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영의 수도원 기행 2 공지영의 수도원 기행 2
공지영 지음 / 분도출판사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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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나는 알았다. 내가 무력하게 느껴질 때, 어떤 노력도 부질없을 때, 세상이 모두 내게 등을 돌리고 있다고 느껴질 때, 눈물이 터지기 직전, 바로 이런 때 우리는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나중에서야 그때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것이 축복이라는 것을 알았다. - 64쪽

그 후로 나는 많은 생각을 했다. 믿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무엇을 믿는다는 것일까? 주 예수가 그리스도, 그러니까 나의 주인임을 믿는다고? 그건 믿는다.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일은 내 생애 전체를 통틀어 2퍼센트도 되지 않았다. 나는 엄청난 내 생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것을 깨닫는 행운을 누린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그분이 나의 주인이 맞다. 그러면 그게 다일까?
한참 후에 나는 깨달았다. 믿는다는 것은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는 것, 설사 내 눈앞에서 믿을 수 없을 만큼 나쁜 일이 벌어진다 해도, 사랑한다면 이런 일이 어떻게 생겨날 수 있을까 싶은 나쁜 일이 벌어진다 해도, 산 같은 고통이 닥쳐온다 해도, 설사 내가 어이없이 죽는다 해도, 내 식구가 내 자식이 죽는다 해도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고 구원하여 벗을 삼고 싶어 하심을 믿는 것이라는 것을. - 65, 66쪽

내가 싫다는 아이를 억지로 데리고 가서 아이가 그토록 싫어하고 두려워하는 예방주사를 맞히듯이, 내가 아이를 위해 아이가 좋아하는 장난감을 빼앗듯이, 내가 싫다고 해도 그분이 시키는 그것, 내가 아프다는데 그분이 나를 그 아픔으로 밀어 넣는 그것, 그것이 결국 끝끝내 그분이 나를 두고 하시는 사랑의 행위임을 믿는 것이라는 것을, 아마도 그것을 믿음이라고 부른다는 것을. - 66쪽

나는 이혼하지 않게 해 달라고 정말이지 열심히 기도했었다. 열렬하고 열렬하게 빌었다. 행복한 가정을 달라고, 아이들이 공부 잘하게 해 달라고, 책도 잘 쓰고 잘 팔리게 해 달라고 빌었다. 그런데 하느님은 하나도 허락하지 않으셨다. 나는 세 번째 이혼녀가 되어 있었고 아이들은 나날이 속을 썩였다. 책 쓰는 것도 진도가 잘 나가지 않았고 빚은 갚을 길이 없었다. 솔직히 마음 깊은 곳에서 하느님께 서운한 마음이 있었다. 그런데 이 화재 사건 앞에서 나는 깨닫게 되었다. 이토록 큰일도, 막으려고 맘만 먹으면 이렇게 막으시는 분이, 어떤 일이 일어나게 그냥 내버려 두었다면 그건 그분이 내게 허락하신 일이라는 것을 말이다. 나는 모르지만, 더 큰 그분이 보시기에 그게 내게 더 유익해서 그냥 내버려 두셨다는 것을 말이다.
그 이후 나는 매사를 예민하게 관찰하게 되었다. 내가 자고 있는 동안, 내가 아무 생각 없는 동안, 내가 다른 일에 정신을 팔고 있는 동안 얼마나 많은 죽을 고비에서 그분이 나를 구해 주고 계신지 알고 싶어서. 내가 차마 그것의 백의 하나라도 알까마는. - 108쪽

그중에서 제일 먼저 내 가슴을 노크한 분이 안젤름 그륀(Anselm Grun) 신부님이었다. 그분은 냉철하지만 말할 수 없이 따스한 언어로 많은 이의 상처를 어루만져 주고 계셨다. 그분의 책들을 읽고 나면 내 영혼이 한 뼘은 자라 있는 것 같았고 상처는 조금 더 아무는 것 같았다. 그러던 어느날, 나는 <너 자신을 아프게 하지 말라>라는 책을 읽고 있었다.
아직도 그 구절을 기억한다.

