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근두근 내 인생
김애란 지음 / 창비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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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에게 잡아먹히지 않으려고 새똥으로 위장하는 곤충이 있대."
"근데?"
"그게 꼭 너 같다."-20쪽

하지만 나는 더 큰 기적은 항상 보통 속에 존재한다고 믿는 편이다. 보통의 삶을 살다 보통의 나이에 죽는 것, 나는 언제나 그런 것이 기적이라 믿어왔다. -47쪽

"아빠."
"엉?"
"지금 슬퍼요?"
"응."
"나 때문에 그래요?"
"응."
"제가 뭘 해드리면 좋을까요?"
아빠가 멀뚱 나를 쳐다봤다. 그러곤 뭔가 고민하다 차분하게 답했다.
"네가 뭘 해야 좋을지 나도 모르지만, 네가 하지 말아야 할 것은 좀 알지."
"그게 뭔데요?"
"미안해하지 않는 거야."
"왜요?"
"사람이 누군가를 위해 슬퍼할 수 있다는 건,"
"네."
"흔치 않은 일이니까......"
"......"
"네가 나의 슬픔이라 기쁘다, 나는."
"......"
"그러니까 너는,"
"네, 아빠."
"자라서 꼭 누군가의 슬픔이 되렴."
"......"
"그리고 마음이 아플 땐 반드시 아이처럼 울어라."
"아빠?"
"응?"
"전 이미 아이인걸요."
"그래, 그렇지......"-49-51쪽

진짜 어른. 그런 게 어떤 건지 알 수 없어도, 심지어는 오랫동안 그런 대우를 받고 싶었으면서도, 아버지는 자신이 그걸 진심으로 원한 적이 한번도 없다는 걸 깨달았다. 아버지는 인생이 뭔지 몰랐다. 하지만 어른이란 단어에서 어쩐지 지독한 냄새가 난다는 건 알았다. 그건 단순히 피로나 권력, 또는 타락의 냄새가 아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막연히 그럴 거라 예상했는데, 막상 그 입구에 서고 보니 꼭 그런 것만도 아니었다. 아버지가 어른이란 말 속에서 본능적으로 감지한 것, 그것은 다름아닌 외로움의 냄새였다. 말만 들어도 단어 주위에 어두운 자장이 이는 게 한번 빨려들어가면 다시는 헤어나올 수 없을 것만 같은 무엇이었다.-67쪽

'사람들은 왜 아이를 낳을까?'
나는 그 찰나의 햇살이 내게서 급히 떠나가지 않도록 다급하게 자판을 두드렸다.
'자기가 기억하지 못하는 생을 다시 살고 싶어서.'-79쪽

"그게...... 어떻게 말해야 하나? 음...... 너 어릴 때 옷장 안에 들어가 숨어 있었던 적 있지? 부모님이 나를 찾나 안 찾나 궁금해서."
"어."
"근데 어느 순간 나이가 들고부터는 그 게임을 내가 나알 하고 있더라고."
한수미가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처음엔 재미로 그런 건데,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내가 나를 안찾더라고. 장롱 안에서 나는 설레어하다, 이상해하다, 초조해하다, 우울해하다, 나중엔 지금 나가면 얼마나 민망할까 싶어 그냥 거기 그대로 있게 됐고."
"뭐야, 꼬지 말고 쉽게 말해."
"이게 어른 말씀하시는데 어디서 말대꾸야?"
"야, 네가 무슨 어른이냐?"
"결혼했으니까 어른이지. 어쨌든 말 자르지 말고 끝까지 들어봐. 나는 대수가 꿈이 없어 반했던 게 아니고 꿈이 없는 척하는 모습에 마음이 끌렸던 거 같아. 그냥 걔 속에도 내게 있는 것과 비슷한 장롱이 하나 있는 것 같아서......"-86쪽

글쓰기는 매 순간이 결정과 선택의 연속이었다. 그런데 그걸 내가 잘하고 있는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이야기는 중간중간 자주 멈췄다. 그럴 때면 홀로 북극에 버려진 펭귄이 된 기분이 들었다. 참으로 막막하고 무시한 순간이었다.-89쪽

고작 열일곱살밖에 안 먹었지만, 내가 이만큼 살명서 깨달은 게 하나 있다면, 세상에 육체적인 고통만큼 철저하게 독자적인 것도 없다는 거였다. 그것은 누군가 이해할 수 있는 것도, 누구와 나눠가질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몸보다 마음이 더 아프다'는 말을 잘 믿지 않는 편이다. 적어도 마음이 아프려먼, 살아 있어야 하니까.-96쪽

"누군가가 다른 사람을 사랑할 때, 그 사랑을 알아보는 기준이 있어요."
어머니의 두 눈은 퉁퉁 부어 있었다.
"그건 그 사람이 도망치려 한다는 거에요."
"......"
"엄마, 나는...... 엄마가 나한테서 도망치려 했다는 걸 알아서, 그 사랑이 진짜인 걸 알아요."-143쪽

"하느님을 원망한 적은 없니?"
"솔직하게 말해도 돼요?"
"그럼."
"사실 저는 아직도 잘 모르겠어요."
"뭐를?"
"완전한 존재가 어떻게 불완전한 존재를 이해할 수 있는지...... 그건 정말 어려운 일 같거든요."
"......"
"그래서 아직 기도를 못했어요. 이해하실 수 없을 것 같아서."
그런 뒤 나는 겸연쩍은 듯 말을 보탰다.
"하느님은 감기도 안 걸리실 텐데. 그죠?"-170-171쪽

답장을 보내진 않았다. 막상 책상 앞에 앉으니 겁이 났다.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어쩌면 내가 이 아이를 좋아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예감 때문에. 그리고 어떤 한 사람을 좋아하게 된 탓에, 이 세상도 덩달아 좋아지면 어쩌나 하는 걱정 때문에.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겐...... 자격이 없어 보였다.-188쪽

"그럼, 아저씨는 결혼까지 했는데 아직도 여자를 잘 모르겠어."
"음, 그렇구나. 실은 최근에 저도 궁금해서 인터넷 사전에서 '여자'라는 단어를 찾아봤어요. 그랬더니 '여성으로 태어난 사람' 하고 나오더라고요. 그래서 다시 '여성'이라고 쳤더니 '성의 측면에서 여자를 이르는 말'하고 뜨는 거에요. 나 참, 어쩌라고."
"사전은 원래 동어반복적이야. 그래서 어떤 작가들은 자기만의 사전을 따로 쓰기도 하지."
"누가요?"
"시인들이 그렇지."-228쪽

가져본 걸 그리워하는 사람과
갖지 못한 걸 상상하는 사람 중
어느 쪽이 더 불행한지 모르겠어.
하지만 굳이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나는 전자일 거라고 생각해.-269쪽

"근데 내가 마흔 넘었을 때 딱 그런 생각이 들더구나. 이제 내 몸은 나빠질 일만 남았다, 하는. 몸이 좋아 몸이 있다는 것도 모르고 산 게 지금까지의 삶이었구나, 앞으로는 뭔가 잃어버릴 일만 남았겠구나 하고 말이야."-298-29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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