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태어난 게 잘못이야 - 일중독 미국 변호사의 유럽 복지사회 체험기
토머스 게이건 지음, 한상연 옮김 / 부키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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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내가 숨이 턱 막힌 이유였다. 평등하고 풍요로운 나라여서 보고 맛보고 만질 게 너무 많았다. 여기저기 마음껏 돌아다녀도 전혀 위험하지 않았다. 또 질서 정연했다. 가난한 사람들로 인한 무질서가 눈곱만큼도 없는, 그런 완벽한 질서를 엿볼 수 있었다. 뭐 하나 흠잡을 구석이 없었다. 무심코 마시는 커피 한 잔, 아침에 먹는 시리얼 한 사발조차 완벽했다. 심지어 제자리를 벗어난 것도 그 나름의 방식으로 완벽하게 벗어나 있는 것처럼 보였다. -26쪽

내가 취리히에 머물던 당시 인상 깊었던 것은 풍요로움이 아니라 사람들의 얼굴 표정이었다. 두세 가지 언어를 구사하는, 어딘가 교양 있어 보이는 얼굴 표정 말이다. 그걸 몰랐더라면 좋았을걸. 반면에 여기 미국에서는 연예인에 대한 생각으로 머릿속이 꽉 차 있는 아이들의 얼굴만 보게 된다.-29쪽

한편 유럽에는 눈에 보이지 않아 계산하기 힘든 GDP도 있다. 예컨대 미국 모델에서 미국인은 2300시간(중앙값 기준)을 일해야 하지만 유럽 모델에서 유럽인은 1600시간(중앙값 기준)만 일하면 된다. 유럽인은 연간 700시간 이상을 다양하게 활용할 수가 있다. 다른 언어를 하나 더 익히거나 스리랑카를 여행할 수도 있고 독서를 할 수도 있다. 지금의 GDP로는 측정할 수 없는 여가의 가치를 마음껏 누리며 삶의 질을 향상시킬 수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현재 몇몇 경제학자들 사이에서는 1인당 GDP에 대한 회의론이 일면서 삶의 질을 비교하는 더 나은 방법을 모색할 필요성이 제기되는 중이다.-35쪽

몇 년 전 <헨리 애덤스의 교육(The Education of Henry Adams)>을 읽고는 충격을 받았다. 헨리 애덤스(Henry Adams)는 자기의 부족한 교육 수준을 한탄하며 스페인어, 프랑스어, 독일어, 수학, 이 네 가지를 반드시 배워야 한다고 꼽았다. 최근 101세의 나이로 세상을 뜬 내 로펌 파트너 레온 데스프레스(Leon Despres) 선생은 1차 세계대전 전에 파리에서 자랐는데 한번은 내가 헨리 애덤스 이야기를 했더니 별로 대단한 일이 아니라는듯 "아, 난 그 네 가지를 모두 할 줄 알아."라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나 그 말고는 이 네 가지를 모두 할 줄 아는 미국인은 지금까지 본 적이 없다.-44쪽

불행히도 미국의 경우 노동시간이 늘어날수록 GDP도 가파르게 상승하는 경향을 보인다. 왜냐고? 요리할 시간을 낼 수 없으니까 외식을 해야 하고, 화장실 청소할 짬을 낼 수 없어서 청소 도우미를 불러야 한다. 고장나면 수리할 여유가 없는 탓에 얼마 쓰지 않은 물건도 그냥 버려야 한다.
유럽인의 눈에는 주말 밤에 미국인 가족이 맥도널드에서 외식하는 광경이 그야말로 충격으로 비친다. 호경기 시절 식구 네 명 중 세 명이 1년에 2300시간 일하는 집은 운이 좋다고 동네방네 자랑하고 다녔을 것이다. 하지만 그로 인해 쇼핑, 요리, 청소조차 제대로 하기 힘들다. 맥도널드에서 햄버거 한 조각 사 먹을 여유도 없다. 이제 사람들은 주유소에서 주유하는 동안에 끼니를 때운다. 콜라를 더 많이 마실수록 1인당 GDP는 콜라의 거품처럼 부풀어 오른다. 돈 쓸 시간은 줄어들었는데도 나가는 돈은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91쪽

