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우스트 열린책들 세계문학 73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김인순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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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페이지,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의 이야기가 끝나는 쪽수다.

473페이지, 파우스트의 이야기가 끝나는 쪽수다. 


 파우스트를 읽고 싶지만 정말 읽히지 않는다는 고민을 종종 접한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그 고민을 '이해한다'고 말하기 어렵다.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을 읽는데 8시간쯤 걸렸다면 <파우스트>는 오히려 그보다 적게 걸렸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에는 이미 파우스트를 2~3번 읽었던 경험이 크게 작용했다. 그러나 그런 점을 감안해도 파우스트를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처럼 재밌게 읽지 말라는 법은 없다. 메피스토펠레스가 부리는 익살과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신화 속 인물들의 모습, 마녀들의 축제와 파우스트의 고뇌는 한 편의 드라마처럼 흘러간다 

 파우스트와 같은 작품을 읽는데 어려움을 느끼는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희곡이라는 장르가 잘 맞지 않는다고 말하기도 한다. 인물들의 말투가 낯설다고도 한다. 장면의 설명이나 배경이 이해하기 어렵다고도 한다. 

  

 이 이야기는 지금으로부터 200년도 더 전에 쓰인 것이다. 게다가 배경이 외국이다. 그런 점을 생각하면 어색하거나 낯선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사실은 처음 파우스트를 읽었을 때의 기억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을 정도로 읽는데 고생했었다. 단테의 <신곡>처럼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기분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 가지 알고 싶은 것이 있었기에 끝까지 읽었었다.


 "왜 파우스트 박사는 구원받는가?"

처음의 궁금증은 '이론적'으로는 풀렸다. 그러나 아직도 감정적으로는 완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이전에 읽었을 때는 버럭 화가 나는 걸 느꼈을 정도다. 가련한 메피스토펠레스라며 사탄을 동정했을 정도다. 


 파우스트를 읽으려고 하는 사람은 왜 이 이야기가 시작되는지만 알고 들어가도 조금 마음이 편해질지 모르겠다. 이 이야기의 시작은 하느님과 메피스토펠레스의 '내기'다. 마치 성경 속에서 '욥'을 사탄의 손에 내어주었던 것처럼 여기서 하느님은 파우스트를 메피스토펠레스에게 내어주며 시험해보라고 부추긴다. 

 이 시험을 통과하면 파우스트는 구원받을 것이고, 통과하지 못하면 지옥으로 떨어질 거다. 

물론 이 내기에 파우스트 박사의 의지는 전혀 개입하지 않는다. '그들'의 마음대로 내기를 정하고 시험당하는 것뿐이다. 그러면서 하느님은 의미심장한 한 마디 말을 던진다.

18쪽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기 마련이니라.


 이 문장을 납득할 수 있게 되면 <파우스트>를 읽기는 대단히 수월해지는 것처럼 느껴진다. 받아들이든 거부하든 그것은 읽는 이의 마음이다. 그러나 '인간의 노력'과 '방황'이 파우스트 속 내용의 전부라는 것은 기억해두는 게 좋겠다. 파우스트가 어떤 노력을 했고, 방황 속에서 무엇을 깨달아가는지 그것이 이 책 <파우스트>를 통해 괴테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안타까운 것은 인간이 노력하는 한 방황할 뿐 아니라 거듭 시험에 들게 된다는 것이다. 

누군가를 탓하거나, 자신을 탓하거나 인간은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갈등하며 괴로워한다. 누구에게나 그런 경험이 있을 것이다.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모습과 현실 속의 자신 사이의 부정할 수 없는 '차이'의 실감 말이다.


  파우스트 박사는 뛰어난 학자다. '초인'이라 불릴 정도로 지혜로운 동시에 학문에서 마법까지 다방면에 걸쳐 능력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그는 한탄한다. 자신은 너무 늙었으며, 여전히 이상은 멀리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결국 파우스트는 자신을 유혹하는 줄 알면서도 메피스토펠레스와 계약한다. 더 나은 자신을 위해 영혼을 버릴 각오를 다진 것이다. 

 이 계약을 끝내는 주문은 이렇다. 

<순간이여 멈추어라, 정말 아름답구나!>

이 말을 하는 순간 계약은 끝나고, 파우스트는 메피스토펠레스의 것이 되는 것이다.


 메피스토펠레스는 파우스트에게 인간의 사랑에서부터 발푸르기스의 밤이라는 환락, 신화 속 미녀 헬레네와의 시간과 왕과 같은 삶까지를 경험하게 한다. 그리고 그 시간 동안 파우스트에게 그야말로 종처럼 봉사한다. 자신이 가진 보물과 능력을 몽땅 뽑아내어 파우스트의 요구를 들어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경험하고 또 손에 넣고도 파우스트는 여전히 공허함에 시달린다. 그러던 어느 날 근심이 찾아와 파우스트의 눈을 멀게 한다. 그러나 파우스트는 눈이 멀면서 오히려 빛을 발견하게 되고 넓은 궁성에서 좁은 곳으로 거처를 옮긴 후 메피스토펠레스에게 최후의 역사를 지시한다. 그 역사란 수백만 명을 위한 토지를 일구어 내는 것이다. 

 파우스트가 '지혜가 내리는 최후의 결론'이라고 명명한 이 마지막 역사는 마치 인간의 삶을 빗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453~454쪽

날마다 자유와 삶을 쟁취하려고 노력하는 자만이 

그것을 느릴 자격이 있네.

어린아이, 젊은이, 늙은이 할 것 없이 이곳에서 위험에 둘러싸여 

알찬 삶을 보내리라.

나는 사람들이 그리 모여 사는 것을 보며,

자유로운 땅에서 자유로운 사람들과 더불어 지내고 싶네.

