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행 슬로보트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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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앗, 내가 모르고 지나친 하루키 소설집이 있었다니?' 우연히 하루키의 책을 발견하고 반가움과 놀라움이 교차했다. 그래도 하루키의 단편들을 이리저리 짜집기한 책이 워낙 많다는 생각에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표지와 서지정보를 꼼꼼히 살펴보았다. 출판사가 문학동네이고 번역자가 양윤옥이라면 일단 확실한 것 같았다. 그런데 '불가사의한 세계와 그곳을 헤매는 존재의 고독을 예민한 감성으로 포착한 무라카미 하루키 첫 소설집'이라는 출판사의 광고 문구가 눈에 띠었다. 첫 소설집? 알고 보니, 여기에 수록된 작품들은 하루키가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와 <1973년의 핀볼>을 쓴 이후에 문예지에 발표했던 단편이었다고 한다. 이 두 장편과 <양을 쫓는 모험> 사이, 그리고 약간의 그 이후 동안 발표된 단편들이니 나름 그의 초기작인 셈이다. 


단편집에 대한 독후감을 쓰는 것은 꽤 어려운 일이다. 한 편, 한 편을 각기 다른 느낌을 갖고 몰입해서 읽을 수 있다는 장점은 분명하지만, 장편처럼 완결된 스토리가 없다보니 다 읽은 후에 내게 무엇이 남았는지를 반추하기가 쉽지 않다. 마치 연속된 기억은 다 물처럼 흘러 사라져 버린 이후에 기억의 단편들만이 뇌리 속에 박혀 있는 것 같은 느낌마져 든다. 그래도 어떻게든 독서에 대한 흔적을 남기고 싶다면, 가장 기억에 남는 단편을 하나 고르거나, 아니면 수록된 모든 작품을 다 언급하는 수밖에는 없을 것 같다. 나는 후자를 택해본다.


이 소설집은 7개의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물론 각각이 독립된 단편이며, 제목도 각양각색이다. 대부분 주인공인 '나'와 타인에 대한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는데, 소설집의 제목으로도 되어 있는 <중국행 슬로보트>는 스토리나 문체면에서 내가 좋아하는 하루키 풍을 가장 잘 드러낸 작품이다. 논리적 인과가 없는 가운데 발견되는 낯선 사람 또는 지점과의 연계성, 불확실한 기억에 대한 접근, 남녀 사이에 발생하는 오해, 그리고 그것을 굳이 풀어내려고 하지 않는 주인공. 이 단편은 어찌보면 <노르웨이의 숲>에서 시작하여 <색체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까지도 계속 연결되는 사건에 대한 다른 관점, 오해, 망각, 기억이라는 하루키 소설의 스타일을 간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가난한 아주머니 이야기>나 <시드니의 그린 스트리트>는 하루키 소설 중 기이함과 관련성을 찾을 수 있다. 어느날 뜬금없이 가난한 아주머니가 주인공의 등에 업히게 된다든지, 양 사나이가 찾아와 잃어버린 자신의 귀를 찾아달라고 의뢰한다는 스토리는 상식과 논리를 넘어 창조된 기이함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예전 하루키의 소설을 읽다가 등장한 '양'이나 '쥐'가 무슨 은유일까를 한참 고민하며 소설을 이해하려고 노력했었는데, 어쩌면 그것은 은유나 상징이 아닌 그 자체로 받아들여야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대화를 통하여 하루키의 아포리즘을 느낄 수 있는 글은 <뉴욕 탄광의 비극>이라는 단편이다. 평범하고 무덤덤한 주인공은 삶을 살아가는 주체이자, 친구들의 죽음을 경험하는 관찰자이자, 그와 전혀 다른 자아인 친구와 관계를 맺고 있는 상대방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주인공이 친구와 나눈 대화는 곧 그가 거울 속의 다른 자아에게 하고자 하는 말인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다만, 말미에 등장하는 탄광 속의 풍경이 곧 제목인 된 셈인데, 이 짧은 몇 단락이 앞에 썼던 주인공의 생활과 어떠한 관계가 있는지를 명확히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남은 공기가 얼마 안되니 최대한 숨을 쉬지 않는 것, 그것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나의 태도라는 것인가.


