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로 산다는 것 - 우리 시대 작가 17인이 말하는 나의 삶 나의 글
김훈 외 지음 / 문학사상사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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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소설은 그 자체 내에 스스로를 입증할 수 있는 이야기의 문법을 지닌다. 이것은 작가 자신의 창작 방법과도 연관된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작품 자체가 추구하는 서사 원리를 여기서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의 작가들은 왜 쓰는가의 문제를 놓고 존재론적 고심에 빠지기보다는 어떻게 쓸 것인가에 매달린다. 말하자면 작가로서의 실천에 대해 글쓰기의 방법을 놓고 고심한다는 뜻이다. - 권영민-5쪽

주인공에 대한 작가의 인식론적 우위는 작가의 외재성에 근거한다. 주인공을 삼킨 미로르 조감하는 작가의 위치에너지야말로 '주어진 현실'을 '창조된 현실'로 재구성하는 미학적인 원동력이다. 바흐찐이 일찍이 "식견의 잉여"라고 명명한 주인공에 대한 작가의 인식론적 우위를 소설 내에서 구현하는 장치가 바로 화자다. 소설의 역사는 화자의 발명으로 시작되었고 소설의 영욕은 화자의 부침과 함께했다. 오늘날 화자라는 중개 장치는 득세하는 영화로부터 소설이 가까스로 자신의 정체성을 지켜낼 수 있는 최후의 보루다. 소설의 미래는 소설의 기원을 초월할 수 없기 때문이다. - 김경욱-18쪽

음악은 언제나 내게 다른 리얼리티를 꿈꾸게 만든다. 삶은 잠이고 사랑은 꿈이다. 자는 동안에는 계속 꿈을 꾸고 싶다. 음악은 내게 그런 말을 한다.-53쪽

퍼즐을 맞추는 재미는 그 퍼즐의 완성된 그림에 대한 매혹이 아니다. 완성된 퍼즐이 얼마나 아름다울까 같은 것은 적어도 퍼즐을 맞춰나가는 동안에는 상상하지 않는다. 상상하는 것은, 최후의 퍼즐을 손에 집어들 때의 쾌감이다. 마지막 한 조각이 빈틈없이 채워지는, 구멍을 메우는 순간! - 김인숙-62쪽

나는 3인칭 주어를 거의 쓰지 못한다. 나는 그것이 무섭고 낯설다. 가끔씩 3인칭 주어를 끌어다놓고 문장을 만들기도 하지만 그 3인칭 주어를 뒷받침할 만한 술어를 찾아내기란 대체로 불가능하다. 그래서 내가 쓴 3인칭 문장은 그 허우대만 3인칭일 뿐 결국은 1인칭에 불과하다.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하면서, 하는 수 없이 원고를 편집자에게 넘긴다. 이게 아니라는 것은 알겠는데, 그렇다면 무엇인지는 알기 어렵다. 가장 절망적인 장벽은 그 3인칭 인물의 이름을 지어야 하는 일이다. 허구의 고유명사를 지어내는 일은 그 인물의 모든 것을 책임지고 감당해내야 하는 일일 터인데, 내 언어의 힘으로 그 일을 감당해낸다는 것은 말짱 개수작으로 느껴진다. - 김훈-84-85쪽

책을 몇 권 읽기는 했지만, 기댈 만하지는 않았다. 눈을 혹사하는 직업에 오랫동안 종사해서 그런지, 시력은 현저하게 떨어졌다. 담배를 줄여야 하듯 책을 줄여야 할 때다. 남은 시력을 아껴서 써야 할 때가 왔다. 돋보기를 쓰고까지 책을 읽어야 한다는 것은 왠지 사람답지 못하다는 생각이 든다. - 김훈-85-86쪽

언어는 이 세계의 불완전성의 소산일 뿐이다. 그래서 모든 언어는 다른 언어에 의해 부정당해 마땅한 것이고 부정당하기를 거부하는 언어는 이미 언어가 아닐 것이다. 언어에게 소통 기능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모두 부정당하는 운명을 수락하는 그 불완전성 안에 있는 것이 아닐까. 듣는 자가 없는 시대의 말하기란 말이 아니라 재앙이다. - 김훈-86쪽

