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가지 없는 진보 - 진보의 최후 집권 전략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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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바로 한국 정치판, 특히 진보 정치판이 매우 심각한 ‘구성의 오류’에 빠져 있다는 것이다. 이 중요한 깨달음을 어찌 그냥 내버려둘 수 있겠는가.
익히 잘 아시겠지만, ‘구성의 오류(fallacy of composition)’란 부분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을 전체에 부당하게 적용하거나 개별적인 요소에 해당되는 것을 집합 전체에 부당하게 적용하는 것인데, 개인적으로는 타당한 행동을 모두 다 같이할 경우 전체적으로는 부정적인 결과가 초래될 때 쓰이는 말이다. 어떤 농민이 풍작을 올리면 기뻐할 일이지만, 모든 농민이 다 풍작을 하면 농산물 가격이 폭락해 모든 농민이 다 고통을 받는다거나, 어떤 소비자가 자린고비처럼 절약해 저축을 많이 하면 축하해줄 일이긴 하지만, 모든 소비자가 다 그렇게 하면 경기를 악화시켜 모두를 어렵게 만드는 것이 좋은 예다. - 7쪽

싸가지 문제는 민주당이 안고 있는 모든 문제의 알파이자 오메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죽하면 ‘싸가지 없는 진보’란 표현이 한 세트로 굳어졌겠는가. 내부 계파 문제가 심각하다고는 하지만, 그것 역시 싸가지의 문제다. 새누리당을 대하던 행태가 중독성 습관이 되어 내부에서까지 발휘됨으로써 소통을 불가능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상호 신뢰를 갉아먹게 만든다는 것이다.
민주당 사람들이 생각하는 정치의 목적은 무엇일까? 민주당이 대선을 포함한 선거에서 승리해서 이 세상을 바꾸는 데에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는 것일까? 천만의 말씀이다. 그렇지 않다. 우선 나와 내 계파가 내부에서 이기고 보는 것이 목적이다. 세상을 바꿔보고 싶은 뜻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자신들의 패권을 전제로 한 것이기 때문에 있으나 마나 한 것이다. 이미 내부 싸움하다가 망가진 게 한두 번이 아니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이다. - 10, 11쪽

"시장판의 싸움에서야 기품 없는 게 무기일 수 있다. 기품 찾고 예의 찾다보면 약하게 보이고 사기도 꺾인다. 그러나 문명사회의 정치판에서까지 기품 없음이 무기가 된다면 그건 슬픈 일이다. 정치도 그 본질이 싸움인데 기품 찾다 지느니 기품 없이 이기는 게 낫지 않느냐고 따지면 대답이 좀 궁색해지긴 하지만, 그래도 그것이 슬픈 일임에는 변함이 없다. 기품 없음이 무기가 되면, 싸움이 진행될수록 당사자들은 점점 더 기품이 없어진다. 그래서 점점 더 깊은 상처를 주고 받게 된다. 그러다 보면 아픔을 느끼는 능력이 가장 모자란 사람이 최후의 승자가 된다." 고종석, ‘싸가지 있는’ 정치를 위하여, 한국일보, 2007. 9. 13. - 30쪽

‘싸가지 없는 진보’의 사전엔 ‘성찰’이 없다. 도덕적 우월감이 성찰을 가로막을 뿐만 아니라 공격이 최상의 방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런데 또 이런 행동양식이 ‘싸가지 없는 진보’라는 이미지를 더욱 악화시킨다. 예컨대, ‘B급 좌파’를 자처하는 김규항은 「경향신문」 칼럼에서 다음과 같이 마한다.
"지난 대선 당시에 ‘진보 놈들 꼴 보기 싫어서 박근혜 찍는다’는 식의 이야기가 하위계층에서 많았다. 그들의 반감은 자연스러운 데가 있다. 진보가 두 번이나 집권을 하는 동안 기대와는 달리 그들의 삶엔 별다른 게 없었는데, 이명박이나 박근혜를 비롯한 보수는 거의 악귀 취급을 하면서 자신들은 정의와 선의 세력인 양 구는, 정치라는 게 보수고 진보고 다 자기들 좋으라고 하는 거라는 걸 재확인해주었을 뿐이면서, 자신들을 선택하는 게 유일한 희망인 양 설레발치는 이상한 사람들에 대한 반감 말이다." 김규항, 마음의 회복, 경향신문, 2014. 6. 24. - 41쪽

