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의 힘/권혁웅

 

 

 

혈압이 길 가던 아버지를 불러 세웠다

골목에서 삥을 뜯던 불량배처럼

운명이 뒤에서 아버지 머리를 후려쳤다

나오면 백 원에 힌 대다,

주머니에서 정말로 동전들이 굴러 나왔다

 

됐어, 이제 가 봐

운명은 너무 일찍 그를 귀가 시켰다

 

스무 살 내가 골목에서 그녀와 동행할 때에도

운명은 5센티 이내를 허락하지 않았다

손등이 두 번 스쳤을 뿐이다

닿을 수 없는 거리의 이름이 지척이었다

운명은 집 앞에서 초조하게 기다리던

큰오빠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넌 뭐 하는 놈이냐?

운명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할머니는 마루에 앉아 우아하게 담배를 피웠다

떨어진 재가 마루에 배광(背光)을 그렸다

성(聖)조모께서는 자세 한 번 고치지 않고

하루 종일 자리를 지켰다

운명이 주변에 운집(雲集)했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운명이 따라다니며 물었다 네가 모르는 곳으로 간다,

조모가 대답했다

 

이불을 들추면 운명이 웅크리고 누워 있었다

얇게 코를 고는

그러다 볼륨을 확 높이고야마는

으이그, 내가 못 살아

 

운명은 그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운명은 아버지도 할머니도 나도  비켜가지 않았다. 때로는 '골목에서 삥을 뜯는 불량배'의 모습으로  때로는 초조하게 누이동생을 기다리는 큰오빠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또 운명은 제 주인을 놓칠세라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따라다니며 물었다. 놈은 늘 기다리고 있다. '으이구, 못살아'하는 말. 들리는 순간  덥친다.  당해본 사람만 안다. 생의 모퉁이에서 기다리다 뒤통수를 치는 운명에 무릎 꿇고 예의를 갖추기로 한다. 

 

 

시집을 읽는 내내  무협시를 읽는가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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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2-02-25 0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운명의 힘..시가 무섭습니다. 모든 일이 다 그런걸까요..? 그러나 사람은 또 자기 운명을 스스로 개척한다고들 하지 않습니까. 반딧불이님의 앞에도 좋은 운명이 기다리고 있기를, 그리고 만들어나가시기를 바라겠습니다.^^

반딧불이 2012-02-25 01:23   좋아요 0 | URL
맥거핀님. 두더쥐 잡기 게임 아시죠? 방망이로 치면 머리만 튕겨나오는...
저도 운명의 방망이에 뒤통수 맞았다고 생각하려구요. 이제 튀어오르는 일이 제 일이겠지요? 염려와 위로... 고맙습니다.

쉽싸리 2012-02-26 17: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침에 티브 보는데 장석주 시인이 나오더라구요.
그런데 진행자가 권혁웅이라는 시인이 청춘의 표상? 같은 시인 세사람을 들었는데, 그중에 하나가 장석주 시인이라 했다고 그러데요. 한 명은 기형도고 또 한명은 이상이었던가?(이 금붕어 기억력...)그때 권혁웅이라는 시인을 처음 들었어요.
시인의 짧은 머리가 인상적이었어요. 시골같은데서 개 세마리를 키우며 사는데 개들한테 시를 읊어주면 괜찮은 시에는 반응을 한다구 하더군요. ㅎㅎ
저도 두 마리 키우는데 걔들도 먹을것에는 반응이 굉장합니다. 집안에서 뭐 맛난거라고 하면 밖에서 달라고 짓어대지요. 시를 아는? 개와 먹을것에 충실한 개의 운명은 다른거겠죠? ㅎㅎ

자작시는 계속 갈고 닦는 중이신가요? 책으로 낼 계획이라도?
그 상강이라는 시, 너무 좋았는데요...ㅎㅎ

반딧불이 2012-02-28 16:24   좋아요 0 | URL
답이 늦어서 죄송합니다. 쉽싸리님
장석주 시인은 시보다도 문학관련 글을 훨씬 더 많으 쓰시는 분으로 알고 있어요. 장서가이시기도 하다고 들었구요. 기회 되시면 권혁웅 시인의 <마징가 계보학>을 일별해보셔도 좋을 것 같아요. 묘한 맛이 있답니다.

개를 두 마리나 키우시는군요. 저희집에도 요크셔가 한마리 있는데...'나갈까'하는 말에만 적극적인 반응을 보일뿐 먹을것도 시들합니다. 저도 시를 쓰면 읽어주고 반응을 살펴봐야할까봐요.~
자작시는 좀 모아지면 묶어볼까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