<캥커루 통신>은 편지글의 형식을 띠고 있다. 백화점 상품관리과에 근무하고 있는 주인공이 어느 휴일에 동물원에서 캥거루를 보고서는 며칠 전 상품을 교환해달라는 고객의 요청이 생각나서 편지를 쓴다. 편지형식이지만 마치 모노드라마를 연상시키는 듯한 기법을 선보이고 있다. 일반인들이 생각하기에 전혀 연관성이 없는 상황임에도 주인공은 너무나도 진지하게 캥거루와 고객 사이의 서른여섯 개의 미묘한 과정을 알아내어 비로소 편지를 쓴다. 이와 같은 약간의 엉뚱함을 제외하면 읽기에 무난하다.


<오후의 마지막 잔디>와 <땅속 그녀의 작은 개>는 특별한 스토리를 기대하지만 정작 특별할 것이 없이 끝을 맺는 소설이다. 특히 전자의 경우 정원에서 잔디를 깎는 아르바이트 생의 이야기로 주인공이 일을 그만두기 전 마지막 작업에 대한 묘사를 한다. 그는 마지막 작업을 하기 위해 찾아간 집에서 만난 한 여성의 말과 태도에 드러나는 독특함을 무시하지 않으며. 그녀의 과거나 배경이 상당부분 생략된 채 이루어지는 일에 대해 별다른 반감을 느끼지 않는다. 글을 읽으며 이후 일어나게 될 새로운 전개의 실마리를 기대해보기도 하지만 별다른 설명없이 마무리 된다. 마치 한 장의 사진을 설명하듯이. <땅속 그녀의 작은 개>는 이보다는 친절한 편인데, 비가 내리는 비수기 리조트호텔에서 만난 낯선 여자를 만나고 그녀의 알 수 없는 행동에 대하여 주인공이 받아들이고 이끌리다가, 왜 그녀가 그런 생각과 행동을 하게 되는지 추후 설명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이 책에는 하루키의 다른 책들과는 달리 맨 뒷부분에 '작가의 말'이라는 부록을 첨부하고 있는데, 이 부분을 읽다보면 각 단편들을 쓰게 된 배경에 대하여 웬만한 궁금증은 해소할 수가 있다(그러나 작품에 대한 작가의 설명은 없다. 설마, 하루키가. 그럴리가 없지 않은가). 독특한 것은 하루키가 소설을 쓸 때 내용은 정하지 않고 우선 제목을 먼저 생각한 후 첫 장면을 쓰면서 스토리를 펼친다는 점이다. 제목 지어내기를 가장 어렵게 생각하는 나로써는 공감하기 쉽지 않은 부분이었으며, 이러한 독특한 작법이 하루키의 글을 특별하게 만드는 것 아닌가, 라는 생각을 했다. "'중국행 슬로보트'라는 말에서 어떤 소설이 나올지, 나 스스로도 무척 흥미로웠다"는 그의 후기에 웃고 말았다.

 

