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리와 이성의 천적은 부조리가 아니라 욕심이다. 아쉽게도 우리의 주성분은 욕심, 욕망, 욕정이다. 우리는 ‘욕심’이라는 거친 바다 위를 구멍 뚫린 ‘합리’라는 배를 타고 가는 불안한 존재들이다. 마땅히 쉼 없이 구멍을 메우고 차오르는 욕심을 퍼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마치 욕심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허세를 부린다. 그래서 우리는 욕심으로부터 논리와 이성을 지켜내는 법을 배운 적이 없다. 그 결과 아무리 허술한 속임수라도 피해자의 욕심과 만나면 엄청난 힘을 발휘하게 된다. - 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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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저제도는 사회의 창조적 역동성을 막았다.
이 제도는 블랙홀처럼 온 나라의 젊음과 재능을 빨아들였다. 철저한 계급사회에서, 시험만 잘 치면 순식간에 기득권 핵심부에 들어설 수 있다는 약속만큼 달콤한 것도 없다. 유능한 청년들이 자기 주변에 있는 중소 규모의 지적, 산업적 프로젝트에서 관심을 거두고 중앙에서 실시하는 시험을 통과하는 데 모든 힘을 쏟았다.
합격자들은 그 질서의 가장 열렬한 수호자가 되었다. - 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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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더 이상 두려워할 필요가 없으며 더 이상 슬퍼할 필요도 없고, 내가 지금 안전하다고 말한다. 나는 웃는다. 나는 그에게 소련인들이 무섭지 않고 만약 내가 슬프다면 그것은 오히려 지금 너무 많이 안전하기 때문이라고, 직장과 공장, 장보기, 세제, 식사 말고는 달리 생각할 것도, 할 것도 없기 때문이라고, 잠을 자고 내 나라 꿈을 조금 더 오래 꿀 수 있는 일요일을 기다리는 것 외에는 달리 아무것도 기대할 것이 없기 때문이라고 그에게 말하지 못한다. - 90, 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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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
류시화 지음 / 더숲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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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찾아 본 류시화의 책이다. 요즘 같이 삶이 팍팍해지고 여유 없어지면, 가끔 이런 류의 책을 찾고는 한다. 내가 겪고 있는 문제에 대한 즉각적인 해답이 아닌, '나'와 나를 둘러싼 상황을 한 발자국 멀리 떨어져서 바라보고자 할 때, 특히 그런 것 같다(물론, 아주 실용적인 책을 읽는다고 해서 Do It Now가 가능한 것도 아니다). 어쩌면 내가 이런 시기와 기분을 느낄 때즘 의례히 삶에 관한 에세이를 찾는 것이 그가 말한 '퀘렌시아의 시간'인지도 모르겠다.


철학의 본질은 대체적으로 유사하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같은 화두를 삶을 통해 스스로 끊임없이 삶의 방향과 태도에 대해 묻고 답해야 하는 과정이다. 그런 의미에서 방황, 상처의 치유, 자아의 회복, 공감과 관련된 다양한 이야기와 상념들로 구성된 이 책은 목적없이 바쁘게만 움직이는 내 발걸음을 잠시 멈추고 한 템포 쉴 수 있게 해주었다. 누구나 철학자가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철학 없는 삶은 부표 없는 항해와도 같다. 


사실 이런 류의 책은 반복되는 표현이나 유사한 우화, 에피소드가 많다. 유사한 책 몇 권을 읽다보면 '또 그 얘기냐' 생각하기 십상이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하는 행동이나 말이 그 사람 삶의 마지막 순간이 될 수도 있다", "내 감정은 내가 아니다. 나는 그저 관찰자여야 한다"라는 등의 이야기들. 그러나 아는 것과 길을 걷는 것은 다르다고 했던가. 가장 인상 깊게 읽었던 대목은 저자가 배우 김혜자와 네팔 여행을 갔을 대의 이야기다. 노상에서 울고 있는 여인을 가만히 안아 주며 같이 동감해주던 김혜자가, 그녀가 좌판에서 파는 물건 중 싸구려 팔지 하나를 골라 300달러를 지불하면서, "누구나 한 번쯤은 횡재를 하고 싶지 않겠어요? 인생은 누가에게나 힘들잖아요"라고 말했다던 장면에서 절로 탄성이 나왔다. 진정한 공감과 연민이라는 것은 그 상황에서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깊은 통찰과 애정을 기반으로 한 것이었다.