김규항이 잘 지적했듯이, 민주당의 가장 큰 문제는 자기들이 잘할 생각은 하지 않고 늘 보수에 대한 비판과 심판으로 자기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데에 있다. 그게 진보의 길이라고 맞장구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민주당의 투쟁의지와 능력이 약하다고 비판하는 진보적 지식인이 숱하게 많다. 거의 대부분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진보 언론매체엔 그런 글들이 자주 실린다.
그러나 나는 그런 방식으론 절대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나는 김규항의 입장을 적극 지지한다. 그런데 김규항 역시 그런 방식을 그대로 복제하고 있는 건 아닐까? 좌파가 스스로 잘할 생각은 않고 민주당만 비판한다고 해서 무엇이 달라질 수 있을까? 민주당과 그 지지자들이 "진보를 참칭하고 대중의 눈과 귀를 막음으로써 좌파가 축소되고 사회가 미궁 속으로 빠지게 되었다"는 건 민주당 때문에 좌파가 잘할 수 있는 공간이 원천적으로 봉쇄되었다는 뜻일까? 그렇다면, 민주당도 똑같은 논리로 새누리당 비판에만 올인할 수 있는 게 아닐까? - 42, 43쪽

그렇다. 스스로 잘난 척하는 우월감이 문제다. 우월감이야말로 ‘싸가지 없는 진보’의 동력이다. - 46쪽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싸가지 없는 진보’는 진보 전체를 위해선 반드시 극복해야 할 현상이지만, 진보 내부 헤게모니 쟁탈을 위해선 가장 강력하고 효율적인 정치 양식이다. 좋건 나쁘건 정치의 동력은 증오다. 싸가지 없는 언행은 한 정당 내에서도 나와 우리 편의 승리에 도움이 안 되는 사람들을 향한 것이지, 우리 편을 향한 게 아니다. 반대편에 대한 싸가지 없는 언행은 지지자들을 열광시키는 동시에 단합의 대열로 이끌 수 있다.
사정은 이와 같은바, ‘싸가지 없는 진보’는 단기적으론 속된 말로 ‘남는 장사’다. 담론의 시장 논리가 그렇게 되어 있다. 단기적으로 ‘남는 장사’에 대한 집착, 이게 바로 진보가 ‘싸가지 없는 진보’라는 굴레에서 탈출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다. ‘남는 장사’를 하겠다는 의도조차 없이 ‘싸가지 없는 진보’가 하나의 행동 양식으로 굳어져 버린 탓도 있겠지만, 이 또한 바꾸기 어렵다는 점에선 마찬가지다. - 51쪽

‘집단사고(groupthink)’는 미국 예일대학의 심리학자인 어빙 재니스(Irving Janis, 1918~1990)가 1972년에 출간한 「집단사고의 희생자들(Victims of Groupthink)」에서 어떻게 자타가 인정하는 우수한 두뇌집단이 잘못된 결정을 내릴 수 있는지에 관한 문제를 연구하면서 제시한 개념이다. 재니스는 ‘집단사고’를 "응집력이 강한 집단의 성원들이 어떤 현실적인 판단을 내릴 때 만장일치를 이루려고 하는 사고의 경향"이라고 정의했다. 쉽게 말하자면, 낙관론에 집단적으로 눈이 멀어버리는 현상이다. "정책 결정, 집단 내부의 구성원들 사이에 호감과 단결심이 크면 클수록, 독립적인 비판적 사고가 집단사고에 의해 대체될 위험성도 그만큼 커지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집단사고는 집단 외부를 향한 비합리적이고 비인간적인 행동을 취하게 만든다." 어느 조직에서든 조직의 우두머리에겐 신체를 보호하는 보디가드뿐만 아니라 심기를 보호하는 마인드가드(mindguard)가 있기 마련인데, 재니스는 바로 이런 마인드가드가 지도자로 하여금 잘못된 결정을 내리고 그걸 밀어붙이게 만드는 주요 이유가 된다고 지적했다. - 57, 58쪽

나는 진보의 진보 비판은 진보의 숙명이라고 생각한다. "보수는 그렇지 않은데 진보는 왜 그 모양이냐?"는 반론은 무의미하다. 보수와 진보의 출발점이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보수는 이익지향적인 반면, 진보는 가치지향적이다. 이익을 위해 타협하는 일이 보수보다는 진보에 어려운 이유도 여기에 있다. 보수 진영에서도 극우는 가치지향적인 성향이 농후한데, 이들 역시 보수 비판에 적극적인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 66, 67쪽

