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격의 대학교 - 기업의 노예가 된 한국 대학의 자화상
오찬호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4월
평점 :
절판


경영 마인드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과잉`이다. 대학생들이 경영적 사고로만 무장하게 되면 그것은 개인에게도, 사회 전체에도 엄청난 재앙을 초래한다. 무언가에 대한 과잉은 필연적으로 그 대척점의 가치를 외면한다. 명백한 사회구조의 문제 때문에 비판적으로 세상을 의심해야 하는 순간마다, 그리고 정치라는 제도를 발판 삼아 더 나은 미래를 추구해야 하는 결정적인 상황마다, 자동적으로 "그러다 기업 다 죽어!" "기업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이라는 말부터 튀어나오는 끔찍한 모습을 생각해보라. 기업이 원하는 `별도 교육이 필요 없는` 인재를 대학이 만들어가면서, 이 사회는 도대체 무엇을 잃어버렸을까? - 18쪽

한쪽이 일방적으로 고개를 숙이자 자본의 폭력성은 `변화`라는 단어 속에, `창의성`이라는 애매모호한 분위기에 은폐된다. 자본의 편리함은 순간적으로는 달콤하지만 궁극적으로 그 이면의 불편함을 인지하지 못하게 착시를 일으킨다. 그로 인해 비판은 약해지고 이견에 대한 관용의 촉수는 제거된다. 비판의 파이 자체가 엄청나게 줄어드니 개인의 문제 이외의 변수를 따지는 구조가 존재할 리 없다. 그러니 `인명은 제천`이라는 공자 시대의 교훈만 맴돌 뿐이다. - 19쪽

나는 "대안이 뭔데? 없어? 그 말은 나도 한다"는 식으로 `비판적 사고` 자체의 가치를 조롱하는 프레임을 극도로 혐오한다. 지금 하는 것이 `틀렸다`는 것을 알고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대안일 뿐, 무슨 이야기를 더 해달라는 말인가? 달달한 케이크를 너무 많이 먹어 건강을 해칠까봐 걱정되면, 안 먹으면 된다. 나는 사람들이 케이크의 단맛을 지나치게 신뢰하고, 그 단맛이 야기하는 부작용을 인지하지 못하는 데 대해 경고할 뿐이다. 이 책의 목적은 대안이랍시고 `경쟁보다 협력`이라는 고도로 낭만적인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라, `협력이 배제된 경쟁`이 얼마나 끔찍한 모습인지를 공유하는 것이다. - 22, 23쪽

나는 토익 점수가 10점 오를 때마다 대기업 취업 확률이 3퍼센트 더 높아지고, 토익 점수 100점당 연봉이 170만원 더 오르는 현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토익 점수가 높은 학생을 학교에서 우대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모두가 의무적으로 이 시험을 치러야 한다는 것은 문제라고 생각한다. 효율성을 위해 모두를 하나의 목적으로 내몰아버리면 그 목적 이외의 것이 존재할 기회 자체가 차단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다양한 분야의 전문성이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사회를 기대할 수 없다. - 115쪽

대학이 외부에 손을 벌리면 필연적으로 `무감`의 구조가 만들어진다. `무감`은 공감의 부재다. 공감은 무엇을 `알아야`만 할 수 있는 것이다. 기업에 대한 비판 자체가 봉쇄되면, 기업을 비판하는 말이 나와도 그게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다. 공감이 없으니 비판은 파편으로만 존재할 뿐이다. 문제를 알고 있으면서도 애써 외면하는 것과는 수준이 다르다. `지배당한다고 생각하지 않는 피지배자`들은 그렇게 탄생한다. - 162, 163쪽

대학교육의 상업화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MIT의 종신교수직을 받지 못한 기술사학자 데이비드 노블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산업체의 지원을 받으면 연구자가 누릴 수 이는 자유는 상대적으로 적어진다. 이제 따라야 할 방침은 하나, 즉 돈을 아까지 않는 후원자의 방침만이 존재할 뿐이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에게 가장 큰 걱정거리를 안겨준다. 학문 자유의 미래, 토론의 탈정치화(실제로는 의사결정의 비민주화), 논쟁의 질식이 그것이다. (...) 쟁점들을 세세히 따져보는 일이 거의 없다보니 논쟁도 거의 없다. 단지 암묵적인 `줄서기`만 있을 뿐이다. (...) 그러는 동안 수지맞는 산업체와의 연계를 유지하고자 하는 대학 당국자들은 따르기를 거부하는 소수의 사람들을 규율하고 고립시키고 제거한다. 기업이 굳이 나서서 이래라저래라 할 필요도 없다. - 163쪽

대학평가는 이미 `정치적`이다. 평가 자체가 대학을 `솎아내기 위한` 차원에서 그 틀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대학의 생사가 달린 문제이니 대학은 `찍히지 않을까` 노심초사하고 평가 결과를 두려워한다. 오늘날과 같은 형태의 대학평가는 미국의 시사주간지 `U.S. News and World Report`가 1984년부터 실시했다. 이는 2980년대의 레이거노믹스와 대처리즘의 한 과정이었다. 미국의 대학은 68운동 이후 과거에 비해 굉장히 좌파적으로 변했는데 정부로서는 이 눈엣가시를 정리할 수단이 바로 대학평가였다. 쉽게 말해, 대학평가는 반(反)자본주의 운동의 온상이었던 대학을 온순한 양들로 길들이기 위해 만들어졌다. 한국에서 신자유주의의 빗장이 열리기 시작하던 1994년에 중앙일보 대학평가가 시작된 것도 이런 궤적과 무관하지 않다. - 180쪽

상대평가는 이처럼 `논리`를 구조적으로 거세할 `확률`이 높다. `답을 찾아가는 서사과정`을 어떻게 `평가`한다는 말인가? - 20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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