정작 궁금했던 것은 초기의 단편들을 왜 이제와서(국내 발행일은 2014년이다) 다시 발간을 하게 된 것인지였다. 그것도 일단 발표한 작품은 더이상 손을 대지 않는다는 원칙을 어겨가면서까지 왜 초기작품을 손봐서 다시 발간하게 되었나? 이 정도에서 작가로서의 자신을 한번 돌아보고 싶어서였을까? 그러나 이것은 내 추측일뿐, 아쉽지만 그 대답은 찾을 수 없었다. 아래에서 인용한 바와 같이 이 단편집의 의미나 향후 작품에 대한 연계성, 그리고 저자의 감회만을 알 수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보수공사를 하니 나라는 인간, 즉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작가의 대략적 모습이 이 단편집 안에 이미 드러나 있다는 걸 깨달았다. 분명 그 후로 나는 나름대로 나이를 먹으면서 좀더 다면적으로 사물을 보고 문장을 쓸 수 있게 되었다. 내가 뭘 해보고 싶은지도 좀더 명료하게 눈에 보이게 되었다. 현단계에서 작가로서 내 능력이 어느 정도인가도 점점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내 세계라 부를 수 있는 것은 미완성인 나름대로, 어색한 나름대로, 균형감이 떨어지는 대로 이 첫 단편집에서 대부분 제시되어 있다는 생각이 든다. 스타일이며 모티프, 어법 같은 것들의 원형은 일단 빠짐없이 나와 있다고 해도 좋지 않을까 한다" 

하긴 내 기억의 대부분은 날짜가 없다. 내 기억력은 지독히 부정확하다. 지나치게 부정확해서 이따금 내가 그 부정확성을 근거로 누군가에게 뭔가를 증명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기분까지 든다. 하지만 그게 대체 무엇을 증명하느냐고 한다면, 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애당초 부정확성이 증명하는 것을 정확히 파악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 아닐까.
어쨌거나 그런 식으로 내 기억은 지독히 흐릿하다. 앞뒤가 뒤집히거나 사실과 상상이 뒤바뀌고 어떤 때는 나 자신의 시선과 타인의 시선이 뒤섞이기도 한다. 그런건 이미 기억이라고 할 수조차 없는지도 모른다. - 11, 12쪽

이미 서른을 넘은 한 남자인 지금, 다시 한번 외야로 날아가는 공을 쫓아가다 농구대에 전속력으로 부딪히고 다시 한번 글러브를 베개 삼아 포도시렁 밑에서 눈을 뜬다면 나는 이번에는 뭐라고 말할까? 모르겠다. 아니, 어쩌면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여기는 나를 위한 장소도 아니야, 라고.
이미 서른을 넘은 한 남자인 지금, 다시 한번 외야로 날아가는 공을 쫓아가다 농구대에 전속력으로 부딪히고 다시 한번 글러브를 베개 삼아 포도시렁 밑에서 눈을 뜬다면 나는 이번에는 뭐라고 말할까? 모르겠다. 아니, 어쩌면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여기는 나를 위한 장소도 아니야, 라고. - 44, 45쪽

그런 생각이 든 것은 야마노테 선 전철 안이었다. 나는 문 앞에 서서 차표를 잃어버리지 않도록 단단히 움켜쥔 채 유리 너머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의 도시, 그 풍경은 왠지 내 마음을 지독히 어둡게 만들었다. 도시 생활자가 연중행사를 치르듯 빠져드는 낯익은 것, 탁한 커피젤리 같은 정신의 엷은 어둠이 다시금 나를 사로잡고 있었다. 지저분한 빌딩, 이름 없는 사람들의 무리, 끊이지 않는 소음, 꼼짝 못하는 자동차의 행렬, 잿빛 하늘, 공간을 가득 메운 광고판, 욕망과 포기와 초조와 흥분. 그곳에는 무수한 선택지가 있고, 무수한 가능성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무수한 동시에 제로였다. 우리는 그 모든 것을 손에 쥐었지만 우리 손안에 있는 것은 제로였다. 그것이 도시였다. 나는 문득 그 중국인 여자애의 말을 떠올렸다. "애초에 여기는 내가 있을 장소가 아니야." - 44, 45쪽

나는 다시 한번 주위를 둘러보고 여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것은 내게 다가왔고, 그리고 빨리 떠나버렸다. 언어는 투명한 탄도처럼 일요일 오후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시작은 항상 이렇다. 어느 순간 모든 것이 존재하고 그다음 순간에는 사라져버린다. - 53쪽

