만 합니다. 하지만 그런 저 역시 나름 추구하는 가치가 있습니다. 아직까지는 막연히 '이해'라고 부르고 있고, 무엇을, 어디까지,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지 알지 못하지만 삶이 닿는 만큼은 최선을 다하려고 합니다.


 '최선'에 객관적인 기준은 없지만, 개인의 삶이 객관적일 필요는 없겠죠.

로맹 가리는 삶에 조종당하고, 삶에 의해 살아졌다고 말했지만 그래도 저는 이렇게 살고자 합니다.


살아지는 삶을 살기보다 살아가는 삶을 살기 위해 애쓰면서 말입니다.


자, 오늘도 살아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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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HhH
로랑 비네 지음, 이주영 옮김 / 황금가지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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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허구입니다. 

사실과는 다른 지어낸 이야기라는 거죠. 하지만 소설 속 모든 이야기가 허구인 건 아닙니다. 

어떤 소설들은 사실이 너무 많은 비중을 차지해서 소설이라는 이름보다는 '전기'라는 이름이 더 어울리기도 합니다. 바로 이 소설 <HHhH>가 그런 것처럼 말이죠.


제목 <HHhH>는 '히믈러의 두뇌는 하이드리히 라 불린다'라는 문장을 이루는 네 단어의 머릿글자만을 딴 것입니다. 히믈러는 제2차 대전 당시 나치의 핵심 간부였던 그 히믈러이고, 하이드리히는 히믈러를 보좌하며 정보를 관리하고, 히틀러의 정적을 제거하며, 체코 등 강제로 합병한 나라의 통제와 유대인의 효율적인 제거를 주도한 인물입니다. 금발의 짐승, 프라하의 도살자로 불리기도 했으며 전후 오래 잊히지 않을 유대인 '최종 해결' 계획을 세운 것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하이드리히는 점령지인 프라하 시내를 별도의 호위도 없이, 운전기사만을 데리고 오픈카를 타고 지나다녔는데 그런 오만한 행동이 죽음을 앞당기게 됩니다. 1942년, 영국에서 파견된 낙하산 병, 가브치크와 쿠비시 두 사람의 공격에 부상을 당하고, 감염으로 죽음에 이르게 된 거죠.


<HHhH>는 하이드리히의 어린 시절에서 시작해, 암살 직후 프라하에서 벌어진 일들까지를 편집증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상세하게 담고 있습니다. 다른 상황이나 인물은 배제하고, 하이드리히라는 인물과 가브치크, 쿠비시의 세 사람에게 거의 모든 지면을 할애합니다. 덕분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2차 대전의 상황이나 프라하의 역사를 모르는 상황에서 읽었음에도 낯설거나 어렵지 않았습니다. 


 이 소설이 얼마나 사실적인가 하면 검색창에 '유인원 작전(하이드리히 암살 작전명)'을 검색하면 결과가 나오는데, 그 시작이나 경과, 결말이 소설에 나오는 것과 일치합니다. 거의 말이죠. 소설이기에 상상으로 그려진 대화나 내면 심리가 나오지만, 작가가 어찌나 깐깐하게 구는지 과장을 허락하는 법이 없습니다. 

 그래서라고 하면 조금 묘하긴 하지만, 그래서 이 소설은 '거의 사실'이라고 생각하며 읽었습니다. 

별 차이나 문제는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논쟁이 있을 수 있다고 한다면, 하이드리히의 오픈카가 검은색이냐, 초록색이냐 하는 문제에서 일 거고요.


 한 줄로 적어보면 '1942년 6월의 체코 프라하에서 일어난 하이드리히 암살 사건을 대단히 사실적이고, 실감 나게 그려낸 소설'이 <HHhH>라는 겁니다. 

 

 프라하의 도살자, 금발의 짐승, 유대인 최종해결의 주동자. 

하이드리히는 어떤 인물이었을까요?

<HHhH>의 작가는 단순히 하이드리히라는 인물의 삶과 죽음을 이야기하기 위해 이처럼 엄격한 작품을 쓴 것은 아닐 겁니다. 읽는 사람 입장에서도 단순히 사실 확인을 위해 읽기 시작한 게 아닐 겁니다. 

'사실' 혹은 '진실' 너머에 있을 그 '무엇'을 찾고자 함이겠죠. 그게 무엇이든지 말입니다.


 딴소리를 좀 하기로 하죠.

평범한 아이로 학교 생활을 했음에도 열 개가 넘는 별명이 붙어 버렸습니다. 

별명의 기원도 다양해서, 이름에서 생겨난 유치한 것에서부터, 생각이나 행동까지 고려된 복합적인 것도 있었습니다. 듣기에 좋은 별명이 있는가 하면, 듣고 싶지 않은 별명도 있었습니다. 

 각각의 별명이 '나'라는 존재를 조금씩이라도 반영하는 거라면 그 모든 별명들은 세상과 사람들이 저를 바라보는 모습이라고 생각해도 무리가 없었을 겁니다. 제 견해가 어떻든, 그것과는 무관하게 말이죠.


