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의 기원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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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바비악의 저서 <직장으로 간 사이코패스>는 인류의 3% 이상이 사이코패스라고 말한다. 정유정 작가 역시 작가의 말에서 비슷한 맥락의 말을 이어간다. ‘인류의 2~3퍼센트 가량이 사이코패스라고 한다. 소설의 주인공 유진은 그중에도서 상위 1퍼센트에 속하는, 정신의학자들 사이에선 프레데터라 부른다는 순수 악인이다. (p.382)’ 소설 <종의 기원>은 정유정 작가에 의해 만들어진 악인의 탄생기.

 

한유진. 촉망받는 수영 유망주다. 현재 어머니, 해진과 살며 정신과 이모가 처방해주는 약을 먹곤 한다. 정신이 아득해지는 기분을 제법 자주 느낀다. 소설은 유진이 잠에서 깨어나는 것으로 시작한다. 비린내가 후각을 공격할 때 즈음, 집에서 벌어진 일을 목도한다. 무슨 일이지? 자문하는 사이 해진이 새로운 사실을 알리고 집을 나간다. ‘살인 사건 벌어졌데.’

 

이야기는 유진의 현실 자각으로 시작한다. 깜박거리는 전조등 불빛 같은 현실과 꿈. 유진은 어머니의 메모(혹은 일기)를 보며 과거를 더듬는다. 사실을 알게 되면서 결국 사건의 진실과 자신의 을 병치시키며 혼란스러워 한다.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진실이 곧 삶이 되면서 불편했던 삶 속에 온전히 자신을 내버려두는 그. ‘악인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작가는 유진과 해진(혹은 형 유민’)을 대조적으로 그린다. 쾌활하고 애교 많고 사랑받는 첫째, 조용하고 독립적인 둘째, 유진. 그는 피해자로 그려진다. 형이 죽고 어머니는 늘 형을 그리워한다. 어머니는 형의 자리를 대신하려는 듯 해진을 입양한다. 반면 유진에게는 모든 것이 엄격하다. 자야할 시간, 약 먹을 시간, 귀가할 시간, 지키고 싶지 않은 규칙들이 유진을 옥죈다. 이를 위반할 경우에는 벌이 따른다. 성장기 내내 가져야 했던 열패감의 근원을 인지했을 때 내면의 선과 악은 어떻게 모습을 드러낼까. 저자는 한 인간이 느끼는 피해의식이 만들어내는 생존방식을 그리고 싶었던 게 아닐까. 가해자가 피해자로 둔갑하는 엔딩은 작가가 생각하는 이 분출됐을 때의 파국일 게다.

 

작가의 말에서 정유정은 진화심리학자 데이비드 버스의 주장을 인용하며 이렇게 적는다. “인간은 악하게 태어난 것도, 선하게 태어난 것도 아니다. 인간은 생존하도록 태어났다. 생존과 번식을 위해서는 진화과정에 적응해야 했고, 선이나 악만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었기에 선과 악이 공진화했으며, 그들에게 살인은 진화적 성공(유전자 번식의 성공), 즉 경쟁자를 제거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었다. (p.379)” 그리고 에 유독 관심을 갖는 이유 그녀는 여러 전작에서 줄기차게 을 묘사한다. - 에 대해 말한다. ‘평범한 비둘기라 믿는 우리 본성 안에도 매의 어두운 숲이 있기 때문이다. 이를 똑바로 응시하고 이해해야 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지 못한다면 우리 내면의 악, 타인의 악, 나아가 삶을 위협하는 포식자의 악에 제대로 대처할 수 없다. (p.383)’ 마지막 말이 심장에 꽂힌다.

 

그런 의미에서 의 분신 유진이 미미하나마 어떤 역할을 해주리라 믿고 싶다. (p.383)

 

작가는 유진을 그리기 위해 세 번을 다시 썼다고 했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아팠을까, 끔찍했을까, 무서웠을까. <종의 기원>을 읽는 독자들도 같은 마음일지 모르겠다. 이야기는 정유정 작가 특유의 묘사력으로 심장이 터질 듯한 긴장감을 선사한다. 눈은 왼쪽 텍스트를 읽고 있는데 숨은 가빠오면서 설마 아니겠지라는 마음이 오른쪽 텍스트로 내달린다고나 할까. ‘은 분명 우리 안에 숨어있다. 이를 드러내느냐 통제하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 유진의 모습은 우리가 실행할 수 없어 꿈꿔보는 또 다른 자아일지 모른다. 심장이 튀어나올 듯, 오줌을 지릴 듯 안절부절 못하리라. 스릴러영화를 닮은 <종의 기원>, 폭염이 쏟아지는 여름과 어울리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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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크와 바느질하는 중국소녀
다이 시지에 지음, 이원희 옮김 / 현대문학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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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지된, 책과 문학을 욕망한 두 소녀 이야기

