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자의 기억법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7월
절판


죄책감은 본질적으로 약한 감정이다. 공포나 분노, 질투 같은 게 강한 감정이다. 공포와 분노 속에서는 잠이 안 온다. 죄책감 때문에 잠 못 이루는 인물이 나오는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나는 웃는다. 인생도 모르는 작자들이 어디서 약을 팔고 있나.-44쪽

술만 마시면 술자리에서 있었던 일을 다 잊어버리는 동네 사람이 있었다. 죽음이라는 건 삶이라는 시시한 술자리를 잊어버리기 위해 들이켜는 한 잔의 독주일지도.-52-53쪽

"내 명예를 걸고 말하건대 친구여," 차라투스트라가 대답했다. "당신이 말한 것 따위는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 악마도 없고, 지옥도 없다. 당신의 영혼이 당신의 육신보다 더 빨리 죽을 것이다. 그러니 더이상 두려워하지 마라."
마치 나 들으라고 써놓은 듯한 니체의 글-57쪽

책을 읽는데 갈피에서 메모지가 툭 떨어진다. 오래전에 베껴 적은 것인지 종이가 누렇게 바랬다.
"혼돈을 오랫동안 들여다보고 있으면 혼돈이 당신을 쳐다본다. _니체"-62쪽

나는 조용한 세상이 좋다. 도시에서는 살 수가 없다. 너무 많은 소리가 나를 향해 달려든다. 너무 많은 표지판, 간판, 사람들 그리고 그들의 표정들. 나는 그것들을 해석할 수가 없다. 무섭다.-94쪽

인간은 시간이라는 감옥게 갇힌 죄수다.-98쪽

그때 나는 바짝 조인 현처럼 팽팽했다. 그때도 지금처럼 오직 현재만이 있었다. 과거도 미래도 없었다.-111쪽

나는 잘하는 게 하나도 없었다. 오직 딱 한 가지에만 능했는데 아무에게도 자랑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아무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자긍심을 가지고 무덤으로 가는 것일까.-114쪽

작곡가가 악보를 남기는 까닭은 훗날 그 곡을 다시 연주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악상이 떠오른 작곡가의 머릿속은 온통 불꽃놀이겠지. 그 와중에 침착하게 종이를 꺼내 뭔가를 적는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닐거야. 콘 푸오코con fuoco-불같이, 열정적으로-같은 악상 기호를 꼼꼼히 적어넣는 차분함에는 어딘가 희극적인 구석이 있다. 예술가의 내면에 마련된 옹색한 사무원의 자리. 필요하겠지. 그래야 곡도, 작곡가도 후대에 전해질 테니까.-115쪽

기억을 모두 잃는다면 더는 인간이랄 수가 없다. 현재는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는 가상의 접점일 뿐,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117쪽

"무서운 건 악이 아니오. 시간이지. 아무도 그걸 이길 수가 없거든."-145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