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 민음사 오늘의 작가 총서 7
윤흥길 지음 / 민음사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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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으로 서울에 살던 외할머니가 시골 딸 네 집으로 피난오면서 할머니네와 함께 살게 된다. 장마가 계속되던 어느 날, 외할머니에게 국군 소위로 전쟁에 나갔던 외삼촌의 전사 통지서가 날아든다. 아들을 잃은 외할머니는 빨치산은 모두 죽으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할머니와 척을 지게 된다. 삼촌이 빨치산으로 활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맥고자를 눌러쓴 사람의 꼬임에 넘어가 삼촌이 집에 왔었음을 말해, 아버지가 고초를 겪게 된다. 이후 외할머니와 나 사이에는 묘한 동료의식이 생긴다.

소설은 초반 외할머니에게 주목한다. “내 말이 틀리능가 봐라. 인제 쪼매만 있으면 모다 알게 될 것이다. 어디 내 말이 맞능가 틀리능가 봐라”(p.1)라며, 모든 것을 안다는 듯한 외할머니는 줄창 완두를 까고 간혹 손자의 사타구니를 더듬는다. 강단 있어 보이는 외할머니도 사실 속으로는 삼촌에 대해 걱정하는 눈치다. 어느 날 할머니는“그렇게 꾈 종 누가 알었냐. 내가 미쳤다고 그런 자리에 갔겄냐. 허기사 늙은이가 눈치코치도 없이 사둔네 일에 해자를 논 게 잘못은 잘못인지. 잘헌 일은 아니여. 잘헌 일은 아니지만, 그런다고 이 외할매만을 탓혀서는 못쓴다. 그날 저녁에 내가 아녔드라도 느네 삼촌은 오던 질을 되짚어서 떠날 사람이었어. 팔자를 그렇게 타고난 거여.” (p.34) 라며 삼촌이 새벽녘 작은 소리에 도망가듯 떠나던 날의 일에 대해 변명을 하기도 한다.

반면, 소설 후반에는 할머니에게 집중한다. 빨치산이 척결되고 있는 상황에서 가족들은 삼촌이 죽었다 여기지만, 할머니는 점쟁이에게 ‘아무날 아무시’에 아들이 온다는 점괘를 받고 그 날만을 손꼽아 기다린다. 마침 그 날이 되어, 구렁이 한 마리가 집으로 온다. 이 모습을 본 할머니는 졸도하고, 외할머니는 구렁이를 어르고 달래 돌려보낸다. 졸도에서 깨어난 할머니는 그 이야기를 전해 듣고 외할머니와 화해를 한 후 눈 감는다. 마치 삼촌의 혼령을 만나 한이라도 푼 것처럼.

손주인 ‘나’의 시점에서 묘사되는 소설 <장마>는 6.25 전쟁이 만들어 놓은 이데올로기를 암시한다. 빨치산인 삼촌, 그를 기다리는 할머니, 국군으로 활동한 외삼촌, 외삼촌의 죽음을 슬퍼하는 외할머니로 그 사상적 대립은 명확하게 표현된다. 인상깊은 점은 유일하게 이름이 등장하는 인물이 외삼촌 뿐이라는 것이다. 할머니가 내게 연신 외삼촌에 대한 이미지를 심어주며“그러지 않고서는 어디 가서 감희 권오문이가 우리 오삼춘이라고 말헐 자격이 없지. 암, 없다마다 (p.25).”고 말한다. 작가가 지지하는 사상에 대한 확신으로 읽히기도 하는 지점이다.

마지막 주목할 부분은 구렁이다. 삼촌을 기다리던 날 왔던 구렁이는 삼촌의 현신으로 보인다. 이는 외할머니의 달램에 따라 조용히 길을 떠나는 모습에서 가능성을 높이고, 졸도에서 깨어난 할머니가 외할머니에 대한 미움을 거두고 화해하는 장면에서 확실해진다. 이에 대해 일부 학자들은 한국의 토속적인 샤머니즘의 발현으로 읽기도, 분단의 이념적 대결은 궁극적으로 민족의 혈연적 유대로 지양할 수 있다는 해결책을 제시한것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이만교 인하대 교수는 이 해석들이 <장마>를 동족상잔의 전쟁을 가족 구성원간에 벌어진 사건으로 치환했을 때 가능한 추론이라고 지적한다. 즉, <장마>가 가족사의 이야기를 너머 분단의 알레고리로 읽히기 위해서는 이에 상응하는 복잡하고 중층적인 긴장과 짜임새가 필요하다는 의미다.

