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과 굴뚝청소부
이진경 지음 / 그린비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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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예비 고찰을 통하여 이 책에 대해서 약간 언급을 하였기 때문에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이 책은 이진경 교수 나름대로의 ‘경계짓기’(문제설정)를 통하여 근대 및 현대 철학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철학의 가장 큰 주제를 ‘주체’로 파악하였고, 그래서 근대의 철학을 ‘주체철학’이라고 합니다.


1. 근대철학의 출발


왜 근대철학이 ‘주체철학’이 되었느냐하면, 근대철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데카르트의 문제설정이 ‘주체’이기 때문입니다. 예비 고찰에서도 살폈듯이 모든 것을 의심하더라도 ‘의심하는 나’는 확실하다는 것(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을 데카르트는 깨달았고, 이것을 철학의 출발점으로 삼습니다. 이것은 필연적으로 주체가 객체(대상)와 분리되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사고하는 ‘주체’가 있으면, 당연히 사고하는 무엇인가가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여러 문제가 등장하는데, 주체가 대상과 분리되었을 때 (인식하는) 주체가 (인식되는) 대상과 일치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가 문제입니다. 주체가 대상을 올바로 인식할 수 있는가라는 ‘인식론’의 문제가 등장합니다. 이것은 중세에는 별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신을 통하여 대상과 일치하는지 여부를 알 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책의 제목인 『철학과 굴뚝청소부』도 이 대상과의 일치문제를 다루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제3자가 보증해주어야 하는데, 그것은 과학도 보증해주지 못하기 때문에 이 교수가 말하는 ‘근대철학의 딜레마’가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스피노자는 이 근대철학의 딜레마를 넘어섰다는 것이 이 교수의 설명입니다. 스피노자는 두 개의 실체를 가정하는 데카르트를 비판하고 실체는 한 개이지만, 속성은 여러 개로 나타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양태). 다시 말하면 실체는 양태로 '표현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표현된다는 말은 ‘존재한다’는 뜻이구요.(p.68) 그래서 애초부터 주체와 객체의 분리문제, 정신과 물질의 분리문제를 비껴갈 수가 있었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중요한 의미가 담겨있다고 보여집니다.


그리고 스피노자는 진리(대상과의 일치문제)를 알려면 이미 진리의 기준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진리는 진리와 허위의 기준이다.”


2. 근대철학의 위기


그 다음은 영국의 경험주의를 통하여 근대철학의 위기가 왔다고 이 교수는 설명합니다. 로크는 데카르트의 이성주의에 반대하여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경험’뿐이라고 주장합니다. ‘완전한 개념’은 신이 준 것이 아니고, 오직 경험에서 추출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보편적인 것은 단지 개별적인 것에서 추상된 것이며, 이 공통된 특징에 붙인 이름일 뿐이라는 주장은 ‘유명론’의 논지와 비슷합니다.


이 경험주의를 극한으로 밀고 간 사람은 버클리와 흄이였습니다. 특히 흄은 ‘나’, ‘주체’, ‘자아’로 불리는 것은 인상과 관념의 묶음, 지각의 다발일 뿐이라고 합니다. 결국 ‘나’, ‘정신’이라는 게 따로 없다는 것이지요. 흄의 주장은 모든 것을 의심하는, 급기야 ‘생각하는 나’까지 의심하는 극단적 회의주의였습니다. 근대철학의 출발점이였던 ‘주체’가 해체의 위기가 온 것입니다.


그러나, 흄의 주장도 여전히 근대적 문제설정의 한계 ‘안에’ 있었다고 이 교수는 설명합니다. ‘인간’에 대한 과학과 참된 지식이 어떻게 가능한가를 검토하다보니 모든 것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내용이 나오는데, 흄에게 있어서 ‘인과관계’는 습관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상이나 관념을 결합시켜 어떤 지식을 형성합니다. 이 지식은 ‘법칙’이 아니라 ‘믿음’이라고 합니다. 믿음은 힘이 있어 믿은 사람에게 실재적인 효과를 가진다고 합니다. 즉, 흄은 어떤 지식이 진리인가 아닌가를 따지는 게 아니라 이 지식이 그걸 믿는 사람에게 어떤 효과를 갖는가를 질문하고 있습니다.


3. 근대철학의 재건


칸트는 흄의 주체비판을 받아들여 이 주체가 과연 철학의 출발점이 될 수 있는지를 살폈습니다. 데카르트가 자명한 것으로 전제하고 출발점으로 삼았던 것들을, 칸트는 그게 어째서 출발점이 될 수 있는지를 연구하였다는 것이지요. 이를 ‘이성비판’이라고 합니다. 이를 가능케 하기 위해 ‘선험적 주체’라는 개념을 도입합니다. 선험적 주체는 관념이나 감각의 다발에 불과한 경험적 주체와 달리 모든 주체에 공통되며, 경험이나 감각에 좌우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좌우하며, 확실하고 항구적이라는 특징을 가집니다. 이로써 칸트는 흄에 의해 해체되어 버린 근대적 주체를 ‘선험적 주체’라는 확고하고 튼튼한 것으로 되살려 낸 것입니다.


피히테를 거쳐 헤겔에 이르면, 근대철학은 정점에 이릅니다. 헤겔은 주체와 객체의 문제를 ‘절대정신’으로 동일화시킵니다. 절대정신은 자기 발전과정을 통하여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에 도달한다는 것이지요.(변증법) 이로써 절대정신은 다시 자기에게로 복귀하는 겁니다. 이런 의미에서 역사는 절대정신의 실현이란 목적을 향해 발전해 가는 ‘목적론적 과정’이라고 합니다.


4. 근대철학의 해체


근대철학은 이제 해체의 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인간이나 주체를 출발점으로 삼는 ‘주체철학’을 근본적으로 넘어서려는 시도는 먼저 맑스의 '역사유물론'에서 나타납니다. 맑스는 ‘실천’이라는 개념을 통해 근대철학을 넘어서려고 합니다. 먼저 맑스는 ‘대상’의 개념 자체를 바꾸려고 합니다. 주체와 대비되는 ‘대상’이 아니라 활동적인 생활 과정, 실천 과정으로서 파악합니다. 그럼으로써 ‘대상’을 사회적 맥락과 역사 속에서 정의하려고 합니다. 중요한 말이지요. 또한 ‘진리’의 개념도 현실성과 힘의 문제로 바꾸어버립니다. 어떤 사물에 대한 영원한 진리는 불가능하고, 어떤 판단이나 지식의 현실성과 타당성이 힘을 가지게 되면 그것이 진리라고 합니다. 이러한 유물론을 ‘역사유물론’이라고 합니다.


이를 통해 맑스는 ‘인간’이라는 개념 자체를 해체합니다. 인간은 ‘이성’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 인간은 사회적 관계의 총체라고 파악합니다. “흑인은 흑인이다. 특정한 관계 속에서만 그는 노예가 된다.”(p.213)


두 번째로 근대철학을 해체한 사람은 프로이드입니다. 그는 처음으로 인간의 ‘무의식’을 발견합니다. 즉 의식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영역이 있다는 것이지요. 이러한 무의식은 우연적인 게 아니라 인간이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보편적이라고 합니다. 후기의 프로이드는 이 무의식도 ‘이드’와 ‘초자아’로 분열되어 있다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 무의식은 근대철학을 해체하는데 기여하였습니다. 근대철학은 주체를 의식과 동일시하였고, 투명하고 통일성이 있었다고 하였으나 이것이 깨어진 것이지요. 이제는 ‘생각하는 나’ 이외에 ‘생각하는 나’가 알지 못하는 ‘나’가 인간내부에 있게 된 것입니다.


세 번째로 근대철학을 해체한 사람은 니체입니다. 니체는 질문 자체를 바꾸어버립니다. ‘진리란 무엇인가?’가 아니라 ‘진리란 어떤 것인가?’라고 묻습니다. ‘아름다움이 무엇인가?’가 아니라 ‘어떤 것이 아름다운가?’라고 말입니다. 진리라는 것을 사로잡고 있는 힘은 어떤 것인가? 따라서 ‘의미’를 아는 것은 주어진 대상을 점령하고 있는 ‘힘’을 아는 것입니다. 이런 힘을 구별해주는 것이 ‘의지’이고, 이 의지는 힘들간의 관계에 의해 정의되어 지는 것입니다. 이를 ‘권력에의 의지’라고 합니다. 좀 어렵죠?


