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자놀이 - 공지영의 첫 르포르타주, 쌍용자동차 이야기
공지영 지음 / 휴머니스트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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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리한 컨테이너 투입으로 무고한 경찰을 한 사람 잃고, 농성하던 시민 다섯이나 죽게 한 그 참사 앞에서 정부는 여론과 시민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이명박 정권 초기였으므로 자칫 정권의 앞날에 먹구름을 드리울 수도 있는 사건이기 때문이었다. 몇몇 비난 여론이 일었지만 그뿐이었다. 그러자 경찰은 쌍용자동차에 드러내놓고 컨테이너를 투입했다. 말하자면 용산에서 간을 본 것이었는데, 의외로 저항이 거세지 않자 이번에도 그걸 사용한 것이다. 국민이 용산에 대해 국가에게 관용을 베풀지 않았더라면 쌍용자동차 사태도 없었을 것이다. 용산 참사는 국가에게 '이렇게 진압해도 된다'는 몹쓸 교훈을 심어줬다." -46쪽

"더 이상의 죽음은 안 된다!" 그래, 안 된다. 절대로 안 된다. 그런데 그것은 누구를 향해 해야 하는 말일까? 정혜신 박사가 상담하고 있는, 자기도 모르게 목을 매고, 밤마다 죽는 꿈을 꾸고, 아이를 때려놓고 내가 이렇게 보잘것없는 인간이구나 통곡하는 그들에게? "아빠가 쌍용차에 다니는 사람 손 들어봐. 다행이다. 지금 공장 안에서 파업하는 사람들은 다 빨갱이다."라는 선생님의 말을 듣고 파랗게 질려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를 붙들고 우는 어머니와 아이에게? 분향소마저 설치하지 못하고 겨우 얻은 비닐로 노숙자보다 못한 움막 같은 것을 짓고 영정을 놓아두고는, 그거 지키느라고 침낭도 없이 밤새 떨며 웅크린 그 노동자들에게? 밤마다 거기서 서울 시민들의 차가운 발걸음 소리를 들으며 우주 밖으로 쫓겨난 듯한 설움에 젖는 그들에게? 누구에게 그 말을 해야 죽음을 막을 수 있을까? -49쪽

일전에 가톨릭 피정을 갔다가 '악의 특징'이라는 정의를 배우게 되었다. 나는 그저 '나쁘고, 못되고, 잔인하고' 같은 것들을 상상하고 있었는데 뜻밖에도 아주 간단한 단어들이 나열되었다.
혼돈, 지연, 분열.-89-90쪽

의자놀이가 생각났다. 어렸을 때 하던 그 놀이. 의자를 사람 수보다 하나 덜 놓고 노래를 부르며 빙글빙글 돌다가 노래가 멈추는 순간 재빨리 의자에 앉는 놀이. 행동이 굼뜬 마지막 두 명은 엉덩이를 부딪치며 마지막 남은 의자를 차지하려 하고, 대개는 한 명이 엉덩이를 붙이지 못하고 미끄러지는 것으로 끝이 난다. 정말 그럴 생각은 없지만, 마지막 순간이 되면 술래가 되지 않기 위해 친구를 밀어버리고 내가 앉아야 하는 그 의자놀이. 쌍용자동차 관리자들은 이 거대한 노동자 군단에게 사람 수의 반만 되는 의자를 가져다 놓고 마치 그런 놀이를 시키는 것 같았다. 기준도 없고, 이유도 납득할 수 없고, 즐겁지도 않으며, 의자를 놓친 자들에게는 죽음을 부르는 그런 미친 놀이를.-92쪽

일터는 단지 먹이를 구하기 위해 가는 장소가 아니다. 돈만 벌면 어디든지 다 좋다는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다. 일터, 우리에게 생활을 보장해주고, 우리에게 밥과 의복을 주며, 사람들을 엮어내서 인간의 사회적 욕구를 펼치게 해주는, 우리의 품위와 자부심, 그리고 긍지를 주는 내 인생이 펼쳐지는 현장이다. 가정과 직장, 이 두 들판이 우리의 인생인 것이다. 그리고 가정이 무너지면 가끔 직장생활도 무너지지만, 일터가 무너지면 가정은 거의 대부분 무너진다. 아무런 사회안전망, 즉 재취업과 실업보험, 혹은 무상교육, 무상의료, 주거 등에 대한 약속 없는 정리해고는 삶에서 해고된다는 말과 같다.-93쪽

법원에서 집행유예를 선고하며 "물의를 빚은 점은 인정되나"라던 판사에게 김진숙 씨는 말했다. "물의라도 빚지 않으면 누가 우리의 말을 들어줍니까?"-94-95쪽

어떤 이는 평택의 상황을 제2의 용산사태로도 말하지만, 용산사태는 무리한 공권력의 집행으로 발생한 사고이며, 결코 경찰이 시민을 죽이려는 의도가 있었다고는 보지 않는다. 그러나 평택에서는 가진 자와 공권력이 의도를 지니고 시민을 죽음으로 몰고 있다. 이것은 약 30년 전 광주에서 있었던 시민 학살의 또 다른 모습이다. 단지 총칼만 없을 뿐이지 우리 역사에 깊은 상처를 낸 그 폭력의 모습이 다시 일상의 얼굴로 되돌아온 것을 말한다. 언제나 공공질서를 내세우는 경찰과 정부가 용산에서의 책임을 회피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이제는 시민에 대한 살인 방조에까지 참여하는 모습이 21세기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인 한국의 현실이다. (우희종)-138쪽

쌍용자동차 노동자의 자살은 우리의 국가와 자본에 의해 작동하는 독특한 '구조적 폭력'이 만들어낸 '구조적 타살'로 규정되어야 한다. 실제 잔인한 파업 진압 과정에서의 상흔과 트라우마, 피를 말리는 생계 고통, 마치 블랙리스트처럼 따라다니며 취업을 방해하는 낙인, 정부와 회사의 압박과 무대응이 만들어내는 심리적 압박과 좌절, 분노로 수많은 노동자가 스스로의 목숨을 끊은 것이다. 물리적 폭력은 가시적이기 때문에 공분의 대상이 되지만, 역설적으로 이러한 구조적 폭력은 비가시적이기 때문에 무심코 지나가고, 그 폭력에 신음하면서 보내는 구호 요청의 신호에 전혀 응답하지 않는다. 특히 신자유주의 시대에 이 구조적 폭력은 국제경쟁력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면서 많은 사람이 무관심과 순응의 자세로 불가피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나는 당연히 이 자살은 자살이 아니라, 구조적 타살이며 사회적 타살로 규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조희연)-1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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