소설 <발자크와 바느질하는 중국 소녀>

 

문화대혁명은 문화를 위한 운동일까? 오히려 그 반대다. 마오쩌둥이 추진한 사회주의 운동으로 1966년부터 10년간 지속된 문화대혁명은 자본주의적 사상과 문화를 몰아내자는 기치아래 추진되었다. , 사회주의가 아닌 모든 것을 배척, 각종 문화재와 예술품을 파괴하고 지식인과 학자들은 비판과 모욕 끝에 목숨을 잃거나 자살을 하곤 했다. 소설 <발자크와 바느질하는 중국 소녀>는 문화대혁명 시기, 지식인의 자식으로 재교육을 받기 위해 두메산골로 보내진 의 이야기다.

 

재교육에 관해 몇 마디하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1968년 말 어느 날, 중국 공산당의 최고 지도자이자 혁명의 기수인 마오쩌둥 주석은 나라를 일대 변혁하는 운동을 벌였다. 모든 대학이 휴교했고 젊은 지식인들’, 다시 말해 중등교육을 마친 학생들은 가난한 농민들에게 재교육을 받기 위해서 농촌으로 추방되었다. (13p)”

하늘긴꼬리닭이라 불리는 산으로 보내진 뤄와 나는 주로 똥물을 나르거나 탄광 일을 한다. 가끔 농민들에게 바이올린을 연주해주거나 영화를 보고와 재연하기도 한다. 산 생활에 적응할 때 즈음, 소년들은 재봉사의 딸 바느질하는 소녀와 고향친구 안경잡이를 만난다. 똥통과 석탄 먼지만 가득하리라 여겨졌던 소년들의 재교육 생활에 사랑과 문학이 파고들기 시작한다.

 

문학이 사상통제의 일환으로 금지되던 시기, 허락된 책들은 오직 마오쩌둥 주석을 찬양하는 이야기 뿐 이다. 주인공들은 말한다. “서양문학에 대해 들어본 적 있어? - 지금 그 책들은 어디 있는데? -...(중략)...- 문학이야기가 나를 몹시 우울하게 했다. 우리에게는 행운이 없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마침내 술술 책을 읽을 수 있는 나이가 되니까 이제는 읽을 만한 책이 하나도 없었다. (72p)” 그때 마침 그들 눈에 들어온 게 있었으니, 바로 안경잡이의 녹색 가방이었다. 작가 아버지와 시인 어머니를 둔 안경잡이. 그의 노동을 대신해준 대가로 주인공들은 한 권의 낡은 책을 얻는다. 바로 발자크의 소설이다. 문화적 정서와 감정을 억압받던 열일곱 소년들에게 발자크는 이야기는 충격에 가까웠으리라.

 

소년들은 책을 아껴 읽으며 다른 세상에 눈을 떠간다. 뤄는 바느질하는 소녀에게 소설이야기를 영화처럼 재연한다. 그 애에게 반했냐는 질문에 뤄가 대답한다. “아직 개화가 덜 됐어. 아무튼 나한테 썩 어울리는 여자는 아냐!”(40p) 도시에서 온 뤄의 눈에 산골에서 바느질 외의 것은 꿈꾸지 않는 소녀는 그저 예뻐서 관심 가는 아이에 불과했다. 뤄는 그녀를 개화시키기로 마음먹는다. 이후 두 소년은 또 다른 책들을 얻어내는 데 골몰하고 소녀와의 감정은 점점 깊어진다.

 

책에서 그려지는 두 소년의 문학에 대한 열망의 근원은 무엇일까. 이는 저자 다이 시지에의 이력을 통해 유추할 수 있다. 작가는 1971년부터 1974년까지 실제로 산골에서 재교육을 받았다고 한다. 부르주아 지식인으로 지목됐기 때문. 그의 문학에 대한 욕구가 뤄와 나에게 투영된 건 아닐까. 재교육이 마오쩌둥의 죽음으로 마감된 후 저자는 프랑스의 영화학교에 들어가 공부한다. 캐릭터를 창작하고 영상과 미디어로 꾸며지는 문화의 범주로 향한 그에게 (다양한 문학적)책은 꿈이자 삶의 시작이었을지 모른다.