"나무에 앉은 새는 가지가 부러질까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무가 아니라 자신의 날개를 믿기 때문이다"라는 뒷표지의 글귀가 가슴에 팍 박혀버렸다. 어찌 내 주변에는 나뭇가지에 자신의 발을 칭칭 동여맨 이들만 있을까, 나도 모르게 실소를 날리며, 과연 나는 내 날개를 믿을 수 있는 사람인지도 생각해보게 되었다. 책을 덮고 일상으로 넘어가면 또 똑같은 태도로 삶을 살겠지만, 입에서는 예전과 같이 악에 받친 말이 나오겠지만, 내 방향과 맞지 않는 것을 죄악시하고 또 반대하겠지만, 그래도 한 번쯤은 멈칫하거나 한 번쯤은 더 생각하고 말하게 될 수 있지 않을까.  



누군가 말했듯이, 인생은 쉼표 없는 악보와 같기 때문에 연주자가 필요할 때마다 스스로 쉼표를 매겨 가며 연주해야만 한다.
가장 진실한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는 곳, 그곳이 바로 퀘렌시아이다. 나아가 언제 어디서나 진실한 자신이 될 수 있다면, 싸움을 멈추고 평화로움 안에 머물 수 있다면, 이 세상 모든 곳이 퀘렌시아가 될 수 있다. 신은 본래 이 세상을 그런 장소로 창조했다. 자연스러운 나로 존재하는 곳으로, 아메리카 인디언들처럼 세상과 대지와의 교감 속에서 활력을 얻고 영적으로 충만해지는 장소로. 그런 세상을 투우장으로 만드는 것은 우리 자신들이다. - 15, 16

우리가 누군가에게 하는 행동이나 말이 그 사람 삶의 마지막 순간이 될 수도 있으며, 그 사람은 그 느낌을 간직하고 떠나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 29

우리 자신도 목표 지점과 원하는 결과를 향해 가느라 삶이 그 여정에서 선물하는 것들을 지나치기 일쑤이다. 삶은 그 여정들로 이루어지는 것인데도 말이다. 한 사람은 도중의 난관들을 피해 서둘러 목적지에 도착하느라 마음이 급하지만, 또 한 사람은 과정에서 발견하는 신비와 뜻밖의 경험들에서 순수한 기쁨을 얻는다. 그에게 삶은 놓칠 수 없는 소중한 선물이며, 목적지는 오히려 그 과정들을 경험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설정한 지점에 불과하다. 목적지에 이르면 또 다른 목적지로 가야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모든 과정과 순간순간이 목적이’라는 말은 트레킹뿐 아니라 삶에 있어서도 진리이다. - 34, 35

여행이 내게 준 선물은 삶과 세상에 대한 예찬, 그것이다. 광부는 수많은 돌들에 불평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광부의 눈은 보석을 발견할 뿐이다. 예찬하는 마음 역시 모든 돌들을 보석으로 만든다. 부자는 누구인가? 많이 감동하는 사람이다. 감동할 줄 모르는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이다.
<지상의 양식>에서 앙드레 지드는 말한다.
"저녁을 바라볼 때는 마치 하루가 거기서 죽어 가듯이 바라보고, 아침을 바라볼 때는 마치 만물이 거기서 태어나듯이 바라보라. 그대의 눈에 비치는 것이 순간마다 새롭기를. 현자란 모든 것에 경탄하는 자이다." - 62

