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지르고 살기로 했다
제니퍼 매카트니 지음, 김지혜 옮김 / 동아일보사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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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양가 높게 구성된 일주일 식단, 빳빳하게 다림질 된 와이셔츠, 각 잡힌 정장바지, 밭에서 방금 수확해 온 듯 싱싱한 식재료, 개미가 미끄러질 듯 깨끗하게 세척된 식기, 머리카락 한 올 보이지 않는 거실, 섬유유연제 향을 머금고 포근하게 말려진 빨래, 현관문이 열리는 순간부터 느껴지는 향긋한 냄새까지. ‘여성에서 아내가 되는 신분변동이 얼어나자 내게는 많은 과제가 주어졌다. ‘살림꾼이라는 말로 포장된 집안일이 그것인데, 이 중 최고가 바로 청소.
 
<나는 어지르고 살기로 했다>의 저자 제니퍼 매카트니도 비슷한 상황이었던 걸까. 그녀는 어지르고 사는 것도 하나의 기술이라며, ‘이제는 정리라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 당신의 진짜 삶을 되찾아야 할 때라고 말한다. 심지어 학술지 <심리과학>의 연구결과를 언급하며 많은 물건을 소유한 사람들이 참신한 아이디어를 더 잘 받아들이고, 더 창의적이며, 훨씬 더 똑똑하다(p.15)’고 소유하고 어지르기를 권한다.
 
그렇다면 저자의 의도는 정리하기’, ‘버리기혹은 미니멀 라이프가 옳지 않다고 하는 걸까? 책은 사람들이 행복하지 않은 이유를 정리가 삶의 질이 더 나아진다고 강조하는 사회(p.92)’라고 지적한다. , 어지름, 놓아두기, 쌓아두기는 나쁜 것’, 정리하기, 버리기는 좋은 것으로 구분 짓는 편견 아닐까. 이는 어쩌면 가사노동을 강요하는 사회적 편견까지 닿을 수 있는 문제일 테다.
 
책은 총 6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다시는 정리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라(1), 쌓여있는 잡동사니를 탓하지 마라(2), 우리가 사는 집을 다양한 방식으로 어지럽히자(3), 물건에 따라 어지르는 법이 다르다(4), 집 밖와 인터넷 공간도 어지르자(5), 물건은 소중히 간직하되 저장 강박은 피하라(6)인데, 포인트는 결론에 있다. 저자는 결론에서 더 많은 물건을 살 수 있는 곳잡동사니 체크리스트까지 제시한다.
 
책은 여러 모로 특별하자. 맥락 없는 고양이 그림, 뒤죽박죽 폰트와 글씨체. 저자는 글씨만 있는 책 안에서도 여러 형태의 어지름을 몸소 보여주며 독자들을 편안하게 해준다. 하지만 저자의 유머 코드는 내용에 대한 신뢰성을 떨어뜨리는 효과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시종일관 재미있지만 책을 덮고 나면 다소 허무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번쯤 읽어보자. 정리하기와 어지르기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괴로움을 덜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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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 8 - 2부 4권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 (마로니에북스) 8
박경리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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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희가 평사리로 돌아간다. 간도에서 많은 일들이 있었다. 길상과 가정을 이뤄 윤국과 환국을 낳았다. 허나 길상은 허공에 뜬것 같다. 하인에서 양반의 남편이 되었기 때문일까. 평사리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서일까. 8권에서 길상은 다각도로 등장한다. (구천)이와 의병운동을 일으키는 선봉에 서고, 지아비로써 아내를 원망하며 하얼빈으로 갈 것을 도모하기도 한다. 그러나 최씨 가문의 진실한 하인으로써 아픈 진실을 서희에게 전달하는 역할도 한다. 길상의 마음은 결국 어디로 향할까.
 
8권의 가장 큰 사건은 월선의 죽음이다. 병에 걸려 오랜 세월 앓다가 죽어가는 그녀를 위해 홍이는 아비를 찾아간다. 사람을 보내고 편지를 보내도 오지 않던 야속한 사람. 어느 날, 그가 월선을 찾아온다. 생사를 앞에 둔 그들은 의뭉한 대화를 나눈다. “니 여한이 없제?” “, 없십니다.” “그라믄 됐다. 나도 여한이 없다.” (p.244) 용이를 기다렸던 걸까. 애끓듯 가늘게 이어지던 월선의 생명이 용이와의 대화 후 끊어지고 만다. 월선이 앓던 오랜 시간 보이지 않던 용이를 욕하는 사람들 속에서 영팔은 이야기한다. ‘자신에게 벌 하는 것이라고. 월선의 세간에 탐을 내던 임이네는 꼴좋게 용이에게 버림을 받고 혼이 난다.
 
