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으면서 죽음을 이야기하는 방법
줄리언 반스 지음, 최세희 옮김 / 다산책방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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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줄리언 반스의 입담만을 확인할 수 있을 뿐, 죽음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책. 반스의 책은 <플로베르의 앵무새>에서 끝내야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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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는 인간 - 식(食)과 생(生)의 숭고함에 관하여
헨미 요 지음, 박성민 옮김 / 메멘토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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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비전만 켜면 먹는 프로그램이다. 맛있어서 먹고 제철이라 먹고 몸에 좋아 먹고 값이 싸서 먹고, 심지어 누가 더 빨리 더 많이 먹나 시합까지 한다. 영국의 <이코노미스트>지가 한국의 먹방 열풍을 두고 경기침체로 인한 불안감 때문이라 한 것이 2년 전인데 그 사이 변한 것은 없다. 경기가 더 나빠진 탓인지 먹방에 쿡방까지 열풍이 광풍이 되었을 뿐. 불안한 현실을 잊는 데에 먹는 것만큼 쉽고 편한 위로가 어디 있으랴 싶으면서도 눈살이 찌푸려진다. 목숨인 밥을 웃음거리로 삼는 게 불편하고 불쾌하다. 매일 550억 원어치의 음식물쓰레기가 나오는 시대(2015년 한국)에 고리타분한 감상이라고? 그렇다면 아쿠타가와 상 수상 작가이며 기자인 헨미 요가 쓴 <먹는 인간>을 읽어보라. 먹고사는 게 뭔지, 인간 존재의 밑바닥부터, 삶의 기본부터 되돌아보게 될 것이다.



20년간 교도통신 외신부에서 일하던 헨미 요는 세계에 대한 실감을 잃고 무감각해진 자신을 깨치고 싶어 여행을 떠난다. 주제는 음식이나, 미식을 찾아다니는 식도락이 아니라 “호강에 겨워 무뎌진 혀와 위에 분노의 맛, 증오의 맛, 슬픔의 맛”을 일깨우려는 여정이었다. 첫 식사는 방글라데시 다카역 앞 포장마차에서 파는 75원짜리 고기볶음밥. 설렘으로 시작한 도전은 구역질로 끝난다. 다른 사람의 이빨자국이 선명한 고기토막이 말해주듯 그것은 부자들이 먹다 남긴 음식으로 만든 것이었고, 그가 차마 먹지 못한 밥은 순식간에 굶주린 소년의 성찬이 된다. 헨미 요는 “먹는다는 것이 삶과 죽음으로 직결되는 당연한 이치”를 눈앞에서 확인하며, “짐승은 먹이를 먹고 인간은 음식을 먹는다”(<미식 예찬>)는 프랑스 미식가의 말에 고개를 젓는다. 아니다, 사람도 때론 짐승처럼 ‘먹이’를 먹는다.



아시아로 유럽으로 아프리카로, 전쟁터와 난민촌, 탄광과 군대, 고양이 사료공장과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등 세계 곳곳을 다니며 그가 만난 것은 먹이를 먹는 인간이며 먹이조차 제대로 먹기 힘든 세상이다. 그 세상엔 음식 찌꺼기는 물론 낙타 껍질같이 먹을 수 없는 것을 먹는 인간이 있고, 모두가 죽고 없는 땅에서 홀로 신경안정제를 먹는 인간이 있으며, 먹으면 안 되는 방사능 오염 식품으로 목숨을 잇는 인간과 결코 음식이 될 수도 되어서도 안 되는 사람을 잡아먹은 인간이 있다. 



상상할 수 없는 극한의 음식과 그걸 먹는 사람들 앞에서 저자는 당혹감과 슬픔, 절망을 느끼지만 섣불리 동정하거나 판단하지 않는다. 먹을거리를 찾을 수 있었음에도 굳이 식인을 한 잔류 일본병사들에 대해서조차 그는 비난보다 먼저 ‘왜 그랬을까?’ 질문을 던진다. 대신 그가 비판하는 것은 식인의 역사를 조장하고도 그걸 지우고 싶어 하는 일본국이고, 개밥만도 못한 원조음식을 주면서 현지인을 모욕하고 무력을 행사하는 선진국들이다. 반려동물에게 수입산 통조림을 먹이면서도 그걸 만드는 개도국 노동자의 현실엔 눈감은 자기 자신이다. 한마디로, 먹고사는 일의 무거움을 잊은 포식 사회에 그는 분노한다.



