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지 5 - 2부 1권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 (마로니에북스) 5
박경리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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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토지 5권에서는 간도(용정)로 이주한 평사리 사람들이 그려진다. 월선이는 간도에 기거했던 삼촌(공노인)의 도움으로 국밥집을 하고, 서희는 국밥집 한 켠에서 기거한다. 용정에 화재가 발생하지만 토지를 사고팔아 목돈을 만든 서희가 길상과 함께 집을 짓는다. 주목할 것은 길상과 용이의 변화다.
 
무당의 딸이라서 월선을 안지 못했던 용이는, 강청댁을 보내고 임이네와 가정을 차리지만 4권에서 월선에게 돌아갔다. 결국 간도에서는 넷(용이, 임이네, 임이네 아들 홍이, 월선)이 함께 한 집 살림을 한다. 문제는 임이네다. 국밥집 일을 돕는 임이네는 셈에 약한 월선을 이용해 돈을 모아 이자놀이를 하는 등 재물욕에 빠진다. 보다 못한 공노인은 용이에게 꾸중을 하고, 임이네의 행동에 치가 떨리는 용이는 월선에게 못된 말을 해 억지로 정을 떼고임이와 홍이를 데리고 다른 집 살림을 시작한다.
 
4권 말미부터 주목받은 길상의 진면목은 5권에서 드러난다. 듬직하고 잘생긴 길상은 하인들 뿐 아니라 서희의 마음도 얻는다. 길상은 서희에게 마음을 둔 상현와 일종의 기싸움을 한다. 서희도 상현과 길상을 두고 고민하는 듯 하지만 화재를 당한 본인을 모르는척 하는 상현에게 의남매를 맺자는 말로 선을 그어버린다. 하지만 길상은 명확하게 마음을 못 잡는다. 5권에서는 간도와 하동, 서희로 대표되는 속세탈속세를 꿈꾸는 길상의 마음이, 상충된다.
 
이 외에 평사리를 떠났던 영팔과 거복이가 다시 나타나고 금녀, 윤이병, 이상현 등 새로운 인물이 나타난다. 의병운동을 하고, 광산으로 일을 가고, 또 일제의 밀정으로 활동하는 등 간도이주와 더불어 인물들의 많은 변화가 그려진다.

<발췌>
죄책, 무섬증, 잔인한 증오심, 뒹굴며 싸운다. 힘을 준다. 힘을 준다! 뱀의 창자가 터진다. 뒹굴고 굽이치면서 뱀은 죽는다. 용이 얼굴에 땀이 흘러내린다. ‘배미다! 배미! 저 기집은 숭악한 독사배미다!’ (p.27)
 
세상이 달라지고 곳이 달라졌다는 말씀을 드린다면 저는 비겁한 놈이 됩니다. 세상이 달라지지 않고 곳이 달라지지 않았다 하더라도 억지를 쓰시는 일은 선비 체통에 어긋나는 일 아니겠습니까?”(p.45)     
양반 내세우면 뭘 하나. 이불 밑의 활개치기지. (p.48)
 
얼굴에 열이 오르면서 전신이 떨려온다. 뭔가 견딜 수 없는 것이 파동치기 시작한다. 차츰차츰 빠르게 세차게 피가 역류하고 솟구치면서 바람이 인다. 마음 바닥에서 바람이, 바람이 울부짖고 걷잡을 수 없는 폭풍을 몰고 온다. 나뭇가지가 수없이 부러지고 흩날리고 거목(居木)이 통째 뽑혀서 나둥그러진다. 새들의 날갯죽지가 찢어진다. 뇌성벽력, 천지가 아우성이고 뭇 짐승들이 일제히 일어서서 포효한다. 길상은 두 손으로 머리 골을 움켜쥔다. 얼마만 한 시간이 지나갔을까. 미친 바람은 썰물처럼 멀어져서, 멀어져가고 남은 빈터에…… 현기증이 난다. 적막한 바람과 눅진눅진한 현기증과 오색의 환상과 환상, 장작불 타는 시꺼먼 밤의 오광대놀이가 한 마당 막을 올리고 지나간다. 숲이 나타나고 강물이 나타나고 황톳길이 나타나고 섬진강을 따라 굽이쳐 뻗은 삼십 리, 하동으로 가는 길이 나타난다. 그 위로 세월이 발소리를 내며 지나간다. 마음 바닥을 쿵쿵 밟으며 지나가는 세월의 발소리, 끊이지 않는 기나긴 세월의 행렬, 지나가다가 어떤 것은 되돌아오곤 한다. (p.65~66)
 
아니 갈보하고 일본사람하고 어째서 같소!”-“같지. 일부종사 못한 년이 갈보요, 두 나라 섬기는 놈이 역적이니.” (p.131)
 
