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영을 위하여 - 우리 인문학의 자긍심
강신주 지음 / 천년의상상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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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 그동안 시인을 이해할 노력도 하지 않으면서, 시를 이해하려고 했을까. 김수영의 삶과 그 삶속에 뒤엉킨 언어로 표현된 그의 시를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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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을 위하여 - 우리 인문학의 자긍심
강신주 지음 / 천년의상상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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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방법을 가진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이성복 시인의 멋진 말이다. 하긴 어떻게 어떤 사람을 사랑하기도 전에 미리 사랑하는 방법을 가질 수 있겠는가? 만약 가능하다면 그것은 그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와 무관하게 결정된 사랑하는 방법을 그에게 실험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불행히도 바로 이때 사랑은 폭력으로 변질되고 마는 것 아닐까. 사랑만이 그런 것은 아니다. 삶도 예술도 마찬가지니까. 방법을 가진 삶은 삶이 아니다. 미래의 삶을 현재에만 타당한 방법으로 통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방법을 가진 삶은 박제된 삶일 수밖에 없다. 이런 삶에서는 새로운 타자와 바주쳐서 자신이 변화되는 일은 생길 수 없다. 마찬가지로 방법을 가진 예술도 예술이라고 할 수 없다. 왜냐고? 미리 정해진 방법이 있다면, 예술은 창조성을 잃고 단순한 기술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 머리말

우리에 갇힌 동물보다 자연공원에 방목된 동물이 더 자유로운가. 겉으로는 자유로워 보이지만, 자세히 생각해 보면 본질적으로 다른 점은 하나도 없다. 허용된 자유는 언제든 허락한 측에서 철회할 수도 있는 불완전한 자유, 아니 정확히 말해 자유를 표방한 기묘한 억압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자연농원의 동물들은 자신을 가두는 사방의 벽 쪽으로 가기보다는 본능적으로 가운데로 모인다. 하긴 벽에 직면하는 순간, 자신이 갇혀 있다는 사실을 알 테니 얼마나 불쾌한 일이겠는가. "한계를 넘지 않는다면, 너희들 마음대로 해도 좋다." 이것이 바로 허용된 자유의 논리이다. 허용된 자유를 자유라고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는 자신의 행동을 검열하게 된다. - 21쪽

나만의 삶, 나만의 감성, 나만의 욕망을 되찾는 방법은 없을까? 그러기 위해서는 내면으로 침잠하면 안 된다. 오히려 외부로 과감하게 나아가야 한다. 외부는 어떤 식으로든지 마음을 격동시킬 테니까 말이다. 자신의 사유로 예측하지 못한 미묘한 감정이 출현할 때, 우리는 드디어 자신을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를 얻는다. "생각하지 말고, 느껴라!" 단독성을 회복하려는 사람에게 이보다 좋은 행동 강령도 없을 것이다. - 153쪽

1950년대 김수영은 인간의 치명적인 단독성을 서럽게 통찰했다. 어찌 서럽지 않겠는가. 그의 통찰이 옳다면 인간은 결코 타인과 하나가 될 수 없으니 말이다. 사람은 모두 타인의 삶을 흉내 내지 않고 자신만의 삶을 살아 내야만 한다. 그러므로 누군가 자신의 스타일을 나에게 강요한다면, 당연히 목숨을 걸고서 저항해야만 한다. 타율적이든 자율적이든 그의 스타일을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는 스스로 돌기를 그친 것이기 때문이다. 이 경우 비록 살아 있다고 해도 죽은 것에 다름없다. 김수영이 평생 독재에 대해 그토록 치열하게 저항했던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독재는 거대한 팽이가 자기의 회전 스타일을 모든 팽이에게 강요하는 정치 체제이니까 말이다. 그렇지만 이것이 정치 체제에만 해당되는 것일까? 그것은 유일신과 그의 가르침을 모든 인간에게 강요하는 초월 종교에도, 자본을 유일한 가치로 떠받드는 자본주의에도 통용된다. - 186, 187쪽

