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학의 발달은 인간의 수명을 연장시켰지만 우리는 여전히 수세기 전부터 가져왔던 노년에 대한 고루한 시각을 버리지 않고 있다. 노년에 대한 완전히 다른 시선이 필요하다. 노년은 매우 감미롭고 아름다운 시기다. 비로소 타인에 대한 의무에서 벗어나 호젓하게 자신만의 시간을 누릴 수 있게 되는 때다. 그러나 사회는 노년의 삶을 위한 그 어떤 준비도 하지 않고 있다. 테레즈는 말한다. 늙는다는 것은 사는 것의 연장일 뿐이라고. 여기저기 아픈 곳을 얘기하며 자신들에게 투정이나 부리다가 죽음이 찾아오는 날을 기다리는 대신 "삶을 의미 있게 해주는 프로젝트를 끊임없이 갖는 것,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 온몸을 다해 투쟁하는 것, 마지막 순간까지 활기찬 시민으로 살다 가는 것"이 테레즈의 꿈이자 그녀가 바바야가의 집을 통해 실현하려고 하는 목표다. - 19쪽
하기 싫은 일이 뭔지 아는 것, 그래서 그 일을 하지 않는 건 쉽다. 일단 흥이 안 날 테고, 몸도 안 따라줄 테니. 그러나 무한히 열려 있는 선택지 앞에서 원하는 것을 고르는 일은 생각처럼 쉽지 않다. 도대체 내가 원하는 게 뭔지 알지 못하는 병은 네 개 중 하나의 정답, 그것도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하나가 아니라 세상이 옳다고 생각하는 하나를 추정하는 훈련만 무수히 해온 사람들에게는 어쩌면 피할 수 없는 병이다. 많은 이가 죽을 때까지 결국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고 무수한 세상의 시선과 관심, 대세에 떠밀려 다닌다. 그러다가 결국 원하는 것이 뭐였는지도 모른 채 생은 끝나버리기 십상이다. 죽는 날에도 유행하는 방식에 따라 자손들의 체면을 구기지 않으면서 유행하는 수의를 입고 유행하는 관 속에 얌전히 들어가 주어야 하는 것이 수많은 평범한 사람의 운명이다. - 38, 39쪽
사람들은 자유의 번잡함이 괴로운 나머지 자발적으로 선택지를 좁힌다. 자율화된 학생들의 복장은 교장들의 용단과 학부모들의 열렬한 지지 속에 다시 교복 시대로 복귀하고, 세상의 미혼 남녀들은 자신의 직관과 느낌으로 짝짓기를 포기하고 결혼중계업체의 배를 불리는 선택을 한다. "자유는 싫어. 선택은 귀찮아. 그냥 정해줘. 그럼 시키는 대로 할게." 이런 아우성이 곳곳에서 들린다. 최근 청소년들에게서 나타나는 가장 심각한 증상은 불같은 반항이 아니라 `무기력`이라는 진단이 나오고 있다. 10년간의 짧은 민주화 경험 이후 이토록 왕성하게 자라난 독재 시절에 대한 노스탤지어를 생각해보면 지금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세력은 단지 부정선거의 결과만은 아닌 듯 싶다. 절반 정도는 독재와 권위가 익숙하고 편한 사람들이 불러들인 재앙이기도 하다. - 39쪽
살면서 그리고 일하면서 돈을 먼저 생각한 적이 없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좌파와 우파는 돈에 부여하는 가치의 우선순위에 따라 구분되는 것 같다. 나는 사람들과 함께 기쁨을 나누는 것에 우선순위를 둔다. 우선 내가 행복할 수 있는 일을 선택하고, 그 일을 통해 사람들과 더불어 행복할 수 있기를 바란다. 작업할 때도 사람들의 얼굴에 웃음이 번지게 하는 것과, 일상에서 전혀 누릴 수 없는 색다른 경험을 사람들에게 선사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각별히 아름다운 것을 보여주려 하기보다 도시에 살며 잊고 지낸 것들을 일깨워주려고 한다. 물질적 보상은 내가 이 일을 계속하며 생활할 수 있을 만큼만 주어지면 충분하다. 또 하나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자유다. 자유롭게 시간을 운용하고 작업을 선택하는데, 돈에 초점을 맞추기 시작하면 이 모든 것을 잃고 만다. 그런 점에서 나는 충분히 풍요로운 좌파다. - 44, 45쪽
