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 괴물이 된 이십대의 자화상 지금+여기 3
오찬호 지음 / 개마고원 / 2013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람이 실패하는 데 있어서 `노력 부족`이란 개인적 변수가 결정적이라면, 왜 그런 부족 현상이 경제력 층위별로 정확하게 구별되어 나타나느냔 말이다. 왜 집안의 `소득`과 개인의 `성공`이 탄탄하게 비례하는 지표들이 수두룩하냔 말이다. 취업 실패 이유에 개인이 감당해야 할 몫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게 아니다. 다만, 성공의 요인이 100% 개인적 역량 때문은 아닌 것처럼, 실패 역시 마찬가지란 얘기다. - 34쪽

바로 여기에 이십대 자기계발하기의 세번째 특징이 있다. `자기 계발에 열심이지 않은 게으른 자`와의 비교에서 자신의 현재에 대한 위안과 만족을 구한다는 점. 진솔이는 "솔직히 게으른 사람보다는 그래도 이것이 괜찮은 거잖아요"라며 스스로를 위로한다. 자기계발로 둔갑한 취업준비 과정이 아무리 희생과 상처를 요구하더라도, 이것이 다른 누군가에 비해 시간을 체계적으로 사용하는 것이라면 그 자체를 기꺼이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힘들다! 그렇지만 그건 내가 이렇게 체계적으로 살고 있기 때문이잖아."라는 식으로 말이다. - 60쪽

`내가 투자한 시간`에 대한 이런 집착은 일부러 비교대상을 설정하여 `시간을 써서 무엇을 했는지`가 아니라 `무엇에다 얼만큼의 시간을 썼는지`를 따지게 한다. 그래서 그 무엇, 즉 본인에게 어떤 자기계발 결과물이 없어도 거기에 투자한 `과정`만으로도 "너는 나처럼 노력하지 않았잖아!"하는 기준을 만들어내어 자신을 방어하는 것이다. 이는 이런 자기만족 외에는 만족을 구할 만한 그 무엇도 없다는 절박함 때문일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라도 위안을 얻지 않는다면 그 지루한 고통의 과정을 어떻게 견디겠는가. - 60쪽

그래서 이들의 자기계발은 매우 역설적이다. 취업되기 위해 그 힘든 자기계발을 하는 건데, 결과적으로는 취업과 상관도 없는 단순한 `상대적 비교에서 오는 자기만족`을 위해 자기계발을 하고 있는 셈이니 말이다. 앞서 그 자체로 만족할 수 있는 진정한 의미의 자기계발에 대해 말한 바 있지만, 이 경우는 결코 그것도 아니다. 남보다 위에 올라서려는 노력이 자기계발일진대, 그로 인한 성과가 없다보니 일부러 자신보다 비교우위가 `낮은` 집단을 곁에 세워둔 채 위로를 구하는 셈이다. 그러니 여기서도 결국 `자기`계발은 없다. - 60, 61쪽

중요한 것은 이러한 이십대들의 취업준비란 게 이런 경우든 저런 경우든 다 `긍정`됨으로써 자기계발이 스스로 동력을 얻게 된다는 사실이다. 취업과 직결되든, 이와 별개의 만족감을 주든 다 긍정되니 말이다. 그래서 시간을 `어떻게` 활용하는지가 중요하다는 말은, 바로 `누군가와는` 다르게 시간을 사용한다는 데서 만족감을 얻는다는 소리에 다름 아니다. 자기계발하는 이십대의 이 세번째 특징은, 취업이라는 목표로서만 의미 있는(첫번째 특징) 자기계발을 실제로는 별 성과가 없음에도 계속 해야 하는(두번째 특징) 모순의 과정으로 매우 자연스럽게 순환되도록 돕는다. - 61쪽

개인이 사회적 원인으로 고통 받는 상황이 늘고 있다는 게 현재 이십대가 처한 상황의 한 특징이라면, 이를 사회적 원인에서 비롯된 문제로 이해하지 않는 것 역시 지금 이십대가 지닌 특징의 하나로 보인다. - 90쪽

타인의 고통에 대해서 공감할 이유를 찾지 못하는 것은, 어쨌든 모든 건 자기 할 탓이라는 자기계발 논리에 길들여진 결과이다. 자기계발서는 측정할 수 없는 것을 측정하고자 했다. 고통이란, 한 개인이 특정한 현상에 반응하는 지극히 주관적인 감정 상태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자기계발서는 고통을 객관적으로 비교 가능한 것으로 해석한다. 즉, A가 아파할 때 그보다 더 심한 고통을 이겨낸 B가 있다면 A의 고통은 참아야 되고, 이겨내야 하고, 사회적 요인과 무관한 것이 되어버린다. 이를테면, 심성 여린 A가 아르바이트 현장에서 경험한 점장의 횡포에 대한 서러움은, 늘 강한 심성을 가진 덕분에 그보다 더한 것도 참아내는 B가 있기에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주먹 한 대 맞은 고통은 두 대 맞은 고통보다 그저 `낮은` 순위로 이해될 뿐이다. - 91쪽

지금의 이십대들이 수행하는 `학력의 위계화된 질서`에 관한 집착은 과거의 학력주의보다 훨씬 정교해졌고 자기내면화의 강도도 훨씬 높다. 이들에게 학력에 근거한 비교와 차별은 당연한 것이 되었고, 이를 의문시 할 이유를 굳이 찾지 않는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타인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한다. 그 결과, 티끌만틈의 의문도 없는 `학력위계주의`가 이십대들에게 내면화되고 있었다. "결과를 책임져라!"는 자기계발을 권하는 사회의 시대정신을 발판삼아서 말이다. - 108쪽

사실 이 지점에서 지금의 이십대가 어떤 모습으로서 이 사회에 존재하고 있는지가 가장 잘 나타난다. 멸시의 피해자들은 또 어떤 지점에선 멸시의 가해자로 존재한다. 서울대생은 연고대생을, 연고대생은 서강대생을, 서강대생은 또... 그렇게 밑바닥까지 멸시의 고리는 이어진다. 그래서 멸시를 받는 쪽이라고 과연 누군가를 멸시하지 않는다는 말이냐는 질문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대학생 집단은 없다. - 167, 168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