시국은 점점 어지러워진다. 러시아, 중국, 일본 사이에서 의병운동은 본격화된다. 반면, 김두수의 밀정 활동도 가시적으로 변한다. 얼굴을 고쳐가면서까지 잠입하고 숨어들기 시작한 그는 심녀를 찾아내 의병 활동의 뿌리를 찾아내고자 한다. 조준구의 몰락과 함께 김두수의 결말이 더욱 궁금해진다.
 
 
 
<발췌>
뜻대로 안 되는 것을 뜻대로 살아볼려니까 피투성이가 되는 게야. 인간의 인연같이 무서운 거이 어디 있나.’ (p.59)
 
그 자신 의식하지 못한 일이나 그것은 상민의 피, 공노인 내부에 흐르고 있는 상민의 피 탓이다. 김개주의 아들이라는 확신 때문이다. 저 준수한 젊은이가 김개주의 아들이라니. 김개주는 영웅이다. 상민의 영웅이다. 이조 오백 년을 들어 엎으려던 그를 사람들은 살인귀라 하였다. 압제자의 목을 추풍낙엽같이 날려버린 살인자, 살인귀건 흡혈귀건 아무래도 좋았다. 뭣이든 그는 핍박받아온 백성들 가슴에 등불로 살아있다. (p.62)
 
망해라. 망해라, 최서희! 망해라! 망해! 망해! 망해라. 그러면 넌 내 아내가 되고 나는 환국이 윤국이 아비가 된다. 그리고 돌아가지 않아도 된다! 어떻게 망해? 어떻게 망하느냐 말이다! 비적단이 몰려와도 최서희는 안 망한다. 고향에는 옛날같이, 옛날과 다름없는 엄청난 땅이 최서희를 기다리고 있어! 기다리고 있단 말이야!” (p.87)
 
노상 몸이 성할 줄 아냐? 피라미라도 열 마리 잡으면 중고기야! 되지도 않을 고래 잡을 생각만 하구서, 판판 생일은 굶고 넘기면서 생일 잘 먹을 생각만 하고 이틀 굶는 놈이 바로 네놈이다!” (p.130)
 
서희의 가진 것과 서희의 소망의 무게 탓이다. 시초, 치열한 소망과 기득권에 대한 절대적인 가치관 때문에 휘청거렸지만 최서희는 기왕의 자리에서 떠나지는 아니했다. 그러나 이제는 그 무게에 최서희는 눌리어 떠나질 못했다. 그 무게는 소망과 가치관의 약화와 반비례하여 가중되어 왔다. 이제 무게는 완벽하다. 그렇다. 떠나는 일만이 남아 있는 것이다. 마상에 상전 아씨를 싣고 말고삐를 잡으며 가는 하인이 아니고서는 돌아가지 못할 길상의 문제가 남아 있다. 서희에게 그것은 처절하고 절체절명의 판단이다. 아이 둘이 아비의 옷깃을 잡아주리니 그 희망에 기대를 걸지 못하는 것도 자신이 애소하지 못하는 것도 그 판단 때문이다. (p.142) - 서희와의 결혼이 못 마땅했던 길사, 이제 이를 이용해 결국 떠날 수 있는 상황에 놓임
 
내 조카가 조도전대학 사학과에 다녀요. 수재지요. 그 아이 말이 일본인과 조선인은 혼인을 해야 한다. 왜냐하면 피를 섞어서 조선인이 없어져야 한다는 거 아니겠어요? 중국은 워낙이 인구가 많아 어렵겠지만 조선쯤이야 가능한 일이라나요? 서양 역사에서 보면 알렉산더 대왕도 그 땅을 정복하면은 그 땅에서 반드시 제 나라 남녀를 데려가서 씨를 뿌렸다는 거예요.” (p.157)
 
생과 사 그 틈바구니의 빛깔이란 참으로 미묘하다. 시신은 아직 방에 있고 땅 속에 묻히는 그동안 숨막히는 그 시간을 사람들은 고인과 그리고 그와 가장 가까운 사람의 얘기로 하여 숨구멍을 트고 있는 것이다. 슬픔이 덜한 사람은 그것으로 보충하는 마음, 슬픔이 깊은 사람은 그것으로 위로 받고. (p.249)
 
아까 자넨 영팔이더러 그 돈을 맡으라 했는데 그거는 처음부터 안 될 얘기네. 사는 사내니까, 하는 오기에서 거절하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홍이에미가 원했다 하더라도 그 사람의 피땀을, 홍이는 그것 없이도 큰다. 그것 없이도…… 홍이가 기여 공부를 하겠다믄 무신 짓을 하더라도 내가 공부시킬 것이요, 하지마는 자식은 제 부모가 젤 알지. 홍이는 공부에 별로 생각이 없아. 이곳에 있자 카니 공부랍시고 한 거지. 또 장가드는 일도 그렇다. 형편 되는 대로 정화수 한 그릇 가지고 예는 올릴 수 있는 거고, 피땀나게 살다 간 사람 땜에 우리가 편하게 살아 옳겄나?”...“그래 이거는 내 생각이네만 그 돈은 죽은 사람을 위해서도 그렇고 홍이 처지로서도…… 길가에 버릴 수는 없는 돈 아니가? 그러니 독립운동 하는 곳에 기부하는 게 좋겄다. 홍이에미가 홍이에게 남긴 거라면 홍이가 그걸 받아서 독립운동 하는 데 썼다 할 것 같으면 과희, 안 그렇나?” (p.275)
 