"보수언론의 프레임에 빠졌다"는 주장은 사실상 "보수언론은 늘 그르다"는 전제를 깔고 있는 셈인데, 이거야말로 진보의 필패(必敗)를 부르는 첩경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논쟁적인 사안에 대해 보수언론이 하는 말은 늘 잘못되었거나 정략과 음모의 산물이란 말일까? 보수언론이 그렇게 어리석을까? 그런 생각은 보수언론의 힘은 과대평가하면서 보수언론의 지능은 과소평가하는 게 아닐까?
이래서 역지사지(易地思之)가 필요한 것이다. 반대로 물어보자. 박근혜 정부에 대한 인식과 평가에서 보수언론과 진보언론 중 어느 쪽이 사실과 진실에 더 가까울까? 진보 지식인은 ‘진보언론’이라고 답할 것이다. 맞다. 보수가 부정한다 해도 답은 ‘진보언론’이다. 왜 그런가? 진보언론은 박근혜 정부에 대해 거리두기가 가능할 뿐만 아니라 같은 편 내부에서 고려해야 할 인간관계나 이해관계에서 자유롭기 때문이다. - 70쪽

같은 이유로 진보에 대한 인식과 평가에서 사실과 진실에 더 가까운 인식과 평가를 하고 있는 건 진보언론이 아니라 보수언론이다. 물론 보수언론이 의도적인 ‘진보 죽이기’용 기사와 논평을 양산해내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런 걸 가려낼 수 있는 분별력만 있다면, 진보가 경청해야 할 것은 진보언론보다는 보수언론의 비판이다. - 70, 71쪽

그런데 보수언론의 어떤 비판에 주목해서 그걸 받아들이면 그건 ‘조중동 프레임’에 놀아난 것이 되는가? 예컨대, 「조선일보」 2014년 8월 2일자 A3면에 실린 「2012년 이후 연전연해하는 야(野): 인물․노선․체질․전략․우군(友軍)… ‘뻔한 5가지’에 발목」(김경화 기자)이라는 기사를 보자. 이 기사는 익명의 민주당 당직자들의 입을 빌려, 민주당의 ‘5대 뻔한’ 신드롬을 제시하고 있다. 아래와 같다.
① 뻔한 인물(불로장생 원로, 꽉 틀어쥔 486, 진보의 이준석 부재), ② 뻔한 노선(아직도 반새누리당이면 모든 노선이 정당화되고 철학이 없음), ③ 뻔한 체질(계파 갈등, 노숙 및 단식 투쟁, SNS 환청․환각 현상), ④ 뻔한 전략(편 가르기, 안 되면 단일화 등), ⑤ 뻔한 우군들(야당 외곽세력은 그들만의 언론, 학자, 시민단체들) - 70, 71쪽

어찌되었건 진보 좌파의 지도급 인사들이 대부분 명문대 출신이라는 건 진보의 자산으로 긍정 평가할 수 있는 일이지만, 문제가 그렇게 간단치만은 않다. ‘지식 엘리트’의 속성은 자신의 비교 우위가 지식․지성․비전에 있다는 걸 거의 본능 비슷하게 갖고 있기 때문에 타인과 세상에 대한 ‘계몽 욕망’으로 충만해 있다. 미국 정치에서 늘 진보적 지식 엘리트가 일반 서민의 거센 반감의 대상이 되는 등 뜨거운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한국에선 그들의 계몽 욕망이 해소되기 어려운 내부 분란을 낳은 건 물론이고 외부적으론 자주 싸가지의 문제로 비화된다. "우리가 모든 걸 다 알고 있으니 우리를 따르라"는 식이니 말이다. - 83쪽

진보적 지식 엘리트는 자기들에게 선거 결과가 안 좋게 나오면 "유권자가 욕망에 투항했다"는 식으로 싸가지 없는 진단을 내놓는다. 그런데 막상 그렇게 말하는 이들의 재산을 까보면 욕망에 투항했다는 유권자들의 평균보다 훨씬 많다. 그래서 ‘왕싸가지’라는 말을 듣기도 하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이런 현실이 막연하지만 강력한 느낌과 이미지로 유권자들의 뇌리에 자리 잡으면서 ‘싸가지 없는 진보’를 깨기 힘든 고정관념으로 만들어버린다는 점이다. - 83쪽

영국의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1561~1626)은 이미 1620년에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인간의 지성은 일단 어떤 의견을 채택한 뒤에는 … 모든 얘기를 끌어들여 그 견해를 뒷받침하거나 동의해버린다. 설사 정반대를 가리키는 중요한 증거가 훨씬 더 많다고 해도 이를 무시하거나 간과해버리며 … 미리 결정한 내용에 죽어라고 매달려 이미 내린 결론의 정당성을 지키려 한다."
심리학에선 인간의 그러한 성향을 가리켜 ‘확증 편향(confirmation bias)’이라고 한다. 자신의 신념과 일치하는 정보는 받아들이고 신념과 일치하지 않는 정보는 무시하는 경향을 가리키는 말이다. 확증 편향은 정치적 논쟁이나 토론의 가치에 대해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게 만든다. - 93, 94쪽