 

소설은 바느질 하는 중국소녀의 변신으로 마무리된다. 중국도 마오쩌둥의 사망 후 급격한 변화를 겪는다. 덩샤오핑 주석이 추대되며 1980년 중국식 시장경제 흑묘백묘론이 등장한다. 색깔과 상관없이 고양이만 잘 잡으면 된다는 이 말은 곧, 자본주의 혹은 공산주의와 상관없이 중국 인민을 잘 살게 하면 된다는 걸 의미한다. 댕기 머리를 단발로 자르고 하늘긴꼬리닭 산을 벗어나 도시로 향한 중국소녀는 이런 말을 남긴다. “발자크 때문에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는 거야. 여자의 아름다움은 비할 데 없을 만큼 값진 보물이라는 걸.(252p)” 문학의 힘을 믿고 있는 작가의 마지막 메시지 아닐까.

 

미디어는 <발자크와 바느질하는 중국 소녀>중국스럽지않은 책이라고 한다. 프랑스에서 공부한 저자의 배경을 빗대 프랑스 문학에 가깝다고도 한다. 하지만 이 소설은 지극히 중국적이다. 중국은 세계 최대의 대륙 , 최대 국민 수라는 타이틀을 안고 있다. 허나 그 빛나는 수식어는 문화대혁명이라는 곡진 세월을 보낸 결과다. 우리나라와의 지리적 여건으로 중국은 남다른 의미의 관계를 갖는 나라다. 중국을 알고 싶다면 읽어볼 만하지 않을까? 마침 여름휴가 시즌을 맞이해 가볍고 유쾌하게 읽을 책으로 여러 미디어에서 추천을 받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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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병원을 탈출한 여신 프레야 프레야 시리즈
매튜 로렌스 지음, 김세경 옮김 / 아작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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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부신 외모로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들이 그녀를 사랑한다. 인간은 물론 신들도 그 미모에 반해, 그녀를 차지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매번 외로움에 젖은 눈물을 흘려야 했는데, 여행을 좋아해 방랑하는 남편 때문이다. 그녀는 사랑하는 남편을 찾아 방황하기도 했다.

 

북유럽 신화에 등장하는 미, 사랑, 다산의 여신 프레야에 대한 설명이다. 게임 디자이너 매튜 로렌스가 장편소설 <프레야>를 출간했다. 저자 매튜 로렌스는 세계적 게임 <앵그리 버드> 제작사 로비오의 게임 디자이너다. 게임 디자이너이자 작가라는 저자의 이력이 흥미롭다.

 

소설은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는 새라가 면회객 - ‘가렌’ - 을 만난 후, 본능적으로 위협을 감지하고 나단과 함께 병원을 탈출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후 나단과 새라는 가렌을 피해 인간들 틈에 섞여 취업을 하고 집을 구하고, 신들이 모여 있는 곳에 부러 잡혀가 다른 신들을 도모해 전쟁을 계획, 탈출하기도 한다.

 

432쪽에 달하는 분량이지만 소설 <프레야>는 어렵지 않게 완독할 수 있다. 즉흥, 환상, 전투 등 게임적 요소를 다분히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믿음으로 신이 만들어졌다는 설정, 인간의 믿음에 따라 신의 힘이 좌지우지 되는 상황, 신간의 적대적이고 우호적인 관계, 신과 인간사이의 창조물 등. 소설의 내용은 한 마디로 개성 넘치는 캐릭터의 반란과 승리라고 할 수 있다. 주연이 북유럽 신 프레야 라면 조연은 그리스, 로마 신화의 여러 신들이다. 신들 간 다툼과 그 신적 에너지가 분출되는 모습 등은 독자들이 마치 IMAX 영화를 보는 것과 같은 느낌을 준다.

 

