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각의 박물학
다이앤 애커먼 지음, 백영미 옮김 / 작가정신 / 2004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벤 킹슬리와 시고니 위버가 주인공으로 등장했던 영화가 있었다. 제목이 생각나지 않는다. (찾아보고 싶은 의욕도 없다). 여주인공은 학창시절 운동권에 몸담고 있을 때 자신을 성고문한 의사를 기억한다. 그녀는 눈이 가려진 채 묶여있었으므로 그를 보지 못했다. 십수 년이 지난 후에도 그녀는 슈베르트의 <죽음과 소녀>라는 음악과 의사의 목소리 그리고 체취를 기억하고 있다. 오로지 이 기억만으로 그녀는 우연히 자기 집에 오게 된 사람이 범인임을 밝혀낸다.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향수』도 냄새에 관한 이야기이다. 파리의 빈민가에서 태어난 주인공(그의 이름이 그루누이였던가)은 체취가 없다. 대신 그는 냄새의 귀재다. 나뭇가지를 거쳐 온 바람 냄새를 맡고 나무이름까지도 알아맞힌다. 그는 향수를 만드는 일에 광적으로 매달리면서 향기를 얻기 위해 살인도 아무런 죄의식 없이 해치운다. 책을 덮으면서 그가 그토록 찾아 헤맨 것이 결국 살아 움직이는 동물인 인간이 내뿜는 몸 냄새 혹은 서로의 체취뿐만 아니라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사람냄새가 아니었나 싶어 씁쓸하고 허탈했다. 도대체 사람냄새란 어떤 것일까 생각하면서 허탈함을 달랠 즈음 영화가 개봉되었고 개봉첫날 심야극장에서 영화를 보았지만 그 해답은 아직도 찾고 있는 중이다.


인간의 특정 감각을 소재로 한 예술작품들이 많지만 감각에 대한 백과사전 같은 책은 처음이다. 『감각의 박물학』은 내게도 있었던가 싶은 모든 감각을 정밀하게 생각해보게 해준다. 책 속에 가득 찬 감각에 대한 과학적 탐구는 설득력으로 작동하고, 문화적 차이는 신기함을, 문학적 표현은 읽는 즐거움으로 포만감을 준다. 그러나 인종이 다르고 시대가 달라도 인간이 느끼는 감각은 모두 같다. 다만 문화의 차이에 따라 감각의 확장과 속박이 다를 뿐이다. 감각의 향연을 벌였던 로마인들이나 감각을 부정한 기독교 구원의 교리는 인간이 감각의 동물이라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일 것이다. 어떤 이는 자신의 감각을 고양시켜 예술작품을 생산하고 타인과 공유하기도 한다. 선택받은 사람들이다. 450여 쪽에 이르는 이 책의 말미는 공감각에 할애되어있다. 이 부분에는 독특한 감각을 마음껏 향유한 예술가들의 이야기다. 글을 쓰기 전에 관 속에 들어가 눕는다거나, 적당한 단어가 필요할 때마다 서랍에 넣어둔 썩은 사과를 꺼내 냄새를 맡았다거나, 감기에 걸린 상태의 출렁이는 의식 속에서 감기 바이러스를 강장제로 활용한 이야기들은 짧지만 재미있다.      


인간은 가지고 태어난 감각을 얼마나 활용하고 사는 걸까? 사라져가는 감각을 보완하기 위해 인간은 무수한 기구들을 개발하고 사용한다. 물론 가진 감각을 더 확장하기 위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안경, 망원경, 현미경, 카메라, 전화기, 보청기, 이어폰, 마스크, 방독면 등등. 주변에 널려있는 모든 것들이 감각의 보조기구들이다. 음식이나 약물도 인간의 감각을 마비시키거나 확장시키기 위해 사용된다. 자본주의가 세계에 범람하면서 감각은 문화라는 이름으로 소비되기 시작했다. 모든 매체는 인간의 감각을 향해 맹렬한 유혹의 사인들을 보내고 있다. 순식간에 감각의 귀족을 만들어 줄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자신의 감각을 예민하게 발달시키고 감각의 귀족처럼 살기 위해서는 그것을 향유할 현실이 뒷받침 되어야한다. 그렇지 못한 경우 감각은 우아한 아씨로, 현실은 비천한 몸종으로 살아야만 하는 것이 현실이다.