삶은 늘 느낌의 절박함으로서 나에게 다가온다. 그 절박함은 몸과 마음의 절박함인데, 그것을 글로 들이밀자면 말의 모호성에 부딪힌다. 그래서 내 글쓰기란 그 절박함과 모호성 사이에서 좌충우돌하는 파행인 것이다. 나는 글 전체에 어떤 지향성을 설정하는 일을 감당해내지 못한다. 내가 단지 말과 느낌 그 자체를 겨누고 있는 것이나 아닐까 하는 회의에 빠질 때 소설 쓰기는 불가능한 것처럼 느껴진다. - 김훈-88쪽

글이 잘 풀리지 않는 밤이면, 나는 노트북을 덮고 눈을 감은 채 이런 말을 중얼거린다. '잊지 말자, 한 번에 한 단어씩!' 그러면 초조했던 마음이 조금 느긋해진다. 이 말을 내게 알려준 사람은 스티븐 킹이다. 토크쇼 진행자가 스티븐 킹에게 어떻게 글을 쓰냐고 물었을 때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한 번에 한 단어씩 쓰죠.' 진행자는 그 대답에 당황했을지 모르지만, 스티븐 킹은 그 말을 농담으로 한 게 아니었다. 그는 '한 페이지짜리 소품이든 <반지의 제왕> 삼부작 같은 대작이든 간에, 모든 작품은 한 번에 한 단어씩 써서 완성된다.'는 소박한 원칙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한 번에 한 단어씩'이라고 포스트잇에 적은 다음 책상 위에 붙여 놓았다. - 윤성희-144쪽

<레고로 만든 집>을 쓸 동안, 벽에는 "상처받고, 응시하고, 꿈꾼다."라는 문장을 적은 포스트잇이 붙어 있었다. 문학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가슴이 뛰던 시절에 나는 최승자 시인의 저 한마디에 위안을 받았다. - 윤성희-144쪽

"만약에~?" "왜~?" "과연~?" 이제 막 소설 쓰기를 시작하려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이 내게 어떻게 하면 소설을 잘 쓸 수 있는지를 묻는다면, 쪽지에 이 세단어를 적어줄 것이다. "만약에" "왜" "과연" 이 질문들만 제때 던질 줄 안다면, 누구나 소설을 쓸 수 있다. 아니, 그렇지 않다고 반박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으니,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는다고 바꿔 말하자. - 윤성희-150쪽

처음 소설을 쓸 무렵, 언어들은 이방인들의 창문처럼 나를 유혹했다. 내가 그 이름을 부르면 스르르 열리며 내부를 보여주는 언어들... 무한한 밤처럼 무한한 창문들, 무한한 빗방울들, 무한한 바다와 무한한 배들, 무한한 장미, 무한한 타인들과 무한한 안개와 무한한 나... 단어들의 무한함 때문에 수식어가 필요했고 수식어를 위해 나의 사적인 삶이 필요했다. 그리고 타인들의 사적인 사랑과 슬픔과 열망과 괴로움과 상처와 미움. 세상의 창문들을 열기 위해서는 그 창문에 맞는 단 하나의 경험을 가진 사적인 언어가 필요했던 것이다. - 전경린-205쪽

흔히 소설에는 정답이 없다고 말들 하지만, 나는 소설에도 답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 답은 은유이다. 소설의 공간이 무엇을 은유하는가, 인물은 무엇을 은유하는가, 에피소드들과 정황들은 무엇을 은유하는가, 내가 쓰는 것들의 부분과 전체는 무엇을 은유하는가, 그 모든 것에서 일관성 있는 은유가 이루어지면 나는 답을 찾은 것이다. 말하자면 내가 쓰는 전체를 한 단어로 은유할 수 있는가, 한 문장으로 표명할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 전경린-208쪽

도시에서 살기 때문에 욕망과 만나고, 그렇기 때문에 우울하고, 우울하기 때문에 웬만한 책임은 피할 수 있는 소설이 무심코 책을 펴보면 만날 수 있는 내용의 대부분이다. 대중 속의 고독도 사람의 일이라 작가가 그곳으로 손을 뻗지 않으면 안 되지만, 너무 많이들 어두운 카페로 걸어들어가버렸다. 개인의 우울이 사회의 비참보다 더 크고 강렬해져버린 것. 이른바 문학적이다. 그러나 문학을 키우는 것은 비문학적인 것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 한창훈-24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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