어찌 그리 못 살았습니까. 아재하고 아지매는,” ...(중략)...“아니다. 우리는 많이 살았다. 살 수 있는 데까지 살았네라.” (p.275)
 
아무리 일 잘하다고 무슨 일인들 허용된다 생각하면 잘못이오.” (p.360)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고 나서는 그 자신을. 그것은 생명의 유한이다. 죄에 얽매인 것 아닌 삼라만상, 모든 것은 생명이 있고 또 생명이 없는 유한, 역설이라면 기막힌 역설이겠으나. 어느 시기까지 유지될 안정일지는 모르지만 길상은 서희와 아이들에게로 향하는 사랑이 담백한 상태로 자리잡는 것을 느낀다. (p.375)
 
예라는 말이란 편리한 것이어서 곧잘 그것을 앞장세워 용무를 보게 되는 오늘날의 인심을 내 모르는 바는 아니나 그것도 염치의 정도 나름이지.” (p.381)
 
혼란과 혼란이 부딪고, 그 와중에서 서희는 필사의 헤어짐을 한다. (p.395)
 
모래밭을 핥고는 물러가고 핥고는 물러가는 물결 소리만, 목마른 사람같이 핥고는 물러설밖에 없는 안타까운 갈증에 몸부림치듯 강물은 달빛 아래 일렁이고 있는 것이다. (p.3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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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 7 - 2부 3권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 (마로니에북스) 7
박경리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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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4권 이후 자취를 감췄던 기화가 등장한다. 전주에서 기생으로 이름을 날린 기화가 서희를 찾아간다. 절색인 미모와 기품으로 뭇 남성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기생이 되었지만 서희와 함께 일 때는 영락없는 하동 꼬마아가씨다. 각자의 시간 속에서 부딪히며 인내했던 세월들을 채 풀지도 못하고 기화는 다시 서울로 향한다.
 
김두수의 밀정도 본격적으로 그려진다. 금녀와 윤이병의 과거지사를 이용하고, 송애의 약점을 잡아 이용한다. 최치수를 살해할 음모를 꾸몄던 김평산의 아들 김두수다. 살인죄인의 씨가 그대로 대물림 된 걸까? 아비의 죄로 고개를 들지 못하게 했던 환경이 그를 비겁하게 만든 걸까? 돼지상이라는 면상, 여자를 겁탈하고 약점으로 이용하는 성품, 김두수의 행적을 보고 있으면 조준구가 착하게 보일 지경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두수가 그런김두수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찾는 건 왜 일까.
 
서희의 복수도 암시된다. 간도에서 사업 확장과 연애에만 관심이 있는 듯 했던 서희다. 어느 정도 안정적 궤도에 오르자 그녀는 조준구를 추적한다. 공노인을 통해서다. 7권에서는 공노인의 입놀림에 뻐끔하고 넘어간 조준구의 모습으로 끝난다. 야비할수록 처세에 강한 법. 조준구가 조용히 당하기만 할지 다음 권이 기대되는 대목이다. 한편 길상은 서희와 혼인을 하지만 헛헛해한다. 평범한 지아비가 되지 못할 바에, 서희와의 관계를 끊고 싶다면, 차라리 원하는 바대로 절에 들어가든가, 독립운동가로 활동하면 안될까. 이용 그리고 김길상. 퍽퍽한 인물들이다.
 
 
<발췌>
의병이냐 동학이냐 갈라놓고 생각는 것도 지는 마땅찮아요. 수효를 가지고 따지시는 것도 그렇고, 또 화적당이면 어떻소? 핍박받는 백성이 일어서면은 으레껏 역적이다 화적이다 하기 매련이고 구데기 무서워 장 못 당구겄소? 실정이 십만 대군 거니리고 서울 가겄어라우? (p.18)
 
주재소에 불지르고 왜순사 등에 칼 꽂는 것 그거만 능사 아니란께. 우리는 그냥 의병이 아녀. 의병이기보담 동학교도란 말시. 칼을 휘두르는 한펜 사람 맘에다 하눌님 뜻도 전하여야 한단께로. 그래야만 우리가 칼을 휘둘러 왜놈을 치는 명분도 서는 거 아니겄어? (p.19)
 
무조건 승복이 아니라는 오기도 속셈으론 환이에 대한 관심의 표시오 신비스런 뭣으로 가려진 그의 정체를 벗겨보고 싶은 호기심이었던 것이다. (p.21)
 
