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의 힘/권혁웅
혈압이 길 가던 아버지를 불러 세웠다
골목에서 삥을 뜯던 불량배처럼
운명이 뒤에서 아버지 머리를 후려쳤다
나오면 백 원에 힌 대다,
주머니에서 정말로 동전들이 굴러 나왔다
됐어, 이제 가 봐
운명은 너무 일찍 그를 귀가 시켰다
스무 살 내가 골목에서 그녀와 동행할 때에도
운명은 5센티 이내를 허락하지 않았다
손등이 두 번 스쳤을 뿐이다
닿을 수 없는 거리의 이름이 지척이었다
운명은 집 앞에서 초조하게 기다리던
큰오빠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넌 뭐 하는 놈이냐?
운명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할머니는 마루에 앉아 우아하게 담배를 피웠다
떨어진 재가 마루에 배광(背光)을 그렸다
성(聖)조모께서는 자세 한 번 고치지 않고
하루 종일 자리를 지켰다
운명이 주변에 운집(雲集)했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운명이 따라다니며 물었다 네가 모르는 곳으로 간다,
조모가 대답했다
이불을 들추면 운명이 웅크리고 누워 있었다
얇게 코를 고는
그러다 볼륨을 확 높이고야마는
으이그, 내가 못 살아
운명은 그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운명은 아버지도 할머니도 나도 비켜가지 않았다. 때로는 '골목에서 삥을 뜯는 불량배'의 모습으로 때로는 초조하게 누이동생을 기다리는 큰오빠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또 운명은 제 주인을 놓칠세라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따라다니며 물었다. 놈은 늘 기다리고 있다. '으이구, 못살아'하는 말. 들리는 순간 덥친다. 당해본 사람만 안다. 생의 모퉁이에서 기다리다 뒤통수를 치는 운명에 무릎 꿇고 예의를 갖추기로 한다.
시집을 읽는 내내 무협시를 읽는가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