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줄리언 반스 지음, 최세희 옮김 / 다산책방 / 2012년 3월
평점 :
판매중지


"언뜻 생각하기엔 단순한 질문으로 시작해볼 수 있지 않을까. 역사란 무엇인가, 라고 말이지. 뭐 생각나는 것 있나, 웹스터?"
"역사는 승자들의 거짓말 입니다." 내 대답은 좀 빠르다 싶게 튀어 나왔다.
"그래, 안 그래도 자네가 그렇게 말할까봐 걱정을 좀 했는데, 그게 또한 패배자들의 자기기만이기도 하다는 것 기억하고 있나, 심슨?"
콜린은 나보다 더 잘 준비된 답변을 했다. "역사는 생 양파 샌드위치입니다. 선생님."
"어떤 이유로?"
"죽자고 반복하니까요, 선생님. 우리는 이제껏 역사가 트림하는 것을 보고 또 보았고, 올해에도 또 보고 있습니다. 폭정과 폭동, 전쟁과 평화, 번영과 빈곤 사이를 오가는 천편일률적인 이야기와 천편일률적인 동요뿐이죠."
"그걸 샌드위치 속에 다 넣기엔 좀 많지 않은가 싶은데?"
우리는 학년 말 특유의 신경증에 의존해서 과하게 웃어댔다.
"핀?"
"`역사는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입니다." - 25쪽

출처는 기억나지 않지만, 사람들이 자신의 말을 경청하게 하려면 언성을 높이는 게 아니라 낮추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었다. 그래야 진짜로 이목을 끌 수 있게 된다. - 46쪽

나는 살아남았다. `그는 살아남아 이야기를 전했다.` 후세 사람들은 그렇게 말하지 않을까? 과거, 조 헌트 영감에게 내가 넉살좋게 단언한 것과 달리, 역사는 승자들의 거짓말이 아니다. 이제 나는 알고 있다. 역사는 살아남은 자, 대부분 승자도 패자도 아닌 이들의 회고에 더 가깝다는 것을. - 78쪽

청년을 매료시키는 천재에 무슨 잘못이 있을까. 그보다는, 천재에 매료되지 않는 청년쪽이 문제다. - 82쪽

누구나 그렇게 간단히 짐작하면서 살아가지 않는가. 예를 들면, 기억이란 사건과 시간을 합친 것과 동등하다고. 그러나 그것은 그와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기이하다. 기억은 우리가 잊어버렸다고생각한 것이라고 말한 사람이 누구였더라. 또한 시간이 정착제 역할을 하는 게 아니라, 용해제에 가깝다는 사실을 우리는 명백히 알아야만 한다. - 85쪽

그런데, 왜 우리는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 유순해진다고 생각하는 걸까. 잘 살았다고 상을 주는 게 인생이란 것의 소관이 아니라고 한다면, 생이 저물어갈 때 우리에게 따뜻하고 기분 좋은 감정을 느끼게 할 의무도 없는 것 아닌가. 생의 진화론적 목적 중에 향수라는 감정이 종사할 만한 부분이 과연 있기나 한걸까. - 111쪽

한 구절로 표현하자면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러나 에이드리언은 자신의 삶을 책임졌고, 그것을 지휘했으면, 온전히 포착했다. 그리고 놓아주었다. 우리 - 살아남은 우리 - 중에 그와 같은 경지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는 자가 과연 몇이나 될까. 우리는 살면서 좌충우돌하고, 대책없이 삶과 맞닥뜨리면서 서시히 기억의 창고를 지어간다. 축적의 문제가 있짐나, 에이드리언이 의미한 것과는 무관하게 다만 인생의 토대에 더하고 또 더할 뿐이다. 그리고 한 시인이 지적했듯, 더하는 것과 늘어나는 것은 다른 것이다. - 118쪽

그리고 내가 지금 느끼는 건 수치심이나 죄책감이 아니었다. 천만에, 내 인생에선 상대적으로 드문데다 더욱 강렬한 종류였다. 회한의 감정. 더 복잡하고, 온통 엉겨붙어버린 원싲거인 감정이다. 그런 감정의 특징은 속수무책으로 견디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세월이 흘렀고, 그만큼 상처도 깊어 개선의 여지조차 없는 감정이었다. - 133쪽

그에 비하면 나는 언제나 흐리멍덩했고, 인생이 내게 던져주는 얼마 되지도 않는 교훈에 대해 크게 깨달을 깜냥도 못 되었다. 내 식으로 말하면, 나는 삶의 현실에 안주했고, 삶의 불가항력에 복속했다. 만약 이렇다면 이렇게, 그렇다면 저렇게 하는 식으로 세월을 보냈다. 에이드리언 식으로 말하면 나는 삶을 포기했고, 삶을 시험해보는 것도 포기했고, 삶이 닥쳐오는 대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난생처음, 나는 내 온 인생에 대해 한결 총체적인 - 자기연민과 자기혐오 사이의 어딘가에 위치한 - 후회의 감정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살아온 어느 하루도 후회되지 않는 날이 없었다. - 133쪽

젊을 때는 산 날이 많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삶을 온전한 형태로 기억하는 게 가능하다. 노년에 이르면, 기억은 이리저리 찢기고 누덕누덕 기운 것처럼 돼버린다. 충돌사고 현황을 기록하기 위해 비행기에 탑재하는 블랙박스와 비슷한 데가 있다. 사고가 일어나지 않으면 테이프는 자체적으로 기록을 지운다. 사고가 생기면 사고가 일어난 원인은 명확히 알 수 있다. 사고가 없으면 인생의 운행일지는 더욱더 불투명해진다. - 140쪽

베로니카와의 관계, 몇 년을 함께 보낸 그 관계는 당시의 내겐 꼭 필요했었다. 배반당한 청춘의 심장, 농락당한 청춘의 육체, 전락한 청춘의 사회적 자아. - 16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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