왈가왈부, 더 이상 해보아야, 천년이 간들 지상에서는 천상의 법이 이루어질 수 없고 (p.21)
 
나는 동학이 아니어도 좋은 사람이라 소임이 없고 교전에도 장님이오. 다만 지금 형편을 구경한 사람의 처지에서 말하라 한다면 할 수 있겠소. (p.22)
 
치맛자락을 걷어 힝 하고 코를 푸는데 콧물은 눈물과 엇비슷한 것, 청승궂다. 외로움에 찌들고 세월에 찌든 모습이 낡고 때묻은 입성같이 처량하다. (p.32)
 
, 가리 늦기 이기이 무슨 고생일꼬. 아무튼지 간에 동네에 남아날라 카믄 우가 놈겉이 간악하든가, 마당쇠겉이 미련하든가 둘 중 하나라.” (p.45)
 
하얗게 바래어진 자갈밭은 백정네 인생처럼 살풍경하다. 마을을 흘러다니며 가락을 뽑는 광대들의 그 한 맺힌 가락 하나 없이, 햇볕에 타고 있는 쇠가죽처럼 핏빛에 얼룩직 백정네 인생이 거기, 자갈밭에 굴러 있다. (p.60)
 
아 시상에 아비 직인 샐인죄도 그 자식밖에는 칠 곤리(권리)가 없는 게라우! 최참판네 사돈 팔촌이나 된다고 이리들 헌답디여? 인심이 이래가지고, 괄시하는 사람끼리 이리 혀야 옳다 그 말이여라우? 이런께로 조선이 안 망허고 어쩔랍디여, ? 살이 살을 무는디 남이사 오죽이나 허겄소잉? 이보더라고! 구천이! 저 죽일 놈의 인사들헌티 맞기는 왜 맞는디야? (p.71~72)
 
여보, 당신은 지금 어디 있소. 어디 있느냐구! 맞아서 속이 조금은 후련하우, 죄 땜에 아니오! 나는 살아서 이 끝었는, , 이건 끝이 없는 쳇바퀴요, 나는 한 마리의 개미 아니겠소? 아무것도 없는, 가도 가도 꼭 같은 길이오, 다만 길이 있을 뿐이오. 여보, 이 세상 어디에 가도 진달래 꽃잎 따서 화전 부쳐주겠다던. (p.74)
 
사랑하면서, 살을 저미듯 짙은 애정이면서, 그 누구에게도 주고 싶지 않았던 애기씨, 최서희가 지금 길상에게는 쓸쓸한 아내다. 피차가 다 쓸쓸하고 공허한가. 역설이며 이율배반이다. 인간이란 습관을 뛰어넘기 어려운 조물인지 모른다. (p.140)
 
나는 갈보가 아니지만 윤이병은 밀정이오! - 난 김두수 그놈한테 몸 팔지 않았어! 하지만 윤이병은 양심을 팔았단 말이예요! (p.174)
 
좋은 일 나쁜 일 남의 일이라면 거리에 굴러 있는 개똥 보듯 오로지 꿀벌처럼 불개미처럼 제 일족의 성의 쌓고 먹이를 비축하고 그게 실상이란 말이냐? 크게는 한 국가 한 민족도 그래야만 오래 살아남는다. 지금은 허허한 곳을 많은 조선백성이 방황하는데 꿈을 위해서, 원수들 때문에, 한과 정 때문에. 살아남으면은 얼마나 더 살아남을 것이며. (p.181)
 
임이네의 상사병과도 같은 돈에 대한 집념은 고쳐지질 않았고 용이는 용이대로 용정서의 그 지긋지긋한 생활에서 놓여난 것만을 다행으로 여기듯 대개는 임이네 신경질에 무감각인 편이었다. (p.241)
 
사람이 사는 낙이란 한 가장 밑에서 자식 낳고, 고생이 되더라도 그렇기 살아야지. 좋고 궂고가 어디 있노? 우리도 어디 정분나서 만낸 부부가? 부모가 짝지어주니께 얼굴도 모리고 시집와서... 자식 낳고 살믄은 절로 제 가숙 소중한 거 알게 되고 사람 사는 기이 별거 아니네라. 잘산다고 밥 두 그릇 묵겄나? (p.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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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 3 - 1부 3권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 (마로니에북스) 3
박경리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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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망할지고. 윤씨부인이 죽었다. 김서방과 봉선네까지. 최참판댁과 깊이 관계한 많은 인물들이 괴질(원인을 알 수 없는 이상한 병)과 흉년으로 죽었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왜군들까지 칼검을 꽂고 드나들기 시작한다. <토지 13>은 이런 악조건에서 변해가는 평사리 인물들의 이야기다
     
#조준구와 이동진의 등장
전 편에서 참판댁에 들어왔던 조준구는 윤씨부인의 죽음을 계기로 가족들을 모두 데리고 내려와 살기 시작한다. 최씨 집안 핏줄인 서희가 어린 것을 이유로 참판댁 가산을 소유하려는 계획이다. 노비들도 서희와 조준구 측으로 나뉜다. 삼수는 조준구의 앞잡이 노릇을 하고 길상과 수동은 삼수를 이를 괘씸히 여긴다.
 