전쟁에서 진다는 것은 어느 시대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처참한 일입니다. 그러나 더욱 처참한 것은 동족이 상쟁하여 나라가 망하는 일이며 그보다 더 처참한 것은 오늘날과 같이 제 민족이 제 나라를 팔아먹는 그것입니다. (p.159)
 
여러분들은 편지를 쓰기 위해 글을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 셈을 하기 위해 글을 배우는 것도 아닙니다. 싸우기 위해 글을 배우는 것입니다. 알아야만 싸울 수 있습니다. 알아야만 이길 수 있습니다. (p.162)
 
천성이 악독하고 교활한 자에게는 지식도 그 악독과 교활에 쓰이는 법이다. 연장도 쓰기 나름이 아니겠느냐? (p.166)
 
우리는 도둑의 무리 못지 않게 경계를 해야 할 것이 있다는 것을 명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성현의 길을 배웠으되 그것이 무엇을 위한 것인가를 모르는 무리 말이다. 이들이 도둑과 합세하여 나라를 망해 먹은 셈이야. 첫째는 왕실 왕실은 왕실의 안녕만을 위해 백성을 배반했다. 둘째는 고관대작, 일신의 영달과 일문의 무사 태평을 위해 백성을 배반했다. 셋째는 선비들, 제 한 몸 닦기 위해 청탁만을 가려 백성들을 이끌지 못했으니 죄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배움에의 길은 내 나라를 위한 것, 내 겨레를 위한 것, 총도 될 수 있고 칼도 될 수 있고 분필도 될 수 있고 (p.168)
 
독수리 같은 중이었소. 늙은 독수리…… 대자대비하시고, 준열무비하시고, 교활무쌍하시고, 호방음탕하시고. 나는 그 어른이 비구인지 세간인이지 잘 모르겠소. 하하핫…….” (p.189)
 
지금 애기씨는 내게 있어 한 마리의 꾀꼬리 새끼란 말일까? 나는 애기씨를 위해 누구의 목을 비틀고 있는 게지?’ (p.214) 
    
아내가 있는 처지, 어쩔 수 없는 강을 끼고 맴을 돌면서 서로의 가슴에 생채기를 입히며 서로의 애정을 학대하며 마음을 엄폐할 수밖에 없었던 처지였다 할지라도 종말을 그렇게 지은 것은 잔혹한 일이었으리라. 결의남매의 제의로써 상현의 가슴에 칼을 꽂았고 길상을 지아비로 맞이하겠노라는 말로 치명상을 주었다. 그만했으면 발걸음을 끊음으로써 서희에게 상처를 준 그 사내에게 앙심대로 열 배 스무배의 보복은 한 셈이다. 마지막 내뱉고 간 상현의 독설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절망의 절규, 상처 입은 울음이겠는데 그러나 서희는 백번 그렇게 생각이 미쳐도 터럭만큼의 위안도 받을 수가 없다. (p.262)
 
홀로 걷는 굽이져 뻗어가는 이 타관의 외줄기 길이 새삼스레 서러울 까닭이야 없겠는데 가도 가도 황토의 남도길, 등짐장수가 맨발로 갔으며, 액병과 보리 흉년에는 집 안에, 길바닥에 송장이 썩던 그 고국의 산천, 척박한 땅에선들 아니 서러울 날이 있었을까마는, 기름지다고 찾아온 간도땅의 사위는 어찌 이다지도 삭막한가 하고 용이는 생각한다. (p.321~322)

어매, 우찌 아들자식 하나 못 두었소. 살아 생전보다 어매 죽은 뒤가 더 서럽소. 무배믄 우떻고 사당이믄, 백정이믄 우떻소. 서러운 사람끼리 만내서 아들딸 낳아서, 와 그리 못 살았소. 참말로 차생이 없다믄 땅속에 누운 어맨들 우찌 한을 풀 것이며 낸들 우찌 눈을 감고 죽을 수 있겄소. 서럽게 나서 서럽게 살다가 서럽게 죽어야 하는 우리네들 신세가…… 어매, 우찌 아니 서럽다 하겄소?’ (p.363~364)
 
세상에 못할 것은 맘고생이제. 육신을 부리묵는 기이 훨씬 편치. 안 그런가? 오장에 기름이 끼니께 인간이 더럽어지더라구마.” (p.3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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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 6 - 2부 2권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 (마로니에북스) 6
박경리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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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일본의 수탈이 본격화 된다. 토지조사와 신회사령 등이 내려진다. 일본(혹은 친일세력) 토지를 빼앗긴 소작인들은 광산이나 나무를 하러 산에 들어간다. 회사령으로 조선 내 건물의 대부분은 일본의 소유로 전락하고 농민들 삶은 더욱 팍팍해진다. 이에 의병, 의적, 동학당의 운동들이 곳곳에서 일어난다. 조선의 국운을 걱정하는 관수, 서의돈, 이상현 등이 등장하고 환이(구천)도 이런 세력에 일조하는 듯하다.
 