‘우리가 곤경에 빠지는 것은 뭔가를 몰라서가 아니라 뭔가를 확실히 안다는 착각 때문이다.’라는 말은 진리이다. 자세히 볼수록 더 모르게 된다. 그것이 존재의 신비이다. 한 존재를 아는 것은 한 세계를 끌어안는 일이고,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내가 모르는 그 무한한 세계를 사랑한다는 것이다. 상대방을 이름과 성별과 직업으로 분류하고 규정짓는 순간, 나는 그 무한한 세계를 사랑하기를 포기한 것이다.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살아 있는 모든 것을 그냥 ‘그대’라고 불렀다. 그 자체로 존중이고 사랑이다.
당신은 이름 없이 나에게로 오면 좋겠다. 나도 그 많은 이름을 버리고 당신에게로 가면 좋겠다. 이름을 알기 전에 서로를 느끼면 좋겠다. - 66, 67

이것은 전혀 과장이 아니다. 모든 행위는 고유한 파장이 있고, 그 파장과 일치하는 존재들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변화하고 성장할 수 있다. 아무리 어둔 길이라도 혼자 걷는 길은 없다. 혼자라고 믿는다면, 자신을 도우러 오는 수많은 존재들을 외면하는 것이다. 그러면 시공간을 초월한 협력의 즐거움을 누릴 수 없다. 인생은 혼자 걷는 길이라고 말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이 세상 안에서는 혼자 내던져지는 법이 없다. 단지 우리가 혼자라고 믿는 것일 뿐이다. - 77, 78

화살에 맞으면 아픔을 느끼되 그 아픔을 과장하지 말라고 붓다는 충고했다. 병이 난 제자를 찾아가서도 아파하되 그 아픔에 깨어 있으라고 가르쳤다. 상처에 너무 상처 받지 말 것, 실망에 너무 실망하지 말 것, 아픔에 너무 아파하지 말 것 – 이것이 두 번째 화살을 피하는 방법이다. 잠시 아플 뿐이고, 잠시 화가 날 뿐이고, 잠시 슬플 뿐이면 되는 것이다. 그 순간이 지나면 우리는 다시 맑고 투명해진다.
우리는 첫 번째 화살에 반응을 보이는 데는 익숙하지만, 두 번째 화살을 다루는 데는 매우 서툴다. 칼루 린포체는 말한다.
"용서는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해방시켜 주는 일이 아니다. 그 사람을 향한 원망과 분노와 증오에서 나 자신이 해방되는 일이다." - 137

즐겁고, 자유롭고, 자발적으로 사는 것을 방해하는 교리들은 잘못 베낀 것일 가능성이 높다. 모든 정의와 도그마를 넘어 두려움 없이 지금 이 순간의 삶 속으로 들어간다면 언제든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이 살아 있는 경전이다. 인생은 필사본이 아니라 각자 스스로 써 나가는 책이다. 우리는 예술가이며 예술 그 자체이다. - 149

노르웨이를 대표하는 3인의 현대 시인 중 한 명인 올라브 H. 하우게의 시가 있다.

모든 진리를 가지고 나에게 오지 말라
내가 목말라한다고 바다를 가져오지는 말라
내가 빛을 찾는다고 하늘을 가져오지는 말라
다만 하나의 암시, 이슬 몇 방울, 파편 하나를 보여달라
호수에서 나온 새가 물방을 몇 개 묻혀 나르듯
바람이 소금 알갱이 하나 실어 나르듯 – 164

당신이 추구의 길에 있을 때, 누군가가 자신이 모든 해답을 알고 있다고 말하면 그를 따르지 말아야 한다. 그 해답은 당신의 목적지가 아닌 그의 목적지로 데려갈 것이기 때문이다. 목말라하는 당신을 위한다고 바다를 주려고 하는 사람은 믿지 말아야 한다. 그것이 당신의 갈증을 해결해 주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빛을 찾는 당신에게 누군가가 하늘을 가져다준다면 당신은 오히려 눈이 멀 것이다. – 164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는 두 마리의 늑대가 싸우고 있다. 한 마리는 악한 늑대이다. 그것은 분노이고, 질투이고, 탐욕이다. 거만함이고, 거짓이고, 우월감이다. 다른 한 마리는 선한 늑대이다. 그것은 친절이고, 겸허함이고, 공감이다. 기쁨이고, 평화이고, 사랑이다."
귀 기울여 듣던 손자가 물었다.
"어느 쪽 늑대가 이기죠?"
체로키 노인이 말했다.
"네가 먹이를 주는 쪽이 이기지." - 174