조준구의 안하무인격 태도에 질려갈 때 즈음 이동진 윤씨부인의 친척 이사부댁 아들 이 평사리에 당도한다. 서희를 보살피는 노비들에게 환대를 받지만 이동진에 대한 평가는 아직 유보적이다. 참판댁과의 오랜 인연은 있더라도 정세를 살피는 속내가 무섭기 때문이다. “이런 시국에는 남의 참견 안 하는 게 제일이지요. 뭣이든 앞장서는 게 화근이니. 왜놈들하고 송살 해봤자 이기는 일 없고 그저 걸려들지 않게 몸조심하는 게 제일입니다.”라는 한 나그네의 말에 이동진은 되내인다. ‘지혜로운 말이군.’ (p.278)
     
#애달픈 귀녀, 월선, 삼월
최치수의 씨를 받으려 음모를 꾸미든 귀녀는 결국 아이를 낳고 죽는다. 귀녀를 마음에 품었던 강포수는 그녀의 옥수발을 들다, 그 아이를 데리고 도망을 친다. 귀녀보다 애처로운 사람이 있다. 월선이다. 무당의 딸로 용이와 서로 사랑하지만 데면데면해야 했던 월선은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다. 용이는 용이대로 월선이 보고싶지만 임이네에 대한 책임감에 갈등하고, 아이를 갖게된 용이에게 다시 다가갈 수 없는 월선은 바보같을 정도로 힘들어한다. 하지만 어느 정도 해피엔딩, 용이가 어렵게 차장간 월선에게 말한다. , 니 또 도망가믄 그때는 직이부릴 기니” (p.330)
 
귀녀, 월선보다 더 호된 시간을 보내는 여성, 삼월이다. 삼월은 조준구에게 겁탈을 당한다. 시시때때로 조준구의 부름을 억지로 이행해야 했던 삼월은 점차 소실로 들어갈 꿈을 꾸지만 이마저도 묵살당한다. 더욱이 조준구는 서울에서 본처를 데려와 삼월을 괴롭게하고 본처 홍씨에게 삼월은 거의 매일 매질을 당해 정신을 반쯤 놓는다. 더 나쁜 것은 조준구를 따르는 삼수마저 그녀를 범하려 든다는 것이다. 아내나 소실로서가 아닌 노리개로. 준구는 삼수에게 삼월을 가지라 한다. 본처의 의심을 피하기 위한 방패막이로 이용할 속셈이다. 이에 삼수는 준구처럼 심심풀이라면 모를까 헌 계집을, 싶었다고 뇌까린다.  헌 계집이라니! 게다가 삼수는 제기럴! 밑져야 본전이다. 그깟 년 살다 버리믄 되는 기고, 아무튼지 간에 노리개는 노리개 아니가. 따지고 보믄 같이 외입을 하자는 건데 머가 나쁘노. 그라믄 이 양반하고 나하고 베갯동서가 되는 거 아니가?’ (p.396) 야무진 생각을 하기에 이른다
     
#옮음과 참
<토지 1부 3편>에는 지금 우리나라 정세에 딱 들어맞는 이야기도 등장한다. 김훈장과 조준구의 대화다. 진실로 옳은 학문은 나라 정치를 휘두를 수 없고 휘둘러지는 것도 아니며 또 휘두를 생각도 말아야 한다구요. 왜 그런고 하니 깨친 바 진리를 정치의 기틀로 삼고자 할 때 그 장소에 깨친 바의 진리가 맞먹질 않는다는 게요. (p.66) , "참말이라는 것이 허황된 것 같기도 하고 참말이 쉬울 듯 하면서 쉽지 않은 것 같기도 하고, 참되게 산다는 일이 반드시 옳게 산다는 것도 아닐 성싶고 아주 적은 사람들이 옳게들 살고 있는 것 같지만 참되게 산다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 같고......착하고 악하다는 것과도 다른 뜻이 있는 듯싶고." (p.69)
 
지금의 위정자들은 '옳음'과 '참'에 대한 구분은 있는걸까. 어떻게 정치를 해야 한다는 방향성은 있는 걸까. 최근 뉴스에 자주 등장하는 인물들이 조준구와 같은 사람과 진배없다는 생각뿐이다.  그밖에 아비의 죄로 마을에서 도망간 한복이가 평산리로 돌아왔고 임이네는 용이와 살림을 차렸다. 소용돌이가 몰아치기 직 전의 평산리다. 괴질과 흉년을 압도하는 어떤 일들이 벌어질 것임을 암시하는 장면들로 13권은 끝난다.
 