1부에서 운명론적인생관을 보이던 사람들의 가치관이 변화하고 있다. 모두 평등하고 중요한 존재라는 관념이 확산되고 있다. 양반들의 대화에서 뿐만 아니라 일반인 사이에서도 전파되고 있다. 길상의 독백이다. ‘애기씨 어릴 적에 나무를 깎아서 신랑 신부 양반 상놈 기생에다 중놈, 뜻대로 소원대로 다 만들어드리긴 했습니다만 난 나무토막은 아니오! 피가 통하고 썩는 살점을 가진 사람이란 말입니다! 최서희! 당신하고 꼭 같은 사람이란 말입니다!(p.94)’ 생떼를 쓰듯 길상과 결혼을 하려 하는 서희에 대해, 길상은 과거 모셨던분에 대한 의무감과 인간 길상이 느끼는 바에 대해 상충됨을 느낀다. , 옷매무새를 보고 냉랭하게 대하는 주모를 보고 관수가 한 마디 내뱉는다. “보소 서울각시, 각시 씨애비 씨에미 그라고 서방도 다 그렇기 누데기옷을 입고 살아왔소. 그거는 그렇다 치고 또 니는 머꼬? 술판이나 닦는 계집 푼수에 누굴 보고 괄시하고, 차벨할 개뿔이나 있다 그 말가?” (p.306)
 
서희는 여전히 여장부 스타일로 그려진다. 회령에 길상이 살림을 차렸다는 얘기를 듣고 길상을 앞세워 회령으로 간다. 여관에 혼자 버려두자 서희는 직접 옥이를 찾아간다. 옥이를 침모로 오게 하려 하지만 실패하고 돌아오는 길에 길상을 위해 목도리를 산다. 후에 이 사실을 알게 된 길상에게 아이처럼 울며 떼를 쓴다. 용정으로 오는 길, 서희의 마차가 사고를 당하게 된다. 간호 도중 길상이 꿈을 꾸는 데, 길상과 서희가 별당아씨와 구천의 관계와 유사해질 듯한 신호처럼 느껴진다. 곧 큰 전쟁이 시작될 듯하다. 서희,길상의 사랑전쟁. 환이의 독립전쟁, 조선을 둘러싼 일제와의 전쟁
     

<발췌>

소문이라는 것은 흔히 사실보다 한발 먼저 가는 수가 있다. (p.8)
 
그들의 접근할 수 없었던 거리는 길상과 서희 사이의 거리이기도 하다. 서희의 대상으로서 상현은 사모(思慕)와 기혼자(旣婚者), 이 두 상극 선상(相剋線上)의 존재요 길상은 야망(野望)과 하인(下人), 그러나 이것은 반드시 상극된 것은 아니다. (p.10)
 
일본의 입김이 들어간 일관성이라면 그건 절망이지요. (p.17)
 
불덩이 같은 슬픔이, 생명의 근원에서 오는 눈물 같은 것이, 무엇 때문에 슬픈가. 무르익은 봄날 보랏빛 꽃이 포도송이같이 주렁주렁 매달린 등나무에는 크고 퉁겁고 윤이 흐르는 곰벌만 찾아왔었다. 스산한 가을 바람이 부는 들판의 작은 꽃에는 무슨 벌레가 찾아드는 겔까. 심장을 쪼갤 수만 있다면 그 가냘픈 작은 벌레에게도 주고, 공작새 같고 연꽃 같은 서희애기씨에게도 주고, 이 만주땅 벌판에 누더기같이 찾아온 내 겨레에게도 주고, 그리고 마지막에는 운명신에게 피 흐르는 내 심장의 일부를 주고 싶다……. (p.19)
 
사람의 마음도 산천같이 씻겨졌다면 오죽이나 좋겠습니까.”-“글쎄올시다. 사람의 마음이 빗물에 씻겨진다면야 공자 맹자가 무슨 소용이겠소.” (p.22)
 
참으로 욕망 무한, 슬픔 없는 목숨이며 비렁땅 꽃 한 포기 새 한 마리 없는 황막한 인생이다. (p.38)
 
길상의 두려움은 서희에 대한 자기의식이 어떻게 변해가고 있는가를 보는 데 있었다. (p.88)
 
애기씨 어릴 적에 나무를 깎아서 신랑 신부 양반 상놈 기생에다 중놈, 뜻대로 소원대로 다 만들어드리긴 했습니다만 난 나무토막은 아니오! 피가 통하고 썩는 살점을 가진 사람이란 말입니다! 최서희! 당신하고 꼭 같은 사람이란 말입니다!(p.94)
 
파상(波狀)같이 연거푸 밀어닥치는 혼란에 지쳐 빠져서 이제는 의식의 반 이상이 대상도 없는 막연한 곳에 한눈을 팔고 있는 상태였다. (p.101)
 