저자 매튜는 프레야 시리즈 - <프레야>가 첫 번째 작품이다 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프레야의 세계는 우리가 사는 세계입니다. 이 세계에는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신들이 있어요. 문제는 신들에게 삶을 주는 건 인간의 기도와 믿음인데, 현재 우리는 대부분 그들을 믿지 않는다는 거죠. 우리 인간과 마찬가지로, 살아남은 신들에게도 힘든 세상입니다.” 여신 프레야가 타의가 아닌, 병원이 가장 편안하다고 생각해 27년간 정신병원에 스스로 갇혀 살았다는 설정이 이런 사고에 근거한 게 아닐까. 저자는 프레야 같은 신 뿐 아니라 인간 역시 자신을 스스로 틀 안에 가두고 있다고 조언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다소 가볍게 느껴질 수 있는 내용이다. 그러나 가렌의 정체가 드러나면서 소설은 존재나 가치관 등 철학적 탐구에까지 가닿는다. SF장르 요소를 좋아하는 독자들에게 추천할만한 책. 내년에 영어 초판이 출간, 올해 한국어로 가장 먼저 출간되었다는 핀란드발 <정신병원을 탈출한 여신 프레야>에 주목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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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농장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
조지 오웰 지음, 도정일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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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오웰은 에세이 <나는 왜 쓰는가>에서 이렇게 말한다. “내 작업들을 돌이켜보건대 맥없는 책들을 쓰고 현란한 구절이나 의미 없는 문장이나 장식적인 형용사나 허튼소리에 현혹되었을 때는 어김없이 정치적목적이 결여되어 있던 때였다(p.300)” , 정치적 목적에 충실한 글을 쓰기 위해 노력했다는 것인데 그 증거는 저자의 여러 작품에서 발견된다. 1938년작 <카탈로니아 찬가>에서는 사회주의의 이중성을 묘사했고, 1949년 출판된 소설 <1984>에서는 미래의 관료화된 국가에 대한 공포를 그렸다. 소설 <동물농장>도 같은 계보를 따른다고 할 수 있다.

 

동물농장의 주인은 동물들이다. ‘인간에게서 벗어나야 한다는 공동의 목표, 동물은 모두 평등하다는 슬로건 아래 동물들은 질서와 규칙을 만들어 그들만의 세계를 이뤄나간다. 어느 날, 농장의 리더인 돼지들 간의 주도권 쟁탈전이 일어난다. 스노볼과 나폴레옹, 두 돼지는 풍차 건설을 두고 서로 대립한다. 육탄전을 방불케하는 싸움에서 나폴레옹이 이겨 풍차 건설은 무마될 듯 보인다. 그렇지만 나폴레옹은 사실 스노볼의 주장 풍차를 건설해 생산성을 높여야 한다. 은 본인의 의견이었으며 스노볼이 인간과 결탁해 동물농장을 와해시키려 했다고 거짓 정보를 유포한다. 다른 동물들은 자연스레 승자인 나폴레옹의 편에 서고 스노볼은 농장에서 발생하는 부정적 사건들의 주범으로 지목받게 된다.

 

여기서 독자들은 의구심을 가질 지도 모르겠다. 나폴레옹의 말이 사실일까? 다른 동물들은 이를 믿고 있는 걸까? 질문에 대한 답은 동물들이 투표에 임하는 장면에서 찾을 수 있다. ‘제대로 따질 말을 생각해낼 수 있었다면 그들 중 몇 명은 항의했을 것이다. 그러나 끝내 할 말을 떠올리지는 못했다.(p.54)’ 좋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고 느끼지만 다른 동물들은 돼지들이 낸 의견에 반박하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순응한다.

 

귄위적인 나폴레옹, 같은 말만 반복하는 양, 일만하는 복서, 비관적인 벤자민 등. 농장의 동물들은 인간들의 모습과 흡사하다. 결국 작가는 동물농장의 모습을 통해 인간 세상을 드러내고 싶었던 건 아닐까. 특히 평등을 외치면서 계급을 나누고, 지식 또는 정보의 차등을 이용해 특권을 누리는 정치의 영역을 비판하고자 했던 건 아닌지 짐작하게 한다. 더 나아가 책을 읽으며 독자는 스스로에게 질문한다. 내가 바로 의견을 내지 못하는 동물은 아닌가? 변화나 조종을 인지하지 못하고 누군가의 통치를 평화라 느끼며 살아가는 존재는 아닌 지 소설은 되묻는다.

소설 <동물농장>1945년 세상에 등장했다. 러시아 혁명과 스탈린, 트로츠키의 반목이 있었던 때다. 정치인들은 정권 탈취만을 좇았고 군중들은 이를 무기력하게 바라보기만 했다. , 당시는 사상통제라는 명분하에 정치적 검열이 자행되던 시대기도 했다. 작가는 정치적 목적이 결여된 글에서 허튼 소리를 하거나 의미 없는 문장을 적었다고 했다. 그런 의미에서 소설 <동물농장>은 당시의 복잡한 정세와 한 나라의 정치를 녹여 저항하고 싶은 작가의 심정을 로써 표현했다고 짐작할 수 있다. 그만큼 함축적이다. 반면 이야기의 주인공은 동물들로 누구나 쉽게 따라갈 수 있다. 작가 조지오웰 특유의 유머와 풍자를 통해 그가 폭로하고 싶었던 실상에 다가가고 싶은 독자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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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임홍빈 옮김 / 문학사상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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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하루키, 적어도 끝까지 걷지는 않았다.

