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는 죽지 않는다
공지영 지음 / 해냄 / 2017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제목을 보고는 시들지언정 사라지지 않는 나이듦의 예찬 같은 것이 아닐까, 라는 단순한 추측을 했다. 그러나 읽고 보니 정말 죽지 않는 현상 그대로의 이야기를 기묘하게 적어 놓은 동일한 제목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었다. 타인의 생명을 흡입하여 자신의 생명을 연장하는 할머니의 삶을 통하여 작가는 무엇을 말하고자 했을까. 그것은 자기보다 약한 자들로부터의 착취를 통해 부(富)를 연장해가는 이 시대의 기득권 세력일 수도 있고, 사라질듯 사라질듯 하면서도 결코 근절되지 않는 사회악일 수도 있으며, 재산분배를 위하여 내심 할머니의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우리들의 속물적 근성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책에는 총 5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일과 양육(월춘 장구), 존재의 죽음과 그를 둘러싼 관계(할머니는 죽지 않는다), 현재의 자아와 태생의 근본(우리는 누구이며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종교와 본성 그리고 삶(부활 무렵), 국가적 이념과 개인의 삶(맨발로 글목을 돌다)과 같이, 이 단편들을 통해 작가가 제시하는 소재는 매우 넓고 다양하다. 


그 중 1, 3, 5번째 수록되어 있는 '월춘 장구', '우리는 누구이며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맨발로 글목을 돌다'는 에세이 같은 느낌을 주는 '소설'이다. 각 소설에는 소설가인 공지영이 등장하며 현실의 자신과 관련 있을 것 같은 상황(글을 쓰다가 아이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서울로 달려가는 엄마의 이야기, 자신이 예전에 잃어버린 친동생이 소설가 공지영 같다며 확인하려고 찾아온 여인에 대한 이야기, 일본에서 책을 출간하게 된 공지영이 만난 특이한 이력의 번역가 H에 대한 이야기)이 전개된다. '이런 것도 소설일까?'라는 물음을 통해 작가는 어쩌면 '소설=픽션'이라는 관념으로부터의 탈피를 시도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2, 4번째 수록되어 있는 것이 나 또는 독자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소설이라는 것'에 가까운 내용일 것인데, 내가 이 두 편이 그래도 소설에 가깝다고 생각하는 이유를 되짚어보니, 그건 단지 다른 단편들처럼 '공지영'이라는 소설가가 등장하지 않고 내가 이미 알고 있던 작가와 관련된 배경이 등장하지 않기 때문인 것 같다. 뚜렷한 형식적 차이가 있는 것도 아닌데, 어떠한 것은 에세이 같고 어떠한 것은 소설같다고 느끼는 이유는 그저 내 고정적인 생각 때문일까. 하지만 내가 갖는 이런 혼란에 대하여 작가는 그것이 그리 낯선 시선이 아니라고 다독이는 듯 하다. 한 검사의 말을 통해 작가는 시간이 갈수록 점점 불투명해지고 점점 흐트러지는 경계에 대하여, 어쩌면 그런 생각이 당연한 것일 수도 있다는 의견을 제시하는 것 같다. 


예전에는 말이지요. 자신이 있었어요. 이건 이 죄고, 저건 저 죄목이고, 너는 범인이고 너는 아니고…… 그런데 나이를 먹을수록 그게 힘들어요. 점점 더 말이지요. 힘들고, 또 무서워요.”

 

문득 <즐거운 나의 집>이라는 소설이 자신의 배경을 기반으로 한 것이지만, 소설로 봐달라고 했던 작가의 말이 어렴풋이 기억났다. 이 책이 소설에 대한 소재의 확장성을 의도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여러 갈래로 흩어진 삶의 다양한 모습을 통해 평소 작가가 고민하던 바를 제시하고 있는 것 같다.

자신의 본질과 이질적인 것은 상흔을 남긴다. 그리고 그 상흔으로 인해, 그 이질적인 것을 받아들여야만 했던 아픔의 힘으로 우리는 생의 모퉁이를 돌기도 한다. 그것이 좋은 곳으로 가는 길인지 아닌지는 나는 아직도 모른다. 블라인드 포인트, 라고 산에 오르던 친구는 말했다. 모퉁이를 돌면 그곳에 무슨 죽음과 무슨 삶이 펼쳐져 있을지 모르는 험악한 등정에서 산악인들은 언제나 그 블라인드 포인트를 돌아야 한다고. 그리고 초보자들에게 그것은 대개 죽음보다 더한 공포와 고통을 준다고. 거기서 주저앉는 사람이 참 많이도 있다고, 그러나 그 공포를 이겨낸 자에게만 산은 그 정상을 허락한다고. - 17, 18쪽