삭풍 열사 속에 육신을 묻으려고, 한 달에도 몇 번씩 넘나드는 국경에서 너는 무엇을 보았나. 고향 잃은 가난한 내 겨레가 이불 짐에 솥단지 하나 얹고 두만강을 건너는 것을, 영팔이아재는 청인들 땅을 부치러 떠났고 용이아재는 벌목꾼이 되어 떠났고 이 사내는 마우재 고깃배를 타다 돌아왔다. 그렇지. 높은 곳에 좌정해 있었던 지난날의 이부사댁 나으리, 슬기로운 선비로 우러러보았던 이동진 씨. 그 사람조차 지금 내 눈에는 개새끼로 보인다. 그런데 너는 어떠냐? 너는! 한 계집아이를 잊지 못하고 꾀꼬리 새끼를 잊지 못하고 넌, 넌 더한 개새끼다! 한데 넌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지? 무엇을 타협하려 했나? 서희와 혼인할 생각을 했지? 당당하게 좋아하는 여자를 거머채는 게 뭐가 나쁘냐구? 아니, 아니다. 종신 종놈이 되어서라도 서희 곁에 있고 싶은 게 너 본심 아니었나? 안 그렇단 말이냐? 떠난다 떠난다 하면서 왜 못 떠나지? (p.109)
 
서희가 알기로도 길상에게는 좋은 혼처가 많았다. 그것을 다 마다하고 볼품없고 가난에 찌든 아이까지 딸린 과부와의 관계를 숨기지 않고 떠벌리고 다녔다는 것은, 그것이 길상의 슬픔이라는 것을 서희는 비로소 느낀다. (p.119)
 
출가한 몸으로서 정행을 아니하고 십계를 지키지 아니한 업보 탓인 듯하오. 이곳은 정처 아닌 허공산야, 고독지옥이오. (p.136)
 
토지조사...(중략).. 양복쟁이들 서슬에 놀란 농부는 엉겁결에 도래질인데 어느덧 논가에 깃대가 꽂히고 새끼줄을 치고. 나라 아닌 일본 정부의 소유로 기록되는 것을 땅임자는 곡괭이자루만 매만지고 천치처럼 입을 헤벌리며 바라보는 것이었다. 이 같은 판세에 훤하게 사태를 아는 친일파 무리들이 죽치고 앉았을 리 없지. 애매한 둔답을, 위조한 도장 꾸러미로 유유히 착복했던 것이다. (p.218~219)
 
괴승이 되고 요승이 되면은 힘이 절로 생기 게요. 땅 밑에서 썩을 황천객한테 지장경 외느니보다 살아 있는 사람 위해 칼을 드는 편이 극락길에 가까울 게요.” (p.240)
 
첫째는 백성들이 의병에 넌더리를 낼 것이라는 셈이고 실컷 시달린 끝에 토벌대가 들어간다면 환영을 받을 것이란 속셈이겠지요. 화적 놈들 목표가 왜놈들 아닌 백성일진대 얼마 동안 관망한다 해서 손해볼 것 없잖습니까. 결국 그러니 불 지르고 재물 뺏고 여자를 겁탈하고 그런 포악한 행위 그것도 가증스럽기 짝이 없으나 그것에 못지않게 근심스런 것은 일본에 저항하는 일체 행동에 대해서 민심이 멀어져갈 것이란 점이오. 악랄한 왜놈들이 노리는 게 바로 그것, 민심이 깨어지고 흩어지고 종래는 왜병들에게 협력하는 사태까지 빚어진다, 생각할 수 있는 일이지요. (p.246)
 
신회사령이란 작년 십이월 조선총독부에서 기왕에 있었던 회사령을 한층 보강하여 공포한 것이다. 그것은 가혹한 식민정책의 일환으로서 일본의 경제계 독점을 조장하고 조선인 자본의 진출을 막아보자는 데 목적이 있었다. 소위 회사설립을 허가제로 해서 까다롭고 악랄한 조건으로 조선인에게는 되도록 허가를 아니하는 방침, 그것은 조선인이 설립한 회사가 삼십 개에도 미달인데 비하여 일인이 설립한 회사는 백 개를 넘어서고 있다는 실정만으로 설명이 된다. (p.252~253)
 
제 부모라 해서 남의 말 끝까지 들어보려 하지도 않고 사리를 헤아려보려 하지도 않고 덮어놓고 맞서려 드는 그게 뭔 줄 아나? 양반흉내야 흉내. 그놈의 형식의 효도라는 것 말일세. 우리 똑같이 밥 먹는 입 가지고 같이 좀 공정해지자구. (p.254)
 