그러면 순간을 향해 말할 수 있으리라.

<순간아 멈추어라, 정말 아름답구나!>

이 지상에서 보낸 내 삶의 흔적이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걸세


솔직히 <파우스트>에 대해서 나부터도 이해하고 있는 것은 거의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단지 몇 번인가 파우스트를 읽고 인간의 노력과 방황, 삶의 목적과 구원의 근거를 발견하고자 하는 시도를 해봤을 뿐이다. 뒤편에 해석이 적혀 있지만 고집스럽게 읽지 않기로 결심한 터라 앞으로도 읽을 생각은 거의 없다.


 파우스트의 마지막 말, "이 지상에서 보낸 내 삶의 흔적이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걸세"라는 말은 지극히 인간적인 소망처럼 보인다. 잊히지 않는 것, 사라지지 않는 것. 사람들이 위험 속에서, 그러나 자유로움 속에서 살아가는 것을 보는 것. 얼마나 인간적인가.

  

 모든 것을 잃고 그동안의 노력에 어떤 보상도 받지 못하고 이를 가는 메피스토펠레스의 모습 역시 인간적이기는 마찬가지다. 어쩌면 악마, 사탄이라 불리는 메피스토펠레스야말로 인간을 가장 잘 아는 가장 인간적인 존재인지도 모른다. 파우스트 역시 메피스토펠레스와 거의 다르지 않게 행동했다. 때로는 더 지나치기도 했다. 그러나 그 목적에 있어서 둘은 너무나 달랐다. 하나는 다른 영혼의 타락을 위해 봉사했지만 다른 하나는 더 나은 어떤 것을 꿈꾸고 갈구했다는 거다. 


 이렇게 감상을 적어보니 아직도 누군가에게 파우스트라는 작품을 설명하기에는 너무 멀고도 부족하다고 느껴진다. 다만 나 스스로 믿고 느끼는 바가 있었다.

 파우스트 박사만큼은 아니지만 나 역시 더 나아지기를, 궁극적인 가치 혹은 목적을 발견하기를 꿈꾸며 나름의 노력을 기울여 왔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그 노력이 좌절될 때마다 실망하기도 하고 슬퍼하기도 했으며, 메피스토펠레스와 같은 악마가 나타나 영혼을 두고 계약을 하자고 한다면 나 역시 그 계약을 받아들이겠다고도 생각했었다. 지금도 그런 생각은 변함이 없다. 


'더 나아진다'는 말은 무척 모호한 말이다. 그러나 저마다 다른 그 나아짐이 간절해지는 순간은 누구에게나 찾아든다. 파우스트를 읽으며 화가 났던 것은 파우스트 박사의 도덕적인 타락에도 불구하고 완벽하게 구원에 이른다는 결말 때문이었다. 그런 것은 있어서는 안 되는 비극처럼 보였다. 메피스토펠레스를 동정하고 파우스트 박사를 질투할 수밖에 없는 그런 결말이었던 거다. 

  

 이번에도 완전히 그런 마음이 사라지지는 않았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러나 지난번처럼 화가 나지는 않았다. 때로 인간은 이기적이 된다. '완성'은 희생 없이는 얻을 수 없는 교환의 결과물인 것 같다. 파우스트 박사가 걸었던 자신의 영혼과 자신이 타락시켜 죽음에 이르게 한 여자와 아이의 영혼, 그 모든 것이 필요한 것이었다는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은 선택을 하고 싶지는 않다. 일단 시대가 다르고 생각이 다르다. 


 나였다면 어땠을까?

이 생각이 그치지 않았다. 

무책임한 파우스트,

이기적인 파우스트,

음란한 파우스트,

욕심쟁이 파우스트, 

잔인한 파우스트, 

쉽게 화내는 파우스트,

다른 사람을 탓하는 파우스트.

파우스트의 결점은 너무나도 많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메피스토펠레스가 부추긴 결과인 것처럼 된다.

결말은 해피엔딩이다. 

파우스트도, 그로 인해 죄에 빠진 여자도 모두 구원받는다. 그러나, 정말 최선이었을까.


보지 못하고 지나친 것이 많을 것이고,

이해하지 못하고 넘어간 것이 적지 않을 것이란 것은 당연하다.

수십 년, 수백 년을 연구한 학자들도 모든 비밀을 풀지는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혹 파우스트를 읽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저 한 편의 막장 드라마를 보는 것처럼 생각하고 읽어도 좋겠다.

실제로 이야기는 막장 요소가 다분하니 말이다.

모든 용어나 배경을 이해하려고 생각하고 읽는다면, 이 생에 이 작품을 다 읽기는 글렀다고 보는 게 좋을 것 같다.

 모든 시대에는 그 시대의 요구가 있는 법이다.

과거는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둘 필요도 있는 법이다.

일단은 보이는 것만을 보는 것으로 만족해도 좋지 않을까. 더 멀리 보는 것은 그다음이다.


 말하는 것을 잊었지만, <파우스트> 속 '호문쿨루스'는 너무 욕심을 부리다 자신이 들어있는 플라스크가 깨지는 바람에 사라지고 만다. 지나친 욕심은 경계되어야 한다. 그것은 과거에도 지금에도 변하지 않는 진리다. 

그러나,

어디까지가 적당한 욕심이고,

어디부터가 지나친 욕심인지 가릴 수 있는 지혜를 가진 사람은 그리 많지 않으므로,

실수해도 어쩔 수 없겠다.


잊지 말자.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는 법이라고 한다. 

지금의 방황이 잘못된 것은 아니라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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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라디오 2015-12-30 12: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파우스트> 너무 읽어보고 싶네요. 내년에 꼭 읽어보겠습니다. 좋은 리뷰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