그러나 분노는 오래가지 않는다. 지금의 포식은 머잖아 공복으로 바뀔 것이기에. 하여 그는 말한다. 닥쳐올 기근의 날을 위해, 사랑하는 모든 먹는 인간에게 책을 바친다고. 참으로 쓰디쓴 헌사요 절실한 경고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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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적인 것의 사회학
기시 마사히코 지음, 김경원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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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 책들은 겉표지가 없어 근사한 디자인이나 저자의 학벌, 수상경력 같은 것으로 책을 판단할 수 없다. 이럴 때 주로 보는 것이 머리말이다. 사회학자 기시 마사히코가 쓴 <단편적인 것의 사회학>의 머리말은 “아버지, 개가 죽었어”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세계 도처에 굴러다니는 무의미한 단편에 대해, 그런 단편이 모여 이 세계가 이루어져 있다는 것에 대해, 그 세계에서 다른 누군가와 이어져 있다는 것에 대해 적어보고자 한다”고 끝맺는다. 책을 읽게 만드는 머리말이다.

책을 빌려 정류장에 선 채 20여 쪽을 읽었다. 눈앞이 아득해졌다. 그대로 서점에 가서 책을 샀다. 한 꼭지 한 꼭지 천천히 읽었다. 눈으로 읽은 문장을 가슴이 이해하는 데 아주 오래 걸렸고, 많은 문장이 이해 못한 채로 남았다. 읽을수록 “분석할 수 없는 것”들이 늘어갔다. 그것이 마음의 오지를 이루었다. 그토록 안달하며 찾아 헤매던 평화가 거기 있었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 단편적인 것의 사회학>은 믿을 수 없는 책이다. 기시 마사히코는 무의미한 것들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도 의미 있는 글을 쓸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 유치원에 다닐 때 그는 길가의 돌멩이를 집어 들고 몇십 분씩 들여다보았다고 한다. 그러면 “무수한 돌멩이가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이 돌멩이’가 되는 순간”이 찾아오고 전율을 느꼈다고 한다. 익숙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이제껏 내가 읽고 쓴 글들이 그런 것이었으니까. 무의미한 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 이름 없는 네게 이름을 붙여주어 꽃이 되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이야기이고 글쓰기가 아닌가.


그런데 아니었다. 저자는 그런 “흔해 빠진 ‘발견의 스토리’가 아니”라고 말한다. 세상에 하나뿐인 돌멩이라서가 아니라 그런 것들이 온 천지에 굴러다닌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으냐고 말한다. “누구에게도 숨겨놓지 않았지만, 누구의 눈에도 보이지 않는 것이 아름답다”고, 무의미함으로써 아름다울 수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특별한 존재이며 한 번뿐인 인생은 소중하다고 설파하는 대신, 우리는 아무 특별한 가치가 없으며 인생은 시답잖다고 말한다. 하! 요즘 유행하는 ‘괜찮다’는 말보다 훨씬 위로가 된다. 인생에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 건 나 하나도 아니고 병증(病症)도 아니다. 그건 그냥 사실이다. 

 

하지만 이 책이 ‘그러니까 우리 모두 어떻게든 살아보자’고 위로하는 건 아니다. 저자는 “부족하고 잘고 단편적인” 인생들이 서로를 위로하며 함께하는 사회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그런 인생도, 그런 인생들이 모인 사회도 쉽게 이해되거나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당신도 나처럼 부족하고 그래서 괴로운 인생을 살고 있구나 하고 아는 것도 힘들지만, 그걸 안다고 해서 연대가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많은 이들이 당연시하는 사소한 행복, 예컨대 생일을 축하하고 축복 속에 결혼식을 올리는 일조차 누군가에겐 결핍과 배제를 일깨우는 상처가 된다. 그래서 “정말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다”고 저자는 고백한다. 정말 어떻게 하면 좋을까? 책은 답을 주지 않고, 하여 상처도 주지 않는다.