홀로 자식을 키우는 어머니의 아들로 산다는 건 끊임없이 뻗어오는 어머니의 영향력으로부터 탈출을 시도하는 일이었다. - 69쪽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교훈을 강요하는 것을 싫어한다. 그것은 아들을 교육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새로운 방식의 사고가 존재한다는 사실만큼은 전하려 했다. 아들에게 "부모의 뜻을 거스를 때 너만의 세계를 만들어 갈 수 있다. 매일매일 너는 부모의 마음에 안 들게 행동해야 한다. 그렇게 구축한 네 모습을 나는 사랑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아들은 내 말을 아주 유용하게 활용했다. 당연한 일이지만, 아들은 사춘기 때 `이상한` 옷차림이나 눈에 거슬리는 행동을 종종 했고, 내가 그런 모습을 나무라면 "아빠가 부모의 맘에 안 들게 행동하라고 말했잖아요"라며 항변했다. 그때는 나도 고통을 받았다. 그러나 그렇게 자신의 독립적인 세계를 구축한 아들을 사랑한다. - 74쪽
좌파란 시간을 더디게 흘러가게 하는 사람들이다. 이것은 움직임을 거부하는 것과는 다르다. 우파는 모든 삶을 속도에 대한 강박 속에 날려버린다. 좌파는 시간을 갖고 삶을 음미하며, 이른바 개발과 발전이라는 강박으로부터 삶을 되찾아오는 싸움을 한다. 또한 좌파는 끊임없이 세상의 구조, 세상이 굴러가는 방식에 의문을 제기하고, 다수에 맞소 소수를 대변하며, 지속적으로 우리를 둘러싼 삶의 조건에 문제를 제기하고, 이에 대한 해답을 얻기 위해 자신을 일깨우고 탐구하는 사람들이다. 예술은 삶의 잉여물이거나 사치품이 아니라 충만한 삶을 살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요소다. 그리고 예술가는 예술적 실험을 통해 다른 세상, 다른 관점이 가능하다는 것을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사람들이다. 예술과 문화로 자신을 계속 일깨우고 자극하는 사람들도 좌파에 해당한다. - 78, 79쪽
그러나 현재 연구소에서 하는 일은 자본가의 이익을 더 많이 창줄해내는 데 과학을 이용하는 것이다. 내가 하는 연구뿐 아니라 다른 많은 연구가 그러하다. 더구나 연구소의 운영 방식 자체도 자본주의적 관점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런 곳에서 과학자들은 기업가나 정부를 위한 소모품으로 전락한다. 정치가로 변신하지 않는 과학자는 도태되는 반면 과학을 뒤로하고 출세의 길을 나선 자들에게만 힘이 주어진다. 환멸이 크다. - 94쪽
나는 사고를 통해서 급격히 깨달았지만 서서히 많은 사람들이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소비사회의 허무를 깨달을 거라고 믿는다. 더 이상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아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을 만큼 이미 지구상에는 너무나 많은 것들이 생산돼 있다. 5년 안에 고장나도록 설계되는 가전제품, 6개월 안에 다른 옷을 사도록 만들어지는 허름한 천들. 이제 자본주의사회는 엔지니어들에게 이런 기술을 요구한다. 사람들이 더 많이 소비하고 더 많이 낭비하게 하는 그런 기술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렇게 생산된 물건을 자신의 특정한 직업을 통해 벌어들인 돈으로 산다. 집 안을 채우는 모든 물건을 돈으로 사고 모든 문제를 돈으로 해결하는 인간은 실제로 얼마나 무능하고 무력한 존재들인가. - 98쪽
첫째, 좌파는 익숙해지는 걸 거부하는 사람이다. 나는 무언가에 익숙해지는 것을 싫어한다. 사회의 시스템에 완전히 흡수되어서 저항하지 않고 살아가는 건 아주 편하고 안락한 삶을 우리에게 약속한다. 우리는 더 이상 화내거나 인상 쓰지 않아도 된다. 누구와도 부딪치지 않고 매끄럽게 지낼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익숙함을 계속 밀어내는 것을 좋아한다. 나도 모르게 무언가에 익숙해져버렸다고 스스로 깨닫는 순간 그것을 밀어내야 계속해서 새로워질 수 있다. 바로 그렇게 해야 만 우린 계속해서 새롭게 태어나고 세상을 새로운 눈으로 볼 수 있다. 그건 계속해서 젊게 존재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 112, 113쪽