데카르트의 명제와 비교하면, 니체는 ‘생각’이라는 것은 내가 원해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 무엇이 원해서 나오는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그 무엇’은 ‘권력의지’이구요. 따라서 근대적인 주체 개념은 자명하지 않고, 출발점이 아니라 권력의지가 구성해내는 ‘결과물’인 것입니다. 주체가 해체된 것이지요.


5. 현대철학과 언어학


세 사람을 통하여 근대의 주체철학은 해체의 길을 가는데, 이를 더욱 가속화 시킨 것은 현대 언어학입니다. 언어는 우리의 사고를 제한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언어의 규칙에 따라서 사고할 수밖에 없습니다. 훔볼트는 언어가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사고구조를 제약하며, 세계를 파악하는 관점을 내장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는 사고보다 언어의 우위성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즉, 언어란 그걸 사용하는 주체들 모두에게 공통된 사고의 기반이며, 선험적인 구조라는 것입니다.


소쉬르는 언어에 있어서 기호와 지시체 간에는 어떤 유사관계나 일치관계가 없다고 합니다. 자의적이라는 것입니다. 유명한 말이지요. 또한 언어는 개인에 의해 좌우되는 게 아니라 사회적으로 약속된 규칙의 체계이기 때문에 개인은 그 규칙에 따라야 한다고 합니다. 의미는 개인이 만들어내는 게 아니라 언어체계 안에서 만들어진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사고나 판단은 개개의 ‘주체’가 하는 게 아니라, 언어의 의미체계(구조) 속에 있는 것이며, 개인들은 그것에 따라 판단하고 행동한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이래서 소쉬르는 ‘구조주의’의 창시자라는 말을 듣지요.


비트겐슈타인은 언어는 ‘용법’이라고 합니다. 단어가 어떻게 사용되는가에 따라, 어떤 맥락 속에서 사용되었는가에 따라 의미가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이를 ‘언어게임’을 통하여 설명합니다. 체스를 할 때와 바둑을 할 때는 그 규칙이 틀려서 다른 규칙을 배워야한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말이지요. 이는 또한 규칙 자체가 가변적이라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 교회에서 사용하는 언어규칙과 직장에서 사용하는 언어규칙이 틀리다고 하면 적절한 예가 될까요? 아무튼 이런 생각은 소쉬르의 구조언어학과 차이가 있습니다. 즉, 구조언어학처럼 항상 이미 정해진 의미구조가 있는 것이 아니라 용법에 따라 가변적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 교수는 비트겐슈타인의 생각을 맑스의 ‘실천’개념과 연결하여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 교수가 지극히 ‘맑스주의자’이고 ‘유물론자’이기 때문에 이런 사유를 하였을 것입니다.


6. 현대철학과 구조주의, 포스트구조주의


레비-스트로스는 구조언어학의 연구방법을 인류학에 연결한 사람입니다. 인간에게 공통적인 무의식적 기초는 무엇인가? 그것은 ‘근친상간 금지’라는 규칙이라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인류의 ‘문화’가 시작되었다는 것이지요. 이는 모든 사회적 집단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다고 합니다. 레비-스트로스는 인간의 보편적이고 ‘선험적인’ 무의식을 기초로 친족관계의 보편적 구조를 찾아내며, 이로써 사회구조 전반을 관통하는 보편적인 사회질서를 찾아냈다고 생각합니다.


라캉은 소쉬르와 레비-스트로스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프로이드의 영향도 받았습니다. 그의 핵심주장은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런 무의식은 타자의 욕망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욕망은 결핍에 대한 욕망입니다. 타자에게 인정받고 싶다는 것이고, 타자와 동일시하고 싶다는 욕망입니다. 참고적으로 르네 지라르는 인간의 욕망을 ‘모방욕망’으로 보았다는 것을 저번 논의를 통해서 알 수가 있었습니다. 여기서 주체가 해체되는 지점은 ‘주체’는 어떤 중심성과 통일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타자의 욕망으로서 무의식의 결과물이라는 것입니다.


알튀세르는 맑스를 극한까지 사고한 사람이랍니다. 먼저 맑스주의를 과학으로 정립하려고 하였는데, 새로운 과학적 성과는 ‘인식론적 단절’을 통하여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데올로기는 단순한 관념이 아니라 물질적인 효과를 갖는다고 합니다. 또한 이데올로기는 항상-이미 개인들을 주체로 호명한다고 합니다. 생각해볼만한 대목이지요. 호명은 불러주는 것입니다. ‘너는 한국인이다’라는 호명에는 ‘너는 한국인답게 행동해야 된다.’라는 뒤의 말이 생략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께서 ‘너는 선택받았다.’라고 말하면, ‘너는 선택받은 백성답게 행동해야 된다.’(물론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겠죠.)가 아니라 ‘그래서 감사해야 해’가 생략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푸코는 경계를 허무는 철학자라고 이 교수는 말합니다. 정상과 비정상, 동일자와 타자, 내부와 외부 사이의 경계를 허문다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인간’이란 범주가 근대라는 시기에 만들어진 산물이라고 합니다. 즉 주체는 이미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생산’된다는 것이지요. 역사유물론적인 관점입니다. 그리고 푸코는 권력에 대해서 사고한 철학자입니다. ‘생체권력’이라는 개념을 통해 우리는 학교에서, 공장에서, 감옥에서 감시와 처벌을 통해 사회가 요구하는 책임있는 주체, 법적인 주체로 만들어진다는 것이지요. 저는 이를 더 확장하여 현대교회는 이러한 감시와 처벌(지옥간다 등)을 통해서 ‘비기독교적인’ ‘교인’을 생산한다고 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들뢰즈/가타리는 ‘배치’라는 개념을 통해 차이의 철학을 주장한 사람입니다. 동일성의 철학에 대한 반대개념이지요. 병원의 배치 안에서는 환자는 주체가 되지 못하고 의사라는 주체에 의해 진단받고 처방받는 대상이 될 수 있을 뿐입니다.(‘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라는 영화를 보면 이를 잘 말해줍니다.) 가정의 배치 안에서는 자애로운 아버지가 되지만, 공안경찰이라는 직업적 배치 안에서는 잔인한 고문경관이 되고, 이를 확대하여 교회라는 배치 안에서는 믿음이 좋아 ‘보이는’ 목사나 집사가 됩니다.


즉 모든 인식이나 태도의 전제가 되는 확고한 출발점으로서 ‘주체’는 없으며, ‘배치’마다 만나는 이웃항에 따라 달라지는 수많은 ‘나’들의 반복이 있습니다. 그런 반복은 동일한 반복이 아니라 차이 나는 반복입니다. 이런 ‘나’는 차이가 나지요. 들뢰즈/가타리는 또한 욕망의 개념을 ‘생산하는 욕망’으로 봅니다. 욕망은 ‘하고자 함’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하고자 함’은 막연하고 추상적인 상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어떻게’ 하고자 함이라는 구체적인 양태로 존재합니다. 앞에서 이야기한 스피노자의 실체와 양태 개념과 맥이 닿아 있습니다. 돈을 벌고 싶다, 먹고 싶다, 구원받고 싶다 등으로 나타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욕망은 ‘나’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나와 만나는 것들의 ‘관계’에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동일한 주체가 없다는 것입니다. ‘배치’에 따라 욕망은 틀려진다는 것입니다.


사실 들뢰즈/가타리는 현대철학의 중심에 놓여있습니다. 그 외 ‘영토화’, ‘탈주’, ‘재영토화’, ‘유목주의’ ‘기계’ 등등의 개념들은 중요하지만 여기에서는 전부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마무리를 하겠습니다. 데카르트에서 출발한 근대철학은 ‘주체철학’이였습니다. 너무 이른 시기에 이를 넘어서려는 스피노자의 자연주의철학은 약 300년을 기다려야 하였고, 영국의 경험주의는 이성주의에 반대하면서 이를 극한까지 밀고나갔으나 근본적인 ‘근대철학의 딜레마’는 극복하지 못하였으며, 칸트는 근대철학을 다시 재건하였고, 헤겔은 이를 정점에까지 가져갔습니다. 근대철학의 해체는 맑스, 프로이트, 니체에 의해 시작되었고, 언어학과 구조주의는 이를 더욱 가속화시켰으며 포스트구조주의는 새로운 주체 개념을 형성하게 된 것입니다. 즉, 현대철학에서는 데카르트적인, 칸트적인 ‘주체는 없다’는 것입니다.