답 없는 책을 읽고 꿈꾼다. 이렇게 살라고 답을 주는 사회가 아니라 사람들이 모두 어떻게 하면 좋은지 묻는 사회를, 아무도 상처받지 않는 세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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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앞에 생이 끝나갈 때 꼭 해야 하는 이야기들
안젤로 E. 볼란데스 지음, 박재영.고주미 옮김 / 청년의사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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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해 제정된 ‘연명의료 결정법’의 첫 단계로 8월 4일부터 호스피스·완화의료가 확대 시행에 들어갔다. 한국에서 호스피스가 시작된 건 1965년, 영국의 시슬리 손더스가 현대적 호스피스의 출발로 꼽히는 세인트 크리스토퍼 호스피스를 설립한 것이 1967년이니 퍽 이른 시작이다. 한데 이후 영국 등 여러 나라들이 호스피스를 의료체계에 도입해 완화의료를 발전시켜온 것과 달리, 한국은 생명연장과 첨단 의료기술에 중점을 둔 의료가 주를 이루었고 환자의 고통과 권리는 간과되어왔다.

다행히 이제라도 호스피스·완화의료를 적극적으로 실시하기로 한 것은 반가운 일이다. 하지만 환자를 중심에 둔 완화의료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호스피스의 대상을 넓히고 병동과 인력을 늘리는 양적 조치로는 부족하며 질적 전환이 필요하다. 환자보다 질병에 초점을 맞춘 의료, 의사 중심의 권위주의적 시스템이 변해야 하고, 노화와 질병과 죽음을 실패로 여기는 우리의 가치관도 바뀌어야 한다. 이러한 변화의 첫 걸음은 죽음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대부분 편안히 죽기를 바라지만 왜 수많은 이웃들이 병원에서 외롭고 고통스럽게 죽는지에 대해선 알려 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다르기를 바라고 다를 것이라 기대한다. 하지만 안젤로 볼란데스의 <우리 앞에 생이 끝나갈 때 꼭 해야 하는 이야기들>을 읽고 나면 그것이 얼마나 헛된 기대인지 알게 된다. 하버드 의대 교수이며 호스피탈리스트(입원전담 전문의)인 필자는, 지금처럼 삶의 마지막까지 공격적인 치료를 계속하고 그 부작용에 대해 침묵하는 한 평온한 죽음은 불가능하다고 확언한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그의 처방은 ‘대화’다. 그는 정말 중요한 의료행위는 값비싼 첨단 장비나 기술이 아니라 대화라면서, 환자가 무엇을 원하고 어떻게 죽음을 맞고 싶은지 터놓고 대화해야 하며 이런 대화 없이 이루어지는 과도한 연명의료는 의료사고나 마찬가지라고 주장한다. 그의 주장대로면 한국의 의료현장에선 의료사고가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셈이다. 의사는 물론 환자 가족들도 환자와 죽음에 대해 대화하는 일이 극히 드물기 때문이다.


 

복잡하고 전문적인 의료적 처치에 비해 특별한 장비나 비용이 들지 않는데도 환자와의 대화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는 뭘까? 사실 중병을 앓는 환자와 죽음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은 부담스럽고 힘들다. 볼란데스는 대화는 “가장 어려운 시술”이므로 의과대학에서 커뮤니케이션 교육을 강화하고, 의사가 된 뒤에도 수술 실습을 하듯이 대화술을 계속 연습해야 하며, 환자도 미리 사전의료지시서를 쓰고 주위 사람들과 죽음을 얘기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또한 지식의 불균형으로 인해 대화가 힘든 점에 대해선, 연명의료와 완화의료의 실제 과정을 보여주고 환자와 대화하는 동영상 해법을 제시한다.(그가 참여하는 단체에서 만든 http://theconversationproject.org에는 한국어 버전도 있다.)

책을 읽고 나니 호스피스 완화의료 발전을 위해 시설 확충보다 먼저 이런 책부터 읽고 이야기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생이 끝나기 전에 우리가 서로 해야 할 이야기가 있음을 깨닫고 나누기만 해도 마음은 가볍고 후회는 적을 테니, 더 늦기 전에 얘기 좀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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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 50인의 용기 - 30년간 암환자를 밀착 취재한 집념의 기록
야나기다 구니오 지음, 김성연 옮김 / 바다출판사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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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내 아들이 꿈구는 세상>을 읽은 뒤부터 야나기다 구니오의 책을 기다려왔다. 전작만큼은 아니지만 이 책 역시 좋았다.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각오도 생겼고. 다만 교정 상태 등에서 편집자의 정성이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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