 
[발췌]
양반하고 상놈우 사는 세상이 천 리 밖이구나 생각했구마. (p.17)
 
귀녀의 죽음은 어떤 형태로든 지금까지의 강포수 인생과는 같을 수 없는, 다른 것으로 변할 것이라는 뜻이다. (p.20~21)
 
남정네가 사람 죽인 죄인이라 해서 아낙도 따라 죽으라는 법은 없다. (p.26)
 
농사꾼 여편네가 일 안 하는 것 이상의 부도덕은 없다고 그들은 생각하는 것이다. (p.27)
 
내가 와 그 눔의 탈바가지를 잡아 뜯지 않았는가 아나? 이런 세상일수록 남에게 원수지믄 안 되는 기라. 사람이란 앙심을 묵으믄 무슨 짓을 할지 모르거든. (p.34)
 
어린 방랑자. 철새같이 옛 둥우리를 잊지 못해 찾아오는 한복이를 마을 사람들을 누구나 다 가엾게 생각했다.(p.39)
 
어린 서희는 만 이태 동안 조석으로 곡을 할 때마다 슬픔을 키워나갔다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는 날이 지나가는 데 따라 자신이 고아나 다름이 없는 사실과 아울러 부친의 죽음의 뜻을 알기 시작했다. (p.39)

정초에는 그렇게 많은 연이 푸른 하늘에 떠있었는데 지금은 찾아볼 수 없고 어디로 떠내려가는지 모를 줄 끊긴 연 하나 없고. 찾지 못한 연은 높이 올라가서 수미산에 닿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러나, 길상은 떠내려가는 구름이 못 견디게 좋았다. 하늘 빛깔도 좋았고 맴을 도는 소리개의 쭉 뻗은 날갯죽지, 그 날갯죽지에 올라앉아서 꿈을 꾸었을 때처럼 넓은 하늘을 날고 싶은 기분이 용솟음친다. (p.45)
 
길상이도 심부름 갔다왔다는 말을 안 했거니와 김서방도 심부름을 시켰노라는 변명을 해주지 못한다. 길상의 경우는 변명이 될 것이요 김서방의 경우는 역성을 드는 것이 되겠기 때문이다. 식객으로 주제넘은 짓이나 그는 엄연한 양반 나리요 두 사람은 노비인 것이다.(p.50) 
    
사람 병신쯤이야 가문 병신보다는 나을 테니 그렇다면 앙혼인들 못하까 (p.54)
 
양반들도 상것들의 업신여김을 당한다는, 어린애와도 같이 철없는 설움이 북받치는 것이다. (p.58) -양반들의 고고한 자존심  
     
비천한 자들은 궁궐을 돼지 우리로 꾸며놓고 거룩할진저 하며 찬탄하고, 슬기로운 자는 한줌의 흙을 빚으면서도 높은 곳에서 울려오는 절묘한 소리를 듣는다는 게요. (p.69)      
    
지아비 없는 여인에게는 이미 청춘은 없소이다.” (p.70)
 
그는 지금 그 과부 며느리의 청춘이 가엾어서 울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양반의 권위가 땅에 떨어져서 잡인들이 그 절대불가침의 영역을 침범하려는 세상 추세에 통분의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이다. 김훈장의 울음은 이조 오백 년 저변에서 지탱해온 불길이 꺼져가는 데 대한 만가였는지도 모른다. (p.71)
 
아무리 야단을 맞고 백 고프고 매질을 당하여도 울지 말아야 한다는 것. 보리 타작이 있을 때 임이는 어미와 함께 이삭을 주우러 나갔었다. 보리 임자 몰래 보릿단 옆에 붙어서서 보리 모개를 분질러 바구니 속에 넣는 것을 (p.81)
 
거지의 옷이 성하면 밥을 잘 주지 않는 경험을 통하여 습득한 지혜였었는지 모른다. (p.82)
 
나는 저 죽은 바우나 간난할멈, 월선네와 같은 처지의 사람이었소. 윤씨부인은 그렇게 말하고 싶은 것이다. 자기의 권위와 달렴과 두뇌는 오로지 최씨 문중에 시종하기 위한 가장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p.115)
 
그 양반이 명문의 자제로서 호의호식할 수도 있었겠는데 이십 세의 약관으로 장사들을 이끌고 국사를 바로잡을 충심에서 거사한 것도 장하고 만리타국, 말조차 통하지 않는 남의 나라에 가서 빈주먹으로 의술을 배운 것도 장한 일이었소. 허나 그 양반이 어디 우리나라 백성이오? 이름 석 자를 버리고 그곳 이름에다 그 나라 백성이 되었고 그 나라 사람을 아내로 맞이하였는데. 근본이 잘못 되어버린 그 사람 본을 따는 것은, 글쎄올시다.” (p.145) 
    
