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주의 맨얼굴의 철학 당당한 인문학 - 지승호가 묻고 강신주가 답하다
강신주.지승호 지음 / 시대의창 / 2013년 5월
품절


모든 인문학은 '고유명사'의 학문이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인문학자가 지향하는 것은 자신의 학문을 만드는 거에요. 강신주가 철학자라면 강신주의 철학을 만드는 거에요. 니체Friedrich Nietzsche가 니체의 철학을 만들었듯이. 어떻게 육박해 들어갈 것인가가 고민이죠. 이건 굉장히 중요한 거에요. 모든 인문학과 문화 예술의 핵심은 고유명사거든요. 소설가가 원하는 것도 그거죠. 제목을 안 보고 이름을 안 봐도 내 소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의 문체를 작품에서 이뤄냈는가? 철학자도 마찬가지에요. 강신주는 그렇게 돼야 한다고요. 표지가 뜯겨 나간 책을 봐도 '아, 강신주 글이다', 옆 사람이 책을 줘도 '강신주 새 책 냈네' 이 정도 되면 제 문체를 만드는 데 성공한 거죠. 그러면 저는 잊히지 않아요, 고유명사로서.-24-25쪽

김수영은 "남에게 희생을 당할 만한/ 충분한 각오를 가진 사람만이/ 살인을 한다"(<죄와 벌>)고 했어요. 우린 남의 눈치를 봐서 자기를 더 아끼는 거죠. -33쪽

그래서 인문학을 고유명사의 학문이라고 하는 거에요. 인문학의 정수는 자기 이름에 걸맞는 글을 써내는 데 있다고요. 그렇기 때문에 인문학은 혁명적인 것이고 권력 편을 들 수는 없는 거에요. 인문학은 개인 편을 들고 자유의 편을 들어요. 한국 사회에서도 독재에 저항했던 이들은 문인이었다는 점을 잊으면 안 돼요.-44쪽

결국 인문학 고전을 읽는다는 건 나의 삶이 어떤 철학자나 인문학자에 육박해 들어가는 건데, 내가 시를 못 읽어내고 영화를 제대로 못 보고 철학 책을 제대로 못 읽는다는 건 그만큼 내 삶이 심화되지 않았다는 거에요. 조금 경험하고 조금 고통스러운 인간이 어떻게 알아요? 그래서 자신의 삶을 심화시켜야 해요. 인문학적 보편성은 거기서 오거든요. 책을 못 읽는 것은 비겁하게 자신의 삶을 심화하지 않고 검열하며 조심조심 살아서 그래요. 적어도 마흔이 넘으면 세계문학전집이 쉽게 읽힐 정도로 살았어야 하는데, 사랑도 제대로 못 했고 권력과도 제대로 한번 부딪쳐보지 못했으니 그게 어떻게 읽히겠어요?-55쪽

단순한 공식인데 경쟁, 분리가 인간 사회에 일어나면 체제가 이기는 거고 반反경쟁, 사랑, 공존 쪽으로 가면 체제가 붕괴돼요. 이건 그냥 공식이에요.(웃음) 서로 사랑하지 않게 하고, 서로 경쟁하게 하는 것이 체제고요. 우리가 자유로워진다고 하는 것은 서로 사랑하고 신뢰하는 데서 나오는 거죠. 체제를 극복한다고 해서 신뢰가 찾아오지는 않아요. 이미 불신하고 있잖아요. 우리가 사랑하면 체제를 무너뜨릴 수 있어요. 이것은 하나의 인문학적 공식이에요. 우리의 사랑을 막는 것이 무엇인가를 고민하면 비판적 지식인이 돼요. 이 공식을 잊어버리고 인문학자가 분리와 의심, 불신 쪽으로 담론을 펴면 자기도 모르게 체제에 놀아나게 되는 거죠. 체제는 인간의 불신을 먹고 자랍니다. 불신 안 하면 돼요.-63쪽

'우리'로 들어가면 이미 사회과학으로 들어간 거에요. 인문학이 아니에요. 인문학은 '나'에요. 각자 각자의 나. 그리고 각자 각자의 '나'들이 공명하는 것이고요. 그래서 인문학의 궁극적인 그림이 민주주의죠. 절대적인 생각은 없어요. 하지만 내 생각은 있어요, 절대적으로. 그리고 모든 사람이 100퍼센트 같지는 않지만, 디테일은 다르지만, 공명할 수 있다는 보편성. 그것이 인문학의 가능성이고 민주주의의 기초죠.-81-82쪽

사랑할 때 사람은 고독해져요. 왜나햐면 저 사람이 내 뜻대로 안 되는 걸 알기 때문이에요. 사랑하는 사람들이 위대한 건 나 말고 타인도 자유롭다는 것을 자각하기 때문이에요. 반대로 사랑은 상대방에게 자유가 없다고 느껴질 때 붕괴되는 거에요. 내가 그렇게 판단 내릴 때, 완전히 내가 소유했다고 여길 때 상대방에게 자유는 없는 거에요. 그런데 우리가 진짜 좋아했던 것은 그 사람의 자유였던 거에요. 결혼 후에 사랑이 식는 것도 그 때문이에요. 결혼 제도는 소유의 제도에요. 배타적 성적 소유에서 재산의 소유까지.-90쪽

그러니까 나이 드는 것은 좋은 것이 아니에요. 중요한 것은 젊음을 어떻게 유지하고, 날카로움을 어떻게 유지하느냐의 문제죠. 세계를 용서하면 안 돼요. 나쁜 놈들이 있기 때문에 세계랑 화해하면 안 돼요. 나쁜 놈들은 나쁜 놈들이고, 도와줄 사람은 도와줘야죠. 세상은 이분법적이에요. 그걸 초월하는 순간 고상한 책이 나오고 보수적인 책이 나오는 거예요. 저는 죽을 때까지 이분법적이었으면 좋겠어요. 나쁜 놈은 나쁜 놈이라고 하고. 50, 60대에 썼는데 30대에 쓴 것처럼 읽히는, 날카로움을 가진, 칼이 무뎌지지 않은 인문학자가 돼야죠. 칼이 무뎌지면 글쓰기를 포기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105쪽

죽을 때까지 살아 있었으면 좋겠어요. 저는 '나이 든' 사람들을 싫어해요. 그건 원숙함이 아니에요. 지침의 표현이죠. 지친 거에요. 젊은 애들은 산에 올라가는데 자기는 못 오르니까 '산에 올라가야만 맛이냐?'라면서 우리를 힘 빠지게 만드는 거죠. 실천하도록 하는 글, 사람의 삶을 바꿀 수 있는 글, 관조하지 않도록 하는 글, 삶에 직면하고 살아감에 직면하는 글을 써야 해요. 죽었다 깨어나도.-105-106쪽

억압이 존재하는 곳인데 자유에 고통이 없다면 그 자유는 허용된 자유인 거에요. 억압이 존재한다면 자유는 고통스럽기 마련이에요. 김수영에게 고통과 자유는 같은 거에요. (...) 억압이 상존하는 곳에서 자유에 고통이 없으면 허용된 자유고 길들여진 자유에요. 그런데 다 자유롭대요, 자본의 억압부터 오만 억압이 다 있는데, 알아서 다 피하는 거에요. 그러니까 김수영이 자유를 얘기했을 때 사람들이 그 자유를 잘 모르는 거죠. 자유의 이미지는 아까 말한 역동적으로 돌고 있는 팽이, 그 이미지로 봐야 해요. 그렇게 스스로 도는 것이 곧 저항이고요.-15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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