민속이란 그 나라의 역사와 문화라는 게지. 대문에 그것은 그 민족의 전통이다, 이거야. 아무리 과학이 발달했다손 치더라도, 경제사정이 윤택해진다손 치더라도 전통이란 물건이 아니다, 그거야. 그러니 기계로써도 그거를 맨들 수 없고 돈으로 그것을 살 수도 없는 게야. 그래 그 일본사람이 말하기를 이렇게 기계만 돌아가는 세상이니 소중한 민족의 오랜 유산들이 날로날로 소멸하는 판국이라 슬프다! 일본도 이러하거늘 침략을 당하고 정복을 당한 나라에서야 오죽하랴, 그러더란 말이야. 그래! 자전거 한 대 사온 것보다 무속이라도 보존할 가치가 있다는 생각을 하고 돌아온 내가..(중략)..그 악랄한 왜놈들이 미신이다! 미신이다! 하고 무당 잡으러 다는 게, 그래 그게 조선 근대화 작업인 줄 알어? 도포가 어딨어? 갓끈이 어딨어? 깡그리 조선 것은 없이해보고 싶은..(p.268)
 
보소 서울각시, 각시 씨애비 씨에미 그라고 서방도 다 그렇기 누데기옷을 입고 살아왔소. 그거는 그렇다 치고 또 니는 머꼬? 술판이나 닦는 계집 푼수에 누굴 보고 괄시하고, 차벨할 개뿔이나 있다 그 말가?” (p.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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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주의자
한강 지음 / 창비 / 2007년 10월
평점 :
절판


저탄수 고지방 식사로 다이어트를 하겠다고 결심했을 때, 우연히 손에 든 책이 <채식주의자>였다. 소위 깔맞춤을 한 단짝 친구를 만난 것 마냥, 내 결심과 닮은 책 제목에 마음이 동했다. 흡입력은 굉장했다. 술술 읽히는 문장과 빠른 서사에 단숨에 읽어 나갔다. 하지만 마음은 어지러웠다. 영혜가 뜻하는 것은 뭐지? 형부는 도대체 왜? 언니는 왜 참는 거지? 삶이란 이런 걸까? 똑 떨어지는 3부작이지만 300부작을 읽은 것처럼 복잡했다. 책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글을 찾아 읽었다. 2010년에 개봉했다는 영화도 찾아봤다. 조금 이해가 되는 듯도 하다. <채식주의자>폭력에 대한 이야기다. ‘영혜와 영혜의 언니 그녀에게 행해지는.

 

소설 <채식주의자>3부작 - <채식주의자>, <몽고반점>, <나무 불꽃> - 으로 구성된다. 1부는 영혜 남편의 시점이다. 어느 날부터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선언한 아내를 바라보는 남편의 목소리다. 2부는 영혜의 형부, 즉 언니의 남편에 대한 이야기다. 예술을 하는 그가 영혜와 꽃을 매개로 작품을 해 나가는 과정을 그린다. 3부는 영혜의 언니, ‘그녀의 이야기다. 영화는 각 장의 경계를 허문다. 병원에 있는 영혜의 모습에서 시작해 병원을 떠나는 영혜의 모습으로 끝난다. 그 사이에 고기에 대한 반항과 남편, 형부의 관점이 버무려진다. 소설과 비교되는 영화의 단점은 시각적 특성을 강조하듯 영혜와 형부의 촬영 장면이 많은 분량을 차지한다는 데 있다.

 

모두 영혜를 주시한다. (책을 기준으로)화자가 다를 뿐이다. 각 화자는 자신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판단한다. ‘고기를 먹지 않는영혜가 남편에게는 정신이상자지만 형부에게는 감흥을 주는 촉매제다. 언니에게는 동생을 죽지 않도록 해야 하는 의무에 해당한다. 바로 이 지점이 그녀에게 <채식주의자>가 유독 폭력적인 이유다.

 

영혜에게 주어지는 폭력은 물리적이다. 아버지는 딸의 얼굴을 쥐고 억지로 고기를 입에 쑤셔 넣는다. 그녀의 건강이 쇠약해가자 의사는 코로 관을 찔러 미음을 강제로 주입한다. 영혜는 말한다. “아무도 날 이해 못해.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으면서, 약만 주고, 주사를 찌르는 거지. (p.190)” 안타깝게도 독자도, 관객도, 그 누구도 영혜를 이해할 수는 없으리라. 책이나 영화에서 그 선택의 이유를 명확하게 설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1부의 이탤릭체로 쓰인 과거의 사연, 영화에서 묘사되는 어릴 적 경험한 아버지의 폭력성, 이것이 그녀에게 어떤 트라우마를 심어준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반면 그녀에게 주어지는 폭력은 정신적이다. 그래서 더 가혹하다. 영혜가 고기를 먹지 않는, 예술작품의 수단으로 작동하는 동안 영혜의 언니는 이름조차 등장하지 않는다. 그저 엄마, , 언니로 역할을 묵묵히 해나간다. 남편에게 밥을 해주고 화장품 가게를 운영하며 생활력을 뽐낼 뿐, 여자 혹은 인간으로서의 존재로 인정받는 면은 전혀 묘사되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다움이 말살된 것처럼 묘사된다. 남편은 일에 지친 아내를 두고 강간에 가까운 행위를 한다. “피곤해요. 정말 피곤하다니까요. - 잠깐만 참아. (p198~199)” 그녀는 도구에 불과한 것일까. 생활비를 벌어오고 욕구를 분출시키는. 그래서 자신에 대한 연민으로 체념하 듯 읊조리는 그녀의 말 이 모든 것은 무의미하다. 더 이상은 견딜 수 없다. 더 앞으로 갈 수 없다. 가고 싶지 않다. (p.200)”은 오히려 쾌감을 주기까지 한다.