식객이라 하기에는 엄연한 최참판댁 친척이요, 친척이라 하기에는 또 뭔지 모르게 막고 나서는 것이 있었다. 그러나 어쨌든 상대방은 양반임에 틀림이 없다. 상사람이 항거해서는 안 되는 양반이다. (p.155)
 
한 가지 좋은 것은 흉년하고 달라서 있는 놈 없는 놈 차별이 없는 그기라. 벵이사 어디 수숫대 움막집만 찾아가나?” (p.229) 
     
이웃사촌이라 안 카나. 와 내가 니 망하는 것을 바라겄노. 물 한 모금을 얻어묵어도 이웃사촌이 잘 살아야재. 자고로 남으 공것을 묵으믄 배탈이 나고 부정한 재물을 쌓으믄 고방에 사가 생긴다 캤는데 내 니 배탈이 날까 염려가 돼서 안 그러나. 너거 고방에 사가 생기도 안 될 기고. 그러나 그것도 갈라묵으믄 방어가 되니께로. (p.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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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 4 - 1부 4권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 (마로니에북스) 4
박경리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12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김훈장 : 양아들을 얻었다. 오적대가 나라를 넘겼다는 소식에 조준구에게  "나라 없는데 내 영화가 어디 있으며 가문이 무슨 소용이오. 밤 사이에 나라 넘겨주고 백성들 앞에 양반 놈들, 무슨 염치로 낯짝 쳐들고 다니겠소. (p.190)"라며 의병으로 앞장설 것을 제안하지만 거절당하고 만다. 뜻이 맞는 사람들을 찾아 나선다.

#조준구 : 서울에 집을 얻어 친일파들을 위한 잔치를 벌이기 까지 한다. 의병을 일으키자는 김훈장 말에 자신의 이득을 셈하고 거절 한다. 윤보의 진두지휘로 평사리 젊은이들이 의병으로 일어서 조준구 일가를 멸하려 하자 삼수의 도움으로 목숨을 보존한다. 그러나 그 다음날 삼수를 죽이고 만다.

#윤보 : 과거 목수일을 해줬던 사람의 주선으로 서울에 일을 하러 간다. 두만아비의 부탁으로 두만이와 함께 간다. 그 후 다시 평사리를 거지꼴로 찾아온다. 서울에서 시국에 대한 소식을 듣고 본 후, 나라에 힘을 보태고자 평사리 장병들을 모으기 시작한다.
 
#한조 : 가장 억울한 캐릭터. 경찰로부터 매질을 당한다. 당사자 기억으로는 찾기도 힘든 한 때 떠벌렸던 조준구에 대한 말 때문이다. 근근히 먹고살던, 가장 측은하게 살아가던 한조가 조준구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만다.

#삼수 : (봉이네 딸)두리를 겁탈하고 만다. 이 사실을 봉기네가 떠벌릴 수 없다는 것을 약점으로 쥐고 흔들며 약아빠진 악의 기운을 힘껏 내보인다. 윤보에게 다가가 조준구를 배신하겠다 하고, 결국 준구를 치러 갔을 때 다시 배신 하고 만다. 결국 죽는다. 셈에 강했던 하인으로, '어느 줄을 잡을까' 노상 걱정하는 현 정치인들의 모습처럼 보인다.

#봉순 : 길상이와 밀당을 한다. 노래길로 접어들지 고민한다. (용이에 대한)월선의 태도와 닮은 행동으로 길상을 대한다. 답답하다. 하지만 어여쁜 외모와 서희와 오래 벗한 덕에 간도로 떠나는 서희 대역으로 나서기도 한다.

#길상 : 봉순이를 애틋해 하지만 표현하지 않는다. 용이와 함께 서희네를 간도로 이주시키려는 계획을 꾸민다. 가장 든든한 장정이다.

#구천 : 행적을 숨겼던 구천이가 드디어 나타난다. 구천이 소식과 함께 별당아씨 소식도 들린다. 별당아씨는 죽었고, 구천이는 윤씨부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된다. 거지꼴로 혜관을 찾아가나 말투며 행동에서 고고함을 내뿜고 있다. 구천의 앞날이 기대된다.

#서희 : 신경질적으로 변해간다. 조준구 내외의 행동과 서울에서 온 하인들을 미워한다. 길상, 봉선, 수동이 지키고 있었지만 수동이 죽고 길상은 의병으로 떠난다. 홀로 남은 서희는 내면의 칼날을 갈아간다. 간도로 이주하고자 한다.
 