7. 서평


느낀 점이야 많지만 이를 전부 이야기하려면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으니 간단하게만 언급하겠습니다. 첫 번째로 ‘문제설정’과 ‘코기토’의 내용입니다. 이것은 예비고찰에서 상세하게 다루었습니다. 두 번째로 스피노자의 실체와 속성(양태) 개념은 저에게 많은 시사점을 주었습니다. 성경에서는 인간(주체)을 어떻게 파악하고 있을까요? 기존의 신학은 인간을 ‘영혼’과 ‘육체’로 파악하였습니다. 데카르트의 사유에 바탕을 둔 ‘이원론’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원론을 말하지 않습니다. 단지 ‘인간’만을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영혼’이 죽어서 천국간다는 말도 틀렸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몸’의 부활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려운 개념이지만 스피노자의 개념을 빌려서 이를 설명할 수 있지도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인간의 실체는 하나인데, 속성이 다르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성경에서 ‘영혼’이라고 하더라도 이원론으로서의 영혼이 아니라 인간의 실체 중 하나로서의 영혼을 이야기(강조)한다고 볼 수가 있을 것입니다. 좀더 분명하게 설명을 하지 못하는 것이 애석하지만 아무튼 이런 식의 표현은 “구약성서의 인간학”이라는 책에 보면 볼 수가 있을 것입니다.


세 번째로 칸트의 논의 중 제가 생략하였지만 ‘시간과 공간’에 대한 것입니다. 칸트는 시간과 공간을 ‘선험적 조건’이라고 합니다. 인간이 사고하고 살아가는데 있어서 바탕이 된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러한 개념은 칸트적이 개념이고, 더 나아가 근대의 산물이라는 것이 이 교수가 지속적으로 주장하는 내용입니다.(“근대적 시공간의 탄생” “수학의 몽상” 참조) 우리가 자명한 진리라고 생각하였던 뉴턴의 물리학, 유클리드의 기하학 등도 그 시대의 산물이고, 현대의 물리학, 기하학에서는 이것이 깨어졌습니다. 공간에 대해서는 공간도 질량에 따라 휘어지고, 시간에 대해서도 빛의 속도보다 빨리 이동하면 시간도 거슬러갈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시간과 공간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는 무엇을 말해 줍니까? 진리란 없다? 그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생각한 진리가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진리관은 근대의 진리관이라는 것입니다. 너무 중요한 내용인데, 성경에서 말하는 ‘천국’과 ‘영원’을 우리는 막연히 저세상에서 시간이 영원히 지속된다고만 생각하였습니다. 과학적으로는 증명이 되지 않는 ‘믿음’의 문제로만 보았단 말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천국’은 기독교인의 상상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공간’에 존재하고, ‘영원’도 너무나 순진하게 시계의 시간이 영원히 흐르는 것이 아니라 다른 차원의 ‘시간’(그것을 굳이 시간이라고 불러야한다면)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미 완성된 ‘묵시세계’도 설명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눈앞에 보여야만 믿는다는 사고방식은 얼마나 어리석은지 아십니까? ‘잠재적’이라는 말은 확실한 사실이지만 아직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저는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의 선조들이 이러한 잠재적인 본향을 사모하였다고 생각합니다. 앞에서도 ‘경험주의’에 대해서 이야기하였지만 눈으로 보아야만 믿겠다는 생각은 역시 너무 ‘인간적인’ 생각입니다. 사실 우리는 현실세계도 똑바로 보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망막으로 보이지 않는 부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맹점’이라고 하지요.


네 번째로 언어가 우리의 사고를 제한한다는 것입니다. 점심 먹고 졸릴 때 우리는 ‘자진다’라고는 표현을 못합니다. ‘자다’라는 자동사는 수동형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졸음이 올 때는 내가 의지적으로 자는 것이 아니라 ‘자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언어규칙이 없기에 우리의 사고는 제한될 수밖에 없습니다. 무의식조차도 언어에 의해 구조화되어있다는 라캉의 주장은 의미가 큽니다. 우리는 흔히 생각이 날 듯 말 듯한 낱말을 경험을 해보지 않았는가요? 입에서 맴도는데 말은 안나오는 경우 말입니다. 또한 언어는 용법이라는 비트겐슈타인의 말은 성경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도 역시 같은 단어라도 어떤 맥락에서 하였느냐에 따라 의미가 틀려질 것입니다. 같은 ‘구원’이라도 재난에서의 구원일 수가 있고, 죄에서의 구원일 수가 있습니다.


다섯 번째로 구조주의에 대한 논의를 통하여 우리의 죄가 구조화되어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따라서 구조화된 죄 아래 있는 인간에게는 빠져나갈 방법이 없어 보입니다. 이를 ‘아담 안’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말이 나온 김에 한 시대를 특정 짓는 인간의 사고 구조라든지 행동양식 등을 여러 학자들이 말하였는데, 토마스 쿤은 ‘패러다임’이라고 하고, 푸코는 ‘에피스테메’라고 하고, 부르디외는 ‘장(場)’이라고 하고, 들뢰즈는 ‘영토’라고 할 수가 있는데, 인간은 이러한 사고 구조에서 벗어나기가 어렵습니다.


크게 보아 모든 시대 인간들의 사고 구조나 ‘선악체계’, 행동양식 등도 구조화되어 있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이 교수는 ‘주체’라는 문제설정을 통하여 근대 및 현대 철학을 이야기하였습니다. 우리는 어떤 문제설정을 통하여 ‘역사’라는 문제설정을 넘어서야 할까요? 역사 안(배치)에서 사고하는 사람들이 역사 너머를 사고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입니다. 하지만 성령의 은혜가 있으면 역사 너머의 ‘묵시’를 사고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그래서 성경은 철학이 아닌 ‘계시’가 아닐까 생각해 보면서 읽기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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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10-08-13 15: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심도있는 글 잘 봤습니다!
 
철학과 굴뚝청소부
이진경 지음 / 그린비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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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과 굴뚝청소부』를 읽기 위한 두 가지 예비 고찰



이 책은 이진경 교수가 일반인들을 상대로 강의한 내용을 책으로 엮은 것인데, 책의 완성도가 뛰어나서 두 번이나 개정판을 내면서(내용도 많이 바뀌였지만) 현재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너무나 쉽게 일반인들을 상대로 근대 및 현대 철학에 대해서 설명을 하였고, 베스트셀러가 된 책입니다. 많은 것을 배웠고, 느꼈습니다.


그후 이진경 교수의 책들을 계속해서 보고 있습니다. 그 외 완성도가 높은 책은 <철학의 외부>와 <근대적 시공간의 탄생>, <노마디즘1, 2> 정도 일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텍스트인 『철학과 굴뚝청소부』에는 어떤 내용이 들어 있었기에 제가 충격을 받았을까요? 그것은 이 교수의 ‘문제의식’ 때문이였습니다. 여기서는 이 책을 읽기 위한 예비 고찰로써 간단히 두 가지만 살펴보겠습니다.


1. 문제설정


이 책은 근대 및 현대철학에 대해서 이 교수만의 ‘문제설정’을 가지고 쓰여진 책입니다. 이 교수는, 철학이란 ‘의심하기’라는 방법을 통하여 기존의 지배적인 사고방식과 투쟁하여 그것을 넘어서는 것이라고 정의를 합니다. 여기서 ‘넘어서는’ 것은 당시의 지배적인 어떤 사상을 넘어서는 것이요, 하나의 시대를 지배하는 특정한 사고방식을 넘어서는 것이라고 합니다.


넘어설 때 기존의 사고방식과 새로운 사고방식과의 경계선이 형성됩니다. 넘어서기는 경계를 넘어서는 것이기 때문이랍니다. 철학한다는 것은 이 경계선들을 찾아내고 그것의 의미를 읽어내는 것이라고 이 교수는 말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경계선을 찾아내는 것이 엄청 어렵다는 것입니다. 철학자 자신들이 경계선들을 말해 주는 경우는 없고, 철학책에서도 이 경계선들을 보여주는 표시는 없기 때문에 일반인들로서는 여간 곤혹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이 지점에서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 부각됩니다. 그 찾기 어려운 경계선들을 이 교수 나름대로의 기준에 따라 경계선을 찾아내고 있고, 이를 독자들에게 알기 쉽게 설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몇몇 철학책들을 보다가도 완독을 하지 못하거나 내용이 거의 기억에 남지 않았던 것은 저자들 나름대로의 이 기준이 없었다는 데에 기인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혼란스러웠고, 어려웠습니다. 철학 훈련이 되지 않은 일반인으로서는 저자가 직접 설명해주지 않으니 그 책을 따라가기가 힘에 부쳤던 것이지요.


