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멘트
더글라스 케네디 지음, 조동섭 옮김 / 밝은세상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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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어 수업시간에 루터의 경구들을 번역하고 있거든."
"그런데?"
"내가 제대로 경구를 골랐는지 말해줘."
"네가 고른 루터의 경구가 뭔지 말해봐."
"Wie bald 'nicht zetzt' 'nie' wird."
"'지금은 아니'가 '전혀'가 되기란 얼마나 순식간인가."
캔디스가 말했다.
"아빠가 생각하기에도 아주 멋진 말이지?"
"그래, 좋은 말은 진실을 담고 있지. 넌 왜 그 말을 골랐니?"
"내가 '지금은 아니'에 속하는 사람은 아닌지 염려스러워서."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아빠, 나는 순간순간을 충실하게 살지 못하겠어. 그때그때 행복을 느끼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겠어."
"왜 그럴까?"
"사실은 아빠도 그러면서."
'지금은 아니'가 '전혀'가 되기란 얼마나 순식간인가.
"순간... 순간은 지나치게 과대평가되어 있어."
나는 '순간'이라는 말을 난생처음 접하는 사람처럼 말했다.
"하지만 삶이란 순간들이 모여 이루어지잖아. 오늘 이 밤, 이 대화, 이 순간. 이런 걸 빼면 뭐가 남아?"
"과거."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아빠는 과거에 얽매어 사는 사람이니까. 아빠 책을 읽어보면 그걸 알 수 있어. 아빠는 왜 그렇게 '과거'에 집작해?"
"과거가 있어야 현재도 있으니까."-12-13쪽

기억은 정말이지 감정을 들었다 놓았다 한다. 뜻밖의 소포가 도착하고, 과거가 한꺼번에 밀어닥친다. 추억과 그 부스러기들이 들쑥날쑥 떠오른다. 그러나 들쑥날쑥한 기억이란 애당초 없다. 그것이 기억에 대한 절대적인 진실이다. 추억과 그 부스러기들은 어떻게든 서로 연관되어 있고, 그 모두에는 사연이 깃들어 있다. 그 중 스스로 인정하는 사연 하나를 우리는 자신의 인생이라 부른다.-33쪽

인간 존재는 우연에 의해 지배된다. 우연의 힘을 절대로 과소평가해선 안 된다. 우연히 어떤 때에 어떤 장소에 있게 되었다가 그 우연이 그 사람의 존재를 통째로 바꿀 수도 있다. 우리는 누구나 인생이라는 우연한 리듬에 묶인 포로다.-58쪽

사랑에 빠지게 되면 두 사람 사이에서 벌어진 모든 일에서 숨은 의미를 찾아내려 한다. 상대도 나를 좋아한다고 느끼며(아니 느낌은 있지만 분명한 증거는 없으며) 연애가 잘 되길 필사적으로 바라는 초창기에 우리는 의미론의 전문가가 된다. 우리는 상대와 나눈 대화 하나하나에 집착한다.-187쪽

우리는 또 사랑을 나눴다. 이번에는 훨씬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서로의 몸이 하나가 되는 쾌감을 선명하게 맛보기 위해.-213쪽

"어떤 헤어짐보다 앞서라. 이렇게 시작하는 릴케의 시를 알아?"
"불길한 시네."
"하지만 시 전체를 보자면 모든 게 변한다는 진리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의미야. 오르페우스에게 바치는 소네트."
(...)
"다 외울 수 있어?"
페트라가 나를 똑바라 바라보며 시를 낭송했다.
'어떤 헤어짐보다 앞서라. 모든 것이 시작되는 거대한 심연을 생각하라. 가장 깊은 떨림을 주는 원천을 찾아라. 그러면 이 한 번뿐인 삶을 완전히 즐길 수 있을 테니.'-232쪽

'자존심은 가장 파괴적인 힘이야. 자존심이 우리 눈을 가리지. 자존심 때문에 눈이 멀면 자신을 보호하려는 이기적인 생각밖에 못하게 돼. 그럼 우린 주위를 올바로 볼 수 없게 되지. 자존심 때문에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가게 되는 거야. 진실의 소리가 들려와도 귀를 완전히 닫아버리지. 내 생애 단 한 번 뿐이었던 진정한 사랑을 만나고도 끝내 잃어버리게 된 건 그 빌어먹을 자존심 때문이었어.'-541쪽

우리가 순간을 붙잡지 못한다면 그 순간은 그저 '하나의 순간'에 불과할 뿐이야. 그런 인생은 단지 의미 없는 시간의 흐름일 뿐이라 생각해. 주어진 생명이 다할 때까지 멈추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뿐인 순간들의 합.-568쪽

그동안 살면서 겪은 일들이 모여 존재하는 게 인간이다. 그리고 우리 인간은 그 모두를 짊어지고 살아가야 한다. 우리에게 결핍된 것, 간절히 바랐지만 결코 손에 넣을 수 없었던 것, 전혀 바라지 않았지만 결국 가지게 된 것, 찾아내고 잃어버린 것. 그 모두를.-573쪽

우리는 운명을 어쩔 수 없는 일로 여긴다. 하지만 운명을 조종하는 건 언제나 자기 자신이다. 자기도 모르는 새, 자신의 바람과 달리, 우리는 자기 자신의 운명을 조종한다. 아무리 끔찍한 비극과 맞닥뜨려도 우리는 그 비극에 걸려 넘어질지 아니면 넘어서서 앞으로 나아갈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 비극에 맞설지 피할지도 선택할 수 있다. 가족에게 구속될 걸 두려워하면서도 가정을 이루는 길을 선택할 수도 있다. 영원히 오점으로 남을 결정이란 걸 알면서도 그대로 밀어붙이는 길을 선택할 수도 있다. 사랑을 받아들일지 피할지도 선택할 수 있다.-574쪽

어쨌든 인생은 선택이다.우리는 늘 자신이 선택한 시나리오 스스로를 설득해야 하고, 앞으로 전진해야 하고, 좋은 일이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어야 한다. 아니, 적어도 우리에게 주어진 이 길지 않은 인생을 가치 있게 만들어야 하고, 어느 정도는 뜻대로 완성해 가야 한다.
완성.
인생에서 '완성'될 수 있는 게 과연 있을까? 아니면 그저 잃어버린 것과 우연히 마주치는 게 인생의 전부일까?-590쪽

사랑을 늘 가장 중요한 발견이다. 계속 줄어드는 인생의 시간. 그 시간의 흐름을 줄이는 사랑이 없다면, 인생이라는 머나먼 여정에 진정한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이 없다면 우리는 과연 어떻게 삶을 견딜 수 있을까?-59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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