이런 것은 '소비' 욕구라기보다는 '생산' 욕구에 가깝다. 집에서 일하기 위해, 즉 늦은 밤이나 주말에도 쉴 새 없이 일하려고 컴퓨터를 산다. 오래 일하려면 체력이 따라야 하므로 집에 운동기구를 들여놓는다. 일하는 동안 어린 자식을 돌봐 줄 보모를 부른다. 이런 것은 모두 더 오랜 시간 일하려는 '욕구'의 충족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91-92쪽

내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이렇다. 물질적 욕구가 충족되면 자유롭게 활용 가능한 시간의 가치는 더 커지기 마련이다. 반면에 물질적 욕구가 충족되지 못하면 자유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 바버라는 빚더미 위에 올라 있다. 따라서 여가를 즐기는 금쪽같은 일분일초는 모두 기회비용을 발생시킨다. 그 시간에 빚을 갚기 위해 돈을 벌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사벨은 전혀 그렇지 않다. 사회민주주의에서는 연금, 의료보험, 교육 등 모든 기본적인 물질적 욕구가 충족된다. 당연히 일정 수준 이상의 연장 노동은 삶의 질을 낮추는 것으로 간주된다. 결국 바버라의 1인당 GDP가 높은 것이 도리어 바버라의 삶의 질이 이사벨에 견주면 얼마나 낮은가를 보여 주는 척도가 될 수도 있다.-94쪽

사회민주주의와 환경주의는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미국의 환경 운동가들은 이 점을 이해하지 못한다. 독일은 높은 조세 부담률을 자랑하는 사회민주주의 국가이기에 미국식의 무분별한 소비지출을 억제하는 가운데 환경 문제의 해결에 중점을 두고 예산을 효과적으로 편성할 수 있다. 사회민주주의가 정착하지 않았다면 소비지출의 한계를 정하기가 무척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 독일은 세금을 많이 거둬들이는 사회민주주의 국가인 덕에 환경 친화적인 정책을 적극적으로 펼칠 수 있다.-179쪽

교육에 돈을 더 많이 쏟아붓는 것은 낭비일 뿐이다. 기초 연금에 돈을 더 쏟아붓는 것 역시 낭비이다. 미국은 충분히 썼다. 사실 미국은 필요한 생산요소를 모두 갖고 있다. 넓은 땅, 많은 노동력, 많은 자본, 높은 수준의 교육. 하지만 노동시장이 유연하기 때문에 인적 자본이나 지식을 개발할 수 없는 것이다. 글로벌 경쟁의 장에서 미국은 독일보다 거의 모든 영역에서 우위에 있다. 그러나 독일이 미국보다 앞서는 결정적인 한 가지가 있는데 그게 바로 사회민주주의이다.-217쪽

"복지제도를 제대로 관리해 나가려면 노동조합이 반드시 필요합니다."라는 기민당 지지자 K의 말이 케네디 스쿨 졸업생 같은 민주당 정치인 입에서 튀어나올 날이 과연 올까? 사민당원뿐 아니라 기민당원조차 '평평한 세계'에서는 특히 노동자가 노동조합에 가입하는 게 사회의 시스템이 엉망이 되는 것을 막는 가장 쉬운 길이라고 인식하고 있다. 노동조합은 아무리 힘이 약하다 해도 생산성 증가분을 여가 확대와 스트레스 감소의 관점에서 노동자에게 분배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 노동조합이라고 해서 반드시 소득분배의 관점만을 고집하라는 법은 없다. 노동조합이 없다면 중산층의 생활수준을 끌어놀릴 전략을 수립할 길이 묘연해지고 만다. 사민당은 바로 이 점을 중시하지만 미국의 민주당은 신경도 쓰지 않는다. 나는 불평등을 없애자는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다. 부자가 중산층보다 더 오래 일하는 데다 생산성까지 더 높다면 소득이 더 많은 게 당연하다. 다만 그 과정을 제대로 관리하자고 주장하는 것이다. -371쪽

미국이 유럽식 모델을 채택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미국인은 생활 수준의 향상을 이야기할 때에도 돈을 앞세운다. 그래서 돈을 적게 벌어도 스트레스가 줄어들면 생활수준이 향상된다는 평범한 진리를 모른다. 정부가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면 일상생활에 쌓이는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생각하지 못한다. -371-3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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