이 교수는 저자의 기준, 이것을 ‘문제설정’이라고 합니다. 경계를 확인하고 그 의미를 파악하기 위한 개념적 도구로서 ‘문제설정’이라는 개념을 도입한 것입니다. 이 교수는 친절하게도 이 ‘문제설정’을 설명하기 위한 예를 들고 있습니다. 저의 집 대문 앞에 아무 양해 없이 며칠 동안 세워둔 남의 자동차를 보고 화가 나서 바퀴에 펑크를 내었다고 하면, 그 자동차 주인이 “아니, 차 좀 주차시켜놓았다고 이렇게 펑크를 낼 수가 있소? 이건 명백히 불법행위이니 배상해 주시오.”라고 항의를 한다고 칩시다.


그러나 그 자동차로 인해 많은 불편을 겪었던 저는 그 말에 순순히 응하지 않고 그 사람을 ‘불법주차’로 맞고소를 하겠지요. 그럼 이제 ‘불법 주차한 자동차에 펑크낸 게 불법행위인가 아닌가’가 문제가 될 것입니다. 여기서는 ‘불법주차한 자동차에 펑크를 낸 행위가 불법인가 적법인가?’라는 문제가 설정된 것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그 대답 역시 그 문제를 설정한 방식에 크게 좌우되는 것이구요.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자동차와 나, 자동차 주인과 나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는 그밖에도 많은 방법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주차장이 아닌 남의 집 앞에 불편하게 주차해 둔 이유가 무엇인가? 그건 주차장이 모자라기 때문이며, 근본적으로 도시 교통정책이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사회적 측면에서의 접근 방식이고, 해결 방법도 전혀 틀릴 것입니다.


또한 왜 나는 바람직한 일이 아님에도 그 자동차에 펑크를 냈나? 자동차 없는 것도 서러운데 남의 차 때문에 하루 종일 고생을 했으니 화가 나서 그랬다, 라고 생각하는 것은 심리적 측면에서의 접근 방식인 것입니다.


법적 측면에서의 접근에서는 이러한 사회적, 심리적 측면에서의 대답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즉, 어떻게 문제를 설정하느냐에 따라 그 대답도 틀리게 됩니다. 대답뿐만 아니라 해결 방법도 전혀 틀리게 됩니다. 법적인 차원에서 접근할 때는 그 법이 정당하냐 아니냐는 결코 문제가 되지 않고, 기존 법의 올바름이 당연시 됩니다.


이건 과학에서도 마찬가지라고 합니다. 뉴턴의 이론이 나온 뒤에 다른 행성의 궤도는 다 그 이론에 따라 계산한 게 맞는데 오직 천왕성만 안 맞습니다. 이 경우 ‘이론을 반박하는 사례가 나오면 그 이론을 포기해야 한다.’는 실증주의나 반증주의의 입장에선 “이론과 사실 둘 중 어느 것이 옳은가? 사실이 안 맞는 이론은 버려야 한다.”는 문제설정을 갖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천왕성 궤도를 잘못 계산한 뉴턴의 이론은 거짓이라는 결론에 이르러야 하는 것이지요.


반면 뉴턴 이론의 지지자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다른 건 다 맞는데 오직 천왕성만 안 맞는다면, 우리가 모르는 다른 요인이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그 요인이 대체 무얼까?”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설정을 하면 이젠 다른 요인들을 찾아 나설 것이고, 결국엔 천왕성과 명왕성 사이에 해왕성이라는 행성이 하나 있기 때문이란 걸 발견하게 됩니다.


상이한 문제설정은 이처럼 상이한 대답과 상이한 결과를 가져옵니다. 문제를 어떻게 설정하느냐는 것은 그 문제를 가지고 사고하는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제한합니다. 여기서 ‘문제설정’을 통해 그 안에 포함되어 있는 사고방식을 찾아볼 수가 있으며, 그것을 분석할 수가 있습니다. 이렇듯 ‘문제설정’이라는 도구를 통해 철학의 경계를 찾아내고, 그 경계의 의미를 읽어낼 수가 있는 것이라고 이 교수는 말합니다.


저는 이 ‘문제설정’이라는 개념이 엄청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우리는 똑같은 성경을 읽는데, 왜 해석이나 그 의미는 개인에 따라 전혀 다르게 다가오는가? 여기에 대해서 고민해보지 않았는가요? 같은 본문을 읽더라도 구속사신학에서는 이렇게 읽고, 언약신학에서는 저렇게 읽고, 성화신학에서는 요렇게 읽는 이유가 ‘문제설정’ 자체가 틀리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이 교수가 예를 든(전혀 다른 의미의 예지만.) 성경구절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요한복음 1장 1절의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라는 본문에서, 왜 말씀이 하나님이 되는지 ‘능력’의 차원에서 이해(문제설정)하는 것과 ‘존재론’적 차원에서 문제설정하는 것은 엄청 차이가 납니다. 그리고 그 대답도 하늘과 땅 차이이지요.


2. 두개의 코기토


코기토(cogito)는 ‘나는 생각한다.’라는 뜻입니다. 근대철학을 연 데카르트의 명제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인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지요. 그런데, 이 코기토가 중세에도 있었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알고 계셨나요? 4세기의 철학자 아우구스티누스(어거스틴)의 제1명제도 이것이였습니다. 어떻게 같은 명제가 서로 대비되는 중세(알다시피 중세는 어거스틴이 열었습니다.)와 근대를 열었을까요?


어거스틴은 플라톤과 기독교교리를 믿음과 이성으로 종합하여 중세철학을 기초지운 사람입니다.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인식의 목표는 신과 영혼이였습니다. 그래서 믿음을 겨냥해 제기되는 숱한 회의론을 반박하려고 하였는데, 그 기초가 되는 것이 이 ‘코기토’인 것입니다. 회의론자들이 의심하는 모든 것 중에서 의심하는 자신은, 회의론자들도 반박을 할 수 없었던 것이지요. ‘의심하는 나’가 없으면 어떻게 ‘내’가 의심하겠습니까?


어거스틴은 여기서 더 나가, 이러한 의심하는 ‘내’가 모여서, 이들이 모두 인정하는 지식, 예를 들면 2+2=4와 같은 수학적 지식은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확실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또한 모든 사람이 긍정하는 도덕적 지혜 등도 확실하다는 것이지요. 그러면 이러한 것들이 확실한 것이라는 판단을 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그것은 개인이 아닌 ‘다른 확실한 것’에 의존하여야만 가능하다고 합니다. 여기서 어거스틴은 ‘신’을 끌어드리죠.


즉, 신이 이런 확실한 판단을 할 수 있게 하였다는 것인데, 반대로 이야기하면, ‘코기토’라는 확실한 지식을 통해 우리는 신이라는 확실하고 완전한 존재가 분명히 존재하고 있음을 증명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거스틴의 ‘문제설정’입니다.


그러면, 데카르트는 똑같은 ‘코기토’를 가지고 어떻게 나아갔을까요? 데카르트도 똑같은 회의에 빠집니다. 진리는 어떠한 의심에도 견뎌내야 한다는 것이지요. 확실한 것에 이르기 위한 회의, 이를 ‘방법적 회의’라고 합니다. 데카르트도 모든 것을 의심하지만, 의심하는 자신만은 확실하다는 것입니다. 이 ‘의심하는 나’는 자신의 능력으로써 확실한 것을 생각할 수 있다는 생각에 미칩니다. 좀 어렵는가요? 쉽게 말해 ‘의심하는 나’는 확실한데, 이 ‘의심하는 나’를 ‘내’가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의심하는 ‘나’는 확실한 것을 알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데카르트의 ‘문제설정’입니다. 더 어렵게 되었죠?