<발췌>

사람들은 한 해가 가고 한 해가 온다고 말들 한단 말이야. 날마다 해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가고, 그게 세월이란 말일까? 그래서 사람들은 늙어가고 죽고 또 아이가 태어나고 자라고 사람이 죽고 아이가 태어나고, 알 수 없군. 정말 윤회라는 게 있다면 왜 사람이나 짐승이나 벌레나 초목이나 그런 것들이 빙빙 돌아야 하는 걸까? 세월은 바람일까? 바람이 사람들을, 이 세상에 있는 것을 어디로 자꾸 몰고 가는 걸까?..(중략)..끝이 없을 건데, 시작도 없을 건데 어째 시간이 있단 말이야? 사람들은 해시니 술시니 하고 길이를 재어서 시각에 이름들을 붙이지만 이 천지가 꼼짝 않고 있는데 세월이 어디 있다고 금을 긋고 길이를 재느냐 말이야. (p.172)
 
내 땀만 있다면야 까짓것 낡아빠진 의관 벗고 나서겠다만 남의 땅 얻어 부치는, 그런 비루한 짓이야 굶어 죽었으면 죽었지.” (p.178)
- 남의 땅을 빌어 부칠 수 없다는 양반들의 꼬장꼬장한 자존심

동학 놈들이 일어섰을 때 제일 먼저 당한 사람들은 누구였지? 지방 관헌들과 재물 있는 양반들 아니었느냐 말이다. 어리석은 것들! 일본을 어떻게 대적하겠다는 건가. 서울서는 시골 놈들만 못해서 도장을 찍었나? 나라는 기왕 망한 건데 손가락에 불을 켜고 하늘로 올라가지, 일본을 물리쳐? 바지저고리에 상투 틀고 짚신 신고 쇠스랑 든 농부 놈들 이끌고 일본을 물리쳐? 흐흐...... 가만있자. 결과야 뻔하지만 우선, 우선에 내가 먼저 당하면? 그렇지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p.193)
- 나라의 위태로움 보다 자신의 안위를 먼저 생각하는 약아빠진 조준구
 
백성들이란 믿을 게 못 되네. 동학군이 왜군들 신무기에 무너졌다고들 하지만 인산인해를 이루었던 그 수많은 사람들이 모두 바지저고리였겠나? 왜군들 신무기 앞에 육신보다 마음들이 먼저 무너졌던 게야.” (p.268)
- 모든 것은 마음의 문제, 오늘의 모든 이에게도 주는 교훈이다.  
 
나는 그 도 밖에서 이는 일시적 풍삭일 게다. 혼돈 속에서만 말을 몰 수 있는 위인이야. 화평스런 대로를 시위 소리 들으며 대교 타고 갈 위인이 못 된다는 말이니라. 내 그동안 수많은 군졸을 거느리고 탐관오리를, 악독한 양반들을 목 베고 추호 가차 없었으나 그게 사명감에서 한 짓인지 진정 자신 못하겠다. 그 밀물 같은 시기가 지나가면 나는 잠을 이룰 수가 없다. 바닥 모를 허무의 아가리가 밤새껏 나를 괴롭히는 게야. 실은 내 속에 이는 원한도 진정 그게 원한인가 맏을 수 없구나. 불민한 너를 위한 아픔도 진정 그게 아픔인가 믿을 수 없구나.” (p.272~273)
- 김개주가 환이에게 하는 말
 
왜 자신이 이곳에 와 서 있으며 어린 날 이곳에서 보낸 일이 있었던가, 그것도 알 수가 없다. 윤씨부인의 죽음을 알고 슬퍼했다면 그것은 거세당한 슬픔 같은 것이요, 부친의 옛날 지기를 만나 충격을 받은 그것도 거세당한 충격 같은 것이나 아니었는지. 낯선 땅, 낯선 산천 이곳 역시 환이에게는 낯선 곳으로밖에 더 이상의 감회가 솟지 않는 것이다. (p.275)
 
소자 지금에 이르러 아버님 말씀하신 뜻이 깨달아집니다. 아픔이나 원한이나 그리움이나 인간사에서 그 모든 생각보다 더 깊고 큰 것이 있었습니다. 그게 허무가 아니옵니까? 아버님은 그 허무와 싸우셨습니다. 저에게는 지금 아픔도 없고 울음도 없고 아무것도 없습니다. 고통도 없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지난 세월의 겪은 고통은 오히려 감수같이 달콤하게 여겨지니 말입니다. 아버님, 차라리 회한인들 제게 있다면,” (p.283~284)
 
어리석은 삼수. 그가 아무리 악독하다 한들 악의 생리를 몰랐다면 어리석었다 할밖에 없다. 악은 악을 기피하는 법이다. 악의 생리를 알기 때문이다. 언제나 남을 해칠 함정을 파놓고 있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시 궁극에 가서 악은 삼수가 지닌 그와 같은 어리석음을 반드시 지니고 있다. 왜냐, 악이란 정신적 욕망에서든 물질적 욕망에서든 간에 그릇된 정열이어서 우둔할밖에 없고 찢어발길 수 있는 허위의 의상을 걸치고 있기 때문이다. (p.3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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