 

채식주의자 해설의 글 <열정은 수난이다>에서 문학평론가 허윤진은 영혜와 그녀의 언니를 두고 이렇게 말한다. “의식의 퓨즈가 나가는 편이 덜 고통스러운가, 의식의 퓨즈를 잇는 편이 덜 고통스러운가. (p.200)” 인간이지만 꽃과 나무가 되고자 하는 영혜의 (현실에서의)비정상을 퓨즈가 나가는 편으로, 가족이 주는 피해와 숨 막힘 속에서 영혜의 언니가 끊임없이 (현실에서의)정상적인 삶을 이어가려 하는 모습을 의식의 퓨즈를 이어가려는 노력으로 해석한 것 아닐까. 허윤진은 또 그녀(영혜 언니)의 담담한 목소리는 얼마나 많은 담즙을 세계의 이면에 방울방울 떨어뜨리고 있는가.”라고 덧붙인다. 평범한 일상을 흔들지 않으려는 그녀의 모습은, 사실 감정의 주먹질을 감당해간 결과라는, 이미 온 몸과 마음이 상처투성이라는, 그녀에게 주어진 폭력이 드러나지 않아 더 아플 것이라는 사실을 꼬집은 말일테다.

 

책을 뒤적이고 영화 리뷰를 여럿 찾아 읽고 글을 쓰면서 <채식주의자>에 대한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이 이야기는 폭력에 대한 것이다. 영혜나 언니 외에 모든 사람에게 해당하는 폭력. 원치 않는 직장에 다니는 것, 돈을 벌어야 한다는 것, 불편한 사람과 말을 섞는 것, 색안경을 쓴 사람들 앞에 나를 드러낼 수 없는 것 등 원하지 않는 것을 상식이라는 이유로 기꺼이 해 나갈 수 있다고 거짓 행복을 표현해야 하는 것까지. 내면의 목소리에 반하지만 세상에서 상식적/현실적이니까 해야 한다고 여겨지는 모든 것들이 어떤 존재들에게는 영혜의 고기와 같으리라.

 

노벨문학상, 콩쿠르문학상과 더불어 세계 3대 문학상 중 하나인 맨부커상(Man Booker Prize) 수상작이다. 서점에서 <채식주의자>는 찾기 어려우니 중고서점이나 해외 영문본을 직구하라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작가 한강은 10년 전 썼던 단편소설 <내 여자의 열매>의 변주를 쓰고 싶었다고 했다. 3년에 걸쳐, 손목이 아파 손으로 쓰고, 볼펜을 거꾸로 잡고 자판을 두들겨 썼다고 했다. 하나의 시발점에서 시작한, 다른 듯 하지만 동일선상에 묶인 세 가지 이야기. 세계가 인정한 소설을 번역 없이 읽을 수 있다는 건 영광이다. 불편한 내용일 수 있지만, 한번 쯤 읽어봐야 하는 이유는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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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02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신호를 기다리던 한 남자, 불이 바뀌었지만 그의 차는 출발하지 못한다. 뒤에서는 클락션을 울려대고 사람들이 차창을 두드린다. 운전석에 앉은 남자가 무어라 말을 한다. 그의 입은 이런 말을 반복하고 있다. 눈이 안 보여, 눈이 안 보여, 눈이 안 보여.

본다는 건 무엇일까. 포르투갈 작가 주제 사라마구에게는 인간다운 것일까. 그는 소설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눈먼자들이 인간 정체성의 모든 것이라 할 수 있는, 가치와 윤리를 상실하고 폭력적으로 변해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사람들은 갑자기 실명하는 병 백색질병이라 불리는 - 에 걸린다. 감염자들은 실명 당시를 즉시 눈이 멀었지만, 이상하게도 눈에서는 어떤 증세도 찾아볼 수 없었지, 또 시야는 눈부신 백색이었고, 눈이 멀기 전이나 후에 아무런 통증이 없었어(p.171)’라고 회고한다. 정부는 원인을 알 수 없는 전염병에 걸린 자들을 격리 수용한다. ‘눈먼 자들의 수용소에서는 ‘보는 로서 할 수 없는 일들이 자행된다. 약탈이 만연하고 여성은 식량을 배급받기 위한 재물로 전락한다. 생존의 욕구 앞에 사람들은 극한의 으로 변해간다.