비교해서 말하면, 어거스틴에게는 이 확실한 ‘코기토’를 신이 제공해 주었다는 것이고,(어거스틴의 목표가 신에 대한 인식이였지요.) 데카르트에게는 이 ‘코기토’를 누가 주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나’라는 자아가 자신의 ‘능력’으로써 확실한 것을 생각할 수 있다는 사실이며, 확실한 지식에 도달할 수 있는 이 능력이 인간 자신에 내장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하면, 어거스틴에게는 ‘코기토’가 신학의 기초를 제공해 주는 것이라면, 데카르트에게는 이것이 이성(과학)의 기초를 제공해 주는 것입니다. 핵심은 ‘코기토’가 상반된 역할을 하는 것은 그것이 어떤 맥락 속에 자리 잡고 있느냐, 어떤 ‘문제설정’ 속에 위치하고 있느냐에 따라 다른 의미를 갖기 때문인 것입니다.


너무 중요한 이야기이지요. 앞에서 이야기하였듯이 어떤 ‘문제설정’을 가지느냐, 또는 어떤 맥락 속에 있느냐에 따라서 같은 낱말도 상반된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생각해보세요. 같은 낱말이라도, 예를 들면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이라는 의미도 어떤 문제설정이나 맥락 속에 위치하느냐에 따라서 상반된 의미를 가집니다. 이 구원이, 인간을 위한 구원으로 보는 사람도 있는 반면에 하나님(예수님)의 영광을 위한 구원으로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면 당연히 거기에 대한 인간의 반응도 틀릴 것입니다. 성경의 명령문이나 예수님의 말씀들도 다른 의미로 다가올 것입니다.


사실 저는 이 두 가지 개념만으로도 이 책의 의의가 충분히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이 개념들을 성경에만 적용하였지만 우리의 일상생활에도 얼마든지 적용할 수가 있는 문제입니다. 우리는 상대방의 말을 얼마나 많이 오해하는가요? 그것은 나와 상대방의 ‘문제설정’ 자체가 틀리기 때문입니다. 같은 말이라도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상반된 의미가 됩니다.


이 책은 정말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책입니다. 내용이 너무 방대하지만 근대 및 현대 철학의 흐름을(물론 이진경 교수 나름대로의 ‘문제설정’에 의해 경계 지어진 흐름이지만) 쉽게, 명확하게 이해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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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10-08-13 15: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 심도있는 서평이네요~
 
설교자의 열심
박영선 지음 / 규장(규장문화사) / 1999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사실 본 서평을 작성하기가 조금은 혼란스럽습니다. 제가 진작에 박영선 목사님의 “하나님의 열심”과 “성령론”에 대해서 서평을 작성하면서, 박 목사님의 성화론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본 책의 구도도 “성화”에 맞추어져 있습니다. 박 목사님의 한국교회에 대한 분노와 애틋한 마음은 충분히 알겠지만 성경의 말씀을 오해한 부분도 없지 않아, 다시 이 부분을 지적하려고 하니 주저하게 되는군요. 마치 감정이 있는 사람처럼. 일단 이 서평의 취지가 이 책을 읽고 느낀 점을 적는 것으로 생각하고 나가보겠습니다.


본 책은 1999년경에 초판이 나왔는데, 5년 동안 합동신학대학원에서 신학생들을 상대로 강의했던 내용을 모은 것입니다. 이 책은 총 4부로 나누어지는데, 1부는 설교를 위한 신학의 준비, 2부는 설교의 10가지 중심기둥, 3부는 설교자론, 4부는 설교촌평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부의 1장은 ‘계시의 인격성’에 대해서 나오는데, 이 부분은 상당히 중요하고, 박 목사님의 계시의 개념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일단 계시는 우리가 이해하여야 계시이지, 우리가 이해할 수 없으면 계시가 성립할 수가 없고, 이해하려면 이성에 호소하여야 한다고 박 목사님은 말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계시하실 때 인격적으로 다가오셔서 우리의 전인적인 항복을 하게끔 한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를 인간적(?)으로 대하셔서 우리가 설복하게끔 하신다는 것입니다. 인격과 인격의 관계로 우리를 대하신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성경의 계시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한에서 ‘계시의 인격성’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 같습니다. 즉 계시가 인격(예수 그리스도)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박 목사님의 의미하고는 많이 다르지요. 아무튼 박 목사님의 그 다음 주장은, 하나님의 은혜는 원인이 없는 결과이기 때문에 믿음으로 얻는 구원은 인과율로 설명될 수 없다고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원인이라고 합니다. 나의 결단이나 열심이 구원의 원인이 될 수가 없다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우리는 원인이 없는 결과에 대해서 사고를 전개시키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앞에서 박 목사님은, 계시는 우리가 이해하여야 계시라고 하였는데, 그러면, 이해할 수 없는 인과율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제 생각에는 모순이 발생하는 것 같은데...


1부의 2장은 ‘성화를 큰 앵글로 잡아라’인데, 즉 목사가 설교를 할 때 항상 신자의 성화에 초점을 맞추라는 것입니다. 신앙을 권면하는 것이지요. 실제로 박 목사님의 설교를 들어보면 성경을 중심으로 강해설교를 하시다가, 끝에 가면 항상 성화되어야 된다고 하면서 마무리를 하십니다. 박 목사님은 ‘성화’에 목숨을 거는 것 같은데, 마치 이근호 목사님이 ‘언약’에 목숨을 걸듯이. 사실 책에서도 박 목사님은, ‘칭의’ 위주로 설교하는 목사들이 대부분이지만 자신은 ‘성화’ 위주로 설교를 하는 은사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 대부분의 목사님들이 ‘성화’ 위주의 설교를 하고, ‘칭의’ 위주의 설교를 하는 목사님은 거의 없습니다. 이것이 박 목사님 덕분(?)인지는 모르겠지만.


1부의 3장은 ‘성경 보는 안목을 계발하라’인데, 안목을 키우려면 책을 많이 보아야 한다고 합니다.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박 목사님은 주로 벤자민 워필드, 존 머레이, 게할더스 보스, 헤르만 리덜보스, 헤르만 바빙크 등의 책을 많이 읽었다고 합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책은 말할 것도 없구요. 이 부분에서 ‘성화설교’를 언급하면서 삼손의 예를 장황하게 들고 있습니다. 요약하면, 삼손은 나실인으로 구별되었고,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을 받았는데, 훈련(여자문제?)이 되지 않아서 망했다는 것이고, 우리는 여기에서 교훈을 받아 실패하더라도, 다시 훈련하여 기어이 이기는 자리로 나아가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정말 삼손이 말하는 것이 그것입니까? 하나님은 부족한 삼손을 통해서라도 자기 할 일을 하신다는 것이 핵심 아닙니까? 하나님은 삼손이 죽는 것에 개이치 않고, 아니 오히려 삼손이 망함(죽음)으로써 하나님의 뜻(이스라엘을 괴롭히는 대적을 죽이는 것)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사사기에는 삼손이 살아있을 때 죽인 대적보다 삼손이 죽으면서, 죽인 대적이 더 많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진짜 삼손에 대해서 제대로 분석한 분은 이근호 목사님이라는 것만 언급하겠습니다.


2부는 ‘설교의 10가지 중심 기동’인데, 중요한 것만 대략적으로 살피면서 넘어가겠습니다. ‘믿음’은 하나님과 우리의 대등한 인격관계이기 때문에 우리를 인격적으로 항복시킨다고 합니다. 앞에서 박 목사님이 말씀하셨죠. 그리고 ‘죄’는 도덕적이거나 윤리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불경, 적개심이라고 합니다. 아주 좋은 말씀이죠? 하나님에 대한 적개심이 죄다! 수긍이 가지 않는가요? 또한 죄는 형태가 아니라 경향이라고 합니다. 죄의 경향성! 그리고 목사가 국가와 사회에 대해서 설교할 때는 ‘구조화된 죄’와 결부되도록 이끌어야 된다고 합니다. 제 개인적으로 아주 공감하는 부분인데, 저는 세상에서 죄가 구조화되어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저는 이것을 ‘죄 아래’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을 해봅니다.


박 목사님은 강해설교에 대해서 설명을 하시면서 창세기 22장의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예를 들고 있습니다. 역시 박 목사님의 아브라함에 대한 분석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대단하고 섬세합니다. 이 본문을 로마서 4장 18절, 히브리서 11장 17절, 야고보서 2장 15절과 연결하면서, 아브라함이 부활신앙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는 ‘네 후사가 이삭으로 말미암음이니라.’는 약속을 믿었습니다. 그는 그 풍성한 뜻을 다 알지 못했을지라도 이삭을 번제로 바쳐도 어쨌든 이 약속이 끊어질 수 없기에 하나님의 다른 어떤 방법이 동원될 것임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p134)


야고보서 2장 21절 말씀엔 “이에 경에 이른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삭을 바친 것은 결국은 말씀의 성취라는 의미로 해석하여야 된다는 것이지요. 여기서 박 목사님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침으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입증이 되었다고 하는데, 제 생각에는 오히려 말씀이 응하여져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쳤다고 생각합니다. 말씀의 역동성! 박 목사님하고는 의미가 틀리지요?