윤흥길은 왜곡된 역사현실과 삶의 부조리, 그것을 극복하려는 인간의 노력을 묘사하려는 작가로 유명하다. 작가는 작품 초기에 이데올로기 갈등을, 이후 산업화 과정의 노동현장에 대한 집중했고, 1980년대 들어서는 <완장(1982~1983)>과 같은 소설에서 권력에 대한 비판의식을, <에미(1982)>에서 여인의 수난사 등을 형상화하기도 했다. 1973년 작품인 소설 <장마>를 시작으로 문단은 그를 주목했다. 사투리가 걸쭉하게 이어지지만, 어린아이 시점의 서술로 어렵지 않게 읽힌다. 왜곡된 현실을 다양한 각도에서 바라보려고 노력하는 윤흥길 작가의 예리한 통찰을 느낄 수 있는 시작점이 곧 <장마>인 셈이다. 6.25 당시의 가정 모습을 생각해보기에도 좋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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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글쓰기 특강 - 생각 정리의 기술
김민영.황선애 지음 / 북바이북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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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NS를 하면서 글쓰기에 목 마를 때가 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표현이 부족하고, 문장이 나아가질 못하니 결국 그만두고 만다. 머릿속 생각들은 왜 글로 표현되지 않는 걸까? <서평 글쓰기 특강>의 저자들은 해결책으로 생각 정리를 제안한다. 그렇다면 생각 정리란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저자들은 그 방법을 ‘서평 쓰기’로 풀어낸다. 서평이란 “좋은 책을 읽은 후 누군가에게 소개하고 싶어질 때 쓰는 글 (p.32)”이라며, 책에 대한 주관적 감상을 적는 독후감에 비해 객관적이고 균형적이라고 소개한다. 또한 서평은 책, 작가, 독자, 주인공을 데려와 그들의 언어로 책에 대해 말을 거는 행위다. 즉, 책에 대한 이해력과 표현력이 두 개의 바퀴처럼 맞물려야 가능한 책을 매개로 한 소통인 셈이다.

①어떤 책을 ②어떻게 읽었고, ③왜 추천하는지, 이 세 꼭짓점을 정리했다면 서평으로서의 조건을 갖춘 셈입니다. (p.14)

책은 서평 쓰기를 소개한다. 어떤 책을, 어떻게 읽었고, 왜 추천하는지에 대해 쓴다. 어떻게 와 왜를 쓰기 위해서는 ‘나의 생각’이 필수다. 맛집의 별점을 메기듯 내가 특별히 이 책을 소개하는 ‘나만의 이유’를 근거로 잡아 글을 쓰라고 책은 강조한다. 주의할 점은 책의 권위에 눌리지 않을 것. 많은 독자들은 지식과 정보의 집약체인 책을 그대로 인정하고 흡수하려는 경향이 있다. 나 역시도 그렇다. 그러나 책이나 저자의 의견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생각을 나누다보면 의문이 생기거나, 설득되지 않는 지점이 있기 마련이다. 저자들은 이런 부분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책과 연관지어 설명하며, 책의 매력을 보여줄 수 있는 글을 쓰라고 말한다. 서평쓰기에서 나아가 책 읽기의 관점까지 달리하게 만드는 방법이다.

책은 비평도 다룬다. 서평이 책을 읽도록 만드는 글이라면, 비평은 조금 더 깊이있게 분석적으로 쓰는 글이다. 두 글쓰기 모두 자신의 관점으로 책을 설명한다는 것은 공통적이지만, 비평이 한 지점을 포착해 더 깊이 파고든다는 점이 차이라 할 수 있겠다. 결국 책에 대한 글쓰기는 네 단계로 구분할 수 있지 않을까. ‘좋았다’ ‘재미있다’는 감정, 이 감정을 써내는 독후감, 객관적 시각으로 책을 읽도록 만드는 글 서평. 마지막은 책의 지점을 파고들어 설득하는 비평까지. 나의 글은 어디쯤일까? 책을 좋아하고 글쓰기를 즐긴다면 순차적으로 경험해보고, 자신의 레벨을 도장깨기하는 마음으로 도전해봐도 좋겠다.