"새벽 세시에 인간은 온갖 생각이 드는 법이야. 이것저것 안 가리고. 누구든 그렇지. 그러니까 각자 대처법을 생각해놔야 해."
"그럴지도 모르겠다." 나는 말했다.
"새벽 세시에는 심지어 동물도 뭔가 생각해." 문득 떠오른 듯 그는 말했다. "새벽 세시에 동물원 가본 적 있어?"
"아니." 나는 멍하니 대답했다. "없지, 물론."
"나는 딱 한 번 있어. 동물원에서 일하는 사람을 한 명 알거든. 그 친구가 밤근무를 하는 날 제발 부탁이라고 애원을 해서 들어갔어. 원래는 안 되는 일이지만." 그는 잔을 흔들었다. "그건 정말 기묘한 체험이었어. 말로는 잘 설명을 못 하겠지만, 마치 땅바닥이 사방에서 소리도 없이 갈라지고 거기서 뭔가 기어올라오는 느낌이 들었지. 그리고 밤의 어둠 속을, 땅 밑에서 기어올라온 보이지 않는 그 뭔가가 마구 날뛰는 거야. 싸늘한 공기덩어리 같은 게 말이야. 눈에는 안 보여. 하지만 동물들은 그것의 존재를 느껴. 그리고 나는 동물들이 느끼는 그것을 느꼈어. 결국 우리가 밟고 선 이 대지는 지구의 중심까지 이어지고, 그 지구 중심에는 엄청난 양의 시간이 빨려들어가 있는 거지." - 98, 99쪽

"텔레비전에는 적어도 한 가지 뛰어난 점이 있어." 잠시 생각한 뒤에 그는 말했다. "원할 때 꺼버릴 수 있다는 거. 끈다고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다는 거."
그는 리모컨을 집어들고 스위치를 눌렀다. 순식간에 영상이 사라졌다. 방은 괴괴히 가라앉았다. 창밖에서 빌딩의 불빛이 하나둘 켜지는 참이었다. - 100쪽

"크리스마스 밤에 여자랑 마시려고 놔뒀던 거 아냐?" 나는 물었다.
그는 차가운 샴페인 병과 새 유리잔 두 개를 테이블 위에 조용히 내려놓았다. 그리고 매우 쿨하게 미소지었다. "샴페인에 용도 같은 건 없어. 마개를 뽑아야 할 때가 있을 뿐이야." - 102쪽

"음악 좋아해?" 그녀가 내게 물었다.
"좋은 세계에서 듣는 좋은 음악이라면." 나는 말했다.
"좋은 세계에는 좋은 음악 따위 없어." 그녀는 중요한 비밀을 털어놓는 듯한 투로 내게 말했다. "좋은 세계의 공기는 진동하지 않거든." - 104쪽

말하자면 이런 얘기입니다.
캥거루와 당신 사이에 서른여섯 개의 미묘한 과정이 있고, 그것을 합당한 순서대로 하나하나 따라가다보니 당신에게 가닿았다. 그냥 그뿐이에요. 그 과정을 일일이 설명해봤자 아마 당신은 잘 모를 테고 우선 나부터가 제대로 기억이 나지 않아요. 그럴만도 하죠. 서른여섯 개나 되잖아요!
그중 하나라도 순서가 어긋났다면 나는 당신에게 이런 편지를 보내지 않았겠지요. 어쩌면 언뜻 충동이 들어 남극해에서 향유고래 등에 올라탔을지도 모릅니다. 혹은 근처 담뱃가게에 불을 질러버렸을 수도 있고요. 하지만 그 서른여섯 개의 우연한 조합이 이끄는 바에 따라, 나는 이렇게 당신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신기한 일 아닌가요? - 112, 113쪽