박 목사님은 ‘인격의 항복’이라는 단락에서, 자유의지를 설명하면서 이런 주장을 합니다. “구원을 받으면 인격이 변해야 합니다. 내 인격에 변화가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나라는 인격은 내가 바뀌지 않는 한 바뀌지 않습니다. 무슨 말인지 아세요? 내가 거룩해지지 않는 이상 그것은 나에게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내가 거룩해져야지요. 그런데 내가 거룩해질 것이냐 말 것이냐는 나에게 일어난다는 차원에서 내 권리입니다. 나를 배제하고는 거룩이고 속되고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여기에 자유의지의 몫과 역할이 있는 것입니다.”(p141)


이 대목에서 박 목사님의 ‘성화’개념이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성화는 자신이 이루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화 되고 안되고는 ‘나’의 ‘자유’이고 ‘권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으나, 성화는 자신이 평생을 두고 이루어야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은혜는 성화에서 온데간데 없어집니다. 아무리 박 목사님을 좋게 보더라도 이것은 아닙니다. 성경에는 성화라는 단어가 없고, 거룩이라고 하는데, 거룩은 이루어가는 것이 아니고 주어지는 것입니다. 속죄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이 속죄가-레위 지파에 의해서-매번 드려짐으로써 그때마다 거룩이 주어졌지만, 신약에서는 단 한번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몸을 드리심으로 거룩함을 받은 것입니다.(히10;10) 거룩은 받는 것입니다.


4부는 ‘설교촌평’인데, 구약(12편)과 신약(32편)의 본문을 어떻게 해석하고 설교할 것인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에서 많은 사람들이 아쉬워하는 게 촌평이 너무 짧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본문에 대해서 충분히 이해할 수가 없다는 것이지요. 제가 읽어보니, 짧긴 짧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특별히 언급할 것이 없는데, 히브리서의 해석 문제는 집고 넘어가겠습니다.


박 목사님은 히브리서 7장의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 직분의 의미를 제대로 해석하여야 예수님의 제사장 직분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왜 레위 지파로 오시지 않고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오셨냐하면, 레위 지파는 예수님의 하신 일 전체를 드러내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멜기세덱의 반차로 오신 ‘영원한’ 제사장이심을 강조하는 것이고, 그 속죄의 사역도 영원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원한 제사장이므로 지금도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신다는 것이지요.(롬8;34)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박 목사님이 이렇게 예수님의 영원한 제사장이심을 강조하는 이유는 딴 데 있습니다. 그 대목을 그대로 인용하겠습니다. “구원에는 신분의 차원에서 일어나는 구원, 다시 말해서 속죄만 있는 것이 아니고, 속죄함을 얻은 후에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전히 제사장 직분을 수행하심으로써 이루어지게 해야 할 성화, 거룩의 문제가 남아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아직도 제사장이십니다.”(p272)


한마디로, 예수님이 영원한 제사장인 이유는 우리의 성화를 위해서 지금도 하늘에서 제사장 사역을 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원한 제사장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이 맞습니까? 히브리서 7장의 멜기세덱 반차를 좇는 예수님을 가지고 성화로 연결하는 것이 가히 대단하십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7장에서 이야기하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영원한 제사장은 무슨 의미일까요? 그것은 레위 지파의 제사장 사역은 제사장이 죽음으로 중단이 되고, 그래서 다른 제사장이 다시 제사장이 되어야 하는데, 예수님은 멜기세덱처럼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 직분도 갈리지 않고 영원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온전하다는 것입니다. 레위 계통으로 제사가 온전하였으면 예수님이 아론의 반차를 따라 오시지 별다른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오실 필요가 있느냐고 성경은 말합니다.(히7:11)


예수님은 레위 지파보다 뛰어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오셨는데,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에게 복을 빌어준 자이고, 레위 지파도 아브라함의 허리에서 멜기세덱으로부터 복빎을 받았다고 합니다. 복이라는 것은 큰 자가 낮은 자에게 주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레위 지파보다 뛰어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레위 지파는 율법으로 제사장이 되었는데, 예수님이 제사장이 되신 것은 하나님의 맹세로 되셨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육체와 연관된 계명의 법을 따르는 레위 지파로 오신 것이 아니라 오직 무궁한 생명의 능력을 좇아 나셨다고 합니다.


3부는 ‘설교자론’인데, 이 부분에서 박 목사님의 설교에 대한 열정과 애정이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나님 중심의 설교를 하라는 것이지요. 절박함을 가지고 신자들에게, 그 하나님의 사랑과 열심을 알고 제발 좀 신앙 좀 성숙해지라는 것이고, 설교자는 그러한 자세로 설교를 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해 못할 바 아닙니다. 박 목사님의 그동안 설교사역을 통하여 보더라도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성화를 강조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하나님의 은혜와 열심을 강조합니다. 한국교회의 현실에서 박 목사님의 노력이 폄하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을 해봅니다.


어떻게 하여 한국교회가 이렇게 되었습니까? 목사나 신자나 매한가지로 성경에는 관심이 없고, 돈에 대한 노예가 되어서 살아가는 모습이-물론 저의 모습이기도 하지만-분노가 치밀다가 못해 이제는 안쓰럽기까지 합니다. 이런 교계 분위기에서 박 목사님의 사역은 충분히 인정되어야 하고, 실제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박 목사님의 성경해석에 문제점이 있으면 이것을 넘어서야 되지 않을까요?


이 책의 핵심은 설교자는 하나님의 열심처럼, 설교자도 열정과 열심을 가지고 설교를 하여야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으로. 저는 이렇게 책을 읽었습니다. (앗! 그런데 이 책이 품절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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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20세기의 이론서 21권

지난 월요일 교보에 잠시 들렀다가 발견한 의외의 책은 <테오리아 - 20세기를 대표하는 21권의 책>(개마고원, 2006)이었다. '이론(theory)'이란 말의 그리스 어원인 '테오리아'를 국역본의 제목으로 삼았는데, 독어본의 원제는 '세기의 책'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 세기가 지난 세기이므로 '20세기의 책'이라 해야겠고, 그 책들이 모두 분류상 '이론서'들이다. 그러니까 테오리아의 어원적 의미대로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들을 대표하는 책 21권에 대한 평설집이라고 해야겠다. '20세기의 이론서 21권'이라고 제목을 붙인 이유이다.

소개에 따르면 책은 "독일에서 개최된 ‘세기의 책-20세기의 이론들’이라는 기획 강의를 바탕으로 했다. 크게 “인문과학과 사회과학의 사유전통과 학문분야가 20세기에 거두었거나 적어도 거두려고 애쓴 성과는 무엇인가?”와, “그 학문들은 어떻게 그것들의 시대에 관여했고, 구체적으로 내세울 수 있는 위대한 이론은 무엇인가?”의 두 가지 문제 제기를 통해 산출된 결과물이다. 20세기를 대표하는 이론에 그치는 것만이 아니라 21세기에도 지속적인 시사성을 지니게 될 것이라고 판단되어 선정한 프로이트에서 하버마스에 이르기까지 모두 21명의 사상가들과 그들의 책, 이론들을 해당 분야의 전문가들이 각각의 독특한 접근방법과 깊이를 가지고 밀도 있게 소개했다."

국내에서도 쏟아지고 있는 고전해제서들 범주에 들어갈 수 있을 텐데, 문제는 그 해제/평설의 수준이겠다. "난해한 이론서들에 좀더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해당 이론서들을 직접 읽어보고자 하는 동기를 부여해줄" 수 있는 수준 말이다. 그리고 물론 그것이 적절하고 정확하게 우리말로 번역되어야 한다는 조건하에서.

21권의 이론서를 다루고 있는 만큼 600쪽 이상의 분량을 자랑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부담을 가질 필요는 없겠다. 일단은 관심이 가는 책을 다루는 장들만 골라서 읽으면 되는 것이니까. 그런 시간조차 낼 수 없다면, 20세기를 '이론적으로' 관조하는 일에는 마음을 접고 눈길을 떼는 게 옳다. 그리고는 21세기만을 한눈팔지 않고 질주하는 게. 굿바이!

