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적 시 읽기의 괴로움 - 사랑과 자유를 찾아가는 유쾌한 사유
강신주 지음 / 동녘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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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말해 욕망의 주체는 금지를 수용하지만, 동시에 금지된 것을 욕망하면서 탄생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라캉은 "법과 억압된 욕망은 동일한 것이고, 이것이야말로 정확히 프로이트가 발견했던 것이다"(<에크리 Ecrits>)라고 이야기했던 겁니다. 따라서 욕망의 주체는 분열된 주체일 수밖에 없습니다. - 34쪽

성관계를 맺을 때 강박증자, 즉 남성에게 여성은 `대상 a`의 우연적인 용기나 매체에 지나지 않는다고 핑크는 지적합니다. 당연히 남성에게 여성은 "대체 가능하고 교환 가능한 것"일 뿐입니다. 핑크의 지적은 강박증에 대한 라캉의 논의를 그대로 계승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라캉도 강조했던 적이 있습니다. "남자에게 여성은 어머니 아니면 매춘부일 수밖에 없다"라고 말이지요. 그러니까 남성에게 여성이란 자신만의 고유한 욕망이 없는 존재로 드러난다는 겁니다. 그래서 강박증자로서 남성이 가장 당혹스러워하는 순간은 단지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수단이라고 생각했던 여성이 당당하게 그녀만의 욕망을 피력할 때입니다. - 39, 40쪽

핑크는 이어서 히스테리는 강박증과는 반대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이야기 합니다. 강박증자에게 중요한 것이 자신의 욕망이었다면, 히스테리 환자에게 중요한 것은 반대로 타자의 욕망입니다. 히스테리 구조를 가지고 있는 대부분의 여성은 상대방 남성이 욕망하는 대상, 즉 `대상 a`가 되려고 합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여성이 자신의 욕망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겁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상대방 남성에게 욕망의 대상이 되려는 노력 자체는 여성의 실존에서 갈등 요인으로 기능하게 될 겁니다. 히스테리가 신경증에 속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지요. - 40쪽

이리가레이는 여성은 남성과는 구별되는 존재라는 확실한 입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물론 과거와 비교해볼 때, 여성의 법적인 지위가 향상된 것은 사실입니다. "여성과 남성은 평등해져가고 있는" 중이지요. 그렇지만 이리가레이는 평등이란 단어가 함축하고 있는 폭력성에 주목합니다. 이것은 남성과 여성 사이의 존재론적 차이를 부정하는 논리를 숨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이리가레이에 따르면, 남녀평등 이념 속에서 평등이란 잣대는 여전히 남성적일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녀는 남녀평등이란 미명이 "민중의 아편"과 같다고 이야기했던 겁니다. 남성사회에서 요구하는 기준에 맞추어 자신을 만들어가게 되면, 여성들은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버리고 남성적 정체성을 내면화하기 때문이지요. - 72, 73쪽

베유의 통찰에 따르면, 노동자의 지위는 육체노동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문명이 도래하지 않는다면 결코 회복될 수 없습니다. 육체를 움직여본 사람은 알 겁니다. 인간이 혼자 있을 때 얼마나 나약하고 무기력한지를 말이지요. 돌 하나를 옮기려고 해도 타자와 관계하여 힘을 모아야만 합니다. 당연히 육체노동은 자신의 한계를 겸허히 받아들이게 하고, 동시에 타자와의 연대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자각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베유도 강조했던 겁니다. "육체노동이 최고의 가치인 것은 생산하는 물건과의 관계가 아니라 노동하는 인간과의 관계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 101, 102쪽

사랑은 타자를 신과 같은 절대자로 만들어버립니다. 그가 나를 나만큼 사랑해주기를 강제할 수 없고, 단지 바라는 것 이외에 다른 방도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사랑에 빠진 우리가 사랑하는 바로 그 사람의 자유를 절대적으로 긍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렇지만 이런 상태는 우리를 불안하게 합니다. 기도의 이면에 사실 내 기도를 들어주었으면 하는 숨은 욕망이 있는 것처럼, 내 사랑도 그에 걸맞은 대가를 무의식적으로 원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사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로부터 사랑받으려는 욕망이 아닌가요? - 186쪽

흥미로운 것은 죽음에 직면했을 때에만 삶도 분명해진다는 사실입니다. 바깥과 직면했을 때에만 안은 안으로서 규정될 수 있는 법이니까요. 타자를 만나지 못하면 자신을 자신으로 자각하지 못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일 겁니다. 죽음이라는 바깥과 직면해 있는 동안에만, 삶은 삶으로서 그 빛을 발하게 됩니다. 블랑쇼는 인간이란 바깥ㅌ과 직면할 때에만 자신으로서 존재할 수 있다고 이해했던 사람입니다. 그의 지적이 옳다면 인간은 자기 자신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바깥, 타자 혹은 차이와의 관계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는 겁니다. 레비나스와 낭시가 강조했던 개념 `엑스포지숑exposition`도 바로 이런 사태를 가리키는 겁니다. 그러니까 `바깥ex`에 대해 `서 있는position`것이 존재의 비밀이라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인간은 죽음이라는 바깥과 직면하면서 삶을 살아내는 존재입니다. 결국 우리는 `무`에 직면해야만 `존재`를 확보할 수 있는 비극적인 존재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 242쪽

체제가 원하는 것을 자신이 원하는 것으로 착각한다면, 우리는 이미 자신의 삶을 살아내고 있는 것이 아니지요. 단지 우리는 주어진 배역을 연기하는 불쌍한 꼭두각시나 광대에 지나지 않을 겁니다. 그래서 "구경꾼이 되면 될수록 우리는 더 적게 살아가게 된다"라는 기 드보로의 지적이 가슴을 철렁하게 만듭니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그리고 무엇을 원하는지 알기 위해서는 세계 혹은 타자들과 직접 부딪쳐야만 합니다. 설령 체제가 제공한 제스처를 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세계와 직접 부딪치면 되는 겁니다. 바로 그 순간 우리가 흉내 내고 있는 제스처가 나의 삶에 어떤 행복과 힘을 주는지 알게 될 테니까요. - 26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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