위대한 불완전함이 무엇이냐고 당신은 궁금해할지도 모르겠군요 - 당연히 궁금하겠죠. 위대한 불완전함이란, 간단히 말하면 누군가가 누군가를 결과적으로 용납한다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내가 캥거루를 용납하고 캥거루가 당신을 용납하고 당신이 나를 용납한다 - 예를 들자면 그런 얘기입니다.
하지만 이런 사이클은 물론 항구적이지 않아서, 어느 순간 캥거루가 이제 더는 당신을 용납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캥거루에게 화를 내지는 말아주세요. 그건 캥거루 탓도 당신 탓도 아니니까요. 혹은 내 탓도 아닙니다. 캥거루에게도 나름대로 매우 복잡한 사정이 있는 거에요. 대체 어느 누가 캥거루를 비난할 수 있겠습니까?
순간을 포착하는 것,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그뿐입니다. 순간을 포착해 기념사진을 찍어두는 것이죠. 앞줄 왼쪽부터 당신, 캥거루, 나, 이런 식으로요. - 117, 118쪽

글을 쓰는 건 이제 포기했습니다. 간단한 사무통지 글이라도 안 됩니다. 글자 자체를 더는 신용할 수 없거든요. 이를테면 내가 ‘우연’이라는 글자를 쓴다고 합시다. 그런데 당신이 이 ‘우연’이라는 글자를 보고 느끼는 것은 내가 똑같은 글자를 보고 느끼는 것과 전혀 다를지도 - 어쩌면 정반대일지도 - 모릅니다. 이건 대단히 불공평하다는 게 내 생각입니다. 나는 팬티까지 벗었는데 당신은 블라우스 단추 세 개밖에 풀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불공평한 일 아닙니까? 저는 불공평함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물론 세계란 불공평한 것이죠. 그러나 적어도 일부러 나서서 적극적으로 그런 것에 가담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것이 나의 기본적인 자세입니다.
그래서 나는 카세트테이프에다 당신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직접 녹음하기로 했습니다. - 118쪽

나는 동시에 두 군데의 장소에 있기를 원합니다. 그게 내 유일한 희망이에요.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하지만 내가 나 자신이라는 개체성이 그런 내 희망을 방해하고 있어요. 몹시 불쾌한 사실 아닙니까? 불합리한 압박 같지 않습니까? 나의 이런 희망은 굳이 따지자면 소박한 편이라고 생각합니다. 세계를 지배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천재 예술가가 되겠다는 것도 아니에요. 하늘을 날겠다는 것도 아니고 천재 예술가가 되겠다는 것도 아니에요. 하늘을 날겠다는 것도 아니죠. 동시에 두 군데의 장소에 존재하기를 원하는 것뿐입니다. 아시겠어요? 세 군데도 네 군데도 아니고 단 두 군데입니다. 나는 콘서트홀에서 오케스트라를 들으면서 롤러스케이트를 타고 싶은 겁니다. 백화점 상품관리 담당자이면서 맥도날드의 쿼터파운드 햄버거이고 도 싶고요. 나는 애인과 자면서 당신과도 자고 싶습니다. 나는 개체이면서 원칙이고도 싶습니다. - 133쪽

기억이라는 건 소설과 비슷하다. 혹은 소설이라는 건 기억과 비슷하다.
나는 소설을 쓰기 시작한 뒤로 그것을 절감하게 되었다. 기억이라는 건 소설과 비슷하다. 혹은 소설이라는 건 어쩌고저쩌고.
아무리 말끔하게 가다듬으려고 애써도 문맥이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하다 결국에는 문맥 같지도 않은 것으로 바뀐다. 마치 축 늘어진 새끼고양이 몇 마리를 쌓아올린 것 같다. 미적지근하고, 게다가 불안정하다. 그런 걸 상품이랍시고 내놓다니 - 상품 말이다 - 나는 때때로 엄청나게 창피해진다. 정말로 얼굴이 붉어지는 때도 있다. 내가 얼굴을 붉히면 온 세상이 얼굴을 붉힌다.
하지만 인간의 존재를 비교적 순수한 동기에 근거한 상당히 어리석은 행위로 파악한다면, 무엇이 올바르고 무엇이 올바르지 않으냐 하는 건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그리고 거기서 기억이 태어나고 소설이 태어난다. 이건 어느 누구도 멈출 수 없는 영구운동 기계와도 같다. 그것은 온 세상을 덜컹덜컹 돌아다니면서 땅바닥에 끝없는 선 하나를 긋는다. - 141쪽

