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식주의자
한강 지음 / 창비 / 2007년 10월
평점 :
절판


저탄수 고지방 식사로 다이어트를 하겠다고 결심했을 때, 우연히 손에 든 책이 <채식주의자>였다. 소위 깔맞춤을 한 단짝 친구를 만난 것 마냥, 내 결심과 닮은 책 제목에 마음이 동했다. 흡입력은 굉장했다. 술술 읽히는 문장과 빠른 서사에 단숨에 읽어 나갔다. 하지만 마음은 어지러웠다. 영혜가 뜻하는 것은 뭐지? 형부는 도대체 왜? 언니는 왜 참는 거지? 삶이란 이런 걸까? 똑 떨어지는 3부작이지만 300부작을 읽은 것처럼 복잡했다. 책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글을 찾아 읽었다. 2010년에 개봉했다는 영화도 찾아봤다. 조금 이해가 되는 듯도 하다. <채식주의자>폭력에 대한 이야기다. ‘영혜와 영혜의 언니 그녀에게 행해지는.

 

소설 <채식주의자>3부작 - <채식주의자>, <몽고반점>, <나무 불꽃> - 으로 구성된다. 1부는 영혜 남편의 시점이다. 어느 날부터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선언한 아내를 바라보는 남편의 목소리다. 2부는 영혜의 형부, 즉 언니의 남편에 대한 이야기다. 예술을 하는 그가 영혜와 꽃을 매개로 작품을 해 나가는 과정을 그린다. 3부는 영혜의 언니, ‘그녀의 이야기다. 영화는 각 장의 경계를 허문다. 병원에 있는 영혜의 모습에서 시작해 병원을 떠나는 영혜의 모습으로 끝난다. 그 사이에 고기에 대한 반항과 남편, 형부의 관점이 버무려진다. 소설과 비교되는 영화의 단점은 시각적 특성을 강조하듯 영혜와 형부의 촬영 장면이 많은 분량을 차지한다는 데 있다.

 

모두 영혜를 주시한다. (책을 기준으로)화자가 다를 뿐이다. 각 화자는 자신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판단한다. ‘고기를 먹지 않는영혜가 남편에게는 정신이상자지만 형부에게는 감흥을 주는 촉매제다. 언니에게는 동생을 죽지 않도록 해야 하는 의무에 해당한다. 바로 이 지점이 그녀에게 <채식주의자>가 유독 폭력적인 이유다.

 

영혜에게 주어지는 폭력은 물리적이다. 아버지는 딸의 얼굴을 쥐고 억지로 고기를 입에 쑤셔 넣는다. 그녀의 건강이 쇠약해가자 의사는 코로 관을 찔러 미음을 강제로 주입한다. 영혜는 말한다. “아무도 날 이해 못해.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으면서, 약만 주고, 주사를 찌르는 거지. (p.190)” 안타깝게도 독자도, 관객도, 그 누구도 영혜를 이해할 수는 없으리라. 책이나 영화에서 그 선택의 이유를 명확하게 설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1부의 이탤릭체로 쓰인 과거의 사연, 영화에서 묘사되는 어릴 적 경험한 아버지의 폭력성, 이것이 그녀에게 어떤 트라우마를 심어준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반면 그녀에게 주어지는 폭력은 정신적이다. 그래서 더 가혹하다. 영혜가 고기를 먹지 않는, 예술작품의 수단으로 작동하는 동안 영혜의 언니는 이름조차 등장하지 않는다. 그저 엄마, , 언니로 역할을 묵묵히 해나간다. 남편에게 밥을 해주고 화장품 가게를 운영하며 생활력을 뽐낼 뿐, 여자 혹은 인간으로서의 존재로 인정받는 면은 전혀 묘사되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다움이 말살된 것처럼 묘사된다. 남편은 일에 지친 아내를 두고 강간에 가까운 행위를 한다. “피곤해요. 정말 피곤하다니까요. - 잠깐만 참아. (p198~199)” 그녀는 도구에 불과한 것일까. 생활비를 벌어오고 욕구를 분출시키는. 그래서 자신에 대한 연민으로 체념하 듯 읊조리는 그녀의 말 이 모든 것은 무의미하다. 더 이상은 견딜 수 없다. 더 앞으로 갈 수 없다. 가고 싶지 않다. (p.200)”은 오히려 쾌감을 주기까지 한다.

 

채식주의자 해설의 글 <열정은 수난이다>에서 문학평론가 허윤진은 영혜와 그녀의 언니를 두고 이렇게 말한다. “의식의 퓨즈가 나가는 편이 덜 고통스러운가, 의식의 퓨즈를 잇는 편이 덜 고통스러운가. (p.200)” 인간이지만 꽃과 나무가 되고자 하는 영혜의 (현실에서의)비정상을 퓨즈가 나가는 편으로, 가족이 주는 피해와 숨 막힘 속에서 영혜의 언니가 끊임없이 (현실에서의)정상적인 삶을 이어가려 하는 모습을 의식의 퓨즈를 이어가려는 노력으로 해석한 것 아닐까. 허윤진은 또 그녀(영혜 언니)의 담담한 목소리는 얼마나 많은 담즙을 세계의 이면에 방울방울 떨어뜨리고 있는가.”라고 덧붙인다. 평범한 일상을 흔들지 않으려는 그녀의 모습은, 사실 감정의 주먹질을 감당해간 결과라는, 이미 온 몸과 마음이 상처투성이라는, 그녀에게 주어진 폭력이 드러나지 않아 더 아플 것이라는 사실을 꼬집은 말일테다.

 

책을 뒤적이고 영화 리뷰를 여럿 찾아 읽고 글을 쓰면서 <채식주의자>에 대한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이 이야기는 폭력에 대한 것이다. 영혜나 언니 외에 모든 사람에게 해당하는 폭력. 원치 않는 직장에 다니는 것, 돈을 벌어야 한다는 것, 불편한 사람과 말을 섞는 것, 색안경을 쓴 사람들 앞에 나를 드러낼 수 없는 것 등 원하지 않는 것을 상식이라는 이유로 기꺼이 해 나갈 수 있다고 거짓 행복을 표현해야 하는 것까지. 내면의 목소리에 반하지만 세상에서 상식적/현실적이니까 해야 한다고 여겨지는 모든 것들이 어떤 존재들에게는 영혜의 고기와 같으리라.

 

노벨문학상, 콩쿠르문학상과 더불어 세계 3대 문학상 중 하나인 맨부커상(Man Booker Prize) 수상작이다. 서점에서 <채식주의자>는 찾기 어려우니 중고서점이나 해외 영문본을 직구하라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작가 한강은 10년 전 썼던 단편소설 <내 여자의 열매>의 변주를 쓰고 싶었다고 했다. 3년에 걸쳐, 손목이 아파 손으로 쓰고, 볼펜을 거꾸로 잡고 자판을 두들겨 썼다고 했다. 하나의 시발점에서 시작한, 다른 듯 하지만 동일선상에 묶인 세 가지 이야기. 세계가 인정한 소설을 번역 없이 읽을 수 있다는 건 영광이다. 불편한 내용일 수 있지만, 한번 쯤 읽어봐야 하는 이유는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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