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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양이 뭐지?』 『오행은 뭘까?』 라는 질문은 여전히 질문으로 내게 유효하다. 『음양오행으로 가는 길』은 사방으로 안개가 자욱하고 나는 그 한가운데 있다. 음양이니 오행이니 하는 말을 특수한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전유물로 여겼던 것을 후회해보지만 답답한 마음을 감출 수는 없다. 답답한 마음은 하늘을 본다. 그러나 하늘의 두꺼운 먹구름은 답답한 가슴을 더욱 짓눌러온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나는 종종 이렇게 가슴이 답답할 때 하늘을 보았던 듯하다. 하늘이 답답함을 해소시켜주기는커녕 질문마다 빗금을 좍좍 그으면서 소나기 심술을 부리는데도 말이다. 그런데 나는 왜 하늘을 보는 걸까? 동물과 다름없었던 수렵시대를 마감하고 농경을 시작하면서 어떤 해결책이 필요할 때마다 하늘을 보았던 인류조상의 유전형질을 나도 물려받은 것은 아닐까?
그들은 눈에 보이는 해와 달과 별자리를 관측했다. 그리하여 보이는 것들의 보이지 않는 원리(體 )를 터득했다. 이 원리를 농경뿐만 아니라 삼라만상에 적용했고 인간 역시 이 우주원리 안에서 움직이고 있다고 믿었다. 인간을 소우주로 본다는 것은 여기에서 비롯된 말이다. 싹을 틔우고(生), 무성해지고(長), 열매 맺고(收), 땅에 떨어져 숨는(藏) 生長收藏이라는 우주의 네 가지 규칙을 목화금수, 봄여름가을겨울, 이야기의 기승전결, 인생의 변화과정인 유소장로(幼少長老) 등 무수한 실제에 응용했다.
우주의 원리는 시간의 변화뿐만 아니라 공간에도 적용되었다. 상하좌우, 동서남북은 물론이려니와 코눈귀입 등 인간의 신체에도 적용했다. 가장 관심 있었던 것은 이러한 우주의 원리에 나의 생년월일을 적용했을 때 과연 나는 우주의 어떤 운행의 과정에 태어났으며 어떤 영향을 가장 많이 받는가 하는 것이었다. 발터벤야민은 자신이 “가장 느리게 공전하는 별, 우회와 지연의 행성”, 토성의 영향아래 태어났다고 믿었다. 프로이트의 심리학 이론보다 중세생리학을 더 선호했던 모양이다. 중세에도 각 행성을 양 또는 음의 성질로 분류했던 듯하다. 태양과 달은 각각 양의 성질과 음의 성질을 대표하는 것으로 남성과 여성을 상징했다. 벤야민이 속했던 토성은 남성을 상징하며 생각은 미래보다 과거에 머물러 있다고 한다. 그는 토성적 기질의 특성인 느림과 우울질을 누구보다도 잘 운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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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원제는 Under the sign of Saturn으로 벤야민에 관한 글의 소제목이기도 하다. 벤야민에 관한 글에는 우울질에 대한 다양한 특성이 언급되고 있다. 벤야민은 누구보다도 자신을 깊이 알았고 자신의 기질을 그의 작업에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그러니까 그는 자신의 기질 즉 우울증에 빠져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객관적으로 바라보았던 것이다. 또 그는 자신과 마찬가지의 토성적 기질을 가진 예술가들을 적극적으로 찾아내기도 했다. 보들레르, 프루스트, 카프가, 괴테 등이 그들이다.
시간의 지배를 받는 기억을 공간과 연결시킨 그의 작품을 읽을 때 는 그의 토성적 기질을 염두에 두고 읽어야 할 것이다.
동양학에서는 생장수장이라는 우주만물의 원리를 목화토금수로 나누어 살펴본다. 이런 원리에 의하면 세상에 태어나 첫울음을 울 때 들이마신 우주의 기운이 바코드처럼 내 몸에 새겨져 있다는 것인데 나는 水의 기운을 가장 많이 갖고 있으면서 火의 기운은 고립되어 있다. 생일이 11월 말경이니 설득력이 떨어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기존의 내가 알고 있던 글자 水의 의미와는 전혀 다른 의미들을 내포하고 있는 水는 3000년 동안 잠자던 목련 씨앗을 발아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으며 만물을 포용하고 감싸 안고 숨어드는 것을 이야기 한다고 한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나는 과연 어떤 씨앗을 싹틔웠을까? 이러한 특성을 가진 水의 기운을 앞으로 어떻게 운용할 것인가?
내게 고립되어 있는 火는 인생에 비유하면 화려하지만 실속 없는 젊은 여름날을 의미한다. 가까이 할 수 없을 만큼 뜨겁고 밝으며 강렬하지만 만져보면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 빈껍데기의 성질을 가졌다. 하지만 속이 없다는 것은 어떤 것으로도 채워 넣을 수 있다는 상대적 의미도 갖고 있다. 火가 현실에서는 재물을 의미한다고 하는데 내 사주에 화가 없다는 것은 가난을 의미하는 것일까 반문해본다. 하지만 지금까지 돈이 없어 끼니를 거르지 않았고 남한테 손 벌리면서 살지 않았으니 이것은 아마도 내 기운이 아니라 누군가의 기운에 무임승차해 살았던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음양오행의 원리를 내게 적용했을 때 나에게 많고 적은 것들은 그러나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다. 내가 넘치게 가지고 있고 하나도 가지지 못한 것들은 그것만으로 기능하기보다는 다분히 상대적이기 때문에 이것을 어떻게 운용하느냐 하는 것이 더 중요했다.
음양오행의 우주원리를 인체에 적용한 의학적 자료가 『동의보감』이다. 생년월일을 우주원리에 적용하여 사주를 살피는 것이 시간적 관찰이라면 몸을 살피는 것은 공간적 관찰이 되는 것일까? 인체의 눈으로 볼 수 있는 오장육부와 10규는 눈에 보이지 않는 정기신에 의해 움직이고 있었다. 『동의보감』에서 놀라웠던 것은 수많은 병증보다도 똑같은 원인이라 할지라도 사람마다 그 증세가 모두 다르다는 것이었다. 또 몸이 살기 위해 병이 생긴다는 것. 그러니 그 병을 제거하기 위해 노력하기보다 몸에 나타나는 병증을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무더운 여름 이천여 쪽에 해당하는 분량을 도 닦듯이 넘기면서 그 어떤 증세와도 관계 맺지 않고 교묘히 비껴 나왔지만 안도감보다도 어쩐지 아무런 증세도 없이 무한한 잠복기만 있는 것처럼 불안하다. 지금은 비록 아이들 협박용으로 쓰고 있지만 내게『동의보감』은 의학서라기보다 종종 들여다보며 내 몸을 살피는 종이거울이며 음양오행은 생의 방향을 살피는 나침반이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