나는 ‘심판’이 효과가 없을 뿐만 아니라 진보를 골병들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정권 심판론에만 의지하다 보면 독자적인 의제 설정이나 정책 생산 능력을 잃어버리는 것도 문제지만, 심판을 외치는 와중에서 싸가지의 문제가 불거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민주당의 ‘심판’은 반대편만을 향할 뿐 자신들에겐 적용되지 않는 마법의 주문이다. 18대 대선 민주당 경선에서 문재인은 "노무현 정부는 총체적 성공"이라는 자평을 내놓았다. 심판이 대상은 오직 ‘이명박 정부’와 ‘독재자의 딸’이었을 뿐이다. 민주당 내부에서야 그렇게 보는 것이 진리였을망정, 유권자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고, 그래서 결국 패배했다. 문제는 이것이다. 민주당이 언제 단 한 번이라도 자신에 대한 심판, 즉 성찰을 해본 적이 있는가 하는 것이다. 유권자들은 그런 적이 없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민주당을 ‘왕싸가지’라고 생각한다. - 136, 137쪽

선의의 해석을 해보자면, 민주당은 갈등 상황에서 몰입이 초래하기 마련인 ‘터널 비전(tunnel vision)’의 함정에 빠져 있다. ‘터널 시야’라고도 하는 ‘터절 비전’은 터널 속으로 들어갔을 때 터널 안만 보이고 터널 밖은 보이지 않는 것처럼 주변을 보지 못한 채 시야가 극도로 좁아지는 현상을 뜻한다.
몰입은 축복일 수 있다. 자연, 사물, 일 등에 몰입하는 것만큼 재미있고 유익한 게 또 있을까. 그러나 인간관계에서 몰입은 축복일 수 있지만 재앙일 수도 있다. 스토킹은 바로 몰입의 산물이다. 인터넷 시대의 ‘빠’ 문화와 ‘까’ 문화도 마찬가지다. 특히 갈등 상황에서 몰입은 자해(自害)를 초래하는 매우 위험한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몰입은 무엇보다도 균형 감각을 잃게 만들기 때문이다. - 137, 138쪽

노무현 정권은 강한 개혁 열망을 품고 출발했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개혁에 저항할 가능성이 높은 ‘수구 기득권세력’에 주목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문제는 주목의 정도가 너무 강했다는 점이다. 주변을 살피지 못했다. ‘주변’이라 함은 바로 국민이다. 노무현 정권은 국민이 아니라 야당․보수신문을 상대로 정치․행정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싸움이 치열할수록 몰입은 ‘자기 성찰’을 원천봉쇄한다. 몰입은 상대편에 대한 과대평가로 이어져 상대편의 허물은 크게 보고 자신의 허물은 사소가게 여기는 심리는 낳기 때문이다. - 142쪽

사람들이 말하기 쉽게 ‘싸가지 없는 진보’라는 표현을 쓰긴 하지만, 이 표현은 진보가 안고 있는 문제의 심각성을 담기엔 모자라다. ‘도덕’이라고 보는 게 옿다. 즉, ‘도덕의 부재’ 또는 ‘도덕의 왜곡’이 오늘날 진보의 위기를 불러온 주범일 수 있다. - 177쪽

‘도덕주의’의 부정적 의미는 크게 보아 세 가지다. 첫째, 사고가 편협하고 경직되어 있다는 의미다. 둘째, 복잡한 세상 이해를 종합적으로 하지 않고 도덕이라는 일면만 보는 편향을 드러내고 있다는 의미다. 셋째, 자기 자신의 도덕적 기준으로 다른 사람의 행위를 억압하고 자유를 침해하려고 든다는 의미다. - 177, 178쪽

진보는 자신들이 ‘수구꼴통’이라고 욕하는 사람들에게도 그들 나름의 도덕적 세계가 있다는 걸 좀처럼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다. 즉, ‘다름’을 ‘틀림’으로 파악하는 데에 아주 익숙한 것이다. 우리는 다른 나라 사람들에겐 그런 다른 세계가 공존할 수 있다는 걸 인정하면서도 우리 내부에서는 인정하지 않는데, 이건 한국 사회의 강한 사회문화적 동질성 때문이다. - 185쪽