현장에서 서평을 강의하는 저자 두 명의 글로 이루어진 책이다. 서평의 정의, 서평가의 태도, 서평을 쓰는 방법, 비평과의 차이 등 ‘서평’을 중심으로 다양한 분석이 이뤄진다. 그 중 마지막 챕터 ‘서평에 대한 여섯 가지 시선’이 가장 인상적이다. 동일한 질문에 대해 서평가 여섯 명이 대답을 했다. ‘좋은 서평이란 무엇인가요?’에 대한 답을 보자. 나는 ‘책을 읽고 싶게 만드는 서평’이라고 대답할텐데, 서평가 현호섭은 "구태여 책을 사보지 않고도 책을 다 읽어본 듯한 느낌을 전해주는 서평이라 말하고 싶네요. (p.215)“라고 답했다. 책이라는 재료가 있어야 서평이라는 창작물이 나올 수 있다고 여겼는데, 오히려 서평을 책보다 앞에 두는 의견이라 새로웠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읽기와 쓰기의 중요성을 알고 있다. 하지만 실천이 어려운데, 그 중 쓰기는 난이도가 더 높다. 이해하고, 생각하는 힘과 묵묵히 자신과 싸우며 풀어내는 엉덩이 근육도 필요하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니 쓰기의 어려움이 조금은 해결되는 듯 하다. 서평의 얼개와 특징을 파악하니 무엇이든 쓰고 싶어진다. 생각을 정리하고 싶다면, 서평에 관심이 있다면, 나아가 책을 제대로 읽고 싶은 사람이라면 꼭 한번 읽어보기를 권한다. 지금까지와는 또 다른 차원의 읽기와 새로운 관점의 쓰기가 가능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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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 빛나는 정리의 마법 인생이 빛나는 정리의 마법 1
곤도 마리에 지음, 홍성민 옮김 / 더난출판사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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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결심으로 살림 간소화를 다짐했다. 물건의 충동 구매를 줄이고 꼭 필요한 것들로만 채우기. 명절을 맞이해 미뤄뒀던 살림을 정리하며, 책 <인생이 빛나는 정리의 마법>을 다시 꺼내 읽었다. 동일한 내용의 넷플릭스 <곤도마리에 '설레지 않으면 버려라'>가 사례 위주라면, 책은 곤도마리에의 '정리 철학과 노하우, 그리고 정리 원리'를 담고있다.


곤도 마리에는 어릴 때부터 자신감이 없었다고 한다. 사람들과 관계하기보다 마음 편하게 홀로 있는 시간을 즐겼고,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방에 있는 물건들에게 정을 주면서 '정리'에 눈을 떴다고 한다. 저자는 정리를 하면 환경이 단순해지고 머리가 맑아져 '해야할 것'을 정확히 알 수 있다고 말한다. 즉, 정리가 곧 생각정리이며, 이를 통해 인생의 방향도 달라진다는 것이 그녀의 철학이다.


물건을 고르는 기준에 대해 내가 내린 결론은 바로 '만졌을 때 설레는가'이다. (p.59)


저자의 원칙은 간단하다. 첫째, 정리는 한 번에, 단 기간에, 완벽하게 한다. 둘째, 모든 물건을 직접 하나씩 만져보며 소중한 것들만 남겨두는 '축제의 정리'를 한 후, 평소에는 물건을 사용하고 제 위치에 두는 '일상의 정리'만 하면 된다. 축제의 정리 방법으로는 세부적으로 (1)버린다. (2)물건의 수납위치를 정한다, 나뉜다. 이 때 물건은 품목별로 모두 꺼내 - 구역별이나, 계절별이 아닌 - 남길것과 버릴것으로 나눈다. 여기서 포인트는 남길 물건의 기준은 '설레임'이다. 곤도는 모든 물건을 직접 만져보며 설레임을 주는 지 느껴보라고 강조한다. 전기가 통하는 것같은 느낌을 주는 물건은 내게 꼭 필요한 것이고, 이 기준으로 판단하면 남게되는 물건은 의외로 많지 않다고 한다. 그렇게 꼭 중요한 것만 물건만 남겨둔 후, 각 물건에게는 수납 위치를 정해준다. 볼펜은 펜꽂이에, 칼은 도마옆에 둔다는 식이다. 위치를 정해줌으로써, 물건을 찾아 헤매거나 다시 집이 어지러워지는 '정리 리바운드(정리되기 전의 혼잡한 상태로 돌아가는)'를 방지할 수 있다는 것이 곤도마리에의 대원칙이다.