우리가 겪는 일들은 삶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이다. 사건들은 우리에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일어난다. 예기치 않았던 불행은 껍질을 태워 버리는 불과 같아서 껍질 속에 가려져 있던 우리 본연의 모습을 보게 한다. - 181

"문제는 물병의 무게가 아니라, 그대가 그것을 얼마나 오래 들고 있는가이다. 과거의 상처나 기억들을 내려놓아야 한다. 오래들고 있을수록 그것들은 이 물병처럼 그 무게를 더할 것이다."
과거를 내려놓고 현재를 붙잡는 것이 삶의 기술이다. 오래전에 놓아 버렸어야만 하는 것들을 놓아 버려야 한다. 그다음에 오는 자유는 무한한 비상이다. 자유는 과거와의 결별에서 온다.
뉴욕 어느 서점의 유리에 붙어 있던 작자 미상의 글귀 하나가 내 마음에 오래도록 남아 있다. ‘나무에 앉은 새는 가지가 부러질까 두려워하지 않는다. 새는 나무가 아니라 자신의 날개를 믿기 때문이다.’ - 204

생각은 내가 아니다. 본래의 나는 생각들이 아니라 그것들의 관찰자이다. 그 ‘나’의 알아차림이 없으면 생각이 우리 삶의 주인이 되고, 현존이 아니라 끊임없는 중얼거림이 일상을 차지한다. 이 중얼거림에서 깨어나 미소 짓지 않겠는가? - 210

어두울 때 우리는 아무것도 볼 수 없다. 그때 빛은 우리 자신으로부터 나온다. 시인 시어도어 로스케도 썼다.
‘어둠 속에서 눈은 비로소 보기 시작한다.’ - 237

인간에 대한 가장 나쁜 예의는 ‘너는 온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내가 바로잡아야만 한다.’는 자세이다. 각자의 내면에 훌륭한 교사가 있음을 인정하지 않는 일이다. 자신이 가진 유일한 연장이 망치일 때는 모든 대상을 튀어나온 못으로 보게 된다. 자신이 옳은 길을 걷고 있다고 해서 그 길만이 옳은 것은 아니다. 그 길은 많은 옳은 길 중 하나일 뿐이다. 행복한 관계는 비평이나 조언이 아니라 상대방의 ‘순수 존재’를 잊는 그대로 받아들일 때 찾아온다. - 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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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부기 셔플 - 2017 제5회 수림문학상 수상작
이진 지음 / 광화문글방 / 2017년 11월
평점 :
절판


장강명의 <당선, 합격, 계급>을 읽던 중 그가 직접 심사위원으로 참여했다는 사례에서 이 책에 대한 이야기를 접했다. "<기타 부기 셔플>이 너무 재미있어서 다른 원고에는 마음이 가지 않았다"는 대목을 읽던 중 책을 잠시 접어 두고, 이 책을 바로 구매한 후 읽던 책을 계속 읽었다. 다른 이의 평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은 아니지만,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현역 작가가 '너무 재미있다'고 밝힐 정도면 정말 그럴 것이라 생각했다. 더욱이 <당선, 합격, 계급>에서도 나왔듯이, "새로운 작가의 새로운 장편소설을 읽고 싶어 하는 시대의 요구"는 이제 독자들이 책을 선택하는 트렌드 또한 'ㅇㅇ(문학)상 수상작'을 통해 검증된 선택을 하게 만들고, 나 또한 그러한 풍토에서 자유롭지는 않은 것 같다.


책을 그리 빨리 읽는 편은 아닌데, 하루만에 다 읽었을 정도로 흡입력이 강하고 전개가 빠른 소설이다. 우리의 과거사에서 서구의 음악이 유입되며 대중화되기 전의 시점을 포착하여, 한국전쟁 이후 피폐한 사회상 속에서 생계도 제대로 해결할 수 없었던 한 개인이 우연히 미8군을 대상으로 한 쇼단에 소속되어 음악가로 성장하는 과정을 그렸다. 먹고 살기도 힘든 재건 상황에서 음악을 통하여 생계를 해결하고 자아성취를 이룬 주인공(현)의 삶은 일반 국민들의 삶과는 다르고 이질적이다. 국가, 경제력, 인종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동질화될 수 있는 유일한 요소인 언어, 그것을 둘러싼 음악의 힘이 그를 포함한 그룹(와일드 캐츠)을 한국에 속하지만 전혀 다른 영역인 캠프, 미합중국으로 이끌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전에는 차마 생각할 수도 없었던 부와 인기를 누리게 된 그들의 앞 길에는 또다른 소멸이 기다리고 있다.


