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어느 세미나에서 이문재 시인에게 여쭈었던 말이 있다. 최근의 한국문단이 두 개의 M신을 모신다고 하는 비판이 있는데 한 말씀 해달라는 내용이었다. 그는 주저 없이 자기도 M신을 모신다고 했다. 물론 그가 말한 M신은 Money도 Media도 아니 文神이었다. 참으로 통쾌하고 뻐근한 감동이었다.
여기 그 文神을 모시는 사람을 또 만났다. 이옥이다. 그는 祭文神文 즉, <문신께 고하는 글>까지 지었다. 이옥은 그가 배냇니를 갈지 않았을 때부터 문신에 종사했다고 한다. 그 내용을 보면 내게는 그가 곧 文神처럼 보인다.
내가 본래 천성이 게으르고 능히 스스로 부지런하지 못하여 전후로 읽은 책이 <서경書經>은 겨우 사백 회, <시경詩經>은 전후 백 회인데 그중에 아송雅頌은 그 갑절이었다. <주역周易은 삼십 회, 공자·맹자·증자·자사의 책은 <주역>보다 이십 회 많이 읽은 정도이다. 내 성정이 <이소離騷>를 가장 사랑하여 어느 때이건 일찍이 입에서 읊조리지 않은 적이 없었으나 또한 천 회를 채우지는 못하였고, 그 밖의 것은 대체로 눈으로 섭렵하였으니 서산書算을 들어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는 책 한 권을 수십 번씩 읽었다. 두 번 이상 읽은 책이 몇 권 안되는 나로서는 기가 질리는 일이다. 아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명심보감은 제법 읽은 듯하다. 오래전이지만 지금의 한국학중앙연구원이 정신문화연구원이었을 때, 청계서당에 다닌적 있다. 훈장님께서는 매일 50 번씩 소리내어 읽을 것과 써 올 것을 주문하셨다. 퇴근 후 허겁지겁 달려가서 오십독을 하고나면 허기가 져서 허리가 휘고 목이 쉬었다. 내 시험답안지를 보신 훈장님은 곧 문리가 트일것이라고 하셨지만, 나는 두학기를 다 마치지 못했다. 남은 것은 훈장님 것을 본따 만든 서산(書算) 두개와 지은이를 알 수 없는 시 한 편 뿐이고 공부에는 때가 있다는 옛말을 다시 확인하는 씁쓸한 후회가 배경화면처럼 깔려있다.
이옥의 나이 스물대여섯에 적은 글이니 문신과 함께한지 이십여 년이다. 돌이켜 생각하니 나는 내 청춘을 너무 낭비했다. 그 죄를 누구에게 물어야하나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해지더니 눈시울이 매캐했다. 그 많은 이유가 핑계와 변명으로 요약될 수 밖에 없는 지금 나를 적시는 이 눈물은 슬픔의 살을 뚫고 나오는 뼈와 같다.
아, 같은 봄이로되 연꽃과 국화의 경우에는 반드시 느리디 느려 꽃피기가 어려우니, 복사꽃 오얏꽃이 일찍 피어남에 비교하지 못하지만 이것이 어찌 봄의 잘못이겠는가? 연꽃과 국화가 봄을 저버린 것이다. 고요히 생각해봄에 얼굴이 붉어지고 위로 열이 올라 내가 차마 그 말을 많이 하지 못하겠다. 다행스럽게도 그대 문신이 나를 낮고 비루하게 여기지 말고, 나의 어리석은 성품을 더욱 도와주어 이전의 나를 한번 씻어준다면, 내가 비록 불민하나 또한 마땅히 새해부터는 조심조심하여 오직 그대를 저버리지 않을 것을 도모하겠다. 금일은 세모라, 내가 느낌이 많아 붓꽃을 엮어 안주로 삼고 연지를 술항아리로 삼아, 심향 한 줄기 가늘고 파르스름하게 실오라기처럼 피어오르는데, 제문을 들고 문신에게 고한다.
문신은 이를 흠향하시라.
입동이 지났으니 소설 대설이 멀지 않았다. 뒤이어 동지는 오고 밤은 더욱 길어질 것이다. 이옥의 저 간절한 제문 앞에 꿇어 이 겨울을 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