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섬의 가능성
미셸 우엘벡 지음, 이상해 옮김 / 열린책들 / 2007년 9월
평점 :
품절


아, 어쩌다가 우엘벡 책만 네 권째 읽었다. 내겐 그만큼 흥미로운 작가라고 해두자. 늘 어떤 잠재적인 결론보다는 질문만 한보따리 던져주는 괴상한 작가.... 


우엘벡은 소립자에서 제시했던 문제의식과 대안을 이번에는 SF적인 상상력을 더욱 더 가동하여 극단적으로 밀어붙인다. 소립자의 문제의식, 즉 극단적인 성적 자유주의가 인간관계를 무한 경쟁의 시장논리로 파괴시켜서 인간의 소외로 인한 고통을 심화시켰다는 명제는 이 작품에서도 그대로 유지된다. 사회적, 관습적인 성적 금기로부터 해방된현대인에게 있어 가장 큰 불행의 원인은 이제 생물학적 한계다. 노화와 죽음이야말로 인류의 적인 것이다. 우엘벡의 가설에 따르면, 노화는 성적 쾌락과 사랑을 차지하기 위한 경쟁에서 중년 이후의 세대를 소외시키고, 죽음은 많은 종교의 숙원이자 인류의 가장 큰 관심거리 중 하나였던 영생(불멸)에의 욕구를 좌절시킴으로써 인간을 갈급과 욕망으로 인한 고통에서 초연하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소립자에서 제시되었던 두 가지 가능한 유물론적(생물학적) 대응방식이 이번 작품에서는 더욱 구체적으로 그려진다. 주인공 다니엘은 소립자의 브뤼노다. 끊임없이 성적 쾌락을 시도하고 실재로 완벽한 환희의 순간을 맛보기도 하지만, 중단 없는 성적 쾌락의 추구와 나이듦은 성적 매력의 경쟁에서 그를 처절하게 버림받게 만들고 그로 하여금 철저한 고립과 소외감을 맛보게 만든다. 미셸의 생화학 프로젝트는 벵상의 유전자 복제를 통한 신인류 탄생으로 완성된다. 성적 욕망도, ‘관계 맺기에 대한 욕구도 거의 없이 평온한 상태에서 자신의 유전자 조상의 기록을 읽고 기억을 유지해나가는 임무만을 묵묵히 수행해가는 수많은 중간자들이 신인류라 불리는 복제인간들이다. 올덕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 시민들을 닮은 이들은 욕망과 집착이 거의 없는 상태,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상태에 도달한 이들인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조상인 다니엘1의 삶을 진지하게 독해하려 애쓰던 다니엘25는 마침내 멋진 신세계의 버나드와 존처럼, 무욕망과 평온의 세계를 탈출하여 인간이 가장 소중하게 생각했던 사랑과 이에 동반되는 고통의 세계를 찾아 나선다.

 

그러니까 유전학도, 집착으로부터의 해탈도 노화와 죽음을 극복할 수 있게 해주는 대안이 될 수 없다는 게 작가의 결론인 듯하다. 여전히 삶은 모호한 가능성의 빛만을 비춘 채 우리에게 던져져 있고, ‘사랑이라는 가능한 섬을 찾아 방황하는 게 인간의 숙명이라는 이야기다. 그런데 브뤼노와 다니엘은 왜 그토록 육체적 쾌락에 집착하는 걸까? , 마치 자기 꼬리를 붙잡기 위해 한 자리에서 뱅글뱅글 도는 강아지를 보고 있는 것만 같다. 사랑이란 게 육체적 관계로만 수렴되는 게 아닐 것이며, 노화와 죽음이 극복의 문제만은 아닐 수도 있을 텐데....

 

물론 작가가 이런 식의 반론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기야 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과감하고 선명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세상에 내보일 수 있는 프랑스 사회의 자유분방함이 부럽기도 하다. 한 사회나 문명이 합의한 윤리 밖을 생각할 수 있는 작가가 있다는 것, 그게 오히려 그 사회가 문명사회임을 방증하는 것 아닐까? 예컨대, 자연의 질서에 의해 정당화되는 윤리규범을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질문을 진지하게 던져보는 이런 작가가 존재하는 사회 말이다

 

2013. 02.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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