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연시, 마음을 한결같이 유지하기가 쉽지 않다. 분주하지만 따져보면 실속없는 분주함이요, 만나지만 돌아오는 길은 허허로운 만남들이다. 부질없다는 생각을 잊고 항상심을 유지하기엔 독서가 최고다.

[안락사의 역사]는 도서관 서가에서 우연히 만난 책. 출판사 이름도 낯선 신간인데 안락사에 대해 관심이 있던 터라 두말 없이 빼들었다. 자살이 금기 혹은 범죄가 된 것은 중세부터의 일이라는 역사적 예화에서 시작하여 최근까지 안락사, 자살, 훌륭한 죽음을 둘러싼 찬반운동과 논리의 발전사를 꼼꼼이 살피고 있다. 가장 눈에 띈 것은 안락사에 대한 적극적. 긍정적 시선이 우생학과 연결되는 지점. 어떤 생명, 어떤 삶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는가에 대한 고민이 어느 순간 살 가치가 없는 삶에 대한 폄하로 이어지는 건 역사적으론 당연한 사실처럼 보여질 정도다. 안락사 하면 '존엄한 죽음'을 떠올렸으나, 이 책을 보니 그렇게 개념의 지형이 그려진 건 불과 30년 전의 일이며 그 전엔 오히려 안락사가 우생학적 관점에서 이루어진 살인과 더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는 사실에 깜짝 놀라다. 우리 사회에선 별다른 토론 없이 안락사의 법제화가 논의되고 있으나, 어쩌면 이런 침묵이 양날의 날을 가진 안락사를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게 만들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재미있는 소설을 읽는 건 언제나 즐겁다. 이참에 중국 작가를 좀 진지하게 만나보자고 작정하고 위화와 하진을 열심으로 읽었다. 위화의 단편집 [나는 이름이 없다]는 그의 다양한 면모를 보여주어 좋았다. [인생] [가랑비 속의 외침] 역시 그의 힘을 느끼게 한다.

하진은 처음엔 뜨악했으나 위화와 비교하며 읽다보니 점점 매력을 느끼게 되었다. [피아오 아저씨의 생일파티][니하오 미스터 빈][남편고르기] 등도 나름 재미있었으나 가장 좋았던 건 [기다림].

  한 남자가 고향의 아내와 이혼하는 단순한 이야기를 담은 꽤 긴 장편소설인데, 이처럼 단순한 이야기가 길게 서술되는 데도 전혀 군더더기가 없다. 유머스러우면서도 쓸쓸한 페이소스를 느끼게 하는 소설인 점은 위화와도 비슷하고 그의 다른 소설에서도 익히 경험했던 바이나, 이 소설은 책장을 덮고 난 뒤에 여러 다른 주제로 읽힐 수 있다는 점에서 놀랍다. 다시 한번 읽고 싶다.

세러 워터스는 역사소설로 유명한 영국의 여성 소설가. 이 소설 역시 19세기 영국 런던을 배경으로 한 역사소설이다. '도둑'을 뜻하는 핑거스미스가 주인공인 이 엄청나게 두껍고 흥미진진한 이야기는, 작가가 밝혔듯이 찰스 디킨스의 색채를 느끼게 한다. 세밀하게 복원된 당시의 역사가 감탄스럽고, 중반을 넘어서면서 책장에서 눈을 떼기 힘들게 하는 이야기가 재미있고, 예상치못한 반전도 흥미롭다. 거기에 자주 보기 힘든 동성애 코드도 설득력 있는 장치로 기능한다. 뒤에 남는 감동을 말하긴 어렵다는 점에서 이 무렵 함께 읽은 [달의 나라]와 비슷하나, 정교한 플롯과 섬세한 서술은 역시 감탄스럽다.

후배의 '아주 재미있다'는 평에 홀려 읽기 시작했는데, 세대차이인가, 나는 읽기가 쉽지 않았다. 소설 속 이야기는 익숙하고 경험의 한자락을 공유한 것임에도, 왜 이리 감정이입이 안 되는지, 지금도 이상하다. 책장을 띄엄띄엄 넘기기도 하면서 간신히 다 읽고난 소감은, [굳빠이 이상]의 김연수를 다시 만나고 싶다는 것. [청춘의 문장들]에서도 서술과 감정의 과잉에 이따금 낯을 찌푸렸는데 이 소설에서도 자꾸 과잉이란 느낌을 갖곤 했다. '이상'에서의 정교함이 그립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