남은 자들끼리 누리는 호사가적 관심거리는 과연 21권을 고른 주최측의 안목(편견 혹은 혜안)을 음미해보는 것이겠다. 대략 '상식적인' 리스트인지라 모험적이라고 할 만한 책을 그닥 눈에 띄지 않지만 몇 권 정도는 '독일'쪽의 관심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도 보인다. 한데, 이 21권 가운데 우리말로 읽을 수 있는 책은 몇 권이나 될까? '아르바이트' 중에 잠시 머리도 식힐 겸 세어보도록 한다.

1.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 - 레나테 슐레지어

 

 

 

 

프로이트의 대표적인 저작 <꿈의 해석>은 주지하다시피 여러 종의 국역본이 나와 있다. 비록 번역서만으로 충분하다고 말하기에는 좀 찜찜하다는 의견이 <최고의 고전 번역을 찾아서>(생각의나무, 2006)에서 제기된 바 있지만.

2. 후설의 <논리 연구> - 미하엘 아스트로

현상학의 창시자 후설의 저작들이 제법 소개되었고 연구서/논문들도 적지 않게 나와 있지만, 특이하게도 그의 초기 대표작인 <논리연구>는 번역돼 있지 않다. 분량의 방대함이 이유인지 내용의 난해함이 문제인지 잘 모르겠다. 여하튼 '고전'의 네임밸류에 걸맞는 번역본이 조만간 나오기를 기대해본다(여담으로 덧붙이자면, 후설의 책은 왜 <논리적 탐구>가 아니라 <논리연구>인가, 혹은 비트겐슈타인의 책은 왜 <철학연구>가 아니라 <철학적 탐구>일까?).

3. 슈펭글러의 <서구의 몰락> - 헤르베르트 야우만

 

 

 

 

지난 1995년에 범우사판으로 나와 있는 <서구의 몰락>이 유일한 완역본이 아닌가 한다. 대학원 시절에 필요 때문에 1권만 사서 부분적으로 읽은 기억이 있다. 나름대로 '세기의 책'에 꼽힐 만한 반향을 불러일으킨 책이지만, 프랑스에서 21권을 꼽았다면 들어갈 수 있었을까? 

4.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논고> - 한스 위르겐 헤링어

 

 

 

 

올해 책세상에서 비트겐슈타인의 새로운 전집이 나오고 있고, <논리철학논고>는 그 전집의 첫권이었다. 두툼한 <철학적 탐구>보다 얇은 <논고>가 선정된 건 그래도 다행스러운 일 아닐까? <탐구>를 읽어야 한다는 부담을 약간은 덜어주니까 말이다. <논고>만을 집중적으로 다룬 해설서로는 박영식 교수의 <비트겐슈타인 연구>(현암사, 1998)가 있다.

5. 베버의 <경제와 사회> - 볼프강 슐룩흐터

국역본은 <경제와 사회 1>(문학과지성사, 2003)으로 출간되었다. 소장도서가 아니어서 당장에 확인할 수는 없지만 완역본은 아니고 더 출간되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한다. 국역본의 이미지가 뜨지 않아 대신에 영역본의 것을 옮겨놓는다.

6.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 위르겐 미텔슈트라스

 

 

 

 

두말할 것도 없는 책. 5권의 파이날(결선)을 꼽더라도 당연히 들어가야 할 책이다. 국역본으로는 이기상(까치글방, 1998), 소광희(경문사, 1995) 두 분의 번역본과 해설서를 각각 참조할 수 있다.  

7. 슈미트의 <정치적인 것의 개념> - 헬무트 레텐

독일의 정치학자 칼 슈미트의 저작들은 비교적 많이 소개돼 있는 편이고 거기엔 물론 <정치적인 것의 개념>(법문사, 1992)도 포함된다. 하지만 당장 서점에서 구해볼 수 있느냐는 별개의 문제이다. 짐작에 21권의 책들 가운데 가장 얇은 책이지 않을까 싶다. <논리철학논고>보다는 얇은 듯하니까. 이미지는 역시나 영역본의 것을 옮겨놓는다.

8. 겔렌의 <인간> - 카를-지크베르트 레베르크

 

 

 

 

아르놀트 겔렌은 '철학적 인간학'의 대표적인 철학자 중 한 사람이다. 보다 잘 알려진 철학적 인간학자로는 막스 셸러가 있지만(국내에도 더 많이 소개돼 있다), 독일에서는 겔렌의 <인간>이 대표적인 저작으로 꼽히는 모양이다. 겔렌이 책으론 <인간학적 탐구>(이문출판사, 1998)이 유일하게 번역돼 있는 책이지만, <인간>은 그보다 좀더 두툼한 책이다.

 

9.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 - 페터 뷔르거

 

 

 

 

사르트르에 대해서는 굳이 군말을 덧붙일 필요가 없고(<존재와 무>도 새 번역본이 나올 수 있을까?), 다만 해설을 쓴 '페터 뷔르거'란 이름이 반갑다. <해설자들 가운데 내가 아는 두엇 중의 한명이기 때문이다. 아방가르드론으로 유명한 문예이론가 뷔르거의 책은 <전위예술의 새로운 이해>(심설당, 1986)를 필두로 하여 현재 네 권 가량이 번역/소개돼 있다.

10.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의 <계몽의 변증법> - 게르하르트 쉬베펜호이저

 

 

 

 

이 또한 두말하면 잔소리인 책이겠다. 또한 <계몽의 변증법>이 확실한 고전인 것은 완독한 사람이 거의 없다는 데에서도 알 수 있다. 어쨌든 국역본의 역자가 전면 개정판을 내야했을 만큼 '난해한' 책이기도 해서 적절한 안내서의 도움을 받는 게 좋겠다(영역본의 경우도 몇년 전 전면개역판이 나왔다). 아도르노를 술술 읽는 사람들이 나는 부럽고 미심쩍다.

11. 보부아르의 <제2의 성> - 크리스타 뷔르거

 

 

 

 

사르트르 커플의 책들이 나란히 선정된 것도 눈길을 끈다. 이젠 여성학의 '고전'이라고 해야할 책(크리스타 뷔르거는 혹 페터 뷔르거의 부인일까?). 보부아르와 관한 특이사항이 그녀가 국내에서는 철학자로서는 거의 진지하게 다루어지지 않는다는 점. 주로 출간되는 건 '사랑밖엔 난 몰라' 수준의 보부아르이다(그런 그녀가 여성학의 대모이다!).

12. 바흐친의 '변증법적 사유와 수사학' - 레나테 라흐만

 

 

 

 

특이한 일이지만 21권의 책이라고 해놓고 유일하게 구체적인 대표작이 명시돼 있지 않은 사상가가 바흐친이다. 일단은 국역본 <말의 미학>(길, 2006)을 대표작으로 꼽아둔다. 그리고 걸출한 연구서 <바흐친의 산문학>(책세상, 2006)은 나의 추천서이다. 해설자인 레나테 라흐만은 독일에서 활동하는 저명한 러시아문학 연구자이자 바흐친 학자이다. 역시나 아는 이름이어서 반갑다.

13. 레비스트로스의 <친족의 기본 구조> - 발터 에어하르트

 

 

 

 

물론 <친족의 기본구조>는 국역본이 나와 있지 않다. 레비스트로스의 박사학위논문인데, <구조주의 인류학>이나 <신화학>보다 중요한 업적으로 간주하는 데에는 이 책이 구조주의 인류학뿐만 아니라 구조주의의 프로그램 자체를 가장 잘 보여준다는 판단이 전제돼 있지 않나 싶다. 회고 대담 <가까이 그리고 멀리서>에서 뒷이야기들을 읽을 수 있고, 책의 보다 구체적인 내용 해설은 김형효 교수의 <구조주의의 사유체계와 사상>을 참조할 수 있다.

14. 루카치의 <이성의 파괴> - 라이너 로젠베르크

 

 

 

 

흔히 루카치의 범작으로 평가되는 줄 알고 있었는데, '세기의 책'으로 꼽혀 있어서 놀랐다. 미완의 번역본까지 치면 세 종류의 국역본이 나와 있기도 한 책. 데카당스(반합리주의) 철학 비판서 정도로 나는 알고 있다. 보통 루카치의 주저로는 <역사와 계급의식>을 꼽는 게 일반적인데, 해설을 읽어보고 소장여부를 판단해봐야겠다.