작가는 인간의 잔혹성을 부각시키는 장치 두 가지 - 무명과 안과의사 아내 - 를 설정한다. 이야기는 여덟 명의 주요 인물들이 이끌어간다. 안과 의사와 안과 의사의 아내, 맨 처음 도로에서 눈이 먼 남자와 그의 아내, 도로에서 눈이 먼 남자의 차를 훔친 도둑, 안과를 찾았던 손님 세 명 한쪽 눈에 안대를 한 노인, 검은색 안경을 쓴 여자, 소년 이다. 이들은 끝까지 무명(無名)이다. 감염으로 대표되는 불행의 전조들이 보편적인을 것임을 의미하는 것이리라. 안과의사의 아내는 어떤 의미일까. 그녀는 수용소의 유일한 보는' 자다. 안과 의사의 아내는 모든 것을 목도한다. 혼자만 볼 수 있다는 책임감, 피할 수 없다는 절망감이 그녀를 지치게 했는지 모른다. 시각에서 해방된 자들의 일들을 보며 그녀는 경멸스럽고 외설적으로 느껴졌다(p.96)’고 말한다.

소설은 무책임한 윤리 의식과 붕괴된 가치관, 그리고 폭력이 만연한 현대 사회를 암시하는 장면을 여러 양상으로 보여준다. 첫째, 정부의 태도다. 감염자들은 정신병원 건물에 수용된다. 군대가 문을 지킨다. ‘문 밖으로 나오면 즉시 사살 한다는 엄포가 수시로 전달된다. 둘째, 식량 불균형이 초래하는 불평등이다. 식량은 배급되지만 전체 수용 인원을 포괄하지도, 균등하게 배분되지도 못한다. 결국 계급과 층위가 발생한다. 여기서 독자들은 사라마구가 제시하는 인간 본성의 극한 모습을 직면한다. 무기를 앞세워 식량을 독점한 자들은 '먹고 싶다면' 여성을 대령하라 명하는데, 여성들 귀에 지원자 없소?’ 또는 내가 원한 것이 아니요라는 남자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저자는 내 이웃의 불행을 감당할 수 있다. (p.241)”는 남성들은 연민과 동정심을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패배했다. (p.235)”고 일침을 놓는다.
 
사라마구에게 눈먼 자들은 동정 혹은 아픔의 대상이 아니다. 오히려 공동의 목표를 위해 소수 혹은 약자를 희생시키려 하는 다수 혹은 강자의 모습이다. 안과의사의 아내가 식량을 독점한 자들의 우두머리를 처단한다. 이때 눈먼 자들은 누가 그를 죽였는지 찾아내 책임을 지게 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전쟁이 일어날지 모르는 일촉즉발의 상황, ‘나 대신타인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생존을 도모하는 이기심의 처절한 표현 아닐까. ‘나만 아니면 돼라는 농담에 쉽게 웃음이 지어지지 않는 이유다.

책이 인간의 잔혹함만을 보여주는 건 아니다. 주제 사라마구는 휴머니즘 혹은 인간애를 표현한다. 안과의사의 아내는 수용소 내에서 마치 어머니와 같다. 그녀의 보살핌에 따라 눈먼 자들은 함께어려움을 타개해간다. 먹을 것을 구하고 살 곳을 마련한다. 그 노력을 저 너머의 누군가가 알아준 걸까. 안과 의사의 집에서 눈 먼 자들끼리 휴식을 취하던 중, 맨 처음 눈이 먼 남자가 외친다. 눈이 보여요, 눈이 보여요, 눈이 보여요.
 
주제 사라마구의 글에서는 대화가 등장하지 않는다. 따옴표가 없는 건 흡입력을 만들어내는 그만의 방식일 테다. 그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독자들은 마지막 페이지에서 저자의 의도를 깨닫는다. “나는 우리가 눈이 멀었다가 다시 보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나는 우리가 처음부터 눈이 멀었고, 지금도 눈이 멀었다고 생각해요. 눈은 멀었지만 본다는 건가. 볼 수는 있지만 보지 않는 눈먼 사람들이라는 거죠. (p.461)” 우리는 가지고 있는 것을 잃었을 때에야 가지고 있는 것이 정말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는 의미 아닐까.
 