어떤 점에서 혁명가는 시인과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새로운 스타일의 글을 창조하는 시인처럼 혁명가도 강인한 고독을 기반으로 새로운 사회의 스타일을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혁명가는 시인과 구별될 수밖에 없다. 아직 노예근성을 버리지 못한 사람들이 존재한다면, 혁명가각 제안한 새로운 스타일의 사회, 즉 `자유로운 공동체`라는 이념은 실현되었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혁명가는 완성되었지만, 혁명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셈이다. 반면 자신만의 스타일로 글을 쓰는 데 성공했다면, 시인은 자신의 자유를 충분히 달성한 셈이다. 김수영이 "혁명가과 시인은 구제를 받을지 모르지만, 혁명은 없다"고 말했던 것도 이런 까닭이다. 분명 혁명가 자신이나 시인 자신은 자유를 구가하는 데 성공한 사람이다. 그렇지만 이들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이 아직 자유를 구가 하지 못한다면, 혁명은 성공했다고 말할 수 없다.
그래서 김수영의 말대로 "혁명은 상대적 완전을, 그러나 시는 절대적 완전을 수행"한다고 할 수 있다. - 276, 277쪽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방인에게 낯선 사람과 사물, 언어는 `의미의 결핍`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항상 `의미의 과잉`으로 다가온다는 점이다. 낯선 곳에서의 모든 것은 이런 의미도 혹은 저런 의미도 가질 수 있는 것으로 보일 테니까 말이다. - 292쪽

누누이 강조하지만 시가 어려워 보이는 이유는 시인 탓이 아니라 우리 탓이다. 앵무새처럼 말을 하는 우리가 자기만[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의 말을 어떻게 쉽게 알아들[을]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쯤 시를 쉽게 이해할 수 있을까? 우리가 지기만의 이야기를 할 수 있을 때다. 1964년 <시인의 정신은 미지>라는 산문에서 김수영이 "시인의 자격은 시인을 발견하는 데 있다"고 이야기 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사랑을 온몸으로 겪어 낸 사람, 다시 말해 남의 사랑을 모방하지 않고 자신만의 사랑을 하는 데 성공한 사람만이 괴테의 사랑 이야기를 읽을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 시인은 "온몸으로 온몸을 밀고"갈 뿐이다. 이것이 시인의 최고 긍지인 자유다. 물론 그러려면 스스로 살지 못하게 하는 현실과의 불화는 불가피하다. 그래서 시인의 시에는 자유에의 의지와 동시에 그가 부딪히는 현실에 대한 감각이 묻어 있는 법이다. - 341쪽.

그렇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는 4.19 혁명의 좌절을 민주주의에 대한 자신의 통찰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계기로 삼는다. 민주주의는 외적인 제도나 형식이 아니라 사람들의 자유정신이 확보되어야 하는 문제라는 통찰이다. 모든 사람들이 투철한 자유정신을 가진다면, 그들이 모여 사는 공동체는 민주적인 공동체, 그러니까 자유로운 개인들의 공동체일 수밖에 없다. 어떻게 자유로운 개인들의 공동체에서 모든 사람을 자기 뜻대로 통제하겠다는 독재자나 소수의 지배자들이 등장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 민주주의는 인문주의가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미사여구에 지나지 않는 이념이다. - 34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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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해줘
임경선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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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사람들은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상처 주는 운명을 떠안고 살아가는지도 몰라.˝ -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언제라도 기꺼이 상처 받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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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해줘
임경선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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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서 내 남자, 내 여자란 애초부터 존재할 수 없었다. 결혼은 열정을 소진하고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마저 파괴했다.
정인은 자신이 평생에 걸쳐 하고 싶은 것은 안정된 결혼 생활이 아니라 사랑임을 알았다. 이혼 후 그 남자를 만나 그의 모든 것을 가지지 못하면서도 사랑에 푹 빠져버렸다. 그녀가 원한 건 사랑밖에 없었으니 사실 그는 그녀가 원하는 모든 걸 줄 수 있었던 셈이다.
결혼과 달리 연애는 언제고 쉽게 떠날 수 있었기에 불안해 하는 여자들이 많지만 어차피 어떤 관계도 영원할 수는 없다. 상대가 내 곁을 떠난다 해도 그렇게 한때나마 서로를 깊이 사랑하면서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 그 이상 인생에서 무언을 더 바랄 수 있단 말인가. - 160쪽