이미 저질러진 것을 우리는 인생이라고 부른다. 내가 잠 안 오는 밤 동이 틀 때까지 뒤척이며 그때는 이렇게 했다면, 그때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그때 거기 가지 않았더라면, 아아 정녕 그랬더라면... 수만 번 되뇌인다 한들, 혹은 내가 앞으로는 어리석게 살지 않을 거야, 정말 이제까지와는 다르게 살겠어, 두 팔에 고개를 묻고 흐느껴 운들 마찬가지였다. 중요한 것은 과거가 아니고 중요한 것은 미래도 아니며 현재는 더더욱 아닌 것이다. 나는 그저 통째로의 이 삶, 나의 어리석음과 돌이킬 수 없었던 결정들과 원하지 않았으나 내게 주어졌던 이 삶, 그러니 결국은 내 것일 수밖에 없는 온전히 내 책임인 이 삶... 찬물에 풍덩 넣어 삶아내는 통돼지고기처럼 다리도 있고 꼬리도 있고 뭉툭한 코도, 다 깎이지 않은 털도 있는 통째로의 이 삶을 나는 받아들이고 싶었다. - 112, 113쪽

누군가 말하지 않았던가. 우리 삶에서 가장 하기 힘든 일은 자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용서하는 일이며 우리 삶의 비극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역시 끝없이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며 사는 것이라고. - 125쪽

"넌 운명이란 것을 믿니? 어느 날 운전면허 시험의 한 과정처럼 돌발 상황이라는 것이 생의 급브레이크를 밟게 하고, 우리가 믿었던 질서들을 뒤죽박죽으로 만들며 이성을 무력화시키고 상식을 비웃으며 단 한 번뿐인 우리 생의 모든 것을 똥창에 거꾸로 처박아버릴 수 있는 난데없고 어마어마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류가 생긴 이래로 그 운명이라는 것이 인간에게 그친 적이 없어. 여기 푸른 별 지구 위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동과 서에서." - 189쪽

"운명이 생을 덮치는 경험을 했던 사람들은 안다. 그 포충망 속에 사로잡히고 나면 시간은 흘러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회전하고 있을 뿐이다. 고통을 중심으로 하여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다만 하나의 슬픔의 계절이 있을 뿐이다"라고 어느 날 갑자기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구경거리가 되어 런던 감옥에 갇혀야 했던 오스카 와일드는 썼다. - 195, 196쪽

힘이 있는 인간들은 힘이 없는 인간들을 죽게 할 방법을 천 가지쯤 가지고 있다. 가끔 정신과 물질을 모두 내게 의지하고 있는 내 아이들을 보면서 나는 권력이 얼마나 악에 물들기 쉬운 것인가를 깨닫고 소스라친다. 내가 마음먹으면 나는 아이들을 때리거나 고문하지 않고도 아이들을 정신병자로 만들거나 불구가 되게 하거나 이상행동을 하는 사람으로 만들 수 있다. 그들이 나를 사랑할수록 그들이 나를 의지할수록, 나 이외의 것에 그들이 속수무책일수록 그것은 너무나도 쉬운 일이다. - 200쪽

이런 구절을 읽었어. "다만 우리가 숨 쉬는 공기 속에는 이른바 비활성 기체라는 것이 있다. 이것들은 박식하게도 그리스어에서 따온 진기한 이름을 갖고 있는데 각각, ‘새로운 것(네온_’, ‘숨겨진 것(크립톤)’ 그리고 ‘낯선 것(제논’, ‘움직임이 없는 것(아르곤)’이라는 뜻을 지닌다. 이들은 정말 활성이 없어서, 그러니까 자신들의 처지에 만족하고 있어서 어떤 화학반응에도 개입하지 않고 다른 원소와 결합하지도 않는다. (...) 그 가운데는 공기의 일 퍼센트를 차지할 정도로 상당히 많은 양이 존재하는 아르곤, 곧 ‘움직임이 없는 것’이 있는데도 말이다. 다시 말해 그 양은 이 지구상에서 생명체의 흔적이 유지되는 데 없어서는 안 되는 이산화탄소보다 스무 배 또는 서른 배나 많은 양이다." 신기하지 않니? 원소들이 제 처지에 만족하고 있다는 표현이라니. - 204, 205쪽.

죽고 싶었지만 신기하게도 진짜로 죽으려는 생각은 하지 않았어요. 이상하게 운명에 대한 대결 같은 거. 그것은 맞서는 대결이 아니라 한번 껴안아보려는 그런 대결이었는데, 말하자면 풍랑을 당한 배가 그 풍랑을 이기고 가는 유일한 방법은 그 풍랑을 타고 넘어가는 것 같은 그런 종류의 대결... 내게 이것을 가르쳐준 것은 글이었는데 글은 모든 사람의 가슴에서 넘치다가 엎질러져 나오는 것이고 그렇게 엎질러져 나온 글들은 상처처럼 빨간 속살에서 터져나온 석류 알처럼 우리를 기르고 구원하니까요. - 214, 215쪽

성경을 펴니 이런 구절이 보입니다. ‘꿈에서 깬 자가 꿈을 업신여기듯...’
그제야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삶은 ‘낯선 여인숙에서 하룻밤’이었다가 ‘소란만 피우는 소리와 분노’였다가 ‘훅 하면 꺼지는 날숨’과 같다는 걸 불현 듯 깨닫습니다. 꿈에서 깨어났으면 이제 세수를 하고 이를 닦고 어린것들의 하루 양식을 벌어야 합니다. 이것만이 이제 제게 남은 유일한 진실입니다. 한 줌의 자기 비하도 없는 이 진실 속에는 신실한 희망이 있습니다. - 225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