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는 자기 철학을 갖고 있느냐 없느냐다. 내공의 문제는 결국 철학의 문제인 것이다. 철학이란 `일관성, 즉 일정한 기준과 지향을 갖춘 체계적인 생각`이다. - 24쪽
그렇다면 지성인이 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는 무엇인가? 혼자 탐구할 수 있느냐, 없느냐다. 그들은 그냥 많이 배워서 지성인이 된 것이 아니라, 그를 바탕으로 `독학 능력`을 갖게 되었기 때문에 지성인이 된 것이다. 지성인의 핵심적 능력은 독학 능력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61쪽
라인홀드 니버는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에서 "도덕적인 개인이 비도덕적인 집단의 사업에 동참"하는 일이 드물지 않음을 통찰한 바 있다. 칼 포퍼는 <열린사회와 그 적들>에서 "지적 탁월성의 본래적 의미는 비판 정신이며 지적 독립성이다"라고 말했다. 에드워드 사이드는 <권력과 지성인>에서 "권력에 흡수되거나 고용되지 않고 언제나 주변에 머물러야 독립적이고 비판적인 지성인이 될 수 있다"라고 주장했다. 모두 지성인의 독립성을 강조한 말들이다. 어느 집단의 논리에도 쉽게 포섬되지 않는 지적 독립성은 지성인이 되는 데 있어서 핵심 덕목이다. - 106쪽
자신의 문제에 대한 책을 찾아 읽는 것은 삶의 태도의 측면에서도 중요하다. 그런 책을 찾아 읽는 것 자체가 문제를 스스로 분석하고 해결하는 과정이 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주체적인 문제 해결 능력이 커지는 것을 의미한다. 세계는 넓다. 나는 작다. 그러나 세상이 아무리 넓어도 `나`를 통해서만 인식될 수 있다. 나는 세상이 들어오는 유일한 통로다. 내 안에는 나 자신에 대한 이미지와 세상에 대한 이미지가 함께 들어 있다. 그러므로 세상이 들어오는 유일한 통로인 나 자신에 대한 관심과 성찰은 매우 중요하다. 내가 무엇을 궁금해하는지, 나의 문제가 무엇인지에 관심을 갖고 그에 대한 책을 읽는 것은 가장 효과적으로 자신의 지력을 향상시켜 나가는 일이며, 나를 개선하고 세계를 개선해 나가는 것의 출발점이다. - 163쪽
좋아하는 작가의 전작을 읽는 것, 좋아하는 작가가 자주 참고하는 저자의 책을 읽는 것, 같은 주제의 책을 잇달아 읽는 것, 이 세 가지 방법이 `네트워크 독서법`이다. 한마디로 `네트워크 독서법`이란 서로 관련 있는 책을 잇달아 읽는 것을 말한다. - 185쪽
미국의 저널리스크 월터 리프먼은 이렇게 말했다. "모두가 비슷하게 생각할 때, 아무도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고등교육을 받은 만큼 습득한 지식의 양은 적지 않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 209쪽
`독창성`이란 `세상에 없는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다. 아래를 보자. 에드워드 사이드 - "작가들은 점점 독창적으로 글을 쓴다고 생각하는 대신, 남의 글을 다시 고쳐 쓴다고 생각한다." 움베르토 에코 - "책들은 항상 다른 책들에 대해 말하고 있으며, 모든 이야기는 이미 행해진 이야기를 다시 반복하고 있다." 자크 에르만 - "글을 쓴다는 것은 곧 남의 글을 인용하는 것이다." 이합 핫산 - "글쓰기는 표절이 되고, 말하기는 인용이 된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 "창작 행위는 표절 행위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 "모든 글쓰기는 고쳐 쓰기다." 강준만 - "창작자가 아닌 편집자가 되라." - 238, 239쪽