 

 

<상실의 시대>, <해변의 카프카>, <1Q84> 로 알려진 일본작가 무라카미 하루키.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가능한 드러내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2003년 한 인터뷰를 통해 독자들은 그의 변화를 감지하게 된다. 자전적 소설을 묻는 질문에 대한 그의 답은 이러했다. “나는 회고록이나 자전적 소설을 쓸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하지만 이러저러한 방법으로 소설을 써왔다고 하는 것과 같은 실제적 기록은 어느 정도 남기고 싶습니다. 어떤 경위로 내가 소설을 쓰기 시작해서, 어떤 상태로 살아왔는가와 같은 것은 쓰고 싶습니다.” 그로부터 4년 후,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가 출간된다.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총 9장으로 구성된 에세이다. 각 장은 달리는 장소 미국, 일본, 하와이 를 기준으로 나뉘는데, 저자는 각 지역의 날씨와 연관 지어 달리기에 임하는 마음가짐, 달리는 목적, 효과 등을 이야기한다. 흡사 마라토너의 대회 준비 일지 같다고 느낄 수 있지만 하루키가 달리는 행위의 시작과 끝, 시공간을 따라가다 보면 이 책은 사람하루키를 알게 하는 정수가 될 수도 있다.

 

작가는 이 책을 두고 달리기라는 행위를 축으로 한 나의 회고록으로 읽어주었으면 한다(서문)’고 말한다. 러너와 소설가의 삶을 엮어 적었기 때문이리라. 저자는 달리기를 체력적 연소라고 표현한다. 또 저자는 글쓰기를 육체를 혹사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소설가의 일이란 책상에 앉아 연필을 끼적이는데 불과할 것 이라는 일반의 편견과 달리, ‘이야기라고 하는 의상을 몸에 감싼 채, 온몸으로 사고하고 작가의 육체능력을 남김없이 쓰는 걸 요구(p.126~127)’하기 때문이라고.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고통과 닮은 달리기.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달릴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 아닐까.

 

좋은 습관이라도 매일 꾸준히 하지 않으면 여러 해 반복했어도 금방 몸에서 멀어지기 마련인데, 하루키는 말한다. “인생은 기본적으로 불공평한 것이다. 그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가령 불공평한 장소에 있어도 그곳에 있는 종류의 공정함을 희구하는 것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에는 시간과 노력이 들지도 모른다. 어쩌면 시간과 노력을 들였지만 헛수고가 될지도 모른다. (p.72)” 매일 일정 시간 쓰지 않으면 한 줄 쓰기도 버겁고, 매일 조금씩이라도 달려야 몸이 달리기를 기억한다는 그. 얄궂은 삶의 단면을 달리기를 통해 하루키는 알게 된 듯하다.

 

작가의 우직함도 엿볼 수 있다. 작가는 왜 42.195km 마라톤 종주와 같은 혹독한 달리기에 매달리는지 이렇게 적는다. “나는 가령, 무슨 일이든 뭔가를 시작하면 그 일에 전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정을 못 찾는 성격이다. (중략) 만약 어중간하게 하다가 실패한다면 두고두고 후회가 남을 것이다.(p.57~58)” 가게를 꽤 성공적으로 운영했던 사업가였고, 손꼽히는 일본 소설가, 그리고 42.195km를 완주한 장거리 러너, 그의 인생에서 보여준 여러 성취는 이런 우직한 노력 때문 아니었을까?

 

책은 저자의 작가로서의 진면목을 알려준다.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사람이 소설을 쓰게 된 경위, 그 과정을 임하는 자세 등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종류의 마라톤과 달리는 과정 묘사가 여러 차례 등장하면서, 실제 마라톤과 같은 혹독한 달리기를 경험해보지 못한 독자에게는 다소 공감이 어려울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책장을 덮는 순간 독자들은 물을 것이다. 하루키에게 달리기가 있다면, 내게는 무엇이 있을까? 저자가 서문에서 말하듯 철칙이라고 까지 말하기는 어렵지만 누구에게나 어떤 종류의 관찰과 경험에서 얻은 법칙같은 게 있다. 신체를 움직이고 일정 고통 안에서 스스로를 단련하고 배우며 삶의 지혜를 얻게 하는 것, 그것이 무엇일까.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가 독자에게 남기는 여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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