"어쩌면 사람들은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상처 주는 운명을 떠안고 살아가는지도 몰라." - 20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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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티는 삶에 관하여 (2017 리커버 한정판 나무 에디션)
허지웅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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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나의 화두는 그야말로 `버티는 것`이다. 연말이 가까워지면서 도무지 여유를 찾을 수 없을 정도의 분주함이나, 본격적인 가을의 문턱으로 접어들면서 가중되는 육체의 피곤함이나, 그나마 아주 약간 남아 있는 애정조차도 기꺼이 버릴 수 있을 정도로 인간 관계의 피로로 얽힌 직장 생활에서 내가 떠올릴 수 있었던 단어는 `버티다`라는 것이었다. 실제로 생각뿐만 아니라 몸으로도 버텨야 했기에, 버티다는 것은 문자 그대로의 의미와 `동사`라는 형태로 내게 체화되어 있었다.
하지만, 마음 한 켠에는 `오늘도 그럭저럭 버텼다`는 안스러운 위로가, 스스로에 대한 대견함이나 뿌듯함보다는 버티는 것에 대한 자괴감으로 다가왔기에 내심 조금 더 힘들거나 괴로웠던 것 같다. 그러다가 내 지금의 상황과 유사한 내용의 제목이 있는 책을 발견했다.

˝인생의 좌표라는, 그 단어부터 너무나 거대해 도무지 가늠이 되지 않는 세상의 말에 더 이상 무심할 수 없는 나이에 닿아가면서, 결국 버티어내는 것만이 유일하게 선택 가능하되 가장 어려운 길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기는 것도, 좀더 많이 거머쥐는 것도 아닌 세상사에 맞서 자신을 지키고 버티어내는 것.˝

버텨가는 삶은 오직 나뿐만은 아닐테니. 어쩌면 모두가 그렇게 살고 있으며, 살아가는 데 있어 버티는 것 외에 다른 특별한 방식이 존재하는 것 같지도 않으니, 이제는 더 많이 절망하지도 않고, 더 크게 부끄러워하지도 않은 채, 딱 어제만큼만 버텨내면서, 또 그렇게 오늘 하루를 버텨낸 것 만큼 삶에 대한 내 `맷집`도 조금은 좋아졌다고 생각하며, 스스로 위로해주어도 괜찮은 걸까.

타인의 순수함과 절박함이 나보다 덜할 것이라 생각하지 말고, 절대악과 절대선이 존재하는 세상을 상정하며 어느 한 편에만 서면 명쾌해질 것이라 착각하지 말되, 마음속에는 오래도록 지키고 싶은 문장을 한 가지씩 준비해놓고 끝까지 버팁시다. 우리의 지상 과제는 성공이나 이기는 것이 아닌 끝까지 버텨내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버티고 버텨서 다음 세대에게 후하고 창피하지 않은 우리가 됩시다. 버티고 버텨서 앞선 세대에게 손을 내밀고 관용할 수 있는 우리가 됩시다. 마지막 순간까지 버티고 버텨 남 보기에 엉망진창이 되더라도 나 자신에게는 창피한 사람이 되지 맙시다. - 8쪽

나는 그날 이후로 영영 달라졌다. 힘들 때마다 내 비굴한 웃음을 기계적으로 떠올리며, 그날의 나를 해명하기 위해 살아왔다. 그 웃음을 떠올리면 아무리 나쁜 것도 마냥 나쁘게만은 보이지 않고, 제아무리 아름답다는 것도 마냥 아름답게는 보이지 않게 되었다. 자신이 받은 알량한 상처의 총량을 빌미로, 타인에게 가하는 상처를 아무것도 아닌 양 무마해버리는 비겁함을 쉽게 감지할 수 있게 되었다. - 17, 18쪽

뉴스를 보다보면 세상의 속살이 드러나 그 추잡함과 헐거움, 촌스러움에 치를 떨게 될 때가 있다. 나는 그게 근본적으로 서로 앞다투어 멋지고 잘났고 괜찮고 근사하고 옳다고 믿는 사람들 투성이라 초래된 세상이라고 본다. 그것이 체계 안의 인간이기 때문이든, 태생적 한계이든 간에 관계없이, 모든 인간은 모순적이고 흠결투성이라고 생각한다. 아니 확신한다. 자신의 흠결을 들여다보고 객관적으로 파악하지 못하는 사람은 외부 세계의 그 어떤 분야에 대해서도 고쳐나가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나아가 남의 흠결을 공격하는 데에만 혈안이 된다. 그래서 나는 내가 제일 별로라고 말하고 다닌다. 너도 사실 별로라고 말하려고. - 21, 22쪽

나이를 먹고 어른이 된다는 건 자기 주변을 책임질 일이 늘어간다는 것이다. 당신도 알다시피 책임을 진다는 건 말처럼 그리 고상한 일이 아니다. 더럽고 치사한 일이다. 내 소신이 아니라 남의 소신을 지켜주어야 하는 일이다. - 33, 34쪽