독일의 사상가 훔볼트는 대학을 `자유롭고 평등한 학문 공동체`로 규정했다. 대학은 흔히 `상아탑(ivory tower)`이라 불리는데, `현실과 거리를 둔 정신적 행동의 장소`라는 뜻이다. 그것은 현실적 이해관계와 거리를 둔다는 것, 현실에 대해 관조와 성찰의 거리를 유지하면서 탐구하는 공간이라는 말이다. 대학이라는 공간이 그 자체로 `인문적 성격`을 가짐을 의미한다. 그러나 오늘날의 대학은 `학문 공동체`도, 현실적 이해관계로부터 독립적인 `정신적 행동의 장소`도 아니다. 오히려 현실적 이해가 가장 유착된 기관이다. 대학은 교육과 학문의 공공성을 잃어가고 있다. - 309쪽
인간에게는 거대한 두 과제가 있다. 인생을 항해라고 하자. 나는 배를 타고 떠난다. 하늘의 별자리는 항해의 지도다. 그것을 보면 내가 나아가는 방향을 알 수 있고, 또 내가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지를 알 수 있다. 그러나 별만 쳐다보고 있어서는 안 된다. 인생에는 항상 갑작스럽게 닥쳐오는 파도가 있게 마련이다. 배가 파도에 전복되면 모든 것이 끝장이다. 배가 전복되지 않게 신경 써야 한다. 그렇다고 눈앞에 닥쳐오는 파도만 신경 써서도 안 된다. 그러면 배가 어디로 나아가고 있는지를 알 수 없고, 자칫 길을 잃게 된다. 인생에는 별자리를 보는 것과 눈앞의 파도를 보는 것 둘 다 필요하다. 배가 목적지에 잘 도착하려면 그 두 과제 사이에서 균형을 잘 잡아야 한다. 그러나 현대사회에서는 별자리만 신경 쓰다 배가 전복되는 경우보다 파도에만 신경 쓰다 길을 잃는 경우가 더 많다. 현대인들은 단기적인 생존과 전망을 추구하는 데 익숙하다. 그런 까닭에 배는 전복되지 않고 조금씩 앞으로 나가가지만, 그러는 동안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 이 길이 맞는지를 알 수 없게 된다. 이것이 현대인이 처한 실존적 상황이다. - 314, 315쪽
푸코는 이런 현상을 두고 "보편적 지성인이 자신의 전문성을 사용하는 `특수` 지식인으로 대체되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전문가가 지배하는 사회란 무능에 대한 자인(自認)이고, 필요성에 대한 복종이다. 그 결과 여러 관건을 통합하는 일이, 그 일을 성취시킬 능력이나 자질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의 손에 맡겨진다. 그 결과 사회가 전문적인 분야에 있어서는 훌륭하게 기능하고 더욱 진보해가지만, 전체가 나아가야 할 비전의 측면에서 보면 오히려 퇴보하게 된다. 현대사회는 문제는 많이 발생하는데 그것을 책임지는 사람이 없는 경우가 많다. - 322, 323쪽
마르크스는 "그들은 자신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하면서 그렇게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환경 문제에 관한 한, 독일의 이론가 페터 슬로터다이크의 말이 더 옳아 보인다. 그는 마르크스의 말을 이렇게 바꾸었다. "그들은 자신이 하고 있는 것을 잘 알지만, 여전히 그렇게 행동한다." 현대인들은 갈수록 환경이 심각해지고 있음을 모르지 않는다. 그리고 환경이 더 이상 오염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도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상적으로 환경을 오염시키는 데 동참한다. - 343쪽
화폐경제 속에 사는 우리는 화폐가 부(富)인 것으로 착각하기 쉽다. 그러나 진정한 부는 자연이다. 인간은 상품의 가치가 노동에서 창출된다고 생각하지만, 그 노동도 결국 자연을 다소 변형시키는 것에 불과하다. 인간은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멩이 하나도 만들어낼 재간이 없다. 인간은 경제적 이득을 얻지만, 궁극적으로 그보다 훨씬 많은 환경비용을 발생시키고 있다. 오늘날의 경제성장은 부를 생산하기보다 오히려 그것을 소멸시켜가는 반(反)경제로 나아가고 있다. - 346쪽
사람들은 부를 소유할 수 있지만, 위험은 피할 수 없다. 빈곤은 위계적이짐나, 스모그는 민주적이다. - 347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