 하이드리히에게도 별명이 몇 개인가 있었습니다. 그중에는 '유대인'을 암시하는 것도 있었는데, 자신이 순수한 독일인이라고 믿었던 하이드리히에게는 커다란 상처가 된 별명이기도 했습니다. 유대인 최종해결을 승인하면서 나치의 수뇌부는 두 가지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하나는 역시 하이드리히는 위대한 독일인의 후손이라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유대인의 피가 섞였다고 한다면 유대인이 유대인을 말살하는 것이니 그것도 흥미로운 결과일 거라는 거였습니다. 어느 쪽이든 잔인하기는 마찬가지죠.


 온갖 숙청을 주도하고, 학살 수단을 찾는데 열심이었던 만큼 하이드리히가 냉혈한일 거라고 생각할 수 있는 여지는 많습니다. 하지만 하이드리히는 사랑하는 아내와 결혼하기 위해 집안의 반대를 무릅썼고, 근무하던 해군에서 쫓겨났을 때도 무척 괴로워했으며, 죽음을 예감한 순간에는 아내에게 아이들을 부탁하기도 한 '마음'을 가진 인간이었습니다. 

 괴물 같은 일을 무수히 저질렀지만, 여전히 인간이었다는 거죠.


 하이드리히를 죽인 두 낙하산병, 가브치크와 쿠비시는 역사에 이름을 남기기는 했지만, 그 존재는 희미합니다. 말 그대로 사진 몇 장만을 남기고 이 세상에서 사라져 버렸죠. 

 증명할 수는 없지만 두 사람이 하이드리히를 죽음으로 이끈 결과, 역사의 많은 것이 달라졌을 거라는 건 확신합니다. 그것이 더 '나은 현재'를 만들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당시에는 '최선'이었다는 것도 분명합니다. 


 하이드리히의 암살을 주제로 한 소설이지만 사실 감상에서 이야기해야 하는 인물은 가브치크와 쿠비시라는 영웅 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저는 하이드리히라는 인물의 존재에 더 끌리는 마음을 끊지 못했습니다. 하이드리히라는 인간의 다양한 면모, 내면이 궁금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앞에서 실컷 하이드리히 이야기를 적었던 거죠. 별명 이야기를 꺼낸 이유도 같습니다. 

 모든 모습이 하이드리히입니다. 하지만 만약 모순되는 지점들이 있다면 어느 쪽이 진짜 하이드리히였을까요. 

히믈러의 두뇌로 2차 대전을 진행하며, 점령지의 치안을 공고히 하고, 레지스탕스를 소탕하며, 유대인을 학살하는 데 앞장서는 나치 SS의 최고지도자가 처음 태어나던 순간부터 하이드리히의 운명이었을까요? 아니면 아주 사소한 선택의 차이로 전혀 다른 삶을 살았을 그 가능성 혹은 여지에 하이드리히를 넣어둬야 하는 걸까요.


 역사는 가정을 허락하지 않기에, 이런 궁금증은 사실 의미가 없습니다. 하지만 하이드리히가 프라하의 도살자가 되지 않았다면 가브치크나 쿠비시가 하이드리히를 죽일 필요도 없었을 것이고, 이후에 벌어지는 학살의 양상도 달라졌을 거라는 것도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일입니다. 

 뭐, 말하자면 그렇다는 이야기입니다마는.


 2차 대전에 대해, 나치에 대해, SS와 유대인 최종 해결에 대해, 하이드리히 암살작전 유인원 작전과 두 사람의 낙하산병 가브치크와 쿠비시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기에 이 소설을 한 번 읽고 다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는 처음부터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지금처럼 감상을 적을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하이드리히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하는 물음을 던져보는 모양으로요.


 '역사'는 이미 일어난 일을 말합니다. 

가정도, 수정도 허락되지 않죠. 하지만 해석에 따라 얼마든지 변할 수 있는 게 역사이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그 역사 속 인물이 '누구'였는지 알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누구였을까 하는 의문을 끊임없이 던져야만 한다고 믿습니다. 


 대한민국은 긴 역사만큼 다양한 해석과 무수한 여지를 품고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대한민국의 역사는 중대한 도전에 직면해 있고요. 

 해석은 후대의 몫입니다. 하지만 기록은 당대의 책임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최선을 다할 겁니다. 

많이 보고, 듣고, 생각하고, 기록할 셈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사는 길, 우리의 삶이 살아남는 길이라고 믿기 때문에요.


 대통령인지, 꼭두각시인지, 몸통인지, 피해자인지, 코스프레인지.

진실은 반드시 밝혀짐을 기억하겠습니다.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다. 우리가 아무리 경의를 표해도 죽은 사람들은 모른다. 하지만 우리, 살아있는 사람들에게는 의미 있는 일이다. 기억은 당사자인 죽은 사람들에게는 아무 도움도 되지 않지만 기억하는 사람들에게는 도움이 된다. 기억을 통해 나 자신을 성장시키고 스스로 위로받을 수 있다.
<HHhH>_238쪽
"진실에 무관심한 사람들이 싫다." 보리스 파스테르나크가 쓴 글이다. 이보다 더 나쁜 것은 진실에 무관심할 뿐만 아니라 진실을 가리기 위해 적극 노력하는 천박한 인간들이다.
<HHhH>_318쪽

 

그래서입니다. 

잊지 않고 기억하며, 진실이 밝혀지는 날까지 진실에 무관심해지지 않기 위해 애쓰려는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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