어른이 된다는 건, 어쩌면 주변 세계를 향한 애정을 조금씩 잃어가는 과정일지도 모르겠다. - 47쪽

사실 냉소는 내가 세상을 살아가는 데 가장 편리한 방법 가운데 하나다. 비관과 냉소는 대개의 경우 피폐한 자들의 가장 쉽고 편한 도피처다. 나는 냉소의 영향력 아래 있을 때가 제일 아늑하고 좋다. 글쓰는 자에게는 냉소적인 태도가 객관성을 담보해주기도 한다. 뜨겁고 충만할 때보다 냉소적일 때 했던 말과 글이 더 오랜 시간 유효하다. 그래서 나는 곧잘 타인의 진심을 무시한다. 정확히 말하면 진정성을 주장하는 말들을 무시한다.
실제 모든 종류의 ‘진심’이란 아무 의미가 없는 호소다. 진심, 진정성은 주관의 영역에 있는 것이지 남에게 주장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나의 진심을 몰라준다고 세상을 탓할 일도 아니다. - 101쪽

모든 노인이 지혜로운 건 아니지만, 시간의 녹을 먹은 노인들이야말로 가장 지혜로울 수 있는 자들임에 틀림없다. 세상이 늘 어리석고 파괴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지혜로운 노인이 늘 사라져갈 수밖에 없는 원리를, 그 모든 아비규환과 부정과 폭력과 살인과 슬픔이 끊임없이 반복될 수밖에 없는 까닭을, 노인의 주름은 알고 있는 듯했다. - 110쪽

이 나라에서 스스로 중산층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70퍼센트에 달한다. 하지만 실제 한국의 중산층은 40퍼센트가 채 되지 않는다. 이 놀라운 통계의 마술은 한 가지 명징한 진실을 환기한다. 사람들은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한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이 가상의 필터를 ‘가치관’이라고 부른다. 수많은 장르영화들이 이 같은 소재를 다뤄왔다. 사람들은 자신의 계급적 정체성에 따라 투표하지 않는다. 바로 이 가치관에 따라 투표한다. - 155쪽

요컨대 가난한 사람들이 부자를 위한 정책 정당을 지지하는 이유는, 그들이 부자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부유함이나 풍요로움 같은 부자의 가치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와 함께 수반돼 연상되는 보수적 언어를 ‘옳은 것’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누가 혹은 어떤 정당이 서민을 대변하고 말고는 고려 대상이 아니다. 사람들은 부자를 보며 박탈감을 느끼지 않는다. 성공신화에 매료될 뿐이다. 부와 이익이라는 (그들이 생각하기에) 긍정적인 에너지에 박수를 보낼 뿐이다. - 155쪽

도대체 내가 좌파여선 왜 안되나. 좌파라면 그런 대우를 받아도 되는 것인가. 너는 좌파라서 안 된다는 말을 꺼내는 사람들은, 오히려 나는 좌파가 아니라는 당신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런 경우 잡음과 논란은 많을수록 좋다. 가져선 안 될 신념을 상정하고 현실화하는 것. 그것이 말의 힘이고 마법이다. - 175쪽

집단행위란 거기 가담하는 개인을 익명으로 만들기 때문에 개별의 지분을 축소하는 착시효과를 낳기 마련이다. 스스로 폭력의 주체임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1/N의 폭력이 무서운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이들은 자신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 185쪽

그렇게 한국의 디즈니를 찾기 시작했다. 한국의 스티븐 스필버그를 찾기 시작했다. 이제는 한국의 닌텐도를 찾는다. 십 수 년이 지났어도 달라진 건 없다. 오히려 공고해졌다. 지금 한국 문화계를 바라보며 혀를 차는 시장주의자들의 핵심 논점은 변함없이 ‘한국에는 왜 아무개가 없느냐’는 것이다. 저 수많은 문화계 지원정책의 핵심 키워드 또한, 여전히 ‘한국의 아무개를 육성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아무개를 찾는 말들에는 당연한 오류가 있다. 그 아무개가 한국이라는 환경 아래에서도 그 놀라운 시장가치를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냐는 문제다. - 211, 212쪽