내가 그녀를 정말로 좋아했는지, 이제 잘 모르겠다. 기억은 나는데 모르겠다. 나는 그녀와 식사하는 것을 좋아했고 하나씩하나씩 옷 벗는 그녀를 보는 것을 좋아했고 그녀의 부드러운 몸속에 들어가는 것도 좋아했다. 섹스 뒤에 내 가슴에 얼굴을 대고 재잘거리거나 잠드는 그녀를 바라보는 것도 좋아했다. 하지만 내가 알 수 있는 건 그뿐이었다. 그다음에 어떻게 되었는지는 잘 생각나지 않았다.
그녀와 만나는 몇 주간을 빼면 내 인생은 지독히 단조로웠다. 어영부영 학교에 가서 강의를 듣고 그럭저럭 남들 비슷하게 학점을 땄다. 그리고 혼자 영화를 보거나 이유도 없이 거리를 돌아다녔다. 친한 여자가 한 명 있었다. 그녀에게도 애인이 있었지만 우리는 곧잘 둘이서 어딘가에 가서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혼자 있을 때는 내내 로큰롤 레코드를 들었다. 행복한 것 같기도 하고 행복하지 못한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그 시절이란 다 그런 법이다. - 143쪽

"옷을 보면 그 여자에 대해 웬만큼 알 수 있지." 여자는 말했다.
나는 애인을 생각했다. 그리고 그녀가 어떤 옷을 입었는지 떠올려보았다.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내가 그녀에 대해 떠올릴 수 있는 것은 모두 막연한 이미지였다. 그녀의 스커트를 떠올리려고 하면 블라우스가 사라지고, 모자를 떠올리려고 하면 그녀의 얼굴이 어떤 딴 여자의 얼굴이 되었다. 기껏해야 반년 전 일인데 아무것도 떠올릴 수 없었다. 결국 나는 그녀에 대해 대체 뭘 알고 있었던 걸까? - 168, 169쪽

「중국행 슬로보트」
이 작품은 가장 먼저 제목부터 시작했다. 내 단편소설의 대부분은 제목에서 시작되었다. 내용은 정하지 않고 우선 제목을 생각한다. 그리고 일단 첫 장면을 써본다. 그러면 거기서 스토리가 펼쳐져나간다 - 이런 식이다. 모두 다 그런 것은 아니고, 그 방법이 제대로 기능하지 못해 중간에 포기해버린 적도 있지만 대체적으로 이 방식은 내 성격에 잘 맞는 것 같다. 이른바 제재니 주제니 하는 정적인 틀에 얽매이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머릿속에 떠오른 이미지를 문장으로 풀어나가는 사이에 차츰차츰 저절로 줄거리가 펼쳐진다. 글로 써내려가는 사이에 나 스스로도 깨닫지 못했던 뭔가가 모습을 드러낸다. 그런 자연스러운 작업 자체가 내게는 매우 스릴 넘치고 흥미 깊게 다가온다. - 25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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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7-20 13: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기억에 남는 단편 위주로 소개합니다. 모든 단편 다 요약해서 정리하는 것이 힘들었어요. ^^;;

붉은눈 2016-07-20 14:40   좋아요 0 | URL
사실은 저도 그렇습니다. 괜히 모든 단편을 기록해보려고 욕심내다가 한 편에 대한 느낌마저도 제대로 남겨두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것이 또 다른 고민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루키 단편은 단편치고도 서사의 전개가 그리 많지 않아 하나도 제대로 정리하기가 쉽지 않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