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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광금지, 에바로드 - 2014 제2회 수림문학상 수상작
장강명 지음 / 연합뉴스 / 2014년 10월
평점 :
우리는 무엇에 미치는가? 그리고 그것에 왜 미치게 되었는가? 하나의 대상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이 여러 가지 이유들은 각자의 의미에 맞추어 더 깊거나 혹은 넓어진다. 그래서 누구도 따를 수 없는 '깊이'에 다다르게 되었을 때, 그는 비로서 '오덕/덕후'(이)가 된다. 그러나 돌아보면 결국 그 의미란 없는 것이다.
이 책은 신세기 에반게리온이라는 만화에 빠져들어 그 내용을 분석하고 캐릭터들을 사랑하며 세계관을 이해한 한 오덕이 해당 만화의 제작사에서 제시한 스탬프 랠리에 도전하면서 겪게 되는 이야기를 풀어 놓고 있다. 실제 다큐를 모델로 하였기 때문에 단순히 보면 사건에 대한 재편집으로 접근할 수도 있지만, 어떻게 보면 자신의 마음을 둘 곳 없는 이 시대를 사는 젊은이들의 흔들림을 그려낸 20대의 성장소설과도 같은 느낌이다. 기존 세대가 갖고 있는 성공이라는 이상과 그것을 위한 갖은 의미들에서 벗어나, 딱히 별다른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냥 좋아서, 재미 있어서, 즐거워서 그것에 흠뻑 빠져들어버린 에반게리온 오덕의 실화를 소설적인 요소와 적절히 가미하여 탁월하게 그려냈다. 인생을 바꾸어 놓은 것이 말 한 마디, 책 한권, 영화 한 편 일 수 있듯이, 도대체가 설명도 안 되고 이유도 잘 모르겠는 만화 한 편이 어떤 이에게는 삶의 요소로 다가올 수도 있다는 점이 새로웠다.
심사위원들의 평대로 "실존인물이 가진 이야기성에 의존한다는 약점에도 불구하고 에반게리온 열광 세대의 감성과 체험을 깊이 이해하고, 인물에 시대상과 인생을 입히는 시선이며 이야기를 리듬감 있게 끌고 가는 작가적 역량이 탁월했다."
군대가 고등학교보다는 더 나았던 것 같다. 고등학교에서는 시스템이 온몸으로 "너희들은 뻔한 놈들이야"라고 주장했지만, 군대에서는 "다들 사정이 있는 건 알지만 여기 있는 동안에는 뻔하게 있다 가라"라고 말하는 차이가 있었다고나 할까. 고등학교 선생들은 정말로 자기들이 스승이고 인격자이고 마음의 어버이이고 학생들로부터 존경을 받아야 한다고 믿었다. 최소한 선임병들은 더 거칠긴 했어도 그런 위선은 부리지 않았다. 아무리 멍청하고 고약한 인간이라 하더라도 내무실 안에서의 위계가 제대한 뒤에도 이어질 거라고 믿지는 않았다. - 110쪽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에서 신지는 결국 모든 인류의 A.T.필드를 무너뜨리고 아스카의 마음속을 들여다보잖아요. 그리고 그건 인간이 할 짓이 아니었죠. 우리 모두에겐 A.T.필드가 있다, 그 장벽 때문에 외롭고 슬프지만 그 벽이 사라지면 우리는 인간이 아니게 된다. 에반게리온 전체의 메시지는 이것이 아닐까요? 타브리스가 왜 다른 자살 방법을 놔두고 손목을 그었는지 저는 몰라요. 자살할 정도로 절망한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제가 어떻게 알겠어요. 저는 영원히 알 수 없습니다. - 137, 138쪽
`손목을 긋는 건 죽을 마음이 없었다는 뜻`이라는 해석은 굉장히 무례한 거라고 저는 생각해요. 남의 자살 방법에 대해서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남의 이유에 대해서도 금방 쉽게 말할 수 있게 됩니다. `짝사랑을 거절당하고 게이라는 사실이 들통 난다고 그게 뭐 죽을 이유까지 된다는 말인가. 세상에는 살아야 할 이유가 더 많다` 하고 말이죠. 거기에서 더 나아가면 남의 삶과 죽음의 가치까지 제멋대로 정해버리게 됩니다. `죽을 용기가 있으면 그 힘으로 살아라` 하는 식으로요. 저는 그렇게 말하는 사람에게 `그런 참견을 할 시간이 있으면 네 일에나 신경 써라`거나 `그렇게 오지랖을 부리는 걸 보면 관계의존증이 틀림없어`라고 되받아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피차 근거 없는 추측이긴 마찬가지 아닌가요? - 138쪽
세계는 멸망해가고 있었다. 다만 그 멸망의 방식이 결정되지 않았을 따름이었다. - 151쪽
"에반게리온 월드 스탬프 랠리와 그런 여행은 어떤 점이 다른가요?" 내가 물었다. "글쎄요, 큰 틀에서는 같습니다. 무의미하고, 시간 낭비라는 점에서요. 그래도 차이점이 있다면 일단 순례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은 그게 자아 찾기라고 포장한다는 점이겠죠. 저는 그러지 않았어요. 두번째 차이점은 결과물이죠. 저는 처음부터 다큐멘터리를 찍겠다는 마음을 먹고 가서 다큐멘터리를 찍고 왔어요. 워낙 손에 잡히는 일을 좋아하는 성격이라서요. 글쎄, 순례 여행을 떠난 사람들 중에서도 처음부터 여행서 출간이 목적이었던 분도 계시겠지만 그러면 자아를 찾기 위해 떠났다고 말씀하시면 안 되죠." - 192쪽
"내 생각에 스탬프 랠리라는 행사는 오덕들에게 딱 어울리는 프로그램인 것 같아. 우리가 한정판에 미치는 이유가 뭐겠어. 한정판 상품이라고 더 퀄리티가 높은 건 아니잖아. 한정판이 일반 상품과 다른 점은, 돈을 아무리 더 줘도 살 기회를 놓치면 살 수 없다는 데 있는 거야. 오덕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작품의 캐릭터를 감정적으로 받아들여. 진짜로 사랑하고 결혼하고 싶어해. 그런 우리들에게 캐릭터 상품은 어딘지 불쾌한 데가 있어. 일단은 그 상품들이 우리 호주머니만 노리고 있는 것 같아서 기분이 안 좋고, 두번째로는 돈만 있으면 누구가 그 캐릭터 상품을 소유할 수 있다는 점도 마음에 안 들어. 그런데 한정판은 적어도 돈만으로 구입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 평소에 관심을 기울이며 정보를 수집하고 있어야 하고, 판매할 때 가서 줄을 서야 하고, 시사하긴 해도 어쨌든 노력을 들여야 손에 넣을 수 있어. 그런 한정판을 갖고 있으면 캐릭터와 어느 정도 감정적으로 연결된 듯한 착각이 들지. 내가 쏟는 시간과 노력이 있으니까. (...)" - 211, 2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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