한국전쟁, 미군정, 군부독재, 유신과 같은 거시적인 비극은, 그 시대를 사는 한 개인의 삶에 맞닿아 구체화됨으로써 더 큰 비극으로 또는 전혀 다른 방향의 희극으로 변모하기도 한다. 책을 읽는 내내 과거로부터 이어진 현 시대를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이며, 내가 살아보지 못한 과거시대를 이해한다는 것은 또 얼마나 생경한지를 생각하게 되었다. 작가의 말을 읽던 중 현재의 낯섦과 부적응이라는 고독의 근원을 과거로부터 살펴본다는 점이 눈에 띄었다. 시간을 들여 책을 재미있게 읽었다는 즐거움과 더불어 인생에서 나 자신에 대한 시공간을 재편해보려는 시도를 해봐야겠다는 삶의 숙제를 받은 것 같았다.

사람을 무대 위에 서게 만드는 근본적인 힘은 지극히 본능적이며 육체적인 것이었다. 모든 딴따라들의 영혼에 찍힌 낙인, 속된말로 ‘끼’라고 불리는 그 재능은 최초에는 이성의 관심을 끌어보려는 풋내기다운 욕망에서 시작한다. 쇼를 거듭해갈수록 그 욕망은 덩치를 부풀려 수백 수천 청중의 우레 같은 갈채를 갈구하게 된다. 무대라는 단상 위에서 기독교 부흥회의 장로처럼 접신을 한다. 인간을 초월하여 신에 가까워지고자 하는 욕망. 딴따라의 야생적 끼가 도달하는 궁극적인 지점에는 역설적으로 종교적인 숭고함이 있었다. - 110

전쟁 이후 세상은 쭉 무저갱이었다. 혁명이 일어난 지 일 년 만에 또 다른 혁명이 일어나고, 마구잡이로 쏟아지는 새로운 법리와 규율들, 자고 일어나면 어제의 명사가 사형수가 되고, 가도를 헤매던 부랑아와 걸인들은 트럭에 실려 어디론가 떠나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철철이 찾아오는 천재지변과 전염병 속에서 오직 재수와 요행수만이 개인의 운명을 판가름했다. - 132, 133

하지만 누가 노예일까? 따져보자면 꿈 한 번 못 꾸고 사는 쪽이 노예가 아닐까? 나는 스무 해를 살면서 단 한 번도 내 마음속에 노예를 품어본 적이 없어. - 186

예외가 존재하는 혁명이란 모순이다. 그러나 이 땅에서 모순은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일이라 사람들은 의문을 제기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 187

"키키도 아예 잊었어요? 형에게 키키는 뭐였나요?"
"키키? 음악이랑 똑같아. 전부이고 아무것도 아닌 것."
대답하며, 강엽 형은 눈을 감고 벽에 기댄 채 천천히 모로 쓰러졌다. - 238

전부이되 아무것도 아닌 것이란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동경하고 사랑하지만 끝내 손에 쥘 수 없는 것, 그러기에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것. - 242

내가 사는 시공간은 항상 낯설었다. 책과 말과 미디어로 배운 세상과 내 눈에 비치는 세상은 서툴게 깎은 톱니바퀴들처럼 아귀가 맞지 않고 어긋나 있었다. 때로는 내가 먼 미래에서 뚝 떨어진 사람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정반대로 과거에서 온 미라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아예 사람이 아닌 존재인 것처럼도 느껴졌다. 자신에게 주어진 시공간에 의문을 품는다는 것, 사회에 부적응한다는 것은 그렇게 고독해지는 일이었다. - 256(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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