나는 타고난 감각을 얼마나 활용하며 살고 있나? 스스로에게 묻고 보니 감각을 활용했다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조절하고 억압하면서 살아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먼저 든다. 자발적이기보다는 사회가 요구하는 대로 맞춰 살다보니 그리되었다. 보라는 것만 보고, 들어야 할 것만 듣고, 먹어야 할 것만 먹고, 안전한 것들만 만지고, 반경 몇 킬로미터 이내의 것들만 냄새 맡으면서 살아왔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의 등장인물들에 다름 아니다.

때때로 평소에 느껴보지 못했던 감각들과 맞닥뜨릴 때의 낯설음은 당혹감과 신선함을 동시에 전해주기도 한다. 내게도 이런 감각이 있었던가 하는 신선함은 잠시이고 그것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몰라 당혹스러운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러나 염려할 필요도 없다. 달팽이가 조심스럽게 더듬이를 내놓듯이 감각의 더듬이를 내밀라치면 그것을 짓뭉개버리는 인간들이 내 주위에는 포진하고 있으니까. 내가 가진 감각이 존중 받는 삶을 살았다면, 또 존중까지는 아니더라도 감각이 강제철거되지만 않았다면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어쩌면 우리의 삶은 감각의 유통기한  일지도 모른다. 감각이 나를 움직이고 나는 감각의 노예로 주어진 시간을 살 뿐인 것이다. 그러니 내가 살아 움직이며 감각을 활용하는 것이라는 생각은 이제 폐기처분하자.

그런데 희한하게도 다른 모든 감각들은 폐기처분 할 수도 있고 공유도 가능하지만 통각(저자는 통각을 촉각으로 분류했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만은 오롯이 가진 자의 몫이다. 자신의 상처를 푸욱 삭혀서 그것을 살아가는 힘으로 삼는 사람도 더러 있는 모양이지만 고통을 목적으로 사는 사람이 세상에 있을까. 엎어진 두부모처럼 으깨진 마음의 상처는 말하지 않으면 보이지도 않는다. 설사 말한다고 해도 대신 앓아줄 수도 없다. 그저 그것을 외면하지 않고 지켜봐야만 하는 고단함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존재한다. 사랑은 인간의 모든 감각을 활성화 시키는 동시에 그것을 고통으로 통합시키기도 한다. 그러므로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더 아프다. 그래서 사랑은 천형이다. 그런데도 누구나 사랑에 빠지고 싶어 한다. 이 사태를 어찌할꼬. 누구나 사랑이 황홀한 지옥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섯부른 위로는 하지 말기로 하자. 그것은 마음에 붙이는 반창고에 다름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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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9-02-01 1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감각의 박물관' 꼭 읽어보고 싶네요^^

반딧불이 2009-02-01 22:29   좋아요 0 | URL
서점이나 도서관에서 일별 하신 후 사시기를 권합니다.

하이드 2009-02-01 1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너무 좋아하는 책이에요. 다이앤 애커먼의 통통 튀는 문장과 세상에 대한 그 참을 수 없는 호기심과 관심에 읽는 저까지 힘이 나곤 하죠! 그녀의 책은 꽤 많이 번역되어 있어요. 최근에 나온게 <미친 별 아래 집>이고요.

반딧불이 2009-02-01 2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이드님,한산한 제 서재까지 오신걸 보니 이 책을 정말 좋아하시는군요. 나무랄 곳 없는 책이었지만 저는 감각의 이방인처럼 보이는 제 모습이 너무 초라해보여 속이 편치 않았답니다. <미친 별 아래 집>참고할께요.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