둘째, 좌파는 우리를 둘러싼 모든 현상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이다. 단순히 현상에 대하여 반대하는 것 외에 또 다른 방향으로의 가능성을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다. 반대만 하다 보면 결과적으로 그 반대하는 대상의 힘을 키워주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완전히 다른 지편으로의 가능성을 찾다 보면 우리는 또 다른 새로운 가능성을 지속적으로 발견할 수 있다. 노동 문제만이 진정으로 다룰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거나, 오로지 경제 문제에 대한 접근만이 우리가 찾는 해법에 다가갈 수 있는 길이라는 식의 사고보다 페미니즘이나 성소수자 문제, 생태 문제를 통한 접근으로 단단한 의지를 가진 좌파들을 길에서 더 많이 만날 수 있는 것과도 같다. - 113쪽
좌파는 소수자를 비롯하여 우리 모두가 함께 가지고 누려야 하는 권리에 대해 결코 타협하지 않는 사람이다. 또한 정의롭게 작동하는 시스템과 시장에 복종하지 않는 하나의 평화로운 유럽을 열망하는 사람이다. 우리는 지금 쉽게 반동주의자가 될 수 있는 시절을 살고 있다. 이런 시절에 좌파란 지금까지 싸워 획득한 근본적인 권리를 양보하지 않는 사람들일 것이다. 우리가 지금 누리는 사회적 권리와 보다 정의로운 사회는 그동안의 투쟁이 우리에게 가져다준 열매였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 역시 좌파의 몫이다. 전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저항과 희망을 위한 분투에 세심하게 반응하며, 우리의 민주주의가 세계 각지의 저항에 의해 영감을 받으며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게 하는 것, 이 또한 좌파에게 부여된 사명이다. - 150, 151쪽
생존자들에게는 죽어간 나머지 사람들의 몫까지 살아야 할 운명이 주어진다. 삶과 사람의 중심에 정치가 굳건히 자리 잡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거기서 비롯된다. - 161, 162쪽
좌파란 보다 평등하고 보다 차이를 존중하는 사회로 세상을 변혁하려는 의지를 가진 사람이다. - 190쪽
다른 먼지들이 진정한 자류를 갖지 못하고 있을 때 `나`라는 먼지만 홀로 자유로울 수는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다. - 204
좌파란 또한 "세상 모든 일에 즉각적, 감정적으로 반응하지 않는 사람, 무엇에 감정적으로 반응하기 전에 다른 사람의 생각을 받아들이기 위한 간격을 스스로에게 부여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도 말한다. 루이즈에게 좌파는 철학적 성찰과 휴머니스트의 인격을 갖는 사람이다. 우리 사회에서도 흔히 좌파에게 더 엄격한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고 좌파들은 그것을 억울해하기도 한다. 그러나 루이즈의 말을 따르자면 그것은 좌파의 "즐겁고도 괴로운" 숙명이다. 눈치 보면서 대세만 쫓는 이들, 성급한 단견으로 세상을 재단하는 이들에게 우린 좌파라는 영광(?)스러운 라벨을 붙여주지 않으니, 적어도 좌파로 자임하려면 기꺼이 깊이를 수용해야 한다는 그말, 어딘지 낯설지만 충분히 와 닿는다. - 206쪽
나는 은퇴 후의 삶을 기다렸다. 충만한 시간이 주어지면 마음껏 책을 읽을 수 있으니까. 나도 누구보다 세속의 욕망이 크지만, 동시에 그 욕망의 허망함도 잘 안다. 독서를 통해 욕망을 통제하는 법을 배웠다. - 269쪽
박정희 집권 중 우리는 한 번도 정상적인 대통령선거를 치르지 못했다. 박정희는 한국의 과속 성장이 자신의 업적이라고 선전했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한국 사람들의 저력이다. 때가 되면 역사의 페이지를 넘길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만 새로운 장에서 또 다른 가능성이 펼쳐질 수도, 좀 아쉬운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박정희는 역사의 페이지가 넘어가는 것을 거부했고 새로운 장이 펼쳐질 가능성을 혼자 차단하려고 했다. 그것은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었다. - 27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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