우리는 가끔 우리를 비난하는 사람들을 우리의 배심원으로 앉혀 두고 언제까지나 피고석에 앉아 변명을 지속하려고 한다. - 125쪽

"내가 처음 수도원에 입회하고 신부가 되기 위해 대학에 갔을 때 대학은 이미 68혁명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죠. 수도원도 마찬가지였어요. 그 옛날 우리 수도원이 처음 시작되었을 때 그분들도 개혁적인 분들이었죠. 그러나 아시잖아요. 처음에 개혁적인 사람들이 개혁과 이상의 양날을 쥐고 모든 것을 개선해 나가지만 어느 순간 개혁의 열정만큼 열렬하게 안주해 버리고 보수화되지요. 저는 그런 분들을 모시는 젊은 수사였지요. 저는 수도원이 변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것은 절박했지요. 아니면 우리 모두는 그저 낡은 옷을 입고 사라져 가는 먼지같이 될 거 같았어요.(...)"- 141쪽

그들이 나를 비난한다고 내가 불행해하는 것은 그들이 나를 칭찬한다고 내가 행복해하는 것만큼이나 허망한 일이라는 것을. 누구나 자기 앞에 놓인 생의 길을 가는 것이다. - 147, 148쪽

"하루에 한 번 이상 당신의 그림자를 살펴보라. 그러면 당신이 얼마나 약한지 알게 될 것이고, 당신은 당신이 경멸하고 증오하는 악인들과 진배 없음을 알게 되면서 저절로 겸손해지고 말 것이다."- 148쪽

"어떤 의미에서 신앙이란 자기 자신의 유한하고 불확실한 지식을 초월하려는 정신의 개방이다."-179쪽

생각해 보면 우리는 우리 인생에서 뭐가 제일 위급한지, 무엇이 제일 긴요한지, 심지어 무엇이 나를 가장 아프게 하는지조차 모른다. 이것 또한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다만 우리가 그분을 바라보면 우리의 모든 거짓을 제치고 그분께서 우리에게 지적해 주신다. "마리아야, 아니다. 그게 아니다. 이게 네가 제일 아파하는 곳이다" 하고. - 191쪽

이제 나는 세상에서 내가 잘나갈수록 어쩌면 하느님의 은총에서 멀어진다고 생각해 보기도 한다. 물론 내가 잘나가면 잘나가게 해 주시니 감사하면 되고, 내게 역경이 닥치면 그것이 하느님의 사랑하는 자녀 된 징표이니 자랑스럽고, 그러므로 이 지상의 저주처럼 느껴지는 가난이 축복이 되고 이 세상의 모든 역경과 수난이 월계관이 되는 이 오묘한 신비여! 나는 이런 생각을 할 때마다 기쁨에 넘친다. 누가 이 미친 듯한, 돈과 쾌락과 유혹 그리고 물질을 숭상하는 세상에서 이토록 신선한 진리를 우리에게 일러주었단 말인가. 이 진리를 알고 이 진리를 사랑하게 된 나는 그러므로 아직 많이 모자라긴 하지만 얼마나 복된가. - 201, 202쪽

진실한 관계는 결코 언제나 일치함을 의미하지도, 언제나 한마음인 것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그런 관계는 꼭두각시 관계밖에 없다. 진실한 관계는 내 느낌이나 생각 그리고 주장을 있는 그대로 표현해도 상대로부터 배척받거나 버림받지 않는다는 믿음을 가진 것을 의미한다. 조금 불편한 상태가 온다고 해도 그것이 근본적인 사랑을 절대 위협하지 않는다는 믿음을 양쪽이 가지는 것이라고 한다. 아이가 자랄 대 부모로부터 바로 이런 지지를 받아야 한다고 교육학자들은 말한다. 어쩌면 이 지상에서 부모만이 그나마 자식이라는 존재들에게 이러한 사랑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다른 관계라면 어림도 없다. 그리고 사실, 그런 부모도 ... 참으로 없다. 그런 분은 오직 한 분이시다. 하느님은 진실하게 우리를 대하시기에 우리가 드리는 기도를 다는 들어주시지 않는다. 하느님도 우리에게 ‘아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 2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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