어찌보면 곤도의 방식은 너무나 당연하다. 보통 우리는 고민이 많을 때 머리가 복잡하다. A를 생각하다가 B가 생각나고, C를 고민하다고 또 D로 나의 의식은 이동한다. 곤도의 정리법은 이런 복잡하고 두서없는 흐름을 애초에 차단한다. 집 안에는 꼭 필요한 소량의 물건만 있고, 이들은 각각 명확한 위치가 있어 언제든 찾아 쓸 수 있다. 당연하고도 편리한 방법이다.


그리고 곤도의 방식은 특별하다. 감정을 바탕으로 하기때문에 나를 둘러싼 모든 것에 생명을 느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곤도는 물건은 소중히 다룰수록 반드시 주인에게 보답한다면서, "옷, 가방, 펜, 컴퓨터 등 평소 사용하는 물건 하나하나를 소중히 다루면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매일의 생활에서 든든한 조력자를 얻는다. (p.213)"고 말한다. 그저 사용하고 던져두던 물건을 다시 보게 하는 새로운 관점이 아닐 수 없다. 나아가 저자는 집에도 생명력을 불어넣는데, "집은 항상 같은 곳에서 일하고 녹초가 되어 돌아온 주인을 위로해 주고, 기다리고, 지켜준다. 오늘은 일하고 싶지 않다면서 뒹굴어도 편하게 받아준다. 이렇게 집처럼 마음 깊고 따뜻하고 커다란 존재가 있을까? (p.237)"라며, 리를 통해 항상 자신을 지켜주는 집에 대한 보은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나는 실제로 곤도의 방식으로 집을 정리하고 있다. 책에는 옷을 개는 방법, 책을 정리하는 법, 동전보관법, 재고품 처리법 등 물건별 정리법을 다루고 있어 다각도로 활용할 수 있다. 곤도의 책을 읽으며 '한 우물만 판 사람'의 위대함을 다시금 느꼈다. 어린시절 내성적이어서 물건과 대화하기 시작했다는 곤도는 학창시절 '정리반장'을 자처하고, 본인의 방 뿐 아니라 가족들 방과 거실까지 틈나는데로 정리하곤 했다. 또, 자라서는 친구와 지인들의 집도 정리하며 자신만의 원칙과 원리를 만들어, 현재는 정리컨설턴트로 책도 내고 강연도 하고, 해외로 고객을 만나러가는 가기도 한다. 책에서 말했든 저자가 원하는 것을 끊임없이 생각하고 연구하고 도전할 수 있었던 것도 평소의 정리습관으로 '좋아하는 것'을 정확히 알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 아니었을까. 곤도 마리에라는 사람의 대단함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앞에서 말했든 넷플릭스에서도 그녀의 이야기를 볼 수 있다. 각 에피소드별로 미국 가정들을 방문해 컨설팅 해주고 정리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책 <인생이 빛나는 정리의 마법>은 사례뿐 아니라 정리에 대한 곤도의 철학을 포함하고 있어 조금 더 범위가 넓다. 물건을 간소화하고 삶을 명확히하고 싶다는 사람들에게 꼭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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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고 싶은 사람들을 위하여 - 나만 알고 싶은 백수 김봉철 군이 웅크리고 써내려간 이상한 위로
김봉철 지음 / 웨일북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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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여섯, 백조였던 나. 회사를 나왔다는 기쁨은 일주일도 가지 못했다. 그 후로는 '세상에 나를 어떻게 내놓을지' 고민하며 괴로워했다. 기죽기는 싫다,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는 건 참을 수 없다, 자신감 없는 건 더 싫다, 따라서 나는 당당해야 했다. 그래서 누군가 "뭐하고 지내세요?" 라고 물으면 "잠깐 쉬고 있어요. 여기저기서 연락이 너무 많이 와서 피곤하네요. 하하."라며 당치도 않은 거짓말을 내뱉었다. 속으로는 바짝 쪼그라들어 심장이 없어질 지경이면서.