<눈먼 자들의 도시> 1995년 포르투칼에서 출판되고 3년 뒤 한국어판이 출간됐다. 주제 사라마구가 1998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면서 그의 소설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었고 결국 2008년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눈먼 자들의 도시>가 개봉했다. 텍스트가 영상으로 어떻게 변형됐는지 알아보는 재미가 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확인해보자. 브라질 영화감독 페르난도 메이렐레스는 백색질병을 어떻게 표현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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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의 기원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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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바비악의 저서 <직장으로 간 사이코패스>는 인류의 3% 이상이 사이코패스라고 말한다. 정유정 작가 역시 작가의 말에서 비슷한 맥락의 말을 이어간다. ‘인류의 2~3퍼센트 가량이 사이코패스라고 한다. 소설의 주인공 유진은 그중에도서 상위 1퍼센트에 속하는, 정신의학자들 사이에선 프레데터라 부른다는 순수 악인이다. (p.382)’ 소설 <종의 기원>은 정유정 작가에 의해 만들어진 악인의 탄생기.

 

한유진. 촉망받는 수영 유망주다. 현재 어머니, 해진과 살며 정신과 이모가 처방해주는 약을 먹곤 한다. 정신이 아득해지는 기분을 제법 자주 느낀다. 소설은 유진이 잠에서 깨어나는 것으로 시작한다. 비린내가 후각을 공격할 때 즈음, 집에서 벌어진 일을 목도한다. 무슨 일이지? 자문하는 사이 해진이 새로운 사실을 알리고 집을 나간다. ‘살인 사건 벌어졌데.’

 

이야기는 유진의 현실 자각으로 시작한다. 깜박거리는 전조등 불빛 같은 현실과 꿈. 유진은 어머니의 메모(혹은 일기)를 보며 과거를 더듬는다. 사실을 알게 되면서 결국 사건의 진실과 자신의 을 병치시키며 혼란스러워 한다.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진실이 곧 삶이 되면서 불편했던 삶 속에 온전히 자신을 내버려두는 그. ‘악인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작가는 유진과 해진(혹은 형 유민’)을 대조적으로 그린다. 쾌활하고 애교 많고 사랑받는 첫째, 조용하고 독립적인 둘째, 유진. 그는 피해자로 그려진다. 형이 죽고 어머니는 늘 형을 그리워한다. 어머니는 형의 자리를 대신하려는 듯 해진을 입양한다. 반면 유진에게는 모든 것이 엄격하다. 자야할 시간, 약 먹을 시간, 귀가할 시간, 지키고 싶지 않은 규칙들이 유진을 옥죈다. 이를 위반할 경우에는 벌이 따른다. 성장기 내내 가져야 했던 열패감의 근원을 인지했을 때 내면의 선과 악은 어떻게 모습을 드러낼까. 저자는 한 인간이 느끼는 피해의식이 만들어내는 생존방식을 그리고 싶었던 게 아닐까. 가해자가 피해자로 둔갑하는 엔딩은 작가가 생각하는 이 분출됐을 때의 파국일 게다.

 

작가의 말에서 정유정은 진화심리학자 데이비드 버스의 주장을 인용하며 이렇게 적는다. “인간은 악하게 태어난 것도, 선하게 태어난 것도 아니다. 인간은 생존하도록 태어났다. 생존과 번식을 위해서는 진화과정에 적응해야 했고, 선이나 악만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었기에 선과 악이 공진화했으며, 그들에게 살인은 진화적 성공(유전자 번식의 성공), 즉 경쟁자를 제거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었다. (p.379)” 그리고 에 유독 관심을 갖는 이유 그녀는 여러 전작에서 줄기차게 을 묘사한다. - 에 대해 말한다. ‘평범한 비둘기라 믿는 우리 본성 안에도 매의 어두운 숲이 있기 때문이다. 이를 똑바로 응시하고 이해해야 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지 못한다면 우리 내면의 악, 타인의 악, 나아가 삶을 위협하는 포식자의 악에 제대로 대처할 수 없다. (p.383)’ 마지막 말이 심장에 꽂힌다.

 

그런 의미에서 의 분신 유진이 미미하나마 어떤 역할을 해주리라 믿고 싶다. (p.383)

 

작가는 유진을 그리기 위해 세 번을 다시 썼다고 했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아팠을까, 끔찍했을까, 무서웠을까. <종의 기원>을 읽는 독자들도 같은 마음일지 모르겠다. 이야기는 정유정 작가 특유의 묘사력으로 심장이 터질 듯한 긴장감을 선사한다. 눈은 왼쪽 텍스트를 읽고 있는데 숨은 가빠오면서 설마 아니겠지라는 마음이 오른쪽 텍스트로 내달린다고나 할까. ‘은 분명 우리 안에 숨어있다. 이를 드러내느냐 통제하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 유진의 모습은 우리가 실행할 수 없어 꿈꿔보는 또 다른 자아일지 모른다. 심장이 튀어나올 듯, 오줌을 지릴 듯 안절부절 못하리라. 스릴러영화를 닮은 <종의 기원>, 폭염이 쏟아지는 여름과 어울리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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