"다른 많은 진보주의자들처럼 나도 한때는 보수주의자들을 천박하고, 감정이 메마르거나 이기적이며, 부유한 사람들의 도구이거나, 혹은 철저한 파시스트들일 뿐이라고 얕잡아 생각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보수주의자들은 자신들을 고도의 도덕적 이상주의자로 간주하며, 그들이 깊이 믿는 것이 정당하다고 주장하는 보통 사람들이라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야 보수주의에 왜 그토록 열렬하게 헌신적인 사람이 많은지를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보수주의를 잘 이해하게 된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보수주의를 더욱 두려워하게 되었다." 조지 레이코프(George Lakeoff), 손대오 옮김, 도덕의 정치, 생각하는 백성, 2004 - 197쪽

레이코프는 그런 성찰 끝에 자신이 지지하는 민주당 진영에 이런 고언을 내놓는다. "진보주의자들이 정치에서 도덕과 신화와 감정적인 측면을 무시하는 한, 정책과 관심을 가진 그룹과 사안별 논쟁에만 집착하는 한, 그들이 이 나라를 뒤덮은 정치적 변화와 본질을 이해하게 될 희망은 전무하다."- 197, 198쪽

전중환은 「보수와 진보의 도덕」이라는 「한겨레」(2013년 10월 29일) 칼럼에서 슈웨더의 연구 결과를 언급하면서 "유권자들은 경제적 이득이 아니라 도덕적 가치에 따라 투표한다는 것, 그리고 여기서 보수와 진보가 이해하는 도덕은 사뭇 다르다는 것은 우리 사회에 유용한 시사점을 준다"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예를 들어, 지난 대선에서 저소득층이 새누리당을 훨씬 더 지지한 이유는 교육 수준이 낮아서 사탕발림에 쉽게 넘어갔기 때문이며, 그러니 진보세력이 그들의 삶을 향상할 유일한 대안임을 확실히 인식시키기만 하면 문제가 저절로 다 해결되리라는 분석은 이런 점에서 한계가 있다. 진보세력은 보수적인 국민들이 그들에게 품는 생래적인 거부감, 곧 국가안보와 사회질서를 흔드는 ‘비도덕적인’ 정당이라는 시선을 어떻게 바꿀지 궁리할 필요가 있다." - 199쪽

진보에 가장 필요한 건 레이코프가 했던 종류의 자기 성찰이다. 즉, 보수주의자들을 경멸하로 혐오만 할 것이 아니라 그들을 이해하고 더 나아가 존중까지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민주당이 수십 년째 신봉해오고 있는 ‘민주 대 반민주’라는 신념이자 구호는 민주당에 ‘독약’이 되고 있다. 설사 이런 이분법 구도에서 민주 쪽에 속한 사람일지라도, 민주당을 지지하면 ‘민주’요 반대편을 지지하면 ‘반민주’라는 도식은 시대착오적인 정도를 넘어 속된 말로 ‘찌질’하다고 생각한다. - 200쪽

정치가 죽은 공적 영역에선 약자들이 세력을 규합하는 게 불가능해진다. 그런 상황에서 유권자 탓을 하는 건 그야말로 적반하장이다. 샤츠슈나이더의 다음과 같은 말처럼 말이다.
"광범위한 투표 불참에 대한 책임을 인민의 무지․무관심․무기력 탓으로 돌리는 것은 공동체 내의 좀더 부유한 계층이 보여주는 매우 전형적인 형태이다. 이는 어떤 정치체제에서나 늘 하층계급의 배제를 정당화하기 위해 사용되어왔던 논리다. 이보다 나은 설명이 있다. 기권은 투표 불참자들의 요구를 반영한 선택지와 대안이 억압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 224쪽

안철수는 "얻고자 하면 잃고 잃고자 하면 얻는다"는 정신과 실천 하나로 대선주자급으로 급부상하는 코미디의 주인공이 되었지만, 현실정치판에 본격 진입한 후엔 정반대의 정신과 실천으로 인해 망가지는 비극의 주인공이 되고 말았다. - 240, 241쪽

"깰 수 없으면 타협하라"는 건 진리다. 예컨대, 친노는 비노․반노를 깰 수 없고, 비노․반노는 친노를 깰 수 없다. 깰 수 없는 게 분명한데도, 서로 적대해서 뭘 어쩌자는 건가? 이제 서로 달라져야 한다. 세상을 바꾸려면 자기부터 바꿔야 한다. 영국의 작가이자 진보적 지식인이었던 조지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 1856~1950)가 말했듯이, "변화가 없다면 진보는 불가능하다. 자신의 생각을 바꿀 수 없는 사람은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 나는 안 바꾸면서 세상을 바꾸겠다는 건 도둑놈 심보다. - 24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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