15. 가다머의 <진리와 방법> - 기젤라 페벨

 

 

 

 

두말하면 잔소리인 책. 하지만, 국역본은 분량상 아직 1/3밖에 나오지 않은 책. 그 사이에 영역본은 개역본이 나왔다. <논리연구>가 한국현상학회의 아킬레스건이라면 <진리와 방법>은 한국해석학회의 '굴욕'이라 할 만하다. 고전 번역에 단합해야 하실 분들이 담합하고 계신 건 아니신지?

16.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 - 프란츠 폰 쿠체라

 

 

 

 

<과학혁명의 구조>는 국내에 2종의 번역이 있다. 까치글방본과 이화여대출판부본이 그것인데, 교수신문의 번역비평에 따르면 일장일단이 있지만 원저 자체의 난해함을 해소시켜주지는 못한다고. 학부 2학년 때 읽으면서 고전했던 기억이 새롭다(반면에 해설서들은 얼마나 단순명쾌한 것인지!).  

17. 푸코의 <말과 사물> - 우르줄라 링크-헤르

 

 

 

 

바케트빵처럼 팔려나갔다는 푸코의 이 주저 <말과 사물>(민음사, 1986)이 국내에선 절판중이다. 새 번역본이 나온다는 소문이 있지만 '언제'라는 건 아직 들어보지 못했다. 우리의 빵집들이 고급 바케트를 내놓는 데에는 시간이 좀 걸리기도 하고(제빵공은 있나?). 이미지로 대신 올려놓은 것은 개리 거팅의 <미셸 푸꼬의 과학적 이성의 고고학>(백의, 1999)이다. <광기의 역사>부터 <지식의 고고학>까지의 자세한 해설을 담고 있는 책이다.

18. 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 - 베르너 슈테크마이어

 

 

 

 

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도 절판된 민음사판까지 포함하면 2종의 번역이 나와 있다. 초기 데리다의 간판격이 책이지만 역시나 읽은 사람 몇 되지 않는다(나도 완독하지는 못했다). 개인적으로 국역본들 외에 영어, 불어, 러시아어본까지 갖고 있어서 언젠가는 마스터해줄 책으로 꼽고는 있다. 조만간 해설서들도 나올 듯하고. 현재까지는 마이클 페인의 <읽기 이론/ 이론 읽기>(한신문화사, 1999)의 해설이 요긴하다.

19. 부르디외의 <실천이론 연구> - 에곤 프레이크

 

 

 

 

부르디외의 가장 유명한 저작은 물론 <구별짓기>이지만, '이론서'로 꼽기에는 부족한 점이 있었나 보다. 한데, <실천이론 연구>가 정확히 어느 책을 가리키는지 모르겠다. <실천이성>도 국역본이 나와 있지만 짐작엔 'The Logic of Practice'을 가리키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영역본의 제목이 그렇고, 불어본의 제목은 <실천의 의미> 정도이다. 러시아어본도 출간돼 있는 책.

20. 하버마스의 <소통행위이론> - 콘라트 오트

 

 

 

 

올해 가장 번듯한 번역본이 나온 책. 역시나 두말할 필요가 없겠다.

21. 루만의 <사회의 사회> - 위르겐 포르만


 

 

 

하버마스와 함께 독일 사회학을 양분하고 있는 니클라스 루만의 책들은 국내에 좀 얄팍한 책들만 세권쯤 출간돼 있다. 거기에 입문서 한두 권. 그의 방대한 저작 <사회체계>가 구내에 번역/소개되기를 기대한다. <사회의 사회>가 그 사회체계론의 일부인지 독립된 저작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해서 결론적으로 21권의 책들 가운데 5-6권 정도가 아직 번역되지 않은 듯하다. 양호한 편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저작들의 지명도를 생각하면 3-4권은 더 번역돼 있어야 했다. 21권의 책들 가운데 독어권의 책이 13권이니까 과반수가 넘는다. 불어 6권, 영어 1권, 러시아어 1권 순이다. 한편, 우리가 자랑할 만한 '세기의 책'들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

06. 10.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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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dohyosae > 요세푸스의 심지뽑기
군중과 권력
엘리아스 카네티 지음, 강두식. 박병덕 옮김 / 바다출판사 / 2002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나치 선전상 괴벨스는 선동을 통해 대중들에게 <원이 직선>임을 증명해 보이겠다고 호언장담하였다. 그는 대중의 속성을 가장 잘 이해한 정치가였다. 그는 대중이 원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보여주는 것을 대중이 원하는 것이라고 착각하게끔 만드는 재주가 탁월하였다.


81년 생소한 엘리아스 카네티가 노벨상을 받았고, 82년 그의 저서를 구입하였다. 제목은 <군중과 권력>이었다. 군중과 권력은 항상 파시즘을 연상시킨다. 왜냐하면 파시즘은 선동의 정치이기 때문이다. 선동에 의해 군중들은 일사분란하게 외치거나 행동한다. 레니 리펜슈탈Leni Riefenstahl이 찍은 <의지의 승리>란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는가? 1934년 나치당의 뉘른베르크 전당대회를 찰영한 이 영화는 엄청난 시각적 효과를 우리에게 제공한다. 거대한 공간에 질서정연하게 꽉 들어찬 대중들, 그리고 그 사이에 넓게 난 일직선의 공간,  여기를 단 세 사람의 인물이 행진한다. 그 압도적인 화면은 대중과 권력의 속성을 한꺼번에 보여주고 있다. 지도자에 대한 일사분란한 복종의 정신과 범접할 수 없는 신격화가 화면에 담겨있는 것이다.


이 책은 파시즘에 대한 보고서이지만 지금도 유효하다고 본다. 대중이란 어찌보면 너무나 단순한 대상이기 때문이다. 개인의 집합체인 대중은 욕구를 분출하기를 원하면서도 그 안에서는 인간적 평등을 갈구한다. 그러면서도 자신과 타인의 간격에 틈이 존재할 수 없을 만큼 좁혀지는 밀집을 사랑하며 자신들이 나아갈 방향을 필요로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대중이 움직일 방향이 문제인 것이다. 대중은 어찌보면 레밍과 같은 존재일수도 있다. 선두 주자의 안내로 정해진 한 방향으로 맹목적으로 돌진하는 단순성을 우리는 중국의 60년대 문화혁명에서 볼 수 있었다. 여기서 이성은 감성에 의해 소멸되는 하찮은 것일 뿐이다.


군중을 움직이는 권력의 속성은 폭력이다. 이 폭력은 물리적일 수도 있고 정신적일 수도 있다. 폭력을 수반한 권력은 언제나 속도를 중요시한다. 징기스칸은 늑대의 후손이었고, 파라오는 매였으며 로마황제는 독수리였다. 권력을 장악한 자에게 가장 성가신 존재는 신속함을 방해하는 세력인 것이다. 왜 지금까지 한국의 정치에서 야당이 탄압을 받아왔는가는 이 속성을 통해서 알 수 있을 것이다.  권력의 또 다른 속성은 질문이다. 질문의 긍국적인 목표는 분해이다. 한 인간을 또는 한 집단을 철저히 분해하므로서 그 자체를 완벽하게 무력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권력의 가장 핵심은 비밀이다. 먹이를 사냥하는 사자를 보라. 그는 자신의 존재를 철저하게 은폐시킨다. 그러므로서 상대의 불안감을 가중시킨다. 언제,어디서,어떻게 공격해 올지 모르는 상대에 대한 공포감. 비밀은 두려움과 연결되는 코드이다.


테렌스 데 프레의 <생존자>라는 책에서 "죽음은 결코 승리일 수가 없다"라고 말하고 있다. 권력의 박해 속에서 수용소에 갖힌 사람 가운데 생존자만이 증언할 수 있다는 생존자들의 외침은 생존은 어떤 경우에도 절대 선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권력은 자신의 약점과 치부를 감추기 위해 모든 증인을 압살하려한다. 하지만 살아남은 자는 그 시대의 증언자가 되는 것이다. 이로서 권력은 대중을 이용해 권력을 얻었지만 살아남은 생존자에 의해 심판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 심판자가 한 명일지라도 유효한 것이다. 바로 이점을 권력을 추구하는 정치가들은 두려워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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