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 정치사상 고전읽기 통합적 사유를 위한 인문학 강의 1
강유원 지음 / 라티오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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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의 위기라는 말을 심심찮게 듣는다. 그러나 위기를 체감하기란 쉽지 않다. 다만 어느 날 읽히지 않는 책과 맞닥뜨렸을 때 문득 스스로 무식하다는 것을 절감한 것이 내 개인적인 위기라면 위기였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수잔 손택의 『사진에 관하여』에는 ‘플라톤의 동굴 속에서’라는 글이 있다. 플라톤의 『국가』에 나오는 ‘동굴의 비유’를 읽으려 시도했지만 포기했다.  언젠가는 ‘파놉티콘’이라는 제목을 가진 시 한편을 놓고 도대체 파놉티콘이 뭔지 몰라 시가 읽히지 않은 적도 있다. 우연히 「책 세상 문고」뒷날개를 훑어보다가 같은 제목을 가진 제러미 벤담의 책을 발견했고, 그것이 지금의 의미와는 전혀 다른 ‘감옥’이라는 뜻이라는 걸 알았지만 옮긴이의 ‘들어가는 말’만을 읽은 채로 있다. 여러 곳에서 고전에 대한 자극을 받고 고전의 담 너머를 기웃거리며 고전의 담벼락 밑을 배회해왔다. 

 

이후 고전읽기를 나름대로 시도하면서 느낀 것은 고전을 읽기위해서는 역사, 정치, 경제, 사회 등 당시의 상황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을 제대로 알지 못한 채로 읽는다는 것은 줄거리 따라가기이거나 멋진 문장을 채록하는 일에 그치고 마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기 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안다고 해도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하는지 막막하기만 했다. 마치 이런 나의 암담함을 알고라도 있었던 듯 강유원의 저작들은 내게 빛이 되어주었다.     

문학, 역사, 철학 등으로 이루어진 것이 인문학이다. 인문학은 저자가 말하듯이 대학에서 교양으로 배우는 것이지만 언제부터인가 대학은 교양을 배우는 곳이 아니라 취업을 위한 전문지식인 양성소가 되어버렸기 때문에 대학을 나왔다고 해서 인문학적 소양을 갖추고 졸업을 하는 것은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뒤늦게 인문학 공부를 하려면 어찌해야하는지 도대체 막막한 것은 나만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현실이다. 이런 현실이 바뀌기를 기다리느니 차라리 내 무덤을 파는 일이 빠르지 싶다. 스스로 자기에게 맞는 책이나 스승을 찾는 일 외에 달리 방법이 없는 것 또한 현실이다. 

‘통합적 사유를 위한 인문학 강의 1’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서구 정치사상 고전읽기』는 고전 읽기와 읽은 책에 대한 글쓰기를 아우르는 방법서이다. 저자는 먼저 고전을 읽는 방법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두었는데 이런 방법을 토대로 정치사상의 맥락에 따라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마키아벨리, 로크의 주요저작을 읽는다. 『서구 정치사상 고전읽기』와 텍스트로 삼은 고전을 함께 펴놓고 저자의 설명을 따라가다 보면 고전이 가지고 있는 형식과 내용, 고대에서 근대로 시대가 변화함에 따라 사유가 어떻게 변화했는지, 당시의 의미와 현재의 의미가 어떻게 다른지, 이러한 저작들은 후대에 어떻게 연결되는지 등 총체적인 맥락을 짚을 수 있다. 흔히 해설서들은 해설자의 주관적 의도대로 독자를 끌고가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강유원은 자신의 의도대로 독자를 끌고가지 않는다. 당시의 상황을 있는 그대로 고전을 해설하고 해석의 여백은 독자에게 남겨둔다. 이것이 저자의 미덕이다. 내가 제대로 읽은 책은 마키아벨리의 『군주론』한 권뿐이지만 고대와 근대를 다 섭렵해버린 것 같은 만족감이 든다. 이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만족감을 경계하면서 ‘통합적 사유를 위한 인문학 강의 2’를 기대해본다. 

나는 책을 읽으면서 내내 책의 내용과는 전혀 무관한 것을 반성해야했다. 막무가내와 무대뽀로 살고 있는 내 모습이 문득 떠올랐기 때문이다. 나는 운전을 할 때도 신호 떨어지는 대로 움직이고, 여행을 가도 오직 떠나야한다는 한 가지 계획만이 있을 뿐이다. 또 가다가 삼천포로 빠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생활이 이런 까닭에 독서에도 두서가 없으며 글을 쓸 때도 미리 계획하고 쓰는 경우는 거의 없다. 최근 저자의 책을 읽고 강의를 다운받아 들으면서 그가 아무리 5단락 글쓰기의 형식을 강조해도 ‘시대에 따라 형식도 변하고 외형률이 있으면 내재율도 있는데...’얼버무리며 속으로 궁시렁 거렸었다. 나의 이런 궁시렁과는 무관하게 그는 책을 읽고 요약을 하거나 보고문을 쓰는 일은 창조적인 글쓰기와는 전혀 무관하다고 수없이 강조한다. 이 책을 읽고나니 그가 왜 그렇게 형식을 강조해왔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오랜 세월의 풍화작용을 견디고 아직까지 널리 읽히는 고전은 내용 못지않은 형식의 견고성을 가졌기 때문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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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9-02-17 0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치 '책과 세계'의 확장 심화판인거 같네요. 이 책도 점찍었습니다~

반딧불이 2009-02-17 0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과 세계>는 총론, 이 책은 각론으로 보심이 어떠실지....

파란여우 2009-02-17 17: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강유원의 마키아벨리를 또 읽을 수 있는 책인가 봅니다. 목차를 확인했어요.
[책과 세계]에서 <군주론>은 도덕은 거추장스런 장식품이라는 틀 위에서 쓰여진 책이라고 했던 기억이 납니다. 얇지만 이 책도 만만하게 봐선 안될 책이군요. 담았슴다.^^

반딧불이 2009-02-17 2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우님, 평안하신가요? 저에게 <책과 세계>는 애물단지입니다. 저자의 세계관이 보일듯 말듯하면서 언어화가 안되는 탓이죠. 그래서인지 <서구정치사상 고전읽기>는 <책과 세계>보다 훨신 편하게 읽었습니다. 여우님 리뷰읽자마자 준비한 <춘향전>은 책상위에 뒹굴고 있어요. 이번 남명조식에 관한 글도 잘읽었습니다. 댓글을 막아버리셔서 여기다 주절주절 떠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