살아 있는 누군가는 깎아내려짐으로써 상품화된다. 이미 죽은 누군가는 신화화됨으로써 상품화된다. 어제 잭슨을 욕해 배를 채웠던 사람들이 오늘 잭슨을 우러러 다시 배를 채운다. 잭슨에 대한 평가는 하루아침에 바뀌었지만, 정작 그를 둘러싼 세계의 동기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진심과 진실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본질에 대한 어떤 규명이나 확인도 없이 괴물은 우상이 되고 우상은 괴물이 된다. 돈이 된다면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세상에서 가장 쉽고 천박하며 공공연한 진실이다. - 234쪽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일들은 대개, 정의의 이름으로 이루어진다. - 288쪽

우리가 다음 세대에 물려줄 수 있는 가장 좋은 것은, 다름 아닌 가능성이다. 우리보다 아주 조금이라도 나을 수 있는 가능성이다. 커티스와 남궁민수는 지금의 체계와 규칙을 물려주고 그 안에서 아프니까 청춘이고 밖은 추우니까 열차는 달려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가능성을 물려준다. 그것은 한 세대가 다음 세대에게 선사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유산이다. - 310쪽

우리는 모두 가족이라는 이름의 코끼리를 기르고 있다. 공공연한 폭력의 최전선은 전쟁터가 아니라 가정이다. 남이 하면 뭐 저런 미친놈이 다 있어, 삿대질할 것도 엄마에게 형제에게 자식에게 남김없이 쏟아낸다. 문제라고 느끼는 사람도 있고 느끼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그나마 잠깐 후회하고 금세 망각하고 다시 되풀이 된다. 나와 나의 행동을 분리시키지 못하기 때문에 가능한 저열함이다. 수십 년을 함께한 가족관계 안에서 나 자신과 부모와 형제자매를 개별적인 인격체로 객관화할 만한 능력을 가진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 317, 318쪽

<레 미제라블>이 제시하는 이슈는 정의의 궁극적 승리 따위가 아니다. 장발장과 자베르가 벌이는 신념의 대결, 장발장과 코제트-마리우스의 마지막 해후는 무엇을 의미하나. 혁명이라는 거대서사의 소용돌이 안에서조차, 서로 다른 가치관과 계급과 세대에 속한 이들을 공히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개인의 평생에 걸친 자기비판과 성찰, 그리고 그로부터 얻어지는 박애뿐이라는 사실이다.
고작 상대 진영과 특정 세대에 책임을 돌리는 증오의 해법으로 이미 일어난 일을 설명하려는 사람들은, 적어도 이 텍스트에서만큼은 힐링을 누릴 자격이 없다. 우리는 이 숭고한 이야기에 눈물을 흘리기 이전에 앙졸라가 아닌 장발장의 염려를 껴안아야만 한다. 장발장이 숲속에서 코제트를 만난 이후 최후의 순간까지 골몰했던 바로 그것. 우리가 다음 세대에게 물려줄 수 있는 가장 좋은 것은 무엇인가. - 351쪽

세상에 운명 따윈 없다. 약속된 땅도 계획도 다음 생 같은 것도 기대하지 마라. 덜 낭만적으로 들리겠지만 정신 차리고 제대로 살기 위해, 결코 도래하지 않을 행복을 빌미로 오늘을 희생하지 않기 위해, 우리는 우리가 맺고 있는 관계들의 정체를 규명해야만 한다. 그것이 연애든, 고용이든, 혈연이든 마찬가지이다. 너와 나의 관계가 주는 만족감의 뿌리가 정말 이 관계로부터 오고 있는 것일까. 혹은 단지 세상으로부터 정의 내려진 역할에 충실하고 있었던 것뿐일까. 역할에 휘둘릴 것인가, 아니면 정말 관계를 할 것인가. 그 쉽지 않은 답을 찾는 것으로 우리는 정말 나아질 수 있다. 끝이 어떠하든, 후회하지 않을 수 있다. - 357쪽

인생의 좌표라는, 그 단어부터 너무나 거대해 도무지 가늠이 되지 않는 세상의 말에 더 이상 무심할 수 없는 나이에 닿아가면서, 결국 버티어내는 것만이 유일하게 선택 가능하되 가장 어려운 길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기는 것도, 좀더 많이 거머쥐는 것도 아닌 세상사에 맞서 자신을 지키고 버티어내는 것. 록키 발보아가 그랬듯이 말이다. 언제나 록키 발보아 이야기로 끝을 맺고 싶었다. 마지막이다. 모두들, 부디 끝까지 버티어내시길. - 36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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