 

숨자. 숨어 버리자. 누구도 나를 찾을 수 없을 때까지, 끝까지 숨어 버리자. 버틸 수 없으면 피하자. 지칠 것 같으면 포기하자. (p.5)

서른여섯, 백수, 김봉철은 다르다. 그는 "언제나 당당하게 가슴을 쭉 펴고 고개를 꼿꼿이 들자(p.5)"고 하는 말에 지쳤다면서 아예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도록 자신을 방에 가둔다. 책을 읽고 영화를 본다. 생각이란 걸 하다 블로그에 글을 올렸다. 방 안에 웅크린 채 써내려간 글들이 모여 책이 되었다. <숨고 싶은 사람들을 위하여>는 김봉철이 꾹꾹 눌러 써내려간 자신의 초상이자 자화상이다.

짧게 써내려간 그의 글을 읽으며 '어떻게 이렇게 사람이 어둡지' 궁금해진다. 이유는 금방 드러난다. 김봉철의 어린 시절은 불우했다. 가난했고 우울했다. 아버지에게 맞았고, 어머니는 눈물 흘렸으며, 친구들에게도 맞았다. 그렇게 고등학교를 중퇴했다. 마음을 받지 못했으니 마음을 주지도 못한다. 새벽에 일을 나가 탈수상태로 돌아온 엄마가 밥을 차려줄 게 분명함에도, 그는 홀로 방에서 곱창이나 치킨을 시켜먹는다. 엄마는 반찬이 맛이 없어서 그러냐며, 일을 해서 반찬에 신경 쓸 겨를이 없다고 미안해하자 김봉철이 엄마에게 말한다. "핑계 대지 마. 사람은 하면 다 해.(p.161)"

이런 철부지가 있나! 화가날 때쯤, 김봉철의 사회생활 이야기가 등장한다. 백수인줄 알았던 그는 고객센터에서 상담일을 시작한다. 엄마에게는 꺼내겠다 생각하지도 못했던 죄송합니다,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타인에게 반복한다. 팀장에게 혼나고 동료와 관계가 틀어지면서, 그 생활마저 6개월을 넘기지 못한다. 김봉철은 자신이 문제가 많은 사람이라며, 살아서 하는 모든 것에 자신이 없다고 말한다.

어린시절, 학교, 직장,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 툭툭 내려놓듯 써내려간 김봉철의 문장은 묘하다. 너무 어두워 같이 우울해질까 두려워지는 와중에 자꾸 그의 글을 읽게 만든다. 넋두리일까 싶은 이야기들은 나를 반성하게 한다. 특히, ‘엄마’에 대한 이야기는 속이 어지러울 지경. 김봉철은 연신 엄마를 함부로 대한다. 살가운 말 한마디, 따뜻한 눈빛 한번이 그리우셨을 엄마에게 세상 잔인하고 폭력적으로 대한다. 가까워서 함부로 하는 건가, 엄마 돌아가시고 후회하려고 이러나 속으로 수백번 욕을 한다. 그러다 무릎을 탁 친다. 엄마에 대한 태도는 곧 자기 자신에 대한 것 아닐까?

책을 읽고, 김봉철이라는 사람이 궁금해졌다. ‘쓰레기’라고 일컬어지고 있었다. 더불어 이 책은 두 번째 작품이고, 현재는 강연도 다니고, 독립출판계에서는 전설적인 인물이라고도 한다. 또, 작가들의 작가라고도. <숨싶사>로 김봉철을 처음 접한 나에게 그는 무능한 불효자식이었는데, 이제 제법 돈도 벌고 일도 한다는 한결 마음이 놓인다. 그리고 그를 응원하게 된다. 이건 전적으로 그의 어머니를 위해서다. 김봉철과 그의 어머니가, 가족이 지금보다 더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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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혁명의 구조 - 출간기념50주년 제4판 까치글방 170
토머스 S.쿤 지음, 김명자.홍성욱 옮김 / 까치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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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심지어 친정에) 있는 이 책을 손에 들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아마도 작가라는 명함을 파고 글로 밥벌이를 하던 시절, 사두었던 책이 아니었을까. 추측이 맞다면, 지금으로부터 강산이 딱 한번 변하기 전, 그러니까 2010년에 구입한 책이다. 책을 사두고, 봐야지, 봐야지.. 했지만 언젠가 보겠지, 보겠지.. 하면서 미뤄뒀던 책. 부채감이라고나 할까. 그 책을 이제야 손에 들고 한 장씩 넘기며 읽었다. 정독을 하고 싶었으나 통독을 하고 말았지만.

                            

책 <과학혁명의 구조>는 말 그대로 ‘과학혁명이 어떻게 일어나는가’를 다룬다. 토마스 쿤은 과학혁명을 패러다임의 변화라고 했다. 그럼 패러다임은 무엇일까? 정권이 바뀌면서 등장했던 창조경제, 4차 산업혁명 등의 개념을 언급할 때 우리는 보통 ‘패러다임’이라고 해왔다. 쿤에게 패러다임이란, 사회 구성원들에 공유되는 신념, 가치, 기술 등을 말한다. 특히 그는 과학자 사회 안 에서의 범위로 한정해 설명한다. 결국 책에서 말하는 ‘과학혁명’이란 ‘기존의 과학적 발견을 파괴하는 과정’ 즉 ‘패러다임의 변화’로 정의할 수 있겠다.

 

쿤은 과학의 발전을 세 단계로 나눠 설명한다. 현재 믿고 따르는 이론을 정상과학(패러다임이라고도 할 수 있다)이라고 한다. 이 정상과학 안에서 과학자들은 뚜렷하게 밝혀진 사실, 혹은 예측 가능한 사실, 또는 조금 더 명확하게 개념을 파악하기 위한 연구 등을 진행한다. 일종의 과학 활동이다. 그 과정에서 ‘어? 원래 알던 것과 다른데?’라며 기존 명제의 오류를 찾게 된다. 쿤은 이것을 ‘위기’라고 명명했다. 이 위기는 기존 이론에 대한 의심과 연구를 만들어내며 곧, 새로운 이론을 등장시킨다. ‘NEW 정상과학’의 탄생이다. 따라서 오류의 발견과 새로운 이론이 등장하기까지의 시간을 쿤이 설명하는 ‘과학혁명’이라고 이해할 수 있겠다. 정리하면 과학은 <정상과학1 > 위기 봉착 > 과학혁명 > 정상과학2 탄생>의 과정으로 진행된다.

 

이 책의 가치는 무엇일까? 고통스럽게 300p를 읽으며 느낀 바로는 실제와 이론의 불일치를 파악하고 새로운 이론(혹은 원리, 혁명의 과정)을 제시했다는 점이라고 본다. 물리학을 전공한 쿤은 사실 학부시절 과학에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 다만 박사 논문을 준비하며 ‘수용된 견해’라고 불리던 과학관 – 논리경험주의적 과학철학에 대한 이론 - 이 실제와는 다르다는 걸 알았다고 한다. 당시 과학관은 경험에 의거한 원리를 중시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 차이를 학부때 인지한 쿤은 박사 졸업 후 코페르니쿠스에 대해 연구해 <코페르니쿠스 혁명(1957)> 발간했다고 과학사학자로 자리매김하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결론적으로 경험을 중시한다는 당시의 과학이론과 과학이 개념을 정립하며 발전해가는 과정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리라. 그의 용어를 빌리자면, 이해에 대한 패러다임 변화를 경험하며 과학사를 꿰뚫는 관점을 제시할 수 있었던 것으로 읽힌다. 어쩌면 과학사에 대한 이런 과점은 전 문명에도 적용할 수 있는 원리일지도 모르겠다.

 

다시 한번 말하자면, 매우 고통스럽게 읽었다. 무언가를 썼지만 확신도 없다. 번역 핑계를 대고 싶다. 책은 한글인지 영어인지 알 수 없는 문장으로 가득하다. 원문의 느낌을 그대로 살리고 싶었던 걸까. 세상에 이런 책이 있을까 싶은 번역에 휘둘려 열었다 닿기를 반복했다. 여건이 된다면 차라리 원문을 읽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1월 토론도서가 아니었다면 절대 읽고 쓰지 못했을 것이다.(또 하필 1월 도서라서, 이걸 안읽는다면 올해 독서가 모두 어그러질 것만 같은 강박에 시달렸기 때문인지도) 하지만 또 1월 토론도서인 덕분에 이 어려운 책을 읽어냈다. 뭐라도 쓸 수 있을 정도로 읽어낸 스스로를 칭찬해주고 싶다.

